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상 무엇을 쓰려고 이렇게 펜을 아니 타자를 치다 보면 무엇을 써야 할지 막막해 질 때가 있다. 머릿속에서는 할 말들이 아우성을 치며 나오고 싶어 하지만 정작 내 손은 엉뚱한 잡담 같은 글을 길게 늘이며 망설이고 있다. 그래도 한번 뽑아보는 시도라도 해보련다. 왜 우리의 옛말 중에도 있지 않은가. 사내가 칼을 뽑으면 무라도 썰어야 한다고.
자원봉사자. 이곳 필리핀에 와서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쓰는 말이다. 한국에 있을 때 꼭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이곳에 와서 많은 일들을 하고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개뿔 나는 슈퍼맨이 아닌 것이다. 결국에 와서 내가 하는 일은 아이들을 위해서 운동장을 만드는 일이다.
여기 와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은 무엇일까? 곰곰이 돌아보면 사실 별 것 없다. 엄밀히 따져 보자면 운동장 만드는 것이야 일꾼만 고용하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나를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놈의 몸뚱이가 그런 일에는 워낙 도가 터서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것일 리는 없을 테고, 그 돈이면 전문가를 고용해서 5달 동안 파견해도 무언가 더 색다른 것이 나오리라. 그렇다면 무엇일까? 대학생이란 신분으로, 그것도 졸업할 때가 다 되어가는 이젠 정말 고학번이라 후배만 마주쳐도 계면쩍어지는, 지나가면 아저씨 소리를 들을법한 삭은 얼굴을 가진 내가 여기 와서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술도 마시면서 어울리는 것. 그것 말고는 딱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저녁마다 종종 나가 길거리를 배회하며 바람을 쐰다. 어슬렁어슬렁 내가 목적지로 하는 곳으로 걸어가 보면 이미 두어 명씩 모여 있다. 그러면 나 또한 씩 웃어주며 좋은 저녁이라느니 오늘은 좀 덥지 않느냐며 넉살좋게 한마디 던지며 슬그머니 엉덩이를 들이민다. 차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모기에게 피도 좀 헌혈하고, 멍하니 서 있다가 한 두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따갈로그어로 그들끼리 대화하는 걸 지켜보다 다시 한두 마디씩 끼어들고 다시 또 서로를 바라보기도 하고 다른 곳을 바라보기도 하며 느지막한 저녁을 보낸다. 때로는 술을 마시러 가자는 정말 매력적인 제안 앞에 줄 묶인 강아지마냥 졸졸 쫓아가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나는 이 사람들과 진정 함께하는 것일까? 무엇을 공유하고 있는 것일까?
글쎄 이러한 표현이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단지 나는 그들과 함께 있고 싶을 뿐이고, 이러한 내 모습이 어찌 보면 시간을 버리는 아까운 짓일 수도 있다. 누군가가 나를 바라본다면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것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5개월 뒤엔 또 어떠한 생각을 가지며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을지 나도 모르겠다.
지금 드는 생각은 난 아직 젊기에(외국 나와서 좋은 점 중에 하나는 24살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 나이일 것이다.) 나를 굳이 정형화할 필요도 없고, 상황에 따라 배워가는 것 또한 늘어 갈 테고, 그럴 때마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영향을 받지 않을까 한다. 지금의 이 에세이 또한 훗날 볼 때 ‘이때는 이렇게 생각했나?’ 하며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질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나는 지금 필리핀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며, 밥을 먹고, 일을 한다는 것이다. 이 안에서 더욱 무언가를 알아보려 발버둥 치고 싶다. 삶이라는 매력적인, 정말 가슴 설레게 만드는 길을 걸어가는 중인 것이다. 남은 100여일 동안 열심히 걷고 뛰며 글을 적어보련다. 그런 후에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