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얀마 정부의 고문 아웅산수치가 로힝야족 인종학살을 묵인하고 암묵적 동의를 했다는 이유로 국제사법재판소 피고석에 앉았다. 현재 상황과 관련된 뉴스를 다루기 전에, 미얀마 정부와 로힝야족의 관계와 미얀마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현 상황을 보다 명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관련 내용을 요약해보았습니다.
◇ 미얀마 역사
1826년에 걸친 제1차 영국-버마 전쟁
1852년의 제2차 영국-미얀마 전쟁에서 버마는 국토의 반을 잃었음
1885년의 제3차 영국-버마 전쟁으로 왕조는 멸망했고,
1886년에, 영국령인 영국령 인도에 병합 되어 그 한 주가 된다.
1936년에는 자치권을 얻어 영국령 버마로 탄생
1937년 : 버마가 인도로부터 분열되어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다.
1942년 아웅산과 일본군이 진출하면서 일본은 버마에서 영국을 내쫓고 버마 자유주라는 괴뢰정권을 수립
1942년~1945년 : 일본군 점령기. 이때 많은 미얀마인이 일본군에 학살당함.
1945년에 일본이 패망하면서 다시 영국령이 되었음.
1947년 2월 12일 : 팡롱 조약에 따라 자치 공화국으로 승격
1948년 1월 영국으로부터 독립
미얀마의 민족 (135개 민족이 존재하고 있음)
버마족 68% 샨족 9% 카렌족 7% 중국계 3% 인도계 2% 몬족 2% 기타 5%
미얀마는 전통적으로 소승불교 문화가 공공업무와 일반생활 전반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카렌족, 카친족, 친족 등과 같은 소수민족들은 기독교를 수용하기도 하며, 대체로 각기 고유 언어와 토속종교를 신봉하고 있습니다.
영국과 3차례(1824년, 1852년, 1885년) 전쟁을 치루고, 전쟁 결과 미얀마(버마)는 1886년 인도의 한 주로 편입돼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 내전원인
3차례에 걸친 영국-미얀마 전쟁의 결과, 1886년 미얀마는 영국령 인도의 한 주로 합병이 됩니다. 영국은 미얀마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분할통치 정책(divide and rule)' 시작합니다. 분할통치 정책은 피지배층의 민족 감정이나 종교∙사회∙경제적 이해관계 등을 이용하여 피지배 계층 내부의 갈등과 대립을 유발시켜 통일된 반대 세력이 나타나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의미합니다.
영국은 미얀마가 수많은 소수민족들로 이뤄진 나라라는 점을 이용하여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버마족을 탄압하고 소수민족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수립합니다. 소수민족에게 식민지 정부의 중간 지배층 역할을 맡겨 내부 갈등을 유도하고 통합된 반(反)영국 세력이 생겨나지 못하게 하는 의도로 경찰 세력 대부분을 로힝야족으로 임명하였습니다.
1885년 영국은 불교 국가인 미얀마에 이슬람교를 믿는 로힝야족을 의도적으로 이주시킵니다. 로힝야족은 원래 방글라데시 등 벵골만 인근에 살던 소수민족이었는데 영국은 미얀마인들의 토지를 수탈한 뒤 로힝야족 사람들을 적극 농사에 활용하고 이들을 중간 지배 계층으로 등용하는 등 많은 혜택을 제공하였죠. 미얀마 사람들의 입장에서 로힝야족이 자기 일자리를 빼앗은 '이교도'로 보일 수밖에 없었죠. 여기에 1942년 영국이 무장한 로힝야족을 시켜 2만5000여 명의 미얀마 사람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미얀마인과 로힝야족 간 뿌리 깊은 적대감이 싹트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핍박이 핍박을 낳다'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얀마 정부는 이슬람교를 믿는 로힝야족을 탄압하기 시작했어요. 특히 1962년 세워진 군부 정권은 로힝야족에 대한 핍박을 제도화 하였죠.
학교에선 로힝야어로 수업을 할 수 없었고, 로힝야족은 결혼이나 이사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으며 또 불교 개종(改宗) 등을 조건으로 한 시민권법을 만들어 로힝야족의 시민권을 박탈, 로힝야족을 '무국적 불법 이민자'로 규정한 것입니다 .
로힝야족의 인구 증가를 막기 위한 탄압도 이어졌어요. 로힝야족 여성은 자녀를 2명 이상 출산하지 못하고 이를 어기면 징역형에 처하는 내용의 산아제한 정책으로 인하여, 셋째를 가진 로힝야족 여성들은 비위생적인 불법 낙태 시술을 받아야만 했어요. 최근엔 여성이 한 번 출산하면 3년간 아이를 갖지 못하고 불교도와 무슬림 간 결혼도 금지하는 법이 제정 되었습니다.
핍박이 이어지자 로힝야족은 '아라칸로힝야구원군(ARSA)'이라는 무장단체를 만들어 정부에 저항하였습니다. 거듭되는 인권탄압으로 인하여 1970년대에는 약 20만명의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로 탈출하였고, 1990년대 초반에는 25만명이 미얀마를 떠났고, 2012년엔 로힝야족과 미얀마인 간 심각한 유혈 충돌이 발생해 로힝야족 200여 명이 사망하고 14만명이 미얀마를 떠나는 비상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미얀마 군은 2017년 8월 미얀마 서부 라카인주에서 종교 탄압에 반발한 로힝야족 일부가 경찰초소를 공격하자 사실상 인종학살에 가까운 토벌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수천명이 숨지고 70만명 이상이 방글라데시로 건너가게 됩니다.
현대 사회에서 로힝야 난민의 이슈는 미얀마 내부의 사안이 아니라 인권과 관련된 전세계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으나, 미얀마에서는 로힝야족에 대한 인종 청소가 끊임 없이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이에 미얀마 정부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아래 뉴스기사는 이번 유엔법정에 출두한 아웅산 수지와 관련된 기사입니다.
아웅산 수치 ‘굴욕’…국제사법재판소서 ‘피고’ 전락
‘로힝야족 학살’ 다룬 국제사법재판소 출석
미얀마 정부 대표로 학살혐의 등 변호 나서
수치, 불교도·군부 의식해 ‘인종청소’ 부인
노벨평화상 받은 민주주의·인권 상징 무너져“
아웅산 수치 미얀마 국가자문 겸 외무장관이 10일 로힝야족에 대한 미얀마 정부의 대량학살 혐의를 다루는 재판이 열린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출석해, 재판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AFP 연합뉴스
미얀마 민주주의와 인권의 상징이던 아웅산 수치가 소수민족에 대한 대량학살을 옹호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미얀마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 겸 외무장관은 10일과 11일, 로힝야족 대량학살 혐의를 받는 미얀마 정부를 변호하기 위해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ICJ) 법정에 출석했다. 15년 동안 가택연금을 당하면서도 군부에 맞서 민주주의 투쟁을 벌여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수치가, 사실상 대량학살의 피고로 전락한 셈이다. 공교롭게도 10일은 28년 전 오슬로에서 수치 고문의 장남이 노벨 평화상을 대리 수상한 날이다.
미얀마 군경은 2017년 자국 내 무슬림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을 수천명 살해했으며, 70만명 이상의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로 피난 가는 난민 사태를 야기했다. 로힝야 사태는 미얀마 정부의 실질적 한 축인 군부가 강경 대처한 결과지만, 미얀마의 다수민족인 버마족 불교도들도 로힝야족에 대한 강경 조처를 반대하지 않고 있다. 수치 역시 로힝야족 문제에서는 다수 국민의 정서에 동조하는데다, 군부와의 협조적인 관계를 의식해 미얀마 정부의 조처를 지지해왔다.
법정 출석 첫날인 10일, 수치는 옹호의 여지가 없는 학살을 방어할 것이냐는 기자들의 물음에 일절 대답을 하지 않았다. 수치는 심리 과정 내내 책상 위에 손을 얹은 채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미얀마 정부의 학살에 대한 증언이 이어지자 수치는 긴장하는 듯 보였으며, 눈을 빠르게 껌벅거리면서 때때로 재판정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과 샹들리에를 쳐다보기도 했다.
수치는 심리 이틀째인 11일엔 ‘학살’이 극단주의 세력들의 위협을 막기 위한 정당한 조처였다는 미얀마 정부의 주장을 변호했다. 그는 “일부 사례에선 미얀마군이 국제인도주의법을 무시한 채 부적절한 힘을 사용하고, 전투요원과 민간인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배제할수 없다”면서도 “그러나 이는 범죄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이뤄진 결단”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미얀마는 내부 무장 갈등에 대처하고 있는 것”이라며 로힝야족 탄압을 ‘내부 문제’로 돌린 뒤 “집단학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항변했다.
이번 재판은 이슬람협력기구(OIC) 57개 회원국의 지지를 받아 서부 아프리카의 감비아가 제소하면서 성사됐다. 감비아는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출한 진술서에서 미얀마 군부가 2016년 10월 및 2017년 8월까지 로힝야족에 대한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인종)청소 작전”을 시행했다고 고발했다.
감비아의 법무장관인 아부바카르 탐바두는 이날 법정에서 “감비아가 요구하는 것은 이런 몰상식한 살해, 우리의 집단양심에 계속 충격을 주는 이런 야만적 행위, 자국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 등을 멈추라고 미얀마에 명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량학살에 대한 최종적인 판결까지는 수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국제사법재판소 재판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를 상대로 진행된다. 따라서 엄밀히 따지면 이번 재판에서 피고는 수치가 아니라 미얀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미얀마의 지도자인 수치가 로힝야 사태를 막기 위해 그의 권력과 도덕적 권위를 사용하지 않은 것에 대한 비난이 거세다. 심지어 그는 일부 사실로 확인된 미얀마군의 ‘인종청소’ 보도와 주장을 가짜 뉴스라고 깎아내리기도 했다. 이에 국제앰네스티를 비롯해 여러 국가 및 단체가 인권 관련 수상이나 명예시민증 수여 등을 없던 일로 했다.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미얀마를 유죄로 판결해도 강제할 방법은 없다. 수치나 미얀마 군부 인사들을 체포하거나 재판에 세울 수 없다. 그러나, 유죄판결은 미얀마에 대한 제재로 이어질 수 있다. 또, 국제사법재판소와는 별도로 국제형사재판소(ICC)는 로힝야 사태에 책임이 있는 개인들에 대한 조사를 진행 중이어서 수치까지도 번질 수 있다. 지난 11월 수치는 국제사법재판소에 자신이 외무장관으로서 직접 출석해 미얀마의 혐의를 반박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기사원문 :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siapacific/92038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