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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에세이, 허소현
4
99+
2010년 9월 6일. KB-YMCA 대학생 해외봉사단 라온아띠 4기 발대식 “ 난사람이 아닌 된사람이 되어 돌아오겠습니다” 라고 외친후, 나는 한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이곳, 스리랑카로 출발했다. 말로만 듣던 실론, 그리고 인도양의 진주에서 자발적인 불편함을 실천하러 왔다. 나를 열고, 발견하는 곳 국내훈련 때 우여곡절이 정말 많았다. 그래서 나는 자기소개서를 한 번 더 읽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내가 무엇을 얻기 위해 라온아띠를 해야하는지 말이다. 해답은 지금 찾는 중이다. 슬픔보다는 행복을 찾았으면 하는 바램에서 나는 오늘도 마음을 다 잡는다. 나는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고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듣고 조언해 주길 바란다. 하지만, 국내훈련 때부터 나는 이야기 주머니를 잠궜다. 그리고 열지 못했다. 왜냐하면 살아온 환경이 달라서 그것은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조금은 이기적일 수도 있지만, 나는 22년동안 이렇게 살아왔는데 다른사람이 나한테 맞추면 되지 이런생각이였다. 하지만 겪다보니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선입견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이야기를 하는 대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귀를 갖자고. 나는 지금 다름을 조금씩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말하는 기술과 듣는 귀, 이 두가지를 천천히 얻을 준비를 하고 있다. 한국에 있을 땐 정말 단순한 일만 줄 곧 했다. 하지만, 이 곳, 스리랑카에 오니 나는 이것저것 다 할 줄 아는 사람이였다. 밥하기, 빨래하기, 청소하기, 톱질하기, 망치질하기, 침대 페인트 엄청빨리 깨끗이 벗기기등 나는 나름 이곳에서 재능을 발견했다. 한국에서는 못할 것 같던 것들도 이곳에 오니 아무것도 아니게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은 내 안에 잠재하고 있던 능력을 발견해 준 고마운 곳이다. 흔히들 사람들은 나에게 말했다. 가끔 보이는 미소는 정말 예쁘다고. 힘들어서 그런 것 일 수도 있지만, 나는 국내훈련 때부터 조금씩 미소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잃어버린 미소를 되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살다보니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동안 왜 미소를 숨기고 살았는지 말이다. 선한 영향력을 알려주는 사람들 덕분에 나는 미소를 되찾았다. 그래서 이곳은 잃어버린 나의 아름다운 미소를 되찾게 해준 고마운 곳이다. 행복한 편암함, 스리랑카 어른 다섯명이서 팔을 벌려야만 크기를 잴 수 있는 나무. 그 나무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고 나는 사람들 몰래 눈물을 훔쳤다.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을 왜 이제서야 느끼고 있는 지 말이다. 그래도 늦게나마 볼 수 있게 해 주심에 감사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오감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나는 너무 행복하다. 3개월을 지낸 지금, 나는 이곳이 편안하다. 한국에 있는 우리집 보다 훨씬 편한 것 같다. 지내다 보니 자유시간이 많아 졌다. 대부분 Y에서 활동을 하긴 하지만, 산책다녀오기, 우체국 다녀오기, 전화방 다녀오기등 나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점점 많아 지고 있었다. 그리고 서툴지만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걸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사람들은 웃으면서 이야기를 해 준다. 그 이야기를 다 이해할 순 없지만, 나는 대충 감으로 이해한다. 사람들은 나에게 많은 것을 들려주고 얻어가길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모든 것이 이해는 가지 않지만 사람들의 말에 귀를 귀울이고 있다. 사람을 사랑하는 법 이곳, 스리랑카는 나에게 많은 것을 알려준 곳이다. 행복, 사랑, 자유, 편안함, 나눔, 용기, 현실, 그리고 사람간의 관계, 소통. 아직 배울 것이 많고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많지만, 나는 이곳에서 한 층 성장했다고 말 할 수 있다. 단체생활을 통해서 얻는 것, 그리고 내가 버려야 하는 것들. 나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했다. 작은 것 하나하나에 감사하며 행복과 사랑을 느끼고 있다. 남녀간의 사랑이 아닌,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게되었다.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곳 사람들을 진심을 다해 대하고, 사랑하고 있다. 내가 한국에 가서 무엇을 할 지 아직 감이 오질 않는다. 복지를 하면서 너무 틀에 박힌 삶만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조금은 넓은 시야를 가지고 세상, 그리고 아시아에 한 발 짝 다 가기 위해 생활해야겠다고 말이다. 나는 오늘도 내 머리와 마음에 아시아를 품기 위해서 지나가는 사람들과 웃으면서 인사를 한다. 그리고 하루를 마감함에 있어서 오늘도 무사히 아무일 없이 지나게 해 주심에 감사함을 느낀다.
개인에세이, 한상진
1
99+
먼저 활동 에세이를 써야한다는 말을 들었을때, 항상 미래에 대한 일만 계획하고 생각하던 나에게 지난 3개월을 뒤돌아 볼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와서 찍어 놓은 사진들도 훑어 보았고, 영상도 보았습니다. 다 보고 나니, 지난 3개월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흐뭇해하는 나 자신을 보고 있었습니다. 먼저 <라온아띠 대학생 해외 봉사단>에 예상치 못하게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과 걱정 동시에 든 저였습니다. 개인적인 사정, 그리고 주변에서 하는 소리, 그리고 내 마음속에서 하는 소리를 모두다 귀를 귀울였습니다. (졸업, 취업,나이, etc.) 하지만, 지금 나 ‘한상진’은 여기 스리랑카에 있습니다. 이게 제 결정이였고, 그 결정에 따른 다른이들의 말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람 사는데 다 똑같네 ! 처음 스리랑카에 왔을때 모든게 새로웠습니다. 같은 Asian이였지만, 모든게 달랐습니다. 손으로 밥을 먹고, 내전을 격었고, 문화가 많이 달랐다. 나에게 처음 다가온 스리랑카는 모든게 새롭고 신기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3개월 동안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한가지가 있습니다. “사람 사는데 다 똑같네!” 그런 거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모든게 새롭고 신기하고 다르기만 하던 여기엔 사람과 사람사이에 정이고, 그들만의 룰이 있고, 세상살아가는 모습이 우리나라랑 별반 다를것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런 모습에 적응해 가던 제 모습에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우리 코디네이터랑 장을 같이 보러가면, 한국에서 하던 버릇이 그대로 나온곤 합니다. 야채를 살때도 고다이!(많이 많이)를 외치는건 기본이고, 무게를 달아서 바구니에 담을때 야채 몇개 집어서 바구니 속으로 골인시키고 주인 아저씨를 향해 멋적은 웃음을 짓습니다. 그리고 대화를 나눌때도 영어대신 신할라(스리랑카 언어)가 먼저 나와 어쩔땐 상대방은 우릴 위해 영어로 말하고, 난 신할라로 말하는것 보면, 누가 외국인 이고 누가 자국민인지 헷갈릴 때도 있습니다. 경험, 그 믿음 제가 3개월 동안 본 스리랑카가 스리랑카의 모든것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여기서 그들과 만나고 대화하고 느꼈던 모든 것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아니 잊지 못할것이라고 말합니다. 아직 2개월이란 시간이 남은 이시기에, 제 모든 생각과 마음을 전달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남은 이 2개월이 지나간 3개월 보다 더 크게 저에게 다가올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버려서 말입니다. 누군가는 이글을 읽을것입니다. 하지만 명심해주세요. 이글에 관한 것들을 믿지 마세요. 직접 와서 자신이 만나고 보고 그리고 그들과 나누었던 모든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믿으세요 !
개인에세이, 정동민
3
99+
마음껏 사랑하고 있습니다 9월 7일. 라온아띠 4기의 발대식을 하는 날, 모두들 돌아가면서 짧게 한마디씩을 준비하라고 했다. 그 순간 참 많은 말들이 머리속을 스쳐가더라. 언제가 책에서 읽었던 말, 누군가에게서 흘려 들었던 말 등등.. 그러다가 평소에 내가 지인들에게 입버릇처럼 하고 다니던 이 말이 딱 떠올랐다. ‘순간순간 마음껏 사랑하기.’ 자주 하던 말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갑자기 생각이 났기에 좀 의아했다. 하지만 그 말은 그 전까지는 그냥 입에서만 나오는 말이었을뿐, 확실히 피부에 와 닿지는 못했던 말이었나보다. 어쨋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의 간단한 프로필이 소개되고 나는 자리에 일어나서 크게 외쳤다. ‘ 마음껏 사랑하다 오겠습니다!’. 9월 9일 00시 20분. 드디어 콜롬보에 도착했다. 6팀중 가장 먼 여정을 떠난 우리 스리랑카 팀은 두번의 비행기 경유를 하고 한국을 떠난 지 14시간 만이었다. 라온아띠 4기 스리랑카팀의 리더이신 Mr. Nihal과 Mr. Godfrey 그리고 우리의 코디네이터 Sampath이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심야의 첫 만남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스리랑카 생활은 시작되었다. 3기에게서 집에 대한 많은 정보를 들었기에 내심 걱정했지만 우리의 집은 아주 넓고 쾌적한 그야말로 궁전이었다. 그 곳에서 우리는 매일 버스를 타고 5분정도 거리에 있는 YMCA로 출근을 한다. 처음엔 낯선 곳이라 참 멀고 위험하게만 느껴졌는데, 날씨가 좋은 날엔 가끔 다이어트를 핑계 삼아 걸어가기도 한다. 걷고 뛰기에 아주 적당한 거리라는 것을 근래에 들어와서 알게 되었다.(많이 익숙해졌기에…) 스리랑카 속으로 녹아들기 여기 모라투와에서 우리는 이제 그리 특별하지가 않다. 처음엔 사람들이 아주 이상한 눈으로 우릴 쳐다봤다. 모라투와는 특별한 관광지가 아니라서 외국인이 아주 드물다. 거의 없다. 단지 우리뿐. 그래서 우리 다섯명이 함께 걸어가면 으레 사람들이 물러서거나 놀라기 일쑤였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들의 그런 반응에도 개의치 않으며 열심히 웃고 인사를 하며 다녔다. 이제는 우리의 동선에 있는 가게 사람들이나 안면이 사람들과는 매일 같이 안부를 주고 받으며 손뼉을 맞추기도 한다. 또한 우리는 매일 똑같은 번호의 버스를 타고 다니기에, 왠만한 100번 101번 버스의 운전사와도 안면이 있어서 지나가던 버스도 우릴 알아보고 ‘빵빵’을 울리거나 세워서 인사를 해주고 가신다. 하지만 단점도 있다. 시장에 가면 처음에는 외국인 디스카운트 서비스(?)를 받곤 했지만, 이제는 현지인 가격 그대로 받는다. 약간 속상하지만 사실 기분은 더 좋다. 어느 날, 식당에서 손으로 열심히 밥을 퍼먹고 있었다. (손으로 먹는게 익숙하긴 하지만 능숙하지는 않아 퍼먹는 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그런데 금발에 파란눈동자를 가진 서양 사람이 들어오더라. 우리 다섯명을 밥을 먹다가 ‘어, 외국인이다.’ 이러고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었다. 정확히 10초 뒤, 우리는 웃음이 터졌다. 따지고 보면 우리도 외국인이면서 외국인 보고 외국인이란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외국인이기는 하지만, 스리랑카와 우리는 같은 아시안이니깐 서양사람 보고 외국인(굳이 따진다면, 다른 대륙 사람)이라고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우리는 천천히 스리랑카 속에서 특별함, 다름이 아닌 평범함, 같음을 느끼며 녹아들고 있다. 우리가 행복합니다 ! 우리 스리랑카 팀은 매 주마다 고정적인 프로젝트들이 있고, 사이사이에 1회성 프로젝트 들이나 우리 스스로가 추진하는 프로젝트들을 수행한다. 월요일에는 강가에 있는 빈곤층의 마을에 가서 어린이들과 함께 뒤엉켜 영어, 수학, 예체능 수업 들을 한다. 처음엔 많은 것을 알려주고 보여주고 와야지 했던 우리가, 지금은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온다. 수요일엔 아침 일찍 일어나 ‘Herbal drink’를 만들어 지역 내에 있는 병원으로 찾아가 나눠드린다. 많은 환자 분들이 아파서 병원에 오심에 불구하고 항상 웃어주시며 고맙다고 말씀을 해주신다. 그럼 나는 엉성한 현지어로 ‘우리가 행복합니다.’라고 대답을 한다. 이제는 새벽 5시에 일어나 만들고, 나눠드리는 일들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 일상에서의 행복함이란 이런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금요일에는 Children Club, 한국어 수업이 있다. 스리랑카 사람들과 가장 많이 만나게 되는 날. 어린이부터 성인들 까지 남녀노소 구분 없이 함께 하는 날이다. 금요일 밤만 되면, 스리랑카에 그리고 공통 분모인 아시아에 제대로 녹아 든 느낌을 느낄 수 있다. 비록 우리가 생김새도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다르지만 전혀 문제 없이 소통하고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토요일은 태권도 수업. 발차기 한번 더하고 뛰어 놀기 위해서 오는 친구들도 있겠지만 우리는 진지하게 태권도 수업을 하기로 했다. 그래서 태권도의 정신인 예의, 인내 등 꼭 한국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꼭 지녀야 할 기본적인 정신들을 강조하며, ‘체력은 국력’이라는 명제 아래 열심히 태권도를 가르친다. 이런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의 실력이 한 주 한 주가 다르게 늘어난다. 그런 모습을 보면 태권도를 가르치는 입장에서 참 뿌듯하고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스리랑카라는 나라를 처음 만나게 된 날부터 나는 행복하기만 하다. 물론 더운 날씨와 힘든 노동, 현지 스태프들과의 의견 충돌, 팀원들 간의 내부 문제 등등 어렵고 힘들고 지칠 일들도 많다. 솔직히 이런 문제들은 여태껏 한번도 부딪혀 본적 없는 문제들이고 더욱이 타지에서 겪는 일들이라 참 힘들다. 하지만 이런 상황들이 내가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큰 도움이 될 경험들이라고 생각하기에 하나하나 풀릴 때 마다 그 어떤 행복보다 더 큰 행복으로 다가온다. 이런 것들 까지도 행복해져 버리니 ‘처음부터 행복하기만 하다’라는 말이 절대 틀린 말은 아니다. 적어도 나에겐…… 마음껏, 순간 순간, 사랑하기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렇게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고, 이렇게 값진 경험들을 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너무 감사해 어쩔 줄을 모르겠다. 내가 이런 큰 기쁨들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하지만 이미 이렇게 느끼고 즐기고 받아 버렸는데 어떡하겠나. 이제 돌려줘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환원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내 능력 안에서 어떻게 돌려 줘야 할까 많은 생각을 해봤다. 답은 출발하기 전 발대식에서 했던 그 말에 있었다. 마음껏 사랑하기. 순간 순간, 마음껏 사랑하기. 이젠 말 뿐만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이 되었다. 앞으로 마음껏 사랑하자. 그리고 지금 이순간에도……
개인에세이, 김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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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앞에 한 발짝 더, 나는 지금 스리랑카에 있다. 처음 라온아띠 4기라는 이름을 달게 되었을 때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설렜다. 걱정보다는 기대가 앞섰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스리랑카에 온 지 3개월이 지났고, 3개월이란 시간이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다. 누군가가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했냐고 물어보면 정확하게 세세하게 다 말 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새로운 경험을 많이 했다. 익숙하지 않았던 문화에 익숙해졌고, 더위에, 음식에, 언어에 익숙해졌다. 내가 이곳에 익숙해진 만큼 이곳 사람들 또한 나에게 익숙해졌다. 나는 더 이상 한국에서 온 이방인이 아닌 그들과 같은 이곳 사람이 되었다. 나를 보고 더 이상 아무도 신기해 하지 않는다. 그것이 좋다.그 동안 편협한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던 나의 과거를 돌아보며, 지금 내가 이곳에 있음에 감사한다. 매일 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면서 또 한번 내가 이곳에 있음에 감사한다. 소녀의 성장기 지금 나는 어린 시절 책에서 느꼈던 한 소년의 성장기를 경험하고 있는 듯하다. 성장통을 앓고 있는 사춘기 소년처럼, 가끔 모질게 아플때도 있다. 하지만 이 성장통이 끝나고 나면 나는 전보다 훨씬 더 많이 성장해 있을 것임을 알기에, 이 시간이 나에겐 더 없이 소중하다.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없을 시간이므로…앞으로 2개월 남았다. 2개월 뒤에 나는 어떻게 변해있을까…? 더 큰 스리랑카를, 아시아를, 그리고 세계를 품고싶다. 라온아띠 면접 때 ‘살아서 돌아오기’가 목표라고 말했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최고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목표가 조금 바뀌었다. ‘잘 살다가 돌아가기’로… (지금 Y 컴퓨터실에서 에세이를 쓰고 있는데칠드런 클럽 멤버인 프레거띠가 일부러 나를 찾아와 입에 빵을 넣어주고 간다. 이런것에서 소소한 즐거움과 행복함, 감사함을 느낀다.)
개인에세이, 강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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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강민지의 스리랑카에는 맨발의 자유로움이 있다! 파견을 앞두고 국내에서 교육 받을 때 송진호 실장님께서 “여러분이 잘 나서 뽑힌 것이 아니라 어딘가 모자라서 어딜 가도 못 뽑힐 사람이라 뽑은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온 마음으로, 심지어 고개까지 내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난 내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니까,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나는 잘났으니까! 스리랑카에 ‘살면서’ 이제야 송 실장님의 말씀을 이해한다. 내가 궁긍적으로 원하는 큰 사람이 되는 길은 나 혼자 잘나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었다. 타인의 실수에는 좀 더 관대하고 내 실수에는 좀 더 엄격한 사람이 되는 것, 더디더라도 걸음을 늦추지 않고 한 발자국씩 전진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이곳에서 나는 비로소 혼자 걷는 열 걸음보다 함께 걷는 한 걸음의 기쁨을 알아가고 있다. ♥ 맨발의 자유로움 신발은 집안에서만 벗고 생활하는 것이라는 개념이 있던 내게 스리랑카는 어느 곳에서나 맨발의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준다. 가끔은 무모하게 보일 정도로 아무 곳에서나 철퍼덕 주저 앉아 더 큰 자유로움을 만끽한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이토록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내가 있는 이곳이 스리랑카라는 이유가 전부일까? 아마도 스리랑카가, 이곳의 사람들이 내게 주는 마음의 여유로움 덕분일 것이다. 도전하지 않았다면 절대 느낄 수 없었을 자유로움이다. ♥ 당연한 것에 대한 고마움 스리랑카에 살면서 너무 당연해서 그 가치를 몰랐던 것들에 대한 고마움을 느낀다. 내게 영원한 아군인 가족이 있다는 사실이, 밥을 먹을 수 있는 손이 있다는 것 등 내가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하고 누려왔던 행복들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바라는 대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비로소 한다. 그 즈음 받았던 가족의 편지는 내가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더 실감하는 일이 됐다. 익숙한 글씨체를 마주한 순간 맺히던 눈물, 아빠의 ‘항상 사랑한다.’는 말이 엄마의 ‘늘 사랑하고 믿는 큰 딸’이라는 말이 주는 울림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 강민지의 속도로 가기 인생에는 한 가지 길이 없지만 내 또래의 친구들은 이미 사회 생활을 시작했거나 사회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책상 앞을 지키는 경우가 많다. 스리랑카에 오기 전 스스로에게, 부모님께 말씀드렸던 것이 스리랑카에서 보내게 될 육개월의 시간이 나를 더 큰 사람으로 성장시키리라는 강한 믿음이었다. 그런 내게 스리랑카에서의 일탈같은 일상은 너무 행복하지만 가끔은 내 인생의 길을 잘 가고 있는지 의문을 줄 때도 있었다. 와중에 접한 어느 책은 내 선택이 절대 틀린 않았음을 확신하게 해줬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달팽이가 느리고, 인간이 빠르다는 것이 진실과는 거리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에는 자기만의 속도가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했다. ‘달팽아, 너는 네 속도로, 나는 내 속도로 가자. 그럼 우린 잘 가는 거다.’ 강민지야, 너도 네 속도로 가자. 그럼 넌 잘 가는 거다! 뒹굴거리며 책 읽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인데, 어느 누가 뒹굴거리며 책 읽는 즐거움을 방해할 수 있을까. 스리랑카에서 나날은 내게 가장 감사한 순간들인데, 어느 누가 이곳에서의 특별하지만 일상적이지는 않은 나날을 방해할 수 있을까. 내게 손으로 밥 먹는 일은 능숙하지는 않지만 더 이상 낯선 일도 아니다. 서툴지만 손으로 밥과 커리에 ‘빠빠당’을 야무지게 비벼 맛있게 먹는 나는 지금 스리랑카에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정말 행복하다!
개인에세이,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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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ther Esther.는 미친 여자다. Esther.는 개념이 없다. Esther.는 한시도 우릴 가만 두지 않는다. Esther.는 정말 말이 많다. Esther.는 폭력적이다. Esther.는 나돌아 다니는 걸 좋아한다. Esther.는 많이 먹는다. Esther.는 손가락까지 쪽쪽 빨아먹는다. Esther.는 내 절친이다. Esther.는 deaf다. 생각해 볼 기회도 없었다는 말은 생각해 볼 기회가 생겼을 때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나는 말레이시아에서 생각해 볼, 또 상상해 볼 기회도 없었던 일들을 경험했고 또 앞으로도 계속 이런 일들을 꿈꾸며 살 마음을 먹게 됐다. 말레이시아에 오는 것이 결정되었을 때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일들이 내게 일어났고 지금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조용한 세계의 평범함 이곳에서 deaf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들과 친구가 되지 못했더라면. deaf들의 절대 조용하지 않은 이 세계에 들어와 보지 못했더라면. 나는 아마 그들의 특별함을, 동시에 그들의 평범함을 알지 못하고 살았을 것이다. 평생 그들을 들리지 않는 사람들,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 장애를 가져 불편한 사람들로 분류하며 나와는 다른 이들, 나와 섞일 일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아예 그 존재에 대한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지금 와서 이런 생각을 하면 조금 무섭기도 하고 괜히 미안한 마음까지 든다. 사실 처음 deaf들을 만났을 때는 두려운 마음이 컸다.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수화를 막연하게 바라보며, 그들의 표정을 살피며 이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마냥 조심스럽기만 했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는 항상 그렇게 어렵기 마련이지만 deaf들을 만났을 때는 처음 만나 어색한데다 그 어색함을 풀 말 한마디 하는 것조차 힘들다보니 특히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더 안절부절 못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Esther, Sandy, Jasmin 이렇게 가까운 deaf 친구들이 생겨 수화도 배우고 매일 같이 밥도 먹고 여기저기 함께 다니다보니 그런 어색함이 사라진 건 물론 과장된 연기며 표정을 배워 표현이 풍부해지고 가끔 생기는 곤란한 상황들도 즐기게 됐다. 서로 연기자 다 됐다며 쓰러지게 웃는 우리들. 이런 우리 모습, 내 모습이 새롭고 신기하고, 또 좋다. 내 친구 Esther 이제 내게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즐거웠던 일이 무엇이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주저 않고 내 친구 Esther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Esther는 우리와 함께 일하는 PMY deaf center 동료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였고 내가 만들었던 ‘DEAF'의 개념을 모조리 깨준 한마디로 ’깨는‘ 여자다. KL에 있었던 고작 한 달의 시간동안 우리는 누구보다 친한 친구가 되었고 창피한 얘기, 더러운 얘기, 야한 얘기까지 모두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는 수화로 대화하기 힘든 상황에서는 껑충껑충 뛰며 연기를 하기도 하고 방바닥을 기어 다니기도 하면서 서로를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는 그냥 친구가 된 것이 아니라 노력하며 친구가 된 것이다. 나는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더 좋아하게 됐고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생각한다. 우리는 친구가 되기 위한 노력을 불편함이 아닌 또 하나의 재미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 관계도 재미있는 관계라고 생각한다. 나는 Esther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받았고 또 많은 것을 배웠다. Esther는 그 짧은 시간동안 우리를 KL 구석구석까지 데려가주고 항상 어디서도 먹어보지 못한 맛있는 음식을 소개해주고, 무엇보다 우리의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완전히 새로운 언어인 수화로 우리는 그 어떤 다른 언어로 소통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나눌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소통, 대화는 우리만의 방식이라 더 특별한 느낌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특별해 질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세상에서 나를 찾는 일 이런 새로운 관계, 새로운 상황, 새로운 친구, 그리고 새로운 내 자신. 이 모두는 내게 정말 소중하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은 꿈을 가진 내게 이 모든 것은 하나의 과정이자 공부이다. 나는 남들이 다 알지만 동시에 상상하기 힘든 이야기를 담아내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전엔 언제나 그렇듯, 아직은 내가 아는 세상이 거기서 거기, 내가 하고 싶은 얘기도 거기서 거기가 아닌가 하는 답답함을 갖고 있었다. 학교생활에 쫓기고 동아리에 쫓기고 친구들에게 쫓기고 열등감에 쫓기고. 그렇게 쫓기듯 살며 완전히 새로운 것에 시선을 두고 있기란 그저 꿈같은 일이였다. 그래서 아예 새로운 곳, 상상하기도 버거운 곳으로 나를 내몰고 싶었고 그곳에서 내가 아는 세상을 벗어난 나를 발견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상상했던 것과 달리 말레이시아라는 나라의 환경 자체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나는 말레이시아라는 나라 자체보다 이 익숙한 환경 속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deaf들을 통해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발견했고 그 속에 있는 내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고 또 상상하게 됐다. 처음엔 청각장애인들은. 그들은. 불편하겠지, 답답하겠지, 그야말로 조용하겠지, 참 내 멋대로 많은 상상을 했다. 말레이시아를 오게 되고 deaf들을 만나게 된다는 걸 알면서부터 나는 나도 모르게 그들의 세상을 만들어놓고 구분 지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deaf들에 대한 다큐를 찍었다면 그 다큐는 정말 그런 부분만을 보여주는 재미없는 영상이 되었을 것이다. 자기 영상에는 자기 생각이 담기기 마련이니깐. 하지만 그런 내 부실한 상상을 완전히 깨주듯, 내가 여기서 만난 deaf들 중 얌전한 친구는 단 한명도 없다. 오히려 모두들 너무 정신이 없어 내 기를 빼앗길 정도다. 이제 내가 찍을 다큐에는 말 한마디 없이도, 쿵쾅대는 음악 없이도 시끄러운 deaf들의 모습이 담기게 될 것이다. 조용하지만 시끄러운. 소리 없이 신나는. 이런 경험을 내가 하게 될진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가끔 deaf 친구들과 정신없이 수다를 떠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 나중에 다시 돌려보면 그때의 우리가 소리도 내지 않고 저렇게 미친 듯이 떠들었다는 것이 새삼 놀랍고 우습다. 이제 들리지 않는 것, 소리 내지 않고 대화하는 것은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니다. 내가 배운 세가지? 나는 말레이시아에서 남들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해서 무언가를 배웠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우리는 항상 재밌고 신나는 일을 했고 일이 힘들어 그만 두고 싶은 생각이 든 적도 없다. 그래서 처음엔 우리가 봉사활동을 하러 온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것들이 나를 꿈꾸게 하고 그 꿈속에서 넓은 세상을 보게 해준다는 생각을 한다. 가서 배워오기만 하라던 말이 지금은 이해가 간다. deaf들을 통해 남보다 어려운 점이 하나 더 있다고 해서 우울할거란 단순한 상상은 하지도 말 것이며, 들리지 않는다고 정말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며, 말하지 못한다고 조용한 건 절-대 아니라는 것. 무엇보다 이 세 가지는 분명히 배웠다. 나는 이제 정신이 반쯤 나간 말레이시아 deaf 친구가 생겼다. 우리는 항상 Esther를 미친 여자라고 부른다. 그럼 Esther는 대답한다. “너희도 정상은 아니거든~”
개인에세이, 윤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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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인연 그리고 경험 가장 뜨거운 피가 끓는 20대, 대학생이라는 신분의 특징 중 하나는 잃을 것 하나 없기 때문에 거침이 없고, 무엇보다 두려움이 없다는 것. 그래서 주변에 빽빽이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기회들을 한 없이 도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대학생의 특권이다. 그리고 2010 6월... 나의 또 다른 새로운 도전은 시작됐었다. 지원경쟁률이 엄청나게 높겠다는 우려 속에서도 이 기회를 잡기 위해 라온아띠 4기에 지원했다. 당시에는 자원활동 경험이라고는 대학교에 들어와선 단기적으로 고작 몇 번의 경험밖에는 없었지만, TV 프로그램 중 “단비”프로젝트 프로그램을 애청하면서 해외 자원활동에 대한 희망은 점점 더 부풀고 있을 터였다. 물론 요즘 수많은 대학생들의 취업경쟁 속에서 스펙이라는 일부를 충족시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앞서 내 삶에서의 새로운 경험, 대학생이라는 신분에서의 지금 이 시기가 아니면 놓쳐버리고 말, 값진 경험을 간구하고 있었다. 새로운 경험은 늘, 내 지식과 마음과 삶을 더욱 성숙하고 풍요롭게 해왔기 때문이다. 이번에 꼭 합격하고 말겠다는 나의 강한 의지와 간절한 바램, 그리고 작은 운이 작용해 라온아띠 4기 말레이시아 팀에 내 피 꿇는 뜨거운 도전장은 받아들여졌다. 드디어 시작된 1개월의 국내활동, 29명의 전국 각지에서 온 단원들과의 새로운 첫 만남, 그리고 가족보다 더 가깝게 6개월을 동거동락하게 될 4명의 팀원들과의 만남... 처음 우리가 대면을 했던 그날을 잠시 떠올려본다. 벌써 4개월이 훌쩍 지나버린 이 시점과 굉장히 대조되기는 하다. 초면엔, 너도 나도 모두가 다 천사였고 온갖 갖은 내숭과 함께 눈에 뛰게 서로 조심스러웠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흔히 새로운 만남을 갖는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위한 가식적인 트라우마를 내세우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4개여 월을 같이 형제, 자매마냥 지내온 우리 5명 모두는 그런 초면의 가식 섞인 가면을 벗어 던져 버린지는 오래... 각자의 마음 속 끝자락에 숨어있던 진짜 본인만의 트라우마를 맘껏 뽐내며 지내고 있다. 라온아띠, 변화와 성찰의 시간 나는 라온아띠를 활동을 통해서 단순히 국제 자원활동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자원활동에 대한 의식이 함양되는 정도 즉, 여느 자원활동 프로그램들과 같이 평범히 생각했었다. 그러나 난, 라온아띠를 통해서 내 일부분의 삶의 방식과 공동체 생활방식, 그리고 자아에 대한 크고 작은 변화와 성찰을 겪고 있고 한층 더 성숙해 가고 있음을 크게 느끼고 있다.내가 생각했던 라온아띠는 아니, 국제자원활동은 동남아시아의 어느 개발도상국에 가서 한국문화를 교류하고 한글, 태권도 등 학국의 전통과 그들에게는 새로울 많은 것들을 알리고, 육체노동을 하면서 5개월이라는 시간을 굉장히 바쁘게 보내느라 정신없을 줄 알았다.하지만, 아이 같은 생각은 라온아띠의 일원이 되어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만의 아주 지극히 일반적이며 평범하고도 단면적인 생각이었다. 라온아띠는 5명의 팀원 모두의 원활한 공동체 생활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고 우선시 되어야 하는 큰 과제였다. 5명 각자가 서로 다른 생각과 시각을 가지고 있고, 성격도 다를뿐더러 서로가 갖고 있는 지식, 생활방식, 태도가 다른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우리는 첫 번째로 이렇게 서로 다른 모습의 상대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훈련이 필요했다. 아직 국외활동이 1개월 하고도 보름정도가 남은 이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우리는 지금까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양보하고, 이렇게 상대방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 좀 오래 걸린 것 같다. 다수도 아닌 고작 5명의 소수인데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걸까... 생각해 보건데 아마도 생활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부딪히는 크고 작은 문제들에 관해 서로간의 진솔한 대화가 조금 부족했었기 때문이며,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급급하면서 단순히 난처한 위기의 상황을 어떻게든 빨리 벗어나려고만 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의 선배기수들도 그래왔을 것이고 우리 기수의 다른 팀들도 역시 팀원들 간의 논쟁 속에 불화는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팀 또한 그동안 많은 불화가 있었고 위기의 순간이 있었다. 다행히도 그 고비를 몇 번이나 별 탈 없이 넘겨왔지만, 나는 이렇게 그 동안의 팀원 간의 갈등, 논쟁, 불화 속에서 오히려 참 많은 것을 배웠다. 팀원 간의 위기를 하나씩 극복해가게 되면서 몇 가지 긍정적인 사고와 더불어 내 자신이 한 층 더 성숙했음을 몸소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안에서, 공동체를 배우다 상대방을 배려한다며 내 입장에서의 생각만으로 상대를 배려했었다면, 이젠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며 진정한 배려를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잘못이라는 것은 따지는 것이 아니고 진심으로 그 잘못을 감싸주어야 한다는 것. 우리는 서로가 틀린 것이 아니고 단지 다르기 때문에 그 것을 존중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 위 몇 가지 언급한 내용들은 우리가 평상시에도 공동체 생활에 대한,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한 기본 상식으로 몇 번이고 들어봤을 만한 내용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직접 생활 속에서 부딪히며 리얼하게 겪어가면서 힘든 과정과 시간을 보내며 몸소 터득하게 된 아주 값진 경험이고 교훈이었다. 생각해 보건데, 라온아띠가 아니면, 이렇게 장기간, 남녀 혼성의 공동체생활을 어디서 경험할 수 있었을까... 라온아띠는 앞으로의 내 삶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치게 된 값을 따질 수 없는 귀한 경험이었다. 이제 1개월 하고 보름 남짓 남은 시간들을 조금이라도 아쉬움이나 여운이 남지 않게, 한국에서 들고 왔던 열정을 남김없이 태우고 돌아가야겠다.
개인에세이, 박온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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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웠고 고민했고 변해갔던, 그래서 행복했던 시간들 우리는 사람들에게 자주 질문을 받곤 한다. ‘왜 라온아띠에 지원하게 됐어요?’ ‘말레이시아는 어때요?’ ‘일은 재미있어요?’ 그 광범위한 질문에 나는 어디에서부터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항상 어렵 기만 했는데 이런 자리를 빌려 단박에 말로 풀어내기 힘들었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내심 기쁘다. 그 중에서도 내가 다루고자 하는 이야기는 라온아띠에 지원했던 그 때부터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질문과 고민들에 관한 것이다. 나의 부족한 부분을 드러내는 것 같아 쑥스럽고 부끄럽지만 혹여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혹은 하게 될 누군가가 있다면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왜 라온아띠에 지원하게 됐어요? 라온아띠 프로그램에 지원한 사람들은 정말 다양한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 에게는 외국의 새로운 문화를 경험해보는 기회이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 에게는 이력서에 적어 낼 한 줄이기도 하며 또 다른 이에게는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나는 무엇을 바라고 이 곳에 왔을까. 한가지로 귀결시키기 어렵지만 난 어떤 막연한 기대감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우선 요즘 흔히들 친구들이 떠나는 영미문화권이 아닌 (정말 관심 없던, 한번도 소속감을 가져보지 못한 그 곳) 아시아에 살아보는 건 어떨까 궁금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다른 여타의 봉사활동 프로그램과는 달라 보였던 ‘아시아적 감수성을 지닌 청년 지도자를 양성한다’ ‘현지인들의 주인의식과 상호책임의식을 제고하는 참여형, 지역 밀착형 개발협력 모델을 구축한다’ 는 이 멋드러진 문구가 내 관심을 끌었다. 뭐랄까. 책으로만 배운 그래서 부족함을 느꼈던 ‘이해’ ‘연대’ ‘대안’ ‘지역’ ‘청년’ 이런 활자들이 라온아띠를 통해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움직이는 작은 힘 그런 내게 1개월간의 국내 훈련은 무엇보다 더욱 재미있고 신났던 시간이었다. 우리는 다양한 분야의 지역 공동체들을 방문하고 국제개발에 대해 강의를 듣기도 했으며 그 중 2주 동안은 지방 소도시로 내려가 그곳에 뿌리내리며 지역민들과 함께 하고 있는 조직들을 만나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이 하는 일에 참여해보았다. 세상을 조금씩 움직여나가고 변화시키는 것이 어떤 한 큰 집단이 아닌 이런 작은 힘들이 모인 결과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확인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또 우리는 국내 훈련을 하는 동안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곤 했었는데 그러면서 얻는 것이 많았다. 팀원들 중 몇몇에게는 그곳에서 배우고 확인하는 것들이 지금껏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의식이고 생소한 개념이었는데 나는 오히려 그런 점 덕분에 더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서로 다른 지역, 전공, 나이, 성별이라는 여러 요소가 겹치니 우리의 이야기는 날로 풍성해졌고 앞으로 5개월을 함께할 팀원들을 알아가는 데도 더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국내 훈련을 마치고 우리는 한 달 간의 준비기간을 가졌다. 팀원들과 수시로 회의를 하면서 활동계획을 세우고 준비물을 점검했으며 현지YMCA와 연락을 취해 부족한 부분이 없는지 확인해 나갔다. 사무국에서는 우리에게 ‘이 시간을 잘 보내야 앞으로 활동도 원활하게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당부하곤 했었는데 그 말은 현지에 와서 더욱 공감이 되는 부분이다. 준비물을 체크하는 것뿐만 아니라 팀원들간의 의사소통 문제는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 일과를 마친 여유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지, 5명이 함께 해보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등 사소한 부분까지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오는 것은 5개월을 살아가는데 정말 큰 힘이 되기 때문이다. 친구, 차이를 이해하는 법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많이 부족한 준비였는데도 우리는 뭐가 그리 기대되고 좋았는지 다들 즐거운 마음으로 이곳 말레이시아로 떠나왔다. 말레이시아의 경우 KL YMCA- Bethany Home- Penang YMCA 크게 이렇게 세 곳을 옮겨 다니며 활동하는데 그 중 첫 번째로 머물렀던 KL YMCA에서 우리는 말레이어와 수화를 익히는 등 갖가지 Introduction을 하며 한 달을 보냈다. 그 곳에서 내게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수화를 배우는 것이었는데 YMCA staff인 deaf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수다를 떨면서 자연스레 수화 실력이 늘고 그들과 점점 가까워지는 것은 정말 즐거운 경험이었다. 사실 내 수화 실력이 완벽한 의사전달을 할 만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몸짓과 표정을 십분 발휘해서 그들과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재미있고 새로웠기 때문이다. 나는 그 곳에서 친한 친구를 사귀었고 또 여러 deaf들로부터 과분한 관심과 도움을 받았다. 그 따뜻하고 행복했던 기억을 나는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 같다. KL YMCA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지고 그 곳 사람들과도 모두 친해질 무렵 우리는 Perak에 있는Bethany Home으로 활동 장소를 옮겼다. Bethany Home은 정신지체 장애 아동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시설인데 우리가 그 곳에서 하게 된 일은 노래, 춤, 미술, 과학, 요리 수업 진행과 선생님들을 보조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조금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데 처음에 나는 정신지체 아동들을 만나는 것이 불편했다. 나보다 훨씬 덩치가 큰 학생들이 달려올 때는 무언가 무서워 흠칫하기도 했고 아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더러운 손으로 나를 붙잡으려고 할 때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당황하기도 했었다. 동시에 나를 더욱 힘들게 했었던 것은 ‘이런 감정을 느껴서는 안 된다. 잘 해내야 한다’는 어떤 강박관념이었다. 다행히 이런 고민들을 팀원들과 나누고 또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내 마음도 한층 여유로워졌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과도 훨씬 가까워 질 수 있었다. 두 달 동안 내가 Bethany Home에서 얻은 것은 요리를 잘 가르치는 방법을 터득하거나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미술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곳에서 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 그래서 익숙하지 않았고 언제나 힐끔힐끔 경계의 눈초리를 던졌던 그들을 이제는 함께 했던 나의 아이들로 친구로 기억할 수 있게 되었고 차이를 이해하는 방법을 배웠다. 고민, 더 깊고 풍성한 사람으로 돌이켜보면 지난 3개월은 나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였고 매일이 새로운 배움의 시간들이었다.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말레이시아라는 공간에서 4명의 팀원들과 이곳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어울리는 일은 아마 라온아띠가 아니었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활동지인 Penang YMCA에 도착했고 이 곳에서 약 두 달간을 남겨 놓고 있는 지금 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인지 요즘 부쩍 생각이 많아진다. 지금까지 나는 잘 해왔는지 내가 한 일들이 이들에게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닌지 부터 시작해서 이들이 보기에 그저 내가 휴가를 즐기러 온 이방인처럼 보이지는 않을지, 내가 이곳에서 배우고 느낀 것들을 돌아가면 어떻게 쓸 수 있을지 등등 여러가지 고민이 드는 까닭이다.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이 고민들을 잘 풀어나가는 것이다. 쉽지 않은 고민들이지만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는 방향에서 이 고민들이 해결되기를 그리고 그것이 나를 더 깊고 풍성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를 바래본다. 이 활동을 마치고 돌아가서는 이 고민이 해결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개인에세이, 김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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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숫가의 돌덩이 사실대로 이야기 하자면, 내가 라온아띠에 지원하게 된 경위는 지극히 단순했다. 변변찮은 지방대에, 막상 졸업학년이 다가오니 취직 걱정은 되고, 그렇다고 딱히 내세울 만한 것도 없고, 그래서 뭔가 하나라도 해놔야 나중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단순한 스펙 한 줄. 그것이 필요해서였다. 나름 자기소개서에 뭔가 쓰는 것은 자신이 있었던 터라 서류를 넣었고, 결과는 좋았다. 다만 면접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딱히 목적의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꾸준히 봉사활동을 하고는 있었지만 별로 내세우고 싶지도 않았고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었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 주안을 두고 이야기 하지 못했던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 때 당시 면접 보셨던 분들이 이러한 내 속 마음을 정확히 알았던 것 같다. 3기 이후, 나름 신경도 써서 자기소개서도 다시 준비하고, 면접 준비도 다시 하였다. 주안점은 어떻게 나를 포장하고 열정적이게 보일 것인가가 중점을 두었지만. 그렇게 4기에 지원했고, 결과는 좋았다. 지금 내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처음 국내훈련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내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단순한 스펙관리, 내 개발을 위해 와 있는 거라고……. 그래서인지 처음 드림텔에서 받았던 아시아의 이해, 각종 자원 활동의 강의를 들을 때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나는 내 경력에 플러스를 주기 위해 와 있는 것이었고, 멀리 떨어진 그들보다 내 주변의, 또 내가 찾아가는 애들 또한 사정이 딱하고 절박하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나는 현실적, 또 가식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 같다. 내 나름대로는 전자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말레이시아, 작은 변화의 시작 라온아띠에 선발되기 위해서 나는 내가 뭔가 큰 뜻을 가지고 있고, 열정이 넘치는 것처럼 포장하고, 면접 때도 그렇게 얘기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선발되기 위해서 포장 했었던 것이고,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걸. 하지만 일을 못한다는 소리는 듣기 싫었기에 내게 주어진 것들은 완벽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나는 내 행동이 나쁘다고만은 생각지 않았다. 나는 내 개인의 목표를 이루고, 외부적으로 라온아띠에 이미지에 맞게 건실하고, 라온아띠가 추구하는 인재 상으로 보이기 위해 포장하고, 일에도 최선을 다 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된다면 결과적으로는 라온아띠에도 도움이 될 꺼라 생각했기 때문에. 여긴 6개월간 보내야 할 또 다른 일터다,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깔끔하게 마무리가 되면 또 다른 걸 하자는 생각이 제일 컸다. 나름대로 사회생활에는 자신이 있다고 자부했었던 바, 직장으로 생각하니 일은 더 쉬웠다. 혼자 지내는 것이 익숙했던 나에게 팀원들이랑 같이 산다는 건 스트레스였지만, 직장으로 생각하고 나니 그냥 한 귀로 흘릴 수 있었고, 누구보다 먼저 움직이고 나름 큰오빠, 형이라 하며 부지런함을 떨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드림텔 이후 2주간의 구미에서의 생활은 나에게 큰마음의 변화를 주었다. 특히 구미요한센터의 이원재 관장님에게 배웠던 것은 나에게 적잖은 충격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베풀면서 살 수 있구나, 이런 마음으로 살면 가진 것이 없어도 행복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지역NGO가 끝나고 난 후 출국까지의 기간이 너무 길었던 탓인가? 출국을 하기 위해 나머지 업무들을 인수인계하고, 처리하는 동안 나는 다시 일에 시달렸고, 다시 사무적으로, 가식적으로 사람들을 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레이시아에 도착해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할 때까지 말이다. 말레이시아에 도착해서는 라온아띠의 이름으로 왔기 때문에 피해를 주지 말자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다. 내게 주어진 일은 되도록 완벽하고, 깔끔하게 하되 사람들하고는 사무적으로 원만하게 거리를 두고 지내자. 그리고 여기 사람들도 나에게 그렇게 대해주길 바랬던 것 같다. 조용히 성과만 달성하고 돌아갈 수 있게끔. 하지만 여기서 3개월을 넘게 지내고 있는 지금, 이러한 일상에 미묘하게 변화가 생겼다. 모든 사람들을 만나본건 아니지만, 여기서 만났던 사람들은 자신보다는 주변 먼저 챙겼다. 처음에는 저렇게 살면 피곤하지 않나, 오지랖도 넓구나 하고 생각 했다. 나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내 일만 아니면 딱히 관심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점점 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면서 주변의 다른 이들이 끈끈해 지는 것을 보면서는 나도 흐뭇한 생각이 들게 됐다. KL에서의 스텝들과의 생활, 베다니 홈에서의 생활. 그리고 페낭. 특히 베다니 홈에서의 생활은 나에게 또 다른 생소함을 느꼈다. 장애 아동들을 미리 접해 본바, 애들과의 생활은 그다지 문제 되지 않았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애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애들과의 커뮤니케이션 관계에 대해서는 나름 자신이 있었다. 내가 놀랐던 것은 주변 선생님들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인식 문제였다. 베다니 홈에서만 느낀 것이 아니다. KL에서도 그렇지만 이들은 누군가를 상대할 때 가식이 아닌 진심으로 사람을 대한다. 그것이 누군가 되었던 가에 가리지 않고 말이다. 진심으로 애들,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주변 주민들과 선생님들, 스텝들을 보면서 생각이 났다. 내가 언제 관련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대해보고 걱정해 본적이 언젠가 하는 생각. 나는 너무나 사무적이고 가식적인 것에 길들어져 있었다. 만약 내가 1, 2학년 때 라온아띠에 오게 되었다면 좀 더 다른 변화가 있었을까? 내가 좀 더 열정적이고 무엇인가 하기 위해 뛰어들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의 나는 너무 이기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 버렸다. 무언가 하기에는 내 남은 20대의 시간이 너무 아까웠고, 앞으로의 나의 생활이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사람을 대하기에는 적당히 가면을 쓰고, 포장을 하고 비위를 맞춰줘야 나에게 이롭다는 것을 너무 빨리 느껴버렸다. 하지만 이러한 여기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고, 나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할 때도 충분히 행복해 질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구미에서의 이원재 관장님의 말씀이 요즘에는 또 다시 새록새록 떠오르곤 한다. “내 주변부터 사랑해라. 주변이 행복해지면 나도 행복해진다…….” 요즘 내가 가장 걱정을 느끼는 것은 이러한 나의 변화이다. 지금의 나는 소소한 것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고, 진심으로 남을 대할 때 얼마나 가까워 질수 있는지를 배웠다. 그리고 남에게는 절대 말하지 않았던 내 속만의 이야기도 애들한테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변화가 한국에 도착했을 때도 남아있을까? 솔직히 지금으로써는 아니라고 단정 지어서 말할 수 있다. 나는 알고 있다. 여기서 느꼈던 것들은 호숫가에 돌덩이를 던진 것처럼 큰 파문으로 보이겠지만, 다시 조용히,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흘러갈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또 다시 새로운 직장을 찾기 위해 전전긍긍할 것이며, 일에 파묻힐 것이다. 그에 따라 사람들도 예전처럼 적당히 맞춰주고, 속으로 욕하며, 가식적으로 대할 것이다. 적당히 나를 포장하면서 말이다. 또.. 지금의 감정을 다시 느끼도록 무언가를 계속 한다는 것은……. 현재의 나로서는 너무 버겁다. 고민과 변화의 사이에서 혼자 지내는 게 너무 익숙해져 버릴 정도로 오래 되었던 나에게 5개월이란 시간은 변하기에는 너무나 짧다. 다시 가식적이고, 현실만 바라보기에 바빠 급급해버리는 그러한 나로 돌아가고 여기서의 경험은 다 잊히지 않을까. 원래 내가 생각했던 단지 이력서에 한 줄로 남아버리지는 않을까. 지금 나의 가장 큰 고민덩어리이다. 알고는 있다. 이러한 생각들은 내가 가져가야 할 문제라는 것을, 익숙했던 것에서 떨어져 타지에서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변화를 주었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한 부분이 미묘하게 변하는 순간 그 부분은 생각보다 많은 변화를 주며 가슴속에 물들었다. 그렇지만 그 변화는 언젠가는 다시 희미해질 것이다. 알고 있다. 이것이 나에게 커다란 변화를 갖다 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렇지만 나는 이 희미해지는 변화를 다시 덧칠하고, 잡아 나갈 것이다. 조금은 달라질 수 있도록, 주변을 좀 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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