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이곳에서 가장 많이 듣고 있는 말은..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보다 살이 찐 것 같다는 말이다 -_-(나름 영어권이라서 인지 이곳 사람들의 표현은 정말 직설적이다) 그래서 다들 ‘이곳 생활이 편한가 보다’, ‘음식이 정말 잘 맞나 보구나‘ 라는 말들을 한다.
생각해보면 정말 음식이 잘 맞는것 같다. 전에 인도에 갔을 때를 생각해 보더라도 그때는 음식 때문에 많이 고생했던 것 같다. 원래 워낙 카레를 좋아해서, 처음에는 맛있게만 느껴졌던 다양한 종류의 카레들이(콩카레, 녹두카레, 생선카레, 시금치카레 등) 2주일 정도가 지나자 정말 꼴도 보기 싫어졌었다. 그리고 왠만한 음식에서는 할디(카레파우더)의 맛을 느낄 수가 있어서, 인도의 모든 음식은 카레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곳, 필리핀에서는 음식 때문에 고생한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대부분의 음식들이 너무 입맛에 잘 맞아서 접시를 향해 뻗어가는 나의 손을 거두려고 노력한 적이 많다. 물론 대부분 실패했지만 말이다. 아마 그러한 것들이 지금의 이 사태를 불러일으킨 것이 분명할 것이다-_- 그런데 그것은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 였다. 그들도 요즘 건강해 졌다는 소리를 듣고는 한다.
사실 필리핀에 오기 전에는, 인도에 갔을때처럼 분명히 음식에 적응하지 못해서 살이 빠질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에 다이어트를 따로 할 필요 없어서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제는 다이어트를 걱정해야 하다니, 아이러니하다.
필리핀 음식이 그토록 나의 입맛에 잘 맞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무래도, 내가 지금 먹고 있는 음식이 필리핀 고유의 음식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한국에도 한국 음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여러 나라의 음식을 고루 섭취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주로 일상적인 생활에서 매일 먹는 것은 한식이다. 한국에서만 먹을 수 있는 반찬들과 국, 밥인 것이다. 하지만 이곳 필리핀에서 내가 지금 먹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서구식의 음식들과 중국 음식들이다. 이미 내가 익숙해져 있는 음식들이기 때문에 별다른 거부감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따따이네 집에서 밥을 먹을 때 가끔씩 약간 입맛에 맞지 않는 야채 조림 같은 것들이 필리핀 가정식이라고 나오기는 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경우 내가 이미 한국에서 자주 먹을 수 있었던 음식들이 나온다.
그리고 내가 필리핀에서 들을 수 있었던 대부분의 노래는 미국의 팝송이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나, 사람들이 가끔씩 흥얼거리거나 노래방에서 부르는 노래들 중에서 필리핀어로 된 것은 별로 없다. 필리핀어로 된 노래가 별로 없는 거냐고 물어보니 물론 있기는 하지만 그것보다는 팝송이 훨씬 좋아서 듣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했다. 그리고 필리핀 사람들이 사용하는 표현들도 대부분 영어나 다른 외국어에서 빌려온 표현들이다. 그래서 현지 언어를 공부한지 두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필리핀어로 대화를 하고 있어도 어느 정도는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대충은 알 수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대체 필리핀 고유의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고유의 것을 지키고 있는 나라가 결국에는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일본에는 일본어, 일본음악, 일본 음식, 일본 스타일 등이 존재한다. 그리고 한국도 한국어, 한국 음악, 한식, 한국만의 문화가 존재하고 있다. 요즘 발전하고 있는 중국이나 인도도 마찬가지이다. 유럽의 선진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자신의 것을 지키고 그 나라 특유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이 결국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서 있다. 그리고 이러한 나라의 문화들은 주변 다른 여러 나라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나라에 대한 자신감이 높은 편이다. (그래서 가끔은 문화의 상대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망언들을 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필리핀인들에게 한국은 미국이나 일본, 프랑스와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선진국가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요즘에는 한국 드라마들이 필리핀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케이블 방송 같은 것을 보면 거의 24시간 내내 어느 곳에선가는 한국 드라마가 방송되고 있을 정도이다. TV속에 나오는, 수도인 마닐라를 제외하고는 필리핀에서 찾아보기 힘든 고층건물들과 좋은 집들, 여러 문화 시설들을 보면서 한국에 대한 부자 나라라는 이미지는 더욱 굳어가고 있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나에게 묻고는 한다. 어떻게 하면 필리핀도 한국처럼 잘 살게 될수 있는 거냐고 말이다. 특히 1960-70년대의 필리핀의 경제 성장기를 체험한 사람들은 그 당시 한국전쟁 이후 세계 최빈국중의 하나였던 한국이 어떻게 이렇게 까지 성장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궁금해 한다.
하지만 사실 나의 전공이 경영이나 경제에 관련된 것도 아니라서, 이런 질문을 나에게 하면 거의 제대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단지 구태의연한 말들만 할 수 있었을 뿐이다. 지금은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다른 나라들이 예전에 밟아왔던 단계들 말이다. 정부에서 국내 산업을 장려하고, 보호무역을 실시해서 국내 산업을 보호하면서 무역에서 큰 이익을 남겨 그것을 다시 국내 산업을 육성하는데 재투자 한다는 식의 이야기들 말이다. 하지만 거의 정설처럼 믿어지는 그런 단계들이 당연한 발전의 단계인걸까 하는 의문이 최근에 들기 시작한다. 국가 발전의 진리처럼 믿어지는 이론을 추종한다 싶을 정도로 따라온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들어, 아니 사실은 예전 도입 초기부터 계속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단계를 밟아온 다른 나라들에서도 말이다. 하지만 다른 발전 방법이 있냐고 물어본다면 뭐라 대답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아직은 공부가 많이 필요한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필리핀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외세 침략의 역사가 길다보니, 자신의 고유의 것을 유지하기가 힘들었을 것은 분명하다. (필리핀의 외세침략 역사는 우리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스페인 330년, 미국, 일본의 지배를 연달아 받았다. Philippines라는 이름조차도 이곳의 존재를 서양에 알린 탐험가인 마젤란을 후원하였던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의 이름을 딴 ‘Felipinas( 펠리페 2세의 땅)‘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리핀은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곳인 만큼,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고 있다. 서로의 문화적 차이로 인한 분쟁이 일어나 가끔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그러한 다양한 문화는 그만큼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많다는 것으로, 남들과 차별화 되는 경쟁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귀에 딱지가 내려앉을 정도로 들어서, 새삼스럽지도 않은 ‘세계화(世界化)’라는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다. ‘화(化)'라는 말은 무엇인가가 되어 간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 것인가ㅌ? 그것이 완성되어 ’세계(世界)‘가 되었을 때, 그 세계는 과연 어떤 세계일 것인가? 그곳에서 우리는 원래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왠지 모르게 나에게 너무 익숙한 필리핀의 음식과, 음악, 언어, 문화 속에서 나는 가끔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어느 곳인지 혼란스럽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