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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필리핀 팀 활동 보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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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4일 ~ 3월 31일까지의 활동을 필리핀 팀이 직접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혹독했던 신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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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ory of Team Philippines 2009, 3, 9 두번째. 혹독했던 신고식 송유림 3월 9일, 우리는 마욘화산을 보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짐을 정리하고 잠깐 들른 YMCA사무실에서 지역 문화에 대한 강의를 잠시 듣고 린뇬 힐로 향했다. 린뇬 힐은 레가스피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힐’이라고는 하지만 나에게는 ‘산’에 가까웠다. 둔하디 둔한 몸을 이끌고 올라가는 힘겨운 산행이었지만 괜스레 들떠서 깔깔대는 우리들의 모습이 좋아 전혀 고되지 않았다. 린뇬 힐의 정상에 올라 조우한 레가스피의 전경은 실로 엄청났다. 높은 곳에서 보는 풍경은 어떤 곳이든 늘 낯선 매력이 있게 마련이지만 레가스피의 모습은 그 느낌이 사뭇 달랐다. 해질 녘의 전망이 근사했음은 물론이거니와 내 새로운 생활의 범주를 확인한 느낌이랄까. 그간의 일상과 사뭇 다를 날들이 지속될 터전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매우 거룩해졌고 그 곳이 그렇게 아름다웠던 것 또한 감동스러웠다.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일부분이 별로 발달하지 않은 나는, 모든 것을 내가 체감한 느낌으로만 기억하는데 그 날 린뇬힐에 서 있었던 그 시간은 유독 선명하다. 아마도 그 멋진 모습을 감상하며 한편으로는 앞날에 대한 나름의 다짐을 거듭했기 때문일 것이다. 5개월 동안, 혹은 그보다 더 많은 날 동안 내 뇌가 이 기억을 삭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다소 무리한 바람을 가져보았다. INITIATION 일단, initiation을 거칠게 번역하자면 ‘신고식’ 정도이다. 신고식이란 늘 그렇듯, 절대 기대하지 않은 것들을, 매우 갑작스레 하게 되는 법이다. 누구도 우리에게 첫 날 이런 걸 하게 될 것이라고 귀띔하지 않았는데 (혹은 말을 했는데 못 알아 들었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엄청나게 혹독하고도 어안이 벙벙한 신고식을 하게 되었다. 린뇬힐 하이킹을 마친 우리는 집으로 가는 대신 YMCA로 돌아갔다. 안으로 들어서니 “2009 YMCA-KB RAONATTI PROJECT” 라고 쓰여진 현수막이 정면에 걸려 있었고 의자 약 20개 정도가 같은 쪽을 향해 정렬되어 있었다. 일단 우리가 새로 왔으니 대충 '인사 정도 시키겠지'라고 생각을 하긴 했으나 그것이 우리의 환영식이라고는 짐작할 수 없었다. 어떤 예고도 없었던 데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환영의 식을 받을 만한 위치라고 생각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만을 위한 자리가 맞았고 어리둥절하며 서 있던 우리를 맨 앞에 일렬로 앉히고 나서부터 전혀 기대하지 않은 일들이 연속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알바이 지역 대학 Y멤버들이 행사를 진행하기 시작했고 린뇬힐에 같이 올랐던 친구가 그 때 흥얼댔던 한국 가요를 불렀으나 사실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외국 생활 좀 해봤다고 뻐기면서도 나는 이 날 영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해 대체 우리에 대해 뭐라고 얘기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나는 못 알아들어도 그냥 싱긋 웃는 것에 너무나 능숙해 그저 하회탈처럼 웃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사진을 본다면 표정이 계속해서 굳어가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 다음부터 진행된 순서 때문이었다. 그건 정말이지 진정한 '신고식'이었다. 진행을 하던 친구들은 준비한 것들을 쭉 보여주었다. 돌도 있었고, 물이 들어있는 유리병 같은 것도 있었는데 색깔은 탁했고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밀폐용기부터 하여튼 여러가지였다. 그러더니 자신들이 준비한 것들을 먹어야 된단다. 내가 춘천에서 태어나 걸음마를 떼면서부터 닭갈비를 먹고 자랐듯이 어느 지역이나 그 곳에서만 유독 맛있는 음식이 있게 마련이니 뭐 그런 것 중 하나겠지 싶었다. 그런데 말을 되짚어보니 언뜻 이런 말을 들은 것 같았다. “ I hate this moment to let you do this.” 그제서야 우리 먹으라고 준비한 음식이 ‘음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우리를 보고 있던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것들을 먹어야만 했다. 그들이 처음으로 권한 것은 (사실, 권한 것도 아니다. 그건 강제였다.) 돌이었다. 정말 그냥 돌이다. 한 번 깨물고 물로 입을 헹구면 되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가 싶었다. 다음 순서는 과일이라고 해 잠시 잠깐 행복했었다. 분명 멜론이라고 했는데 앞에 아주 아름다운 수식어가 하나 붙었다. Bitter melon………..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 멜론에서 이런 맛도 났었던가. 얘들은 왜 내게 익숙한 맛을 가진 것은 권하지 않는 걸까. 피클같이 쭈글쭈글하게 썰린 그 멜론 조각이 혀에 닿는 순간, 쓴 것도 신 것도 아닌 뭐가 신비한 맛의 세계를 엿본 것 같으면서도 앞으로 난 미맹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에 먹은 것은, 그들의 말에 의하면 누군가의 침이었다. 믿기 싫었고 별로 믿기지도 않았지만 색깔이 꼭 그것인 것도 같았다. ‘이걸 어떻게 먹어..’ 라는 의문을 가질 시간이나 주면 반항이라도 했을 텐데 친절히 한 스푼 가득 떠 올려 내미는 걸 막아낼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우린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침을 꿀꺽 삼켜버렸다. 그리고 또 하나 든 절망적인 생각. ‘갈수록 태산…………..;;’ 다음 것은 좀 맛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색깔도 노르스름한 게 단호박 같았는데 분명 그들은 누군가의 변이라고 얘기했다. 아마 새똥이라 했을 것이다. 뭐 이제 거기까지 갔으면 더 이상의 엽기적인 것은 나올 수가 없지 않겠는가. 앞으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 나올 것이란 기대를 하며 그 ‘변’을 먹으려고 할 때, 앞에 앉아 있던 우리 팀 멤버 강모씨가 “야, 그건 좀 먹을 만 해. 맛있어.” 라며 오지랖을 넓혔다. 똥이라고 했는데… 맛있단다. 우리의 적응 속도도 참 어지간히 빠르다 싶었다. 어쨌든 그 것은 정말 ‘먹을 만’ 했다. 그러나 ‘먹을 만 하다’는 의견에는 절대 ‘값을 지불하고 사먹고 싶다’는 뜻은 포함되지 않는다. 이제는 마지막이겠다 싶었던 네 번째. 내 생애 가장 끔찍했던 순간이었다. 현지인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무언가를 함께 해야 라뽀가 쉽게 형성된다는 인류학의 가르침을 받아온 지 어언 4년째. 그렇다면 나는 그들이 즐겨 먹기 때문에 나에게 권했을 그 음식을 꼭 먹어야만 했는데 정말.. 그 것만큼은 먹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권한 것은 소의 눈이었다. 눈알 말이다. 그 전까지는 라뽀를 형성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주는 대로 먹었는데 그 눈알을 마주한 순간 심박수가 남달라졌다. 생김새로는 그것이 ‘눈’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없었기에, 어차피 먹일꺼면서 ‘그건 소의 눈이야’라고 친절한 설명을 곁들여 준 그들이 미웠다. 어쨌든 난 그 커다란 것을 입에 넣었다. 입에 넣고 맛을 보다가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에 뱉고 물을 내린 후 뭔가를 올려 보내려는 위를 진정시켰다. 그 물질을 선뜻 씹을 수 없던 이유는 그것이 입안을 가득 메울 정도로 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런 생각을 해 본적이 있는가. ‘내 입안엔 지금 누군가의 눈알이 들어있다….’ 그래도 그것을 씹을 수 있다면 그 자에게 우리가 다음에 먹은 것을 권하고 싶다. 드디어 악명 높은 그것이 등장했다. 국내 훈련 때 아주 많이 들었던 그 음식. ‘부화가 덜 된 달걀’ 이름하여 ‘발롯’이다. 달걀이 나타난 순간, 아. 이게 나온다면 정말 마지막이구나 싶었을 정도로 그것은 위대한 먹거리였다. 계란 모양이고 맛은 맥반석 달걀 같이 부드럽고 고소하다. 그러나 그 적당히 맛 좋은 노른자 위에 있던 그 것. 껍질을 깨부수는 순간 나를 경악케 했던 그 것. 모양새를 형용할 수 없는 그 것은 아직 병아리가 되지 못한 채 죽임을 당한 꾸물꾸물한 새끼였다. 사람으로 치면 태아 정도라고나 할까. 그 부분을 보지 못했더라면 난 그냥 덤덤히 먹을 수도 있었을텐데 운 없게도 유독 나만, 껍질을 깨자마자 그 안에 있던 그 친구와 아이컨택을 해버렸다. 몇 초간 세상의 시간은 멈춘 것 같았고 그걸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어쨌든 부숴진 껍질을 이용해 꾸물꾸물한 그 것을 긁어 내리고 ‘이건 그냥 계란이야’라는 별 말도 안 되는 최면을 걸어가며 태연한 척 먹었다. 그리고 심지어 다 먹는 순간 ‘맛있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내 참, 사막에 갖다 놔도 살아 날 팔자라는 내 사주는 틀리지 않았다. 이리하여, 별 생각 없이 시작했다가 된통 당한 신고식은 충격만 안겨준 채 끝났다. 그리고 우린 바로 밖으로 호송되어 초청받은 댄스 팀과 가수의 노래를 들었다. 우리 같은 평범한 대학생일 뿐이지만 가무에 능한 필리피노답게 정말 멋지게, 또 즐거이 우리를 위해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줬다. 그러나 식이 점점 진행 될 수록 우리의 '아노미현상'은 심해졌다. 우리는 여기서 어떠한 ‘손님’이기에 이리 분에 넘치는 환영식을 받고 있는 건지, 우리는 봉사가 뭔지도 모르고 그걸 하러 온 이방인일 뿐인데, 이들은 우리에게 특별히 뭔가를 기대하는 걸까, 혹은 hospitality정신이 충만하다고 자부하는 만큼 이런 환대의 문화는 일반적인 걸까.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맘 편히 즐기기만 할 수 없었던 이유는 YMCA 앞마당에 정말 우리 다섯 명만 나란히 앉아 오롯이 우리만을 위해 춤을 추는 친구들을 보고 있자니 황송하기 이를 데 없었기 때문이다. 그 분위기는 마치 회갑연을 하는 것과 같았는데 우리를 위해 이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준비했다는 것 자체도 신기하고 그냥 그 자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너무 갑작스러웠고 어안이 벙벙했다. 보는 내내 내가 반복해서 웅얼거렸던 말이 기억난다. "대체 우리가 뭐라고....." 생전 처음 보는 음식으로 우리를 당황하게 한 것도 관심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비록 우리는 그 날 ‘우리를 놀려 먹으려는 건가’라는 도전적인 생각을 했지만 그것은 우리를 환영하고, 좀 더 빨리 확실하게 이 곳을 소개하고 싶었고 또 우리를 받아들이려고 했던 그들 나름의 방식이었다. 난 사실, 매우 고맙다. 그리고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오늘은 그들이 우리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춤을 춰 주고 악수를 청하고 인사를 해 주었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먼저 해 주고 싶다. 뭐.. 워낙 까끌까끌한 성격이라 가능할 지는 모르겠으나 필리핀 친구들의 10%만 친절하게 해도 강산이 변한 것보다 큰 변화가 될 것이다. 난 오늘도 라온아띠가 된 나의 행운에 엄청나게 감사하고 있다. Tip: 우리가 먹었던 음식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돌을 먹은 건 ‘자연과 가까워지기 위한 의식’이라는 뜻이 있었구요, 비터멜론은 몸에 좋아서 약용으로도 쓰인다고 하네요. 침은 진짜 침이 아니라 계란 흰자인데 그게 끈적하니까 서로한테 착착 붙는 걸 의미한다고 해서 ‘가까워진다’뭐 이런 상징이 있습니다. 발롯, 소 눈은 현지인들이 즐겨 먹는다고 해서 우리에게도 먹인 건데 어쨌든 그것도 여기서는 먹는 사람이 많진 않은 것 같습니다. 참고로 발롯은 그 모양새가 너무 심해서.. 밤에만 팝니다. 밤엔 잘 안보이니까요ㅋㅋㅋ-_-^
슈퍼맨은 개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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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막상 무엇을 쓰려고 이렇게 펜을 아니 타자를 치다 보면 무엇을 써야 할지 막막해 질 때가 있다. 머릿속에서는 할 말들이 아우성을 치며 나오고 싶어 하지만 정작 내 손은 엉뚱한 잡담 같은 글을 길게 늘이며 망설이고 있다. 그래도 한번 뽑아보는 시도라도 해보련다. 왜 우리의 옛말 중에도 있지 않은가. 사내가 칼을 뽑으면 무라도 썰어야 한다고. 자원봉사자. 이곳 필리핀에 와서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쓰는 말이다. 한국에 있을 때 꼭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이곳에 와서 많은 일들을 하고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개뿔 나는 슈퍼맨이 아닌 것이다. 결국에 와서 내가 하는 일은 아이들을 위해서 운동장을 만드는 일이다. 여기 와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은 무엇일까? 곰곰이 돌아보면 사실 별 것 없다. 엄밀히 따져 보자면 운동장 만드는 것이야 일꾼만 고용하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나를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놈의 몸뚱이가 그런 일에는 워낙 도가 터서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것일 리는 없을 테고, 그 돈이면 전문가를 고용해서 5달 동안 파견해도 무언가 더 색다른 것이 나오리라. 그렇다면 무엇일까? 대학생이란 신분으로, 그것도 졸업할 때가 다 되어가는 이젠 정말 고학번이라 후배만 마주쳐도 계면쩍어지는, 지나가면 아저씨 소리를 들을법한 삭은 얼굴을 가진 내가 여기 와서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술도 마시면서 어울리는 것. 그것 말고는 딱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저녁마다 종종 나가 길거리를 배회하며 바람을 쐰다. 어슬렁어슬렁 내가 목적지로 하는 곳으로 걸어가 보면 이미 두어 명씩 모여 있다. 그러면 나 또한 씩 웃어주며 좋은 저녁이라느니 오늘은 좀 덥지 않느냐며 넉살좋게 한마디 던지며 슬그머니 엉덩이를 들이민다. 차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모기에게 피도 좀 헌혈하고, 멍하니 서 있다가 한 두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따갈로그어로 그들끼리 대화하는 걸 지켜보다 다시 한두 마디씩 끼어들고 다시 또 서로를 바라보기도 하고 다른 곳을 바라보기도 하며 느지막한 저녁을 보낸다. 때로는 술을 마시러 가자는 정말 매력적인 제안 앞에 줄 묶인 강아지마냥 졸졸 쫓아가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나는 이 사람들과 진정 함께하는 것일까? 무엇을 공유하고 있는 것일까? 글쎄 이러한 표현이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단지 나는 그들과 함께 있고 싶을 뿐이고, 이러한 내 모습이 어찌 보면 시간을 버리는 아까운 짓일 수도 있다. 누군가가 나를 바라본다면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것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5개월 뒤엔 또 어떠한 생각을 가지며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을지 나도 모르겠다. 지금 드는 생각은 난 아직 젊기에(외국 나와서 좋은 점 중에 하나는 24살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 나이일 것이다.) 나를 굳이 정형화할 필요도 없고, 상황에 따라 배워가는 것 또한 늘어 갈 테고, 그럴 때마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영향을 받지 않을까 한다. 지금의 이 에세이 또한 훗날 볼 때 ‘이때는 이렇게 생각했나?’ 하며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질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나는 지금 필리핀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며, 밥을 먹고, 일을 한다는 것이다. 이 안에서 더욱 무언가를 알아보려 발버둥 치고 싶다. 삶이라는 매력적인, 정말 가슴 설레게 만드는 길을 걸어가는 중인 것이다. 남은 100여일 동안 열심히 걷고 뛰며 글을 적어보련다. 그런 후에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The Story of Team Philipp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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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The Story of Team Philippines 2009, 3, 9 첫번째. 레가스피를 만나다. 송유림 3월 5일, 우리는 한국을 떠나 여기 필리핀에 왔다. 우리가 5개월간 머물 ‘레가스피’라는 작은 도시로 이동하기 전 마닐라에서 오리엔테이션을 하며 4박 5일을 보냈다. 우리가 머물 알바이 주(레가스피에 속해 있는 주)에 대한 정보와 활동을 하게 될 커뮤니티에 대한 전반적인 안내를 듣고, 너무나 촘촘히 짜여 있어 흠칫 놀랐던 5개월 간의 스케쥴도 보았다. 이 모든 것들을 접하고 나니 나의 신분은 단순한 관광객이 아닌 ‘일을 할 사람’이라는 것이 더욱 명징해져 갑작스런 부담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아직 커뮤니티를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인지 봉사활동이라는 것도, 그 것에 대한 걱정도 다 상상 속의 일이다. 앞으로 한 달 정도 후, 실제로 현지에 들어가게 되면 그 곳의 모든 것에 대해 뚜렷이 알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그렇게 되면 ‘volunteer’라는 생소한 나의 역할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9일 새벽 레가스피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마닐라에서의 오리엔테이션은 앞으로의 시간들에 대한 기대감과 두려움을 적절히 일깨워주었다. 봉사자이기 이전에, 평범한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편견에 사로잡힐 때마다 이 때 했던 ‘겸손한 자세로 그들의 친구가 되자’는 다짐을 생각하려 한다. 라온아띠의 어떤 친구들이 ‘본분을 잃지 말자’고 열심히 주장했던 것과 같이 말이다. MAYON VOLCANO 레가스피에 오던 날은 무척 맑았다. 해외여행 경력이 좀 있는 걸 늘상 으스대는 나는 기내에서 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하는 것 처럼 유치한 행동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가스피로 오던 비행기 안에서 그간 유지해 온 나의 그 도도한 룰은 한 번에 깨져 버렸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생전 처음 보는 ‘야자수로 만들어진 산’ 위로 날아갔다. 눈이 시릴 정도로 맑았던 날씨 덕분에 산의 전경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는 특혜를 누렸는데, 처음 보는 그 생경한 모습이 신기해 과도하게 사진 촬영을 하는 등 ‘유치한 행동’을 금할 길이 없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우리는 경이로운 자연의 빛깔에 압도되어 넋이 나가 있었다. 마닐라에서부터 함께 한 현지 스탭 틴틴은 ‘이렇게 맑은 날은 흔치 않다’며 먼 곳을 가리켰다. “See? You are lucky!” 그녀의 손가락이 닿은 곳엔 레가스피의 상징인 마욘 화산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정확히 측량한 후 갈고 깎아낸 것만 같은 대칭형 고깔모양이었다. 산의 윗 부분에 걸쳐있던 구름도 이를 신성하게 하는 데 한 몫 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몽롱한 기분에 젖어드는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었다. 담담히 카리스마를 내뿜고 있는 그 모습에 혼이 빠져 있던 나는 잠시 ‘그 산은 그냥 산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출국 전 한국에서부터 익히 들었듯 마욘은 2006년 11월 폭발해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낳은 활화산이다. 1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고 13000여가구가 거주지를 잃었다. 같은 시기에 태풍 ‘두리안’ 도 가세 해 피해를 가중시켰다. 그 후 화산재가 쌓인 곳에 불어닥친 태풍의 흔적 속에서 생존해야만 했던 이재민들을 위한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었다. 필리핀 국내외 여러 단체들의 후원과 이재민들 스스로의 노력으로 레가스피에는 현재 10개가 넘는 정착촌(Resettlement)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그 중 하나인 애니슬락(Anislag)에서 5개월간 봉사활동을 할 예정이다. 피해가 발생한지 2년이 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착은 다 되었겠지만 여전히 미완성된 부분이 많을 것이고 그것을 완벽히 가꾸어 나가는 일에 동참하는 만큼 절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마욘 화산은 분명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정확하고도, 간결하게 설명할만한 수식어를 찾아보았으나 인간의 언어는 자연을 묘사하기엔 턱없이 모자랄 뿐이라는 사실만 깨달았다. 걸맞는 형용사가 없을 정도로 경이로운 그 산이 그렇게 많은 이들을 힘들게 했던 주범이란 사실이 매우 묘했다. 게다가 또 언제 터질지 모른다니, 확실히 그 산은 그냥 산이 아니다. 위태로운 아름다움을 간직한 마욘, 그리고 그것에 둘러싸여 있는 도시 레가스피에서 우리가 보낼 5개월이 어떨지 마음껏 상상해본다. 현지인들도 보기 힘들다는 선명한 마욘화산을, 첫 날 도착하자마자 보았다는 것은 어쩌면 밝디 밝은 우리의 앞날에 대한 복선이 아닐까 싶다. 아직은 모든 것이 희망적이지만 잘 하겠다는 성급한 다짐만큼은 하지 않으려 한다. ‘해외봉사단’에 지원했으면서도 ‘봉사’보다는 ‘해외’라는 단어에 현혹되었던 나이다. 봉사정신 같은 것이 있을리 만무하고 심지어 봉사란 성스럽고 고결한 행위이기에 온 몸에 희생정신이 배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나는, 내가 ‘volunteer’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 소름끼칠 정도로 낯설고 아직은 그 이름에 대한 값을 전혀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실제로 커뮤니티에 가서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야 봉사자로서의 마음을 다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내가 한번도 해 본적 없고 할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던 ‘봉사’를 하게 된 사실이 부담스러워 봉사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를 정비하는 그 시간을 유예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젠 더 이상 미룰 여유가 없다. 나는 여기 필리핀에 왔고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봉사가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사람이 사람을 감히 ‘도와준다’고 말하는 것에 늘 반감을 가져왔던지라 난 아직 풋내기다. 이 풋내기가 어떻게 영글어가는지, 사람들은 나로 하여금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지 모든 것이 궁금하다. 열심히 하려고 한다. 마음이 탁해질때마다 눈부신 마욘화산의 정기를 받으면서 말이다.
모두 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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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가 없네 이사진에;; 암튼 우린 잘 살고 있어요 다들 건강하시죠? 건강이 최고입니다!!
에세이12. 보고 듣고 느끼는 '마이크로 크레딧' _ In 일로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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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 크레딧마이크로크레딧(microcredit) 은 우리나라 말로 무담보 소액대출을 말한다. 영세민에게 자활을 할 수 있도록 자금과 사업기회를 마련해 주기 위해 실시하는 대출사업이다. 필리핀Y에서도 진행하고 있는 이 사업은 선정된 커뮤니티에(주로 여성들을 위해, 농촌지역에) 일정한 돈을 빌려주고 사업을 진행하여 일정기가내에 원금을 돌려받는 시스템이다. 이자가 없이 원금만 돌려주는 것이므로 자활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또한 원금 반납후에 벌어들이는 커뮤니티의 수입은 다른 프로젝트로 연계하여 진행 한다.여성임파워먼트?동남아시아는 아직 여성이 일어설 자리가 없다.필리핀은 다른 나라에 비해 여성의 권위가 높은 편이지만 아직 많은 지역에서특히, 농촌에서는 남성 집안의 가장이라는 생각이 만연하다.이러한 여성의 위치 대해 필리핀 네셔널 Y의 총장인 엘씨는 ( 엘씨 역시 여성이다) 대학 시절부터 많은 관심을 가져왔고 '마이크로크레딧과 여성임파워먼트'라는 프로젝트로 사업을 시작하였다. 현재 일로코스, 아순시온, 투딩 등의 지역에서 진행 중이다.마이크로 크레딧과 여성임파워먼트 , 그 사례와 과정 - 투딩(Tuding) _벵겟(Benguet)투딩 지역은 우리가 사업에 참여 했던 곳이다.이곳은 'hog raising(양돈)' 으로 이제 막 시작한 단계에 있다.'hog raising'은 이곳의 여성들 스스로가 제안한 프로젝트로, 현재 오리엔테이션과 조직을 구성을 마치고 돼지 2마리를 구입해 공동으로 돌보고 있다.출산 후엔(3월이 출산 예정일이다) 각각 돼지를 나누어 기른다.이것을 지속하여 후에 돼지의 가공과 비빙카와 싸리싸리 스토어등의 다른프로젝트와의 연계를 목표로 삼고있다.- 딩글라스 (Dingras) _일로코스 (Ilrocos)딩글라스지역은 사업을 시작한지 8년이지나 원금을 갚고, 이익을 내고 있는 단계에 있다. 팝스(네셔널Y 스태프)의 고향이자 엘씨(네셔널Y 사무총장)가 처음으로 성공한 모범지역이라 우리는 몇일동안 머물면서 이사업에대해 더 알아 볼 수 있었다.8년전, 네셔널Y와 일로코스의Y는 연계하여 사업을 진행하기로 하고 빈곤층이 많은 아킨수요 딩글라스 지역을 선정하였다.이곳엔 해외에서 돈을 벌고 돌아오면 돈이없는 마이그런트가 많이 거주한다. 대부분이 농업(토마토와 쌀생산)을 주업으로 하고 생활비외에 아이들의 교육비에 많은 돈이 필요로 한다.이 사업에서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시기는 지역선정 이후 조사 단계이다.일로코스의 경우 이를 위해 1년동안 인근지역의 대학생과 스태프가 홈스테이를 하며 같이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커뮤티니 분들과 친해지고 어떤생각을 갖고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이해를 우선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를 찾는것이 주요 과제 이다.또한 이 기간동안 마이크로 크레딧과 여성임파워먼트에대한 세마나와 워크샵이 진행되었다.돈을 왜 모아야하는지, 돈을 왜 갚아야 하는지 - 조차 모르는 이분들에게 이것에 대한 개념의 이해는 필수였다. 이 과정에서 1년이 걸렸다는 말에 함께하는 것,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과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 시간들이 결코 쉽지않았을텐데 .다음 단계는 조직 구성과 사업의 진행이다. 조직은 프레지던트, 바이스프레지던트,회계 등으로 구성되고 커뮤니티 멤버로 가입시p.100을내고 매달 p20씩 돈을 걷어 원금을 갚아나간다. 처음멤버는 18명이였고 현재는 20명이다. 매달 첫째주 토요일에 정기적인 미팅을 갖고 문제가 생기면 회의를 통해 결정한다.일로코스 역시 'hog raising'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처음받는 p6.000으로 돼지 4마리를 사고 분양까지 이루어졌다.프로젝트 시작 후 2년동안 원금반납이 착실하게 이루어져 Y로 부터 인센티브를 지급받기도 하였으며 사업의 진행된지 3년만에 원금을 가고 이익을 창출하기 시작하였다.얻어진 수익으로 커뮤니티 멤버들에게 1%의 이자를 받고 대출을 하는 프로젝트로 이어졌다.(정부에서 빌리면 10%의 이자를 내야한다고 한다. 빌린돈은 각각의 수익증진을위한 사업에 이용한다) 빌린돈에 1%만큼 더 추가하여 갚는다.만약 정해진 기간내에 돈을 갚지 못하면 5일간의 추가 기간를 주고 , 추가기간이 지나면p.500의 벌금을 낸다.또한 , 돈을 갚지 못하면 다시는 빌리수 없다.(빌리려면 갚아야한다)p.500의 벌금이 크기때문에 실제로 돈을 갚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한다. 그 밖의 공동 사업으로 Feed store와 베이커리도 행해지고 이다.베이커리는 작년 11월 부터 시작하여 주문이 들어오면 공동으로 빵을 제조한다.정부에서도 베이커리 무료 교육을 시행하는 등의 지원이 있었다.스태프의 개입은 처음 교육과 조직구성 까지이며 기반을 잡은 후엔 여성들 스스로 커뮤니티를 운영한다. 현재 커뮤니티는 p200.000 + p53.000 (feed store)의 돈을 모은 상태이며 처음의 p.6000과 비교하였을때 많은 발전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수익으로 멤버들은 p3.000씩 돈을 받았다.어려운점과 앞으로의 방향?초기에는 사업에 대한 개념 이해도 개인차가 있어 모두의 기본적인 이해를 위해 많은시간이 걸렸다. 공동의 일외에 공적인 문서작성 등의 업무를 대표에게만 떠안기는 어려움도 있었다고 한다.돈을 빌리는 데 있어 그 사용이 사업이 아닌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용하거나, feed store에서 돈을 안내고 먹이를 빌려가는 경우가 있다고한다. 멤버간에 좀더 엄격한 운영이 필요할 것이다.어느덧 8년.이익을 창출하는 단계에 있는 그들은 커뮤니티 멤버의 확대 와 새로운 프로젝트의 진행을 꿈꾸고 있다. 하지만 그 방법 (커뮤니티를 벗어나 기업으로 사업확대등의) 을 몰라 어려움이 있다. 엘씨 역시 이에대해 공감하였고 커뮤니티에 새로운 교육과 현재의 리더들을 중심으로 다른 조직으로 더 키워 나가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프로젝트에 참여후 달라진점은?커뮤니티의 어머니들에게 '수입의 증대외에 달라진점에는 어느것이 있는지' 인터뷰를 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가장 큰 변화는 '공동체 의식의 향상' 이였다. 커뮤티의 멤버로 가입을 하고 함께 사업을 진행하고 회의를 하면서 단지 같은 공간에서 생화을 하던 시간들과는 다른, 공동체 의식이 생겼을 것으로 생각된다.다음으로는 리더쉽 (주체의식) 과 규칙의 중요성이해, 지식증대(돈에 대한 개념이해) 등이 달라진 점으로 꼽혔다.프레지던트 어머니의 경우, 어떻게 사람을 조직하고 관려하는지 배울수 있었다고 한다. 보고, 듣고 , 느낀 '마이크로 크레딧 _우먼 임파워먼트'우리의 메인 프로젝트는 '마이크로 크레딧과 우먼임파워먼트' 일단 난 영어를 싫어하고 단어자체가 생소했다. 하지만 커뮤니티에서 생활하면서 -그리고 경영학에 대한 지식은 무지 하지만 , 나의 소속은 어쨋든 경영학과이기때문에 '마이크로 크레딧'과 여기에 접목식킨 '우먼임파워 먼트'에 점점 흥미를 갖게 되었다. 투딩은 아직 시작단계라 멀리 까지 보지 못해 답답했었는데 일로코스의 사례를 직접 보고 들으니 투딩의 몇 년 후는 어떨지 기대가 된다. 이 나라에서 p6000는 결코 작은 돈이 아니다.p1(페소) 는 우리나라돈으로 약 25원 에 해당한다. 내가 아는 액수를 다 동원하자면 지프니는 p8 ,밥값은 보통 p50, 음 한달 집값이 p1000?이분들이 보통 버는 한 달 월급은 p500~1000 .이러한 돈을 기부가 아니라, 이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드리는 이유는 무엇일까?그것은 '고기를 가져다 주는것' 이 아니라 '고기를 잡는법'을 알려주기 위함이다.고기 잡는 법을 배울 기회가 없던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일회성에 끝나는 보기좋은 떡이아닌 계속해서 수익을 증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우먼 임파워먼트의 부분에 있어서전에 안산에서 트레이닝을 할때 마을만들기 운동으로 어머니들의 회의에 참여했었는데 그 수준에 감탄 했었다. 이곳 커뮤니티도 마찬가지로 여성이란 신분과 나이라는 숫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걸 느꼈다.프로젝트의 과정을 통해 주체성을 갖고 '여성이 하는일이 집안일 뿐 만 아니다.' 는걸 깨닫게 하는것, 여성을 통해 그의 남편과 아이들- 가정에서 사회로 그 생각이 전해 지길 바란다- 는 엘씨의 생각을 함께 그리며, 그것이 그리 멀지않은 미래임을 알 수 있다.
에세이 11. 바기오를떠나서_ 마닐라 4박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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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 1:00 버스로 바기오와 '안녕' 하였다.고작 5일인데 짐을 바리바리 꾸리고, 버스를 타고, 잘 가라는 꾸야의 말에 - 바기오를 영영 떠나는 것만 같다.이런 느낌이 겠구나 연습이라면 연습이겠지. 바기오와 떨어져있기.크리스마스에 새해까지 홀리데이가 꽤나 길어서 우린 점점 추워지는 바기오를 벗어나기로 했다.처음에는 감히 . 세부나 보라카이를 꿈꾸었지만 비행기는 이미 매진된지 오래 _ 버스로 이동할수 있는 곳을 찾아야 했다.한울이와 혜성이가 정보를 열심히 모아모아, 다시 짠 루트는마닐라 - 마카티 - 보니또 아일랜드.마닐라는 우리가 처음 머물렀던 곳이였지만 제대로 돌아보지 못해서 다시 가보는것도 괜찮을것 같았다.니은언니 말대로 에어콘 버스는 그 장점을 자랑하느라 주구장창 에어콘을 가동하였다에어콘을 꺼주면 안되겠냐고 물어봤지만 관리자분께서는 친절하게도"다음에는 남자친구를 데려와서 껴앉고 계세요" 라고 말해주셨다.a추위에 밤잠을 설치며 도착한 마닐라.습습하고 끈적이는 공기 .아 마닐라는 이랬지.터미널에서 내리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팁 맨 - 들이 달려든다택시를 잡아준다며 짐을 옮겨준다며 원치않는 호의를 베풀고는 돈을 달라고한다. 그 광경이 무섭기까지 했다 .처음 이곳에 발을 내딛는 사람들의 기분은 어떨지 . 기분이 찹잡해진다.우리가 처음으로 머문 숙소는 마닐라Y였다.체크인이 2시부터여서 일단 졸리비에서 아침을 먹었다마닐라의 졸리비에서 모두가 내린 평가는"바기오가 팬케잌도 훨씬 맛잇군"팬케잌 하나에도 우리는 바기오가 좋았다.처음 머물던 곳에 있으니 이런저런 생각도 나고 '그땐 그랬었는데 - '라며 시간의 흐름을 실감한다.마닐라는 중심지. 따뜻한기후와 많은 쇼핑몰이 있다.마카티는 강남 삘- 화려했다.그곳에서 사람들과 카운트 다운을 외치며 2009년을 맞이했다.이곳은 빈부의 격차가 크다는걸 재확인 했고.보니또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바다를 가진 매력적인 섬.오랜만에 벗어난 바기오였고, 여행이여서 _나중에 느낀점이지만 그 유명하고 사람많은 세부나 보라카이가 아니라서 _ 더 좋았다. (특히 나는 한참 여행에 목말라 있었기에 .)여행 내내 큰 빌딩, 버스, 평평한 도로가 어색했다.강원도탄광에서 강남으로 상경했다는 언니의 표현이 딱 맞다알고보니 . 다르다 !몇개월 전에는 어색했던 마닐라 , 바기오였지만 필리핀에서 지낸 시간동안 우리는 많이 변했다. 바기오에 있다보니 정말 '마닐라'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이건 비슷하네- 이건다르구나 하는 안목도 생기고. 한편으로는 이제는 익숙해진 따갈로그어를 간간히 사용해 주면서,마닐라를 바기오마냥 돌아다니는 우리의 모습에 '많이 컸다' 라는 생각이 든다.한 나라를 이해하는데 정해진 시간은 없겠지만 우리는 5개월동안 많이 익숙해 졌다.한국에 돌아가서도 "언니"라는 말대신 "아떼" 라는 말이 불쑥 튀어 나올것 같다.이제 마무리와 다시 바기오와 '안녕'하는 일만이 남았구나.벌써부터 필리핀이, 바기오가 그리워진다.
뉴스클리핑 10. Merry Christmas in Philipp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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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서..필리핀, 카톨릭신자가 인구의 85%이상을 차지하는 국가답게 "Jesus Christ"가 매우 중요시되는 나라이다. 난.. 카톨릭신자인데(긴 휴식기간을 갖고 있긴 하지만..)이런 내게도 꽤 어색했던 점은 처음 필리핀에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만나왔던 사람들이 빠지지 않고 물어보았던 질문! 바로 "종교가 무엇입니까?"이다. (이때, 난 대답을 하긴 하지만.. 좀 민망하다...;)어쨌든, 필리피노들에게 종교가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건 명백한 사실이다.그래서 그와 관련하여 필리핀의 크리스마스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내가 지내는 Baguio에서는 10월 중순부터 몇몇 상점이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 다른 지역도 그럴 것이라 예상한다.) 그로부터 한 달정도가 지난 11월부터는 본격적으로 대부분의 상점들과 거리가 빨간색, 초록색이 조화를 이룬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뽐냈다. Baguio YMCA역시 뒤질세라 색색의 등과 장식을 외부, 내부 모두 달았다. 가는 곳곳마다 캐롤이 흘러나왔고, 사람들은 내게 필리핀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를 마음껏 즐기기를 바란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나도 그 분위기에 녹아 한국에 있는 지인들과 라온아띠들을 생각하며 미리 카드를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내용이 필리핀의 크리스마스 모습이었다. 그 이유인 즉슨 우리나라의 크리스마스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기 때문에 알리고 싶었던 것. :D 한국인인 내가 한국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 이틀이 전부였다. 그리고 가족들과 보내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대부분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상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매년 24,25일에는 명동거리가 연인들로 북적거리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하지만, 필리핀은 아주 긴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낸다. 보통 이브인 24일부터 쉬기 시작해 그 다음해 Happy New Year 시즌까지 주~욱 쉰다. 놀랍지 않은가? 여담이지만, 거의 2주를 크리스마스 연휴로 보내니 난 너무 오래동안 쉰다는 생각에 불안하기도 했다. 하하 ;;그리고 대부분의 필리핀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를 가족들과 함께 보낸다. 모두들 고향으로 돌아가 일가친척들이 다 함께 모여서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고 즐거운 시간을 만끽하는 것이다.우리팀원들의 영어선생님, YMCA식구들, 유치원 선생님들 그리고 Bua마을 어머니들도 모두 가족들과 함께 할 생각에 들떠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고 '가족과 함께 하는 크리스마스.. 참 따뜻하겠다'라고 생각했다. +뉴스 클리핑크리스마스와 관련된 다채로운 행사들이 곳곳에서 열렸는데, 그것들에 대한 기사가 뉴스에 실려 공유하고자 한다.1.YEARLY CANTATA바기오 대학교 학생들이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뮤지컬 타블로를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성직자들과 교구민들 그리고 지역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된 이 공연은 2009년 새해를 기념하는 대 성당 축하식때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2.CULTURAL CHRISTMAS TREATKapangan마을의 연장자가 오늘날에는 보기 힘든 고대 크리스마스 시즌 의식을 대중들에게 선보였다. 이 의식은 "Chu-om 만들기"로서 수확시기에만 행해졌다고 한다.3.RE-ENACTMENT크리스마스 이브에 바기오 대성당에서 자정미사가 진행되었는데, 청년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재현함으로써 미사에 의미를 더했다.
[에세이] 아순시온, 그 열 여덟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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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rth & South 그저께 있었던 YMCA 보드 멤버 미팅에서, 이번에 새롭게 보드 멤버에 당선된 부자 아저씨 한 분이 우리 셋에게 말을 걸어왔다. 대뜸 자기는 North Korea 와 South Korea 를 구별하는 방법을 안다고 했다. 어떻게 하냐 그랬더니 North는 못 먹어서 빼빼 마른 사람이고 South는 잘 먹어서 살이 통통하게 오른 사람이란다. 그러면서 자기의 농담에 반했는지 으하하 웃어 제끼시는데 우린 순간 굳어버렸다. 솔직히 한국의 분단된 현실에 대한 농담, 처음은 아니다. 그렇지만 들을 때마다 상처가 된다. 아마도 저 부자 아저씨는 우리 덩치를 보고 자신의 구별법에 더 확신을 얻은 것 같았다. 그러 길래 이런 험한 꼴 당하기 전에 진작에 다이어트를 했어야 했는데 젠장. 한국에 있을 땐 분단된 현실이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분단이 되어있지만, 선 하나만 제외하고는 여전히 우린 붙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언젠가 통일이 될 거고 지금은 잠시 집안 사정으로 각방 쓴 정도라 생각했으니 북한을 다른 나라라고 생각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 곳의 사람들은 KOREA 라고 말을 하면 당연스레 North or South를 묻는다. 처음엔 너무 당황스러웠다. 마치 우리 집안의 비밀을 들킨 것 같은 기분 -당연히 모두 아는 사실일텐데 왜 그동안 나는 다른 나라 사람들은 모를 거라 생각했을까- 나의 편협한 사고가또 한번 발견되었다. 나는 우리가 남/북한으로 나뉜 사실을 우리와 일본, 중국, 그리고 미국만 알거라고 생각했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저 무식이 죄라는 말밖에는.... 그래서 필리핀 사람들이 이웃집 사정 물어보듯 아무렇지 않게 North or South? 할 때마다, ‘뭐야, 우리 나뉜 거 알고 있었어?’, ‘그냥 korea 라니까 왜 굳이 남, 북을 물어. 알아서 뭐 할껀데.’ 기분이 괜시리 나빠졌다 슬퍼졌다 우울해졌다 하다가 결국 잔뜩 비뚤어진 마음을 담아 “South.” 라고 대답하고 만다. 한국이 왜 분단이 되었을까. 그 원인배경과 과정을 우리보고 말하라고 한다면 고등학교 때 근현대사 시간에 배웠던 교과서적인 이유들을 일어난 순서대로 줄줄 읊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여전히 하나도 모르겠다.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되었는지,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우리가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는건지. 어렷을 때 여름 휴가로 아빠랑 엄마랑-지아는 태어나기 전이니까 아마 내가 일곱살 때 쯤- 광주에서 통일 전망대까지 뽈뽈뽈 차를 몰고 간적이 있다. (아! 생각났다. 그때 지아는 엄마 뱃속에 있었는데 그리고 나서 한달 후에 지아가 태어났다) 아빠는 내가 “우리 어디로 놀러가?” 라는 말에 항상 “ 아빠도 몰라. 바퀴 굴러 가는데로 갈꺼야.” 하시며 웃으셨는데 그때는 정말로 만삭이 된 엄마를 데리고 예고도 없이 바퀴가 굴러갈 수 있는 데까지 가버린 것이다. 푸른 동해바다를 옆에 끼고 달리고 달려서 강릉을 찍고 양양, 속초, 뭐 이런 지명의 곳들을 지났던 것 같다. 그리고 하루 걸려 도착한 통일 전망대에서 망원경으로 불과 몇 안 떨어진 거리에 있는 북한도 보았다. 그리고 한 강당 같은 곳에서 북한과 관련된 영상을 보았는데 사람들이 영상이 끝나자 다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을 부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난 그때 의심스러웠다. 정말? 정말로 우리의 소원이 통일이야? 북한도 그걸 원하긴 한대? 나의 미운 일곱 살 스러운 질문에 엄마는 웃으시며 북한도 통일을 정말로 원한다고, 그렇지만 여러 상황 때문에 잠시 통일을 못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후로 커가면서 북한도 남한도 소원은 통일이라는 것은 알게 되었다. 하지만 정치적 · 군사적으로 보여지는 북한의 모습은 우리의 염원과 점점 멀어져가는 모습 뿐이었다. 잘해주면 튕기고, 못해주면 그대로 등 돌려버리는 북한을 보며 원망도 했고 미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밤새 앞으로 말 한마디도 안 할거라고 중얼거려봤자 자고 나서 아침이 밝으면 금새 마음 풀려버리고 애틋해지는 가족처럼, 딱 그 마음이다. 어제의 뭉쳐진 원망도 오늘이 되면 귤 알갱이 부서지듯 와르르 무너지고 마는, 차마 한낱 글자로는 표현 못 할 형용할 수 없는 우리네의 마음이,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도, 느끼지도, 이해는 더더욱 못할 필리핀 사람의 한낱 시시껄렁한 농담 따먹기에 함부로 사용되어지는 것이 불쾌하다. 항상 KOREA! KOREA! 하던 사람들이 북한 얘기가 나오면 눈을 가늘게 뜨며 슬슬 무시하기 시작하는 데, 그들은 아마도 North를, 그리고 한국의 분단된 현실은 자기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우리보다 잘살면 뭐해 분단되었잖아’ 하는 그들의 표정을 접할때의 심정은 뭐라 말할 수 없다. 무슬림한테 맨날 테러당하는 주제에 누가 누구를 동정한단 말이냐아!!!!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오지만 이미 속상해진 마음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다. 인종 차별도 아니었고, 경제 차별도 아니었다. 단지 분단되었다는, 그 이유 뿐이었다. 이제는 필리핀 사람들이 김정일을 얘기하면서 욕을 하면 그것마저도 기분이 나쁘다. 대치 되어있다고 해서 내가 응, 맞아 맞아! 하면서 맞장구라도 쳐줄줄 알았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흥!! 스페인에게서 식민지를 해방시켜 준 게 미국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영웅 대하듯 하는 자존심 없는 필리핀 보단 북한이 백배 천배 더 나아!!! 눈치 없이 우리 앞에서 끊임없이 나불 나불대는 필리핀 사람들도, 그리고 잔뜩 심사가 꼬여버린 나도 구제불능들 같다. 엉엉. 필리핀 사람들, 아니 중국,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블라블라블라- 기타 모든 나라들에게 우리의 진가를 보여주기 위해 반드시 통일을 이루고 말겠어!! 이미 본래의 인도주의적 의의는 잃어버린 나의 수틀린 이성위에 순간 어느 평화적인, 그리고 너무나도 낭만적인 한 소녀의 이야기가 바람을 타고 내려 앉았다. “ 백석, 정지용, 박태원, 이용학, 김기림 ···· 이 문학가들은 모두 월북하거나 납북되어졌대.고등학교 때 문학시간에 되게 좋아했던 작가들인데... 특히 백석 시인의 ‘여우난 곬족’ 을 좋아했어. 그런데 백석 시인의 시에는 평안도 사투리가 많이 쓰여서 문학 평론가들이 해석하는데 애를 많이 먹는다는 거야. 그리고 정지용 시인은 ···· ” 그래. 나도 고등학교 때 백석 시인 참 좋아했어. 당나귀도 좋아서 ‘응앙응앙’ 울 거라는 표현에 홀딱 반해버렸던 기억이 나. 세상에 ‘응앙응앙’ 이라니. 정말로 조그만 당나귀가 흰 눈밭에서 좋아서 폴짝폴짝 뛸 것만 같잖아. 오죽했으면 필리핀 올 때 영어 이름을 ‘나타샤’ 라고 하려고도 했으니까. 결국은 한낱 열매 이름인 체리가 되어버렸지만. 그리고 교과서 밑에 나온 백석 시인의 조그마한 프로필 사진에도 그대로 뻐렁쳐 버렸어. 인물이 장난 없더라구. 역시, 평양 YMCA 차기 사무총장님은 다르구나.지혜는 원창수 팀장님이 평양 YMCA 사무총장님이 되어서 실세를 잡으시면 팀장님의 오른팔이 되었다가 언젠가 은퇴하시면, 자기가 실권을 잡고 평양 YMCA 사무총장 자리를 꿰차겠다고 했었다. 얼마 전엔 신의주 YMCA 사무총장을 하고 싶다고 해서 도대체 북한 사람들의 일자리를 다 빼앗을 참이냐고 면박을 줬지만 쨌든, 그 이후로 나는 그녀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언젠가 나는 꼭 북한을 위해 일을 하고 있을거야- 라고 항상 입버릇처럼 얘기하던 너의 가치 있는 원대한 포부들이 반드시 현실로 이루어지기를. 분단이 되어있는 북한을 위해, 그리고 하나가 될 한국을 위해, 혹은 이미 하나가 된 이후의 한국을 위해. 언젠가 반짝반짝 빛날 평양 YMCA 사무총장님이 있어서 마음이 참 든든하다. “ 나는 지금 우리에게 어떠한 군사적, 정치적 대립이 있다 해도 불안하지 않아.” 그녀는 말을 이었다. “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우리가 떨어져있는 시간들은...” 음, 그러니까 고조선,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다 합쳐서, “ 5000년 역사 중의 극히 일부분이니까. 먼 미래의 사람들이 한국의 역사를 쓸 땐 지금의 이 시간이 너무나 짧고 순간적이어서 어쩌면 자칫 잊고 빼먹어버릴지도 모를 정도로.”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슬프기도 하지만 또 영광스럽기도 해. “ 우리는 결국 하나가 될꺼야. 언제나 그랬듯이.” 그래. 나도 언젠가 언젠가 다시 떠날 여름 휴가에서는 아빠는 부릉부릉 운전하고 나는 뒷 자리에서 편히 한숨 푸욱 깊게 자고 일어나면 바퀴가 멈춰져있는 마지막 장소가 강릉, 속초, 양양을 훨씬 더 지나 멀리 멀리 나진시의 어느 쯤 이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런 날이 꼭 올거라고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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