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탈리즘은 서방세계에서 동양을 보는 시각을 이야기한다. 동양을 서양과 구분해 덩어리로 취급하며 일방적인 성격을 부여한다. 최근 여러 분야에서 아시아적 가치가 부각되는 것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근본적 가치가 아닌 피상적인 오리엔탈적 가치에만 관심을 갖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리엔트 중 하나인 한국에서도 동남아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에 빠져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중일은 아시아에 속하면서도 극동아시아의 범주에 속하길 원하며, 동남아시아와 구분되길 기대한다. 이러한 바람은 동남아 오리엔탈리즘을 만든다. 개발도상국, 가난한 나라, 타락한 정부 관료와 타성적인 국민, 더운 나라 특유의 게으름 등 동남아시아에 대한 편견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오리엔탈리즘은 애초에 구분 짓기를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원인보다 결과를 중요시 한다. 동티모르 역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동남아 오리엔탈리즘)을 확인할 수 있는 요소가 다분하다. 하지만 문제는 원인이 사라져버리는 것에 있다. 서구에서 오리엔탈리즘을 동양을 상대적으로 낮추거나 신비화하여 자신들의 합리성을 강조하려 했던 것에 비교해보면, 우리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리고 라온아띠는 동남아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고 있을까. 이 곳 동티모르에서는 과거 우리가 경험했었던 그리고 경험하고 있는 일을 다시금 볼 수 있다. 채 정비되지 않은 도로 시설, 학교 속의 군대 문화, 인맥, 지연이 그렇다. 또, 1999년 자치-독립 선거, 2002년 독립, 2006년 분쟁 등 치열한 21세기를 거친 마지막 독립국으로 여러 강대국의 영향력에 크게 좌지우지되고 있는 정세도 그러하다.
국가의 발전 정도는 다만 속도와 위치의 차이가 있다. 문화 역시 문화상대주의가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시대에 우열은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기준은 어디에 있을 수 있을까. 우리보다 느리면 게으른 것이라는 명제가 성립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곳에서 한국에서와 같은 속도로 일 한다면 과로로 쓰러지고 말 것이다. 친인척 공동체가 일반적인 문화에서 무조건적으로 인연과 지연을 끊어버리라고 하는 것이 가능할까. 또 부족한 학교와 교수 수에도 불구하고 민주적이고 창의적인 교육을 실시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합당한가.
대안이 없는 비판은 욕설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대안은 피상적인 모습에서 나올 수 없다. 대안이라 함은 문제의 본질, 즉 이유를 알아야만 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봉사나 자원활동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도 이러한 대안이 필요하다. 이유를 알아내고, 근본적인 대안을 찾는 것. 이것은 계몽적인 봉사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곧잘 행해지고 있는-혹 많은 선교사들이 하고 있는- 제 3세계 곳곳의 계몽적 봉사 활동 장소가 비판을 받곤 하는 근본적 이유이다.
오리엔탈리즘의 극복은 호기심과 소일거리로 갖는 관심을 버리는 것이다. 차라리 어설픈 관심으로 편견과 왜곡을 만드느니 아예 관심을 끊는 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이 시대에 서로의 관계는 끊어질 수 없으며 더욱 굵게 이어질 것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오리엔탈리즘,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동남아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애착과 관심을 갖는 것, 그것을 통해 피상적 표피를 뚫고 진정한 이해를 하는 것이다. 남은 기간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일 테다.
(이곳 동티모르에서 4개월 남짓의 시간이 나에게 주어졌다. 진정한 이해를 위해서는 결코 부족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3주간 지내면서 봉사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할 수 있었고, 여러 편견과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또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느끼며, 많은 것을 생각하기에 한국의 일상을 벗어나 멀다면 먼 티모르 섬 어딘가에 있어본다는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인 것 같다. 앞으로의 4개월의 시간이 그 너머의 긴 시간에 의미가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