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탄 제
김 종 길
어두운 방 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都市)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山茱萸)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참고서 목차에 숨 막히게 나열되어 있어 그 많고 많은 시들.
절반 이상은 이미 기억 속 저 멀리 마치 바이타라나 강이라도 건너가 버린 듯 잊혀졌다.
하지만 마음이 싱숭생숭하거나, 외로울 때
붉은 산수유 열매라는 단어의 선명함처럼
내 가슴속에 박혀 따뜻함으로 기억되는 시가 있다.
김종길 시인의 성탄제.
무척이나 무뚝뚝한 우리 아빠.
한 번도 살갑게 팔짱 한번 안 끼워준 나도 만만찮게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이긴 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키가 자란만큼 마음도 컸던 모양이다.
우리는 서로 표현하지 않아도 누구보다 서로의 마음을 잘 안다.
우리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은 가족이다.
그리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도 가족이다.
땀나게 더운 필리핀의 성탄제.
화려한 필리핀의 크리스마스 트리 불빛 아래
불현 듯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는 것은
야산에서 그와 함께 베어와 만들던 크리스마스 트리가
아직도 내 가슴속에 살아 빛나고 있는 까닭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