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고로 인해 다른 팀원들보다 2주 먼저 귀국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머릿속은 그저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서 내가 피곤한 줄도 내가 무엇을 먹고 싶은 줄도 모르고 그저 그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 날 화르륵 분노를 쏟아내고 집에 돌아와서는 애벌레처럼 웅크리고 잠만 잤다. 정말로 하루종일 자고, 누군가 깨우면 먹고 다시 자고, 그리고 꿈을 꿨다. 몇몇 꿈은 스리랑카에 관한 것도 있었고 가끔은 사람들간의 관계에 있던 것도 있었고, 내가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꿈도 있었고, 그리고 카메라 렌즈에 대한 것도 있었다. 빨간 바디에 은색 렌즈, 그리고 그 안의 까만 동공. 때때로 꿈속에서 깨어나면 내가 미쳐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5개월간 내가 무엇을 했을까. 아이들을 만나고 커리를 먹고 페인트칠을 하고, 오샨드랑 루시루때문에 웃다가 짜증내다가 일하기도 했었고, 사람들이랑 얘기하고 집에 오면 팀원들이랑 저녁 뭐 해먹을지 생각하고 그랬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한국에 있는 내 침대 위고 책상 위엔 5개월간 내게 날라온 우편물들이 쌓여있다.
다이어리엔 그간 써왔던 일정들이 빡빡하다. 디고롤라, 벽화, 한국어. 그리고 노트북엔 손때가 잔뜩 껴서 5개월간 무던히도 이렇게 살았구나 싶다. 손으로 커리 비벼먹다가 매워서 손가락물고 있었는데 이제는 숟가락 젓가락으로 밥 먹고, 빨래도 세탁기한테 맡겨놓고, 짧은 반바지입고 뒹굴거리다가 빨래 널면 끝이다. 집안일 다 해도 시간이 남아서 다시 침대로 들어가서 잠을 자고, 꿈을 꾸고 그리고 다시 깬다. 그리고 그 곳을 생각한다.
그 곳에서 살았기에 많이 부지런해졌다. 사람들이 말할 때 좀 더 참을성 있게 듣고, 내 의견이 세계 제일인양 내세우지 않는 법도 배웠다. 사람마다 생활방식이 다르고 습관이 다르다는 것을 이제사 이해하게 되고, 물도 좀 아껴쓰고 벌레 나오면 소리도 안 지르고 쥐 나와도 잡아죽일 수 있다.
생활의 방식에서부터 사람을 대하는 것까지, 그리고 내 성격의 본 모습을 파악하는 것까지, 20여년이 넘는 동안 못하던 것들을 5개월동안 다른 사람들과의 공생을 통해 배웠다는 게 약간 아이러니하다. 그래도 정말 내게 필요한 시간들이었다. 아직도 사람들간의 관계에서 많이 서툴고 시야도 좁고 배울 것 많지만....가끔씩 내 자신에게 화가 나고 눈물이 나고 내 안의 증오를 다스리지 못하지만. 아직도 이렇게 부족한 내 자신에게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함을,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거나 무언가를 이루기엔 너무나 부족한 내 자신을 깨닫게 되었지만 그래도 5개월의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이렇게나마 변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
라온아띠들에게 처음 부여되었던 시각들을 생각하면, 내 자신은 그 것을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귀중한 시간과 자원으로 좀 더 큰 변화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그저 내 안으로 삼키려 하는 것이 굉장히 이기적인 일인 것도 안다. 만일 다른 사람이 나 대신 갔더라면 더 많은 일들을 이루고 왔을지도 모른다. 더 큰 화합을 이끌어내고 무언가 의미 깊은 일을 하고 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에 대해서 일어나지 않은 일을 가정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지 알기에 앞으로의 시간을 좀 더 유용하게 써보려 한다.
내가 살아온 날보다 살아가야 할 날이 많다. 침대 안에서 꿈만 꾼다면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울어도 눈물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 내 자신을 추스리는 것이 참 버겁지만 고작 이 정도로 여기서 머물기엔 스리랑카의 5개월이, 그 시간이 너무 아깝다. 내 안의 변화를 지키고 이 곳에서라도 하지 못한 일들을 해야지. 아직도 내게 할 일이 참 많이 남아서, 그리고 그 의지도 살아있어서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