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지도에서 한국와 필리핀 사이는 한 뼘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에 사는 내가 필리핀이라는 국가에 대해서 느끼는 실제 거리감은 그보다 멀다. ‘필리핀’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도 별로 없을뿐더러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더 중요하게, 그리고 더 자주 소식을 접하는 국가들을 더 크고 가깝게 지도로 재구성 해본다면 내가 살고 있는 필리핀은 한국에서는 제법 거리가 있는 하나의 점으로 표현될 것이다. 바나나, 이주노동자, 한국기업의 공장, 결혼 이주 여성… 단편적인 이미지들로 멈춰 있던 나의 필리핀은 3월 2일을 이후로 더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깝지만 먼 나라. 그리고 아시아라는 범주 안에 속한 우리. 그런데 나는 내가 아시아 사람인지, 아시아가 뭔지 도통 모르겠다. 살아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나는 그래서 이 곳에 왔다. 다소 추상적이지만 정말 단순한 호기심으로. 알고 싶었고, 우리의 관계를 들여다 보고 싶었고,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상상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더 큰 세상을 보고 싶어서 국경을 넘어선 나는 더 작은 세상 속에서 바둥거리며 자라나게 되었다. 하루 24시간을 함께 꼭 붙어 지내는 우리 다섯 명의 팀원, 그리고 현지 스텝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는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현지 친구들과의 교감. 말이 잘 통하지는 않지만 ‘서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 그 단순한 마음은 나에게 큰 위로이자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더 가까워졌다. 필리핀은 나의 소중한 친구와 추억이 있는 특별한 곳이 되었다. 하지만 이 기억은 단지 앨범에 아름다운 사진으로 남아 덮어버리진 못할 것 같다.
기대와는 달랐다. 그러나 그 변화는 매우 자연스러웠다. ‘아시아’, ‘필리핀’… 이라는 큰 범주를 지우고 난 그냥 이 곳에서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나를 만났다. 25살, 6개월간의 뜨거운 여름. 그리고 이 여름은 지속된다. 이전에도 그래왔고 지금도 그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