국제자원활동 보고서

 

말라리아 첫 타자 기념 에세이

clear , sat 22 Nov 2008 D - 59


지난 9월초 일주일에 한 알씩 먹던 말라리아 예방약이 내 몸속에서 뒤틀렸다.

SAO MIGUEL 학교에서 돌을 나르던 나는 화장실에서 헛구역질을 하고 빈혈이 쏟아지는 말라리아 부작용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날 이후로 효정이와 나는 그 비싼 9만원 돈의 말라리아 약을 접었고 그렇게 말라리아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그로부터 약 2개월이 훨씬 넘는 시간이 지났고 사메 에서의 활동으로 몸이 많이 지쳤다. 그리고 비자연장을 위해 인도네시아를 가야했고 일주일동안의 딜리 휴가가 다가왔다.

우리 팀은 흥분했다. 딜리에서는 답답하지만 인터넷도 할 수 있고 에어컨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세탁기도 있고 깨끗한 물도 있고 자동차도 있고 전기도 있고 고기도 먹을 수가 있다.

우리 팀은 딜리를 가자마자 인터넷 카페를 다녀오고 뷔페에 가서 고기도 실컷 먹었다.

죽었던 몸이 되살아나는 기분 이었다. 다음날부터 딜리의 풍부한 전기를 맛보기 위해 영화 황진이와 크로싱을 연달아 보는 중이었다. 보람언니가 튀겨온 설탕 듬뿍 묻은 빵이 속에서 느끼함으로 가득 찼다. 저녁에 되니 너무나 더부룩해 동티모르에 와서 처음으로 식사를 거르게 되었다. 저녁 시간 나는 온몸이 추웠고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갑자기 쐬어버린 에어컨 바람에 냉방병인줄만 알았다. 동화간사님은 나의 온도를 재더니 " 말라리아네 "라고 하셨고 나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괴로운 밤을 보냈다.

다음날 9명의 단원들은 인도네시아로 갔고 동티모르에 와서 가장 큰 발전을 보인 정현이는  뜨거운 물을 끓여 차를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 고마움을 느낄 새도 없이 아팠다.

나는 침대에 뻗었고 간사님은 클리닉에 가서 말라리아 체크를 해보자고 하셨다. 택시를 타려고 문을 열고 나갈 때 배가 심하게 아파왔다. " 간사님, 클리닉에 화장실 있어요? " " 화장실 가야돼? 그럼 여기 화장실 쓰고 가자 " 그대로 나는 앞이 보이지 않았고 화장실에서 30분 동안 앉아 있었다. 설사로 인해 밑으로 빠지고 헛구역질을 했다. 일어서자마자 1초도 되지 않아 머릿속의 뇌가 흘러내리는 기분이었고 빈혈은 최절정에 달했다. 나는 정말 한걸음도 걸을 힘이 없었다. 그대로 침대로 가 쓰러졌다. 간사님은 현지인 친구를 불렀고 YMCA 숙소 앞으로 '요디'라는 현지인 친구가 트럭을 몰고 왔다. 나는 그 트럭을 타고 클리닉으로 가는 도중에 창문 밖으로 노란 물을 퍽퍽 토해 내었다. 아.. 그 광경이란.. 무슨 트럭에 찌나인지 자판인지 꼬레아인지 모르는 외국인 여자애가 토를 하면서 지나간다.. 그때 수많은 현지인들의 눈빛을 나는 느꼈지만 그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 당장 나는 죽게 생겼으니까. 클리닉에 도착해 나의 짙은 피 몇 방울을 드리고 간사님과 요디는 마트에 금방 갔다 온다며 가버렸다. 나는 검사결과를 기다리기 위해 클리닉 앞 의자를 벽에 붙이고 쓰러져 있었다. 그때였다. 내 앞에 앉아있는 티모르 대학생 정도로 되 보이는 남자 3명이 내 사진을 찍는 것이다. 이런 죽일 놈들 내가 모를 줄 알고 3번씩이나 찍는 것들, 나는 맘 같아선 내 피를 헌혈해 말라리아에 걸리게 하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힘도 없었다. 의사는 나를 불렀다. " 말라리아 로스까? (말라리아 맞나요?) " "로스 (맞습니다) " 그대로 나는 약을 받아서 숙소로 돌아왔다. 하루 동안 아무것도 못 먹은 나를 위해 간사님은 한국에서 가져온 버섯스프와 식빵 두 개를 준비해 주셨다. "이것도 안 먹으면 약 먹고 속 더 뒤집어 진다 " 나는 오랫동안 식빵 두 개와 스프를 먹었고 딱 봐도 거부감이 생기는 말라리아 약 3개를 5분 간격으로 먹었다. 크기도 큰 알약은 내 목에 걸려 덕분에 식빵 한 개를 더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나는 침대로 또 쓰러졌다. 화장실을 몇 번이나 왔다갔다 거렸고 나는 이때의 생각을 말했다. " 간사님.. 제 나이가 한 60됐다면 안락사를 놓아달라고 했을 거예요 .. " 그렇게 생애 첫 말라리아를 만나고 딜리로 올라갔다.

아침이 밝아오기 전에 일은 또 터졌다. 배가 아파서 죽을 것 같은 것이다. 새벽3시50분..

나는 아반을 깨우러 거실로 나갔다. " 아반.. 나 배가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아 손 좀 따줘 " 아반은 항상 그렇듯 어느 때 깨우더라도 안자고 있던 사람처럼 일어나 나를 간호해 주었고 곧 간사님도 함께 나를 간호해 주셨다. 따뜻한 팩을 배에 붙어주었고 아반은 내 옆에서 잤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나의 상태는 점점 양호해져 갔다. 로뚜뚜를 가는 날, 아직 호전되지 않은 나는 마흔 줄리앙운과 사메집에 남고 딜리팀과 간사님은 딜리로 우리팀은 로뚜뚜로 올라갔다. 처음 혼자 있어 보는 시간 나는 진정으로 무서웠다. 발자국 소리 하나에도 깜짝깜짝 놀랐고 그 첫날 저녁에 전기가 안 들어오는 날이었다면 나는 혀 깨물고 죽었을지도 모른다. 다음날도 그렇게 징그럽게 무서운 날을 보내려고 하는데 누누오빠 목소리가 들린다. 심오빠와 아반과 아띠도 왔다. 동티모르 특성상 수업이 없다는 통보를 받지 못해 고생해서 올라간 그 높은 로뚜뚜에서 "빨리 와" 내 한마디가 생각나 하루먼저 4시간 되는 그 거리를 2시간 만에 내려온 우리 팀.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에세이로 올릴까. 나 아팠다고 투정 부리는 거? 위로 받고 싶은 거?

3개월 동안 라온아띠 1기 단원으로 생활을 하면서 여기저기서 잡음이 들리고 슬픈 소식들이 들려오기도 한다. 나는 여기서 핸드폰 없이도 MP3없이도 internet없이도 전기 없이도 한국음식 없이도 씻을 물 없이도 다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이다. 사람은 사람 없이는 못 산다.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상대방 사람에게 기대어 사는 것 이다. 사람이 없다면 사람은 외로워서 살 수가 없다. 곧 죽을 것이다.

'사람은 더불어 살아간다' 이 말이 내 가슴속에 들어와 나에게 깨달음을 주다니..

국내훈련을 포함한 6개월의 시간이 나에게 도움을 줄지 손해를 줄지는 모르는 상황 이었다.모든 것은 내 자신에게 달려있었다. 지금 3개월이 된 시점에서 아직도 이 5개월 동안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단원들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깨달았다. 사람은 결국 사람으로 끝난다는 거. 나는 어쩌면 죽을 때 까지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 깨달음을 진정으로 깨달아 버린 것 이다. 더군다나 나는 보너스로 아시아 연대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과 실천 경험을 하고 있지 않은가. 거기에다가 제대로 손빨래 하는 법도 배웠다.

여러분 나는 이미 5개월을 성공 했습니다.


안효섭 고맙고, 미안해,,,그리고 자랑스러워~~
2008. 12. 4.
오휘경 은정아....ToT 고생많았구나..
말라리아가 가져다 준 깨달음! 은정 힘내!
2008. 12. 4.
이상복 너가 아파서 울 때,, 난 웃음이 나오더라^^
2008. 12. 7.
안주 여러분, 김판놈을 죽여주세요^^ 딜리에서 고기나 퍼먹는주제에..
2008. 12. 16.
조수연 허허..이 사람 참! ㅋㅋㅋ 말이 거세군? ㅋㅋㅋㅋ
2009.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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