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을 자르며-
여자들에게 손톱은 남자에게 있어서 보다 훨씬 그 의미가 크다. 남자들에게 손톱은 물건을 집을 때, 혹은 섬세한 손놀림이 필요한 순간에나 사용하는 신체의 일부에 지나지 않겠지만 여자들에겐 스트레스 해소나 기분전환을 할 수 있는 가장 저렴한 수단이기도 하다.
필리핀에 오기 전 나는 항상 손톱이 길었다. 원래 손톱이 긴 편이라 짧게 자르면 아프기도 했지만 형형색색의 매니큐어 바르는 재미는 내 삶에 기분 좋은 활력소가 되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리핀에선 손톱을 손끝에 바짝 붙여 자르고 있다.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타를 칠 때는 손가락으로 코드를 잡기위해 줄을 꾹 눌러야 하기 때문에 손톱을 바짝 잘라야 했다. 그래서 규칙적으로 손톱을 잘 잘라줘야 했다.
이렇게 시작한 손톱을 깎는 시간. 이 시간은 내게 시간의 흐름을 말해주는 몇 안 되는 가시적인 단서가 된다. 필리핀에 와서 만 10번은 족히 손톱을 자른 것 같다. ‘시간이 가고 있긴 한 거지!’ 장난스런 투정에 너무나 분명히 시간은 흐르고 있음을 말해주는 손톱. 한국이라면 여름이 끝나고 가을도 지나 이제 겨울이 오고 있는 시점. 벌써 철이 3번이나 바뀌었을 시간. 필리핀은 여전히 여름이다. 하늘은 여전히 그 높이 그대로 파랗고, 구름은 뭉게뭉게 하얗다. 야자수도 여전히 푸른색 그대로고, 잠잠한 바람과 뜨거운 태양의 열기도 8월의 첫 그 느낌 그대로다. 물론 사람들의 옷차림도.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다.
새삼스레 한국은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도 너무나 분명히 알 수 있는 곳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일까? 한국 사람들은 시간의 변화에 매우 민감하다. ‘벌써’ 라는 말은 입버릇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오고간다. ‘벌써 여름이야?’ ‘벌써 수박이 나왔어?’ ‘벌써 목도리를 하는 구나’ ‘벌써 연말이네’ 등등. 한국 사람들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와 조급증도 시간에 대한 민감성과 관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또 오늘과 같은 필리핀 사람들이 느긋느긋한 것에도 시간에 대한 민감성이 조금은 작용하는 것일까. 확실히 이곳 사람들은 시간에 대한 그다지 민감하지 않은 것 같다. 오늘이 안 되면 내일 하면 되고 내일 안 되면 또 그 내일 하면 되고. 그렇게 몇 날이 지나고 지나도 하늘도, 태양도, 바람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어떤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인지 따져보는 건 분명 의미 없는 일이 될 것이다. 결국 각자의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각각의 삶 속에서 체득하게 된 삶의 방식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테니까. 생각해 보면 ‘문화 상대주의’라는 이름 좋은 포장 때문에 긍정적인 비판조차 못하게 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속도를 생명으로 아는 한국 사람으로서 ‘필리핀 사람들은 너무 느려’라고 말 할 수 있는데도 마치 그렇게 말하면 필리핀의 문화와 환경은 전혀 고려도 하지 않는 의식이 덜 된 사람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이 요즘의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야 하고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해 버려야 하는 것이다. 느리다는 사실을 좀 더 다양하게 분석해볼 수 있는 기회를 애초부터 박탈 당한고 있는 건 아닌지.
손톱을 깎으며 시간의 흐름에 관한 생각을 하다가 결국은 너무나도 뻔한 결론에 도달했음이 조금은 속상한 마음이 든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나래를 펼치다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턱턱 막혀버리는 순간 오면, 혹시나 내가 고정관념에 묶여 있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기 된다. 갇혀버린 생각이 틀을 깨고 나올 만큼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 더 공부하고 생각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