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ory of Team Philippines
2009, 3, 9 두번째.
혹독했던 신고식
송유림
3월 9일, 우리는 마욘화산을 보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짐을 정리하고 잠깐 들른 YMCA사무실에서 지역 문화에 대한 강의를 잠시 듣고 린뇬 힐로 향했다. 린뇬 힐은 레가스피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힐’이라고는 하지만 나에게는 ‘산’에 가까웠다. 둔하디 둔한 몸을 이끌고 올라가는 힘겨운 산행이었지만 괜스레 들떠서 깔깔대는 우리들의 모습이 좋아 전혀 고되지 않았다.
린뇬 힐의 정상에 올라 조우한 레가스피의 전경은 실로 엄청났다. 높은 곳에서 보는 풍경은 어떤 곳이든 늘 낯선 매력이 있게 마련이지만 레가스피의 모습은 그 느낌이 사뭇 달랐다. 해질 녘의 전망이 근사했음은 물론이거니와 내 새로운 생활의 범주를 확인한 느낌이랄까. 그간의 일상과 사뭇 다를 날들이 지속될 터전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매우 거룩해졌고 그 곳이 그렇게 아름다웠던 것 또한 감동스러웠다.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일부분이 별로 발달하지 않은 나는, 모든 것을 내가 체감한 느낌으로만 기억하는데 그 날 린뇬힐에 서 있었던 그 시간은 유독 선명하다. 아마도 그 멋진 모습을 감상하며 한편으로는 앞날에 대한 나름의 다짐을 거듭했기 때문일 것이다. 5개월 동안, 혹은 그보다 더 많은 날 동안 내 뇌가 이 기억을 삭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다소 무리한 바람을 가져보았다.
INITIATION
일단, initiation을 거칠게 번역하자면 ‘신고식’ 정도이다. 신고식이란 늘 그렇듯, 절대 기대하지 않은 것들을, 매우 갑작스레 하게 되는 법이다. 누구도 우리에게 첫 날 이런 걸 하게 될 것이라고 귀띔하지 않았는데 (혹은 말을 했는데 못 알아 들었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엄청나게 혹독하고도 어안이 벙벙한 신고식을 하게 되었다.
린뇬힐 하이킹을 마친 우리는 집으로 가는 대신 YMCA로 돌아갔다. 안으로 들어서니 “2009 YMCA-KB RAONATTI PROJECT” 라고 쓰여진 현수막이 정면에 걸려 있었고 의자 약 20개 정도가 같은 쪽을 향해 정렬되어 있었다. 일단 우리가 새로 왔으니 대충 '인사 정도 시키겠지'라고 생각을 하긴 했으나 그것이 우리의 환영식이라고는 짐작할 수 없었다. 어떤 예고도 없었던 데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환영의 식을 받을 만한 위치라고 생각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만을 위한 자리가 맞았고 어리둥절하며 서 있던 우리를 맨 앞에 일렬로 앉히고 나서부터 전혀 기대하지 않은 일들이 연속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알바이 지역 대학 Y멤버들이 행사를 진행하기 시작했고 린뇬힐에 같이 올랐던 친구가 그 때 흥얼댔던 한국 가요를 불렀으나 사실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외국 생활 좀 해봤다고 뻐기면서도 나는 이 날 영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해 대체 우리에 대해 뭐라고 얘기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나는 못 알아들어도 그냥 싱긋 웃는 것에 너무나 능숙해 그저 하회탈처럼 웃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사진을 본다면 표정이 계속해서 굳어가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 다음부터 진행된 순서 때문이었다. 그건 정말이지 진정한 '신고식'이었다.
진행을 하던 친구들은 준비한 것들을 쭉 보여주었다. 돌도 있었고, 물이 들어있는 유리병 같은 것도 있었는데 색깔은 탁했고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밀폐용기부터 하여튼 여러가지였다. 그러더니 자신들이 준비한 것들을 먹어야 된단다. 내가 춘천에서 태어나 걸음마를 떼면서부터 닭갈비를 먹고 자랐듯이 어느 지역이나 그 곳에서만 유독 맛있는 음식이 있게 마련이니 뭐 그런 것 중 하나겠지 싶었다. 그런데 말을 되짚어보니 언뜻 이런 말을 들은 것 같았다.
“ I hate this moment to let you do this.”
그제서야 우리 먹으라고 준비한 음식이 ‘음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우리를 보고 있던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것들을 먹어야만 했다. 그들이 처음으로 권한 것은 (사실, 권한 것도 아니다. 그건 강제였다.) 돌이었다. 정말 그냥 돌이다. 한 번 깨물고 물로 입을 헹구면 되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가 싶었다.
다음 순서는 과일이라고 해 잠시 잠깐 행복했었다. 분명 멜론이라고 했는데 앞에 아주 아름다운 수식어가 하나 붙었다. Bitter melon………..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 멜론에서 이런 맛도 났었던가. 얘들은 왜 내게 익숙한 맛을 가진 것은 권하지 않는 걸까. 피클같이 쭈글쭈글하게 썰린 그 멜론 조각이 혀에 닿는 순간, 쓴 것도 신 것도 아닌 뭐가 신비한 맛의 세계를 엿본 것 같으면서도 앞으로 난 미맹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에 먹은 것은, 그들의 말에 의하면 누군가의 침이었다. 믿기 싫었고 별로 믿기지도 않았지만 색깔이 꼭 그것인 것도 같았다. ‘이걸 어떻게 먹어..’ 라는 의문을 가질 시간이나 주면 반항이라도 했을 텐데 친절히 한 스푼 가득 떠 올려 내미는 걸 막아낼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우린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침을 꿀꺽 삼켜버렸다. 그리고 또 하나 든 절망적인 생각.
‘갈수록 태산…………..;;’
다음 것은 좀 맛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색깔도 노르스름한 게 단호박 같았는데 분명 그들은 누군가의 변이라고 얘기했다. 아마 새똥이라 했을 것이다. 뭐 이제 거기까지 갔으면 더 이상의 엽기적인 것은 나올 수가 없지 않겠는가. 앞으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 나올 것이란 기대를 하며 그 ‘변’을 먹으려고 할 때, 앞에 앉아 있던 우리 팀 멤버 강모씨가 “야, 그건 좀 먹을 만 해. 맛있어.” 라며 오지랖을 넓혔다. 똥이라고 했는데… 맛있단다. 우리의 적응 속도도 참 어지간히 빠르다 싶었다. 어쨌든 그 것은 정말 ‘먹을 만’ 했다. 그러나 ‘먹을 만 하다’는 의견에는 절대 ‘값을 지불하고 사먹고 싶다’는 뜻은 포함되지 않는다.
이제는 마지막이겠다 싶었던 네 번째. 내 생애 가장 끔찍했던 순간이었다. 현지인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무언가를 함께 해야 라뽀가 쉽게 형성된다는 인류학의 가르침을 받아온 지 어언 4년째. 그렇다면 나는 그들이 즐겨 먹기 때문에 나에게 권했을 그 음식을 꼭 먹어야만 했는데 정말.. 그 것만큼은 먹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권한 것은 소의 눈이었다. 눈알 말이다. 그 전까지는 라뽀를 형성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주는 대로 먹었는데 그 눈알을 마주한 순간 심박수가 남달라졌다. 생김새로는 그것이 ‘눈’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없었기에, 어차피 먹일꺼면서 ‘그건 소의 눈이야’라고 친절한 설명을 곁들여 준 그들이 미웠다. 어쨌든 난 그 커다란 것을 입에 넣었다. 입에 넣고 맛을 보다가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에 뱉고 물을 내린 후 뭔가를 올려 보내려는 위를 진정시켰다. 그 물질을 선뜻 씹을 수 없던 이유는 그것이 입안을 가득 메울 정도로 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런 생각을 해 본적이 있는가. ‘내 입안엔 지금 누군가의 눈알이 들어있다….’ 그래도 그것을 씹을 수 있다면 그 자에게 우리가 다음에 먹은 것을 권하고 싶다.
드디어 악명 높은 그것이 등장했다. 국내 훈련 때 아주 많이 들었던 그 음식. ‘부화가 덜 된 달걀’ 이름하여 ‘발롯’이다. 달걀이 나타난 순간, 아. 이게 나온다면 정말 마지막이구나 싶었을 정도로 그것은 위대한 먹거리였다. 계란 모양이고 맛은 맥반석 달걀 같이 부드럽고 고소하다. 그러나 그 적당히 맛 좋은 노른자 위에 있던 그 것. 껍질을 깨부수는 순간 나를 경악케 했던 그 것. 모양새를 형용할 수 없는 그 것은 아직 병아리가 되지 못한 채 죽임을 당한 꾸물꾸물한 새끼였다. 사람으로 치면 태아 정도라고나 할까. 그 부분을 보지 못했더라면 난 그냥 덤덤히 먹을 수도 있었을텐데 운 없게도 유독 나만, 껍질을 깨자마자 그 안에 있던 그 친구와 아이컨택을 해버렸다. 몇 초간 세상의 시간은 멈춘 것 같았고 그걸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어쨌든 부숴진 껍질을 이용해 꾸물꾸물한 그 것을 긁어 내리고 ‘이건 그냥 계란이야’라는 별 말도 안 되는 최면을 걸어가며 태연한 척 먹었다. 그리고 심지어 다 먹는 순간 ‘맛있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내 참, 사막에 갖다 놔도 살아 날 팔자라는 내 사주는 틀리지 않았다.
이리하여, 별 생각 없이 시작했다가 된통 당한 신고식은 충격만 안겨준 채 끝났다. 그리고 우린 바로 밖으로 호송되어 초청받은 댄스 팀과 가수의 노래를 들었다. 우리 같은 평범한 대학생일 뿐이지만 가무에 능한 필리피노답게 정말 멋지게, 또 즐거이 우리를 위해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줬다. 그러나 식이 점점 진행 될 수록 우리의 '아노미현상'은 심해졌다. 우리는 여기서 어떠한 ‘손님’이기에 이리 분에 넘치는 환영식을 받고 있는 건지, 우리는 봉사가 뭔지도 모르고 그걸 하러 온 이방인일 뿐인데, 이들은 우리에게 특별히 뭔가를 기대하는 걸까, 혹은 hospitality정신이 충만하다고 자부하는 만큼 이런 환대의 문화는 일반적인 걸까.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맘 편히 즐기기만 할 수 없었던 이유는 YMCA 앞마당에 정말 우리 다섯 명만 나란히 앉아 오롯이 우리만을 위해 춤을 추는 친구들을 보고 있자니 황송하기 이를 데 없었기 때문이다. 그 분위기는 마치 회갑연을 하는 것과 같았는데 우리를 위해 이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준비했다는 것 자체도 신기하고 그냥 그 자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너무 갑작스러웠고 어안이 벙벙했다. 보는 내내 내가 반복해서 웅얼거렸던 말이 기억난다.
"대체 우리가 뭐라고....."
생전 처음 보는 음식으로 우리를 당황하게 한 것도 관심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비록 우리는 그 날 ‘우리를 놀려 먹으려는 건가’라는 도전적인 생각을 했지만 그것은 우리를 환영하고, 좀 더 빨리 확실하게 이 곳을 소개하고 싶었고 또 우리를 받아들이려고 했던 그들 나름의 방식이었다. 난 사실, 매우 고맙다. 그리고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오늘은 그들이 우리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춤을 춰 주고 악수를 청하고 인사를 해 주었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먼저 해 주고 싶다. 뭐.. 워낙 까끌까끌한 성격이라 가능할 지는 모르겠으나 필리핀 친구들의 10%만 친절하게 해도 강산이 변한 것보다 큰 변화가 될 것이다. 난 오늘도 라온아띠가 된 나의 행운에 엄청나게 감사하고 있다.
Tip: 우리가 먹었던 음식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돌을 먹은 건 ‘자연과 가까워지기 위한 의식’이라는 뜻이 있었구요, 비터멜론은 몸에 좋아서 약용으로도 쓰인다고 하네요. 침은 진짜 침이 아니라 계란 흰자인데 그게 끈적하니까 서로한테 착착 붙는 걸 의미한다고 해서 ‘가까워진다’뭐 이런 상징이 있습니다. 발롯, 소 눈은 현지인들이 즐겨 먹는다고 해서 우리에게도 먹인 건데 어쨌든 그것도 여기서는 먹는 사람이 많진 않은 것 같습니다. 참고로 발롯은 그 모양새가 너무 심해서.. 밤에만 팝니다. 밤엔 잘 안보이니까요ㅋㅋㅋ-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