맙소사. 물집이다. 그것도 두 개다.
오늘은 특별히 '뗌뻬'를 많이 사온 마나와 함께 밥을 짓고 싶었을 뿐인데. 한창 칼 쓰는 데 재미가 들린 나는 마나와 함께 뗌빼를 썰기 시작했다. 하나 두 개 세 개.. 썰어 가는데 살짝 검지 손가락 안 쪽이 아파왔다. 칼의 무딘 쪽과 부딪히는 부분이 빨개진 것이 보였다. ‘마나는 나보다 더 작고 여린 손으로 빠르게 썰어 가고 있는데’ 고로 나도 다시 흥겹게 뗌뻬 썰기에 몰입했다. '괜찮아! 재밌다! 재밌어!'
그렇게 썰기를 마치고, 상추를 한 장 한 장 뜯어 다듬은 뒤 씻고, 토마토까지 썰어 얹어 찬 두 가지를 만드는 데 일조한 뒤 공부방으로 돌아왔다. 책을 좀 볼까 하는데 계속 아까 그 자리가 아픈 거다. 보니까 글쎄, 물집이 하나 두울 돋아나 있다. '으악!' 갑자기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아파도 칭얼대기 좋아하는 나이지만. 이번 만큼은 넬슨 까롤리나 나노에게 말도 못했다. 사진을 살짝 찍어 남기고, 조용히 명상에 잠겼다. 그동안 얼마나 그만한 일도 안 했으면 10분 만에 물집이 잡혀 버렸을까. 오...
한국에서 난. 사실 바보였다. 요리에 관한 한, 부엌일에 관한 한 내 경험은 전무했다. 절대적으로 어머니께 의존하고, 도시의 편리에 젖어 하기 싫은 일은 제쳐뒀다. 가사는 절대 내 일이 아니라 생각하고 시도조차 안했던 거다. 그리하여 스물 셋의 어엿한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잘 하는 요리가 있기는커녕 라면 물도 못 맞추고 밥도 지을 줄 모르는 것 같다. 양평에서의 2박 3일이 나에게 그리 길었던 건, 추위와 서먹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취사'를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었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잘 보이고 싶은 팀원들 앞에서.. 식사 준비만 할라치면 꿔다놓은 보리짝마냥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게 어찌 그리 싫었던지 모른다. 그때 처음으로 '난 참 바보같이 살았군요'라고 생각했다.
동티모르에 온지 딱 두달이 된 지금에는,
흔쾌히 "오늘 설거지는 내가 하겠어"라 말할 줄 알고, 주말이 다가와 직접 요리를 해 먹게 되는 것에 기뻐하고 있다. 아침 일과가 된 빨래와 바닥 청소도 사랑한다. 내 힘으로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곳을 준비하고 단장하는 것은 단순히 '가사일을 한다'는 의미 이상의 것이었다. 내 몸을 드디어 스스로 건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른 이에게 가사 노동을 제공하면, 삶을 지탱하는 아주 원초적인 행위를 공유하는 것이고 말이다. 나눔 토론 회의로는 채울 수 없는 그 느낌.
티모르에 와서 배우는 것은 점점 늘어간다.
이지숙 jisook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