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6월 5일 ~ 6월 12일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여행길.
9일 새벽 바기오를 떠난 우리는 북으로 북으로 향했다. ‘culture trip’의 컨셉에 가장 맞는 일로코스 지역을 둘러보기 위함이었다. 한 번,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익사할 뻔 했던 나인지라 우리 스탭의 ‘보라카이 예찬론’에도 시큰둥했거늘, 식민지 시절의 흔적이 300년 넘게 보존되어 있는 곳, 400년이 넘은 교회가 있는 곳, 원주민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고 설명 된 북쪽 지역을 여행책에서 확인하는 순간, 바로 여기라며 내 돈을 털어서라도 가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정말 내 돈을 털게 되었다.-_-;;;;;;;; 그럴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했다. 계단식 논을 볼 수 있는 바나우에를 못 간건 천추의 한이 되었지만.
바기오에서 비간으로 향할 땐 이미 우리의 여행길이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것이었음을 잊고 있었다. 잘 털렸다는 말도 나오는 마당에 트라우마는 무슨. 그냥 즐기는 거다. 여행의 목적은 여행 그 자체여야 한다. 무언가를 위한 여행은 이미 순수한 설렘을 잃은 것이다.
2. 비간과 라왁, 사라지지 않은 역사의 흔적
9일, 비간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1시. 그렇게 크지 않은 비간이라는 도시는 고풍스러움이 집약되어 있는 곳이었다. 비간에 있던 메스티조 지역은 여행책자에 의하면, 스페인풍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중국식과 멕시코 식이 혼합된 양식의 옛스러운 집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 보수가 된 모습들이긴 하지만 300년 넘게 보존되어 있는 그 거리는 뭔가, 세상의 모든 행, 불행을 다 겪은 노인의 얼굴 같았다. 수많은 전쟁이 있었던 필리핀에서 거의 유일하게 폭격을 피했던 곳, 그래서 다 부숴진 벽돌들로 지어진 집들이 거짓말처럼 우뚝 서 있는 곳, 또각거리는 마차소리가 그윽한 울림을 반복하는 곳, 비간은 이런 곳이다.
사실 우리가 둘러본 곳은 얼마 되지 않는다. 비간이 어떤 도시라고 얘기하기도 쑥스러울 정도로 잠시 잠깐 머물렀을 뿐이다. 요 것이 이번 여행에서 땅을 치고 아쉬워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 날 하룻밤을 묵은 곳은 비간에서 30분 가량 떨어져 있는 라왁이라는 도시이다. 라왁 은 ‘일로코스 노르테(필리핀 최북단에 있는 주)’에 속한 지역으로 비간보다는 조금 더 ‘기록화 된 역사’를 감상할 수 있었다. 이렇게 느낀 이유는 사실, 비간에 있는 박물관이나 갤러리 같은 곳을 가지 못했기 때문도 있겠지만 라왁에는 ‘마르코스’의 흔적이 살아 숨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코스는 1965년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989년 망명 도중 사망할 때까지 필리핀을 통치한 인물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어떤 전 대통령처럼 긍, 부정적인 평가를 모두 받고 있는 독재자이자 번영의 구세주이자 전설이다. 라왁 씨티는 그의 고향이기도 하고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곳이었다. 저녁이 되기 전 마르코스 박물관에 들렀을 때 우리는 역사적 인물의 실제 시신을 보게 되었다. 곧 망자의 혼이 튀어나올 듯한 시꺼먼 방에 유리와 온갖 꽃에 둘러싸여 있던 그. 한 때는 대통령이었고, 사치 심한 미스 마닐라 출신 미녀의 남편이었고, 또 한 때는 망명자였던 꽤 거창한 삶을 산 사람이 지금은 방부제와 에어컨 바람에 의해 겨우 그 색을 유지하고 있는 시체가 되어 누워있는 것이다. 죽으면 아무것도 아닐 것을. 쯧. 조금, 허망함을 느꼈다.
라왁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밤, 김희곤 단원은 라왁까지 갔으면서 또 졸리비에서 치킨을 시켜댔다. 이러다 알을 낳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쨌든 그가 주문한 스파이시 치킨은 하나도 맵지 않았고 이에 이의 제기를 했다. 그러자.. 종업원은 닭의 살점에다 ‘spicy’’라고 써 있는 깃발을 하나 퐉 꽂아주었다. 허허. 마술의 깃발인가. 꼽기만 하면 치킨이 매워 지는가.. 허허허허-_-^^^
10일 아침, 우리는 필리핀 북부의 바다를 감상하러 떠났다. 바다는 언제나 그렇듯 맑고 투명하고 푸르렀다. 차를 타고 조금만 달려도 바다가 지천으로 있는 필리핀에서 그닥 새로울 풍경은 아니었지만 신기하게도 바다를 볼 때마다 마음이 차분해진다. 여행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동반자임을 심히 확인시켜 준 다툼이 있었는데 아직 그것들이 가시지 않아 나는 분노에 차 있을 때 였다. 그러나 뭐 금방…. 바다와 풍차와 등대 같은 이름만 들어도 산뜻한 피조물들을 보고 나니 조금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자연의 힘은 위대하기 이를 데 없다. 이후엔 또 다시 마르코스와 그의 가족이 20년간 살았다던 사저를 둘러보고 400년 넘게 보존되어 있는 파오아이 성당을 보았다. 종교에 관련해선 지식이 전무한 나라, 뭐 그 성당을 보고 한 생각이라고는.. 한 자리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인간의 추태를 지켜봐야만 했던 그 성당이 참 불운하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신에게 내리는 가장 큰 형벌은 인간과의 결혼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 죽음을 맞을 수 밖에 없는데 신은 불멸의 존재이니 그저 사랑하는 이들의 부재를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왜 그 성당을 보고 문득 그 신화가 떠올랐는지.. 어쨌든, 난 그 곳이 좀 안쓰러웠다.
라왁에서의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비간으로 돌아갔다. 덜 본 듯한 미미함에 견딜 수 없어 없는 시간을 쪼개서 발걸음을 돌린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빡빡했지만 그 아련한 느낌을 지속할 수는 있었다. 다시 보니 300년 넘은 건물 양식 따라 만든 초현대식 레스토랑이 눈에 걸렸다. 마치 한글로 정갈하게 ‘스타벅스’라고 써 놓은 것과 같이 뭔가 어긋난 느낌이랄까. 그 유명한 ‘맥도널드’도 메스티조 지역의 건물 양식으로 지어졌고 사람들은 그 거리 입구에 있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팬피자를 즐기고 있었다. 에잇, 좀 그렇다. 어쨌든 우리도 저녁을 체인점에서 먹긴 했다. 김희곤 단원은 또, 또 졸리비에 가고-_-
마닐라에서 또 하룻밤을 보내고 12일에 레가스피로 돌아오던 길, 북쪽으로의 여행길을 돌아보며 역사를 훔쳐보는 것은 사뭇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언젠가 ‘훔쳐봄’을 당할 수 있는 역사적 인물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다들 돌을 던질텐가. 후훗. 쥐도새도 모르게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싶다면 어디 던져보시지.
괜찮은 여행을 했다. 물론 유쾌하지 않은 기억도 있다만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신비한 곳을 많이 다녀왔다. 모든 것이 여행의 추억이겠거니 싶다. 희.노.애.락이 다 있었다. ‘애’는 어디에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여튼. 쿨한 날씨와 녹음이 인상적이었던 바기오, 고풍스러움의 극치 비간, 볼 것 없다고 책에 나왔지만 자연스러운 매력이 눈부셨던 라왁, 이젠 좀 지겨워진 마닐라 호텔ㅋ 명소들을 둘러본 것도 물론 좋았지만 우리끼리 그렇게 미친듯이 웃으며 여행을 했다는 것이 그저 좋았다. 차 안에 압축되어서도 엄청 웃고 풀밭에 갖다 풀어놔도 웃고.. 조증이었다.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오니 할 일이 산더미. 후우, 남은 날들은 점점 줄어드는데 할 일은 늘어나는 이상한 구조다. 괜찮다. 일 하다가 짜증나면 800장이 넘는 우리의 여행 사진을 보고 또 웃어제끼면 된다. 괜찮아 그래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