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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모르를 떠난지 한 달 후,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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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즘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답니다. 한국에 온지 이틀, 삼일째에는 5개월간 떠나있던 한국에 언제 다시 적응하나 싶었는데, 이젠 아이러니하게 내가 언제 당신과 5개월을 지냈나라는 생각이 드는거에요. 5개월간의 생활이 마치 한 달 전에 꾼 꿈처럼 문득 아련하게 떠오르는 정도의 기억에 불과하달까요. 그 동안 많은 것이 변했지만 지금 제 느낌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공간에 틈새를 내서 그 찰나에 다른 장소에 들렸다 다시 돌아온 것만 같아요. 제게 티모르에 갔었다는 것을 유일하게 느끼게 해주는 경로는 친구들이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물었을 때에요. 그 때는 타인의 이야기를 하듯 스토리를 술술 말하곤 하죠. 하지만 그걸 제외하고 5달x30일x24시간 같이 살던 친구들 없이 집에서 혼자 밥을 먹고, 커피 볶는 소리 대신 자판기의 둔탁한 소리를 듣고, 씻으면서 언제 전기가 나갈지 몰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한국의 생활에 티모르에서 생활을 하긴 한 건지 의문이 들 정도로 너무 자연스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전 이 곳에서의 부적응을 숨기기 위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걸까요, 아니면 점점 그 곳을 잊고 지내려는 준비작업을 하는 걸까요. 평생 5개월을 잊지 않겠다 다짐했던 나는 어디로 가고 현실과 타협해버린 간사한 제 자신만 여기에 있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아마 전 제 자신이 라온아띠에 스스로 지원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지 몰라요. 요즘 들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가 저를 사로잡아 티모르에서 남겨온 흔적 하나하나, 끄나풀이라도 잡고 싶단 생각이 부쩍 드네요. 이런 시시콜콜한 고민 역시 티모르가 제게 남긴 흔적이라면 좋을 정도로요.당신의 빈자리가 그리워요.. sao miguel 학교에서
Maubere의 티모르 음악 이야기 > 2. 티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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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rai Timor Hau hadomi tebes o 오~ 티모르여. 난 정말 사랑하네 husi o ami hotu moris 너로 인해 우리는 모두 살아가고 tan deit o ami hotu terus 너로 인해 우리 모두 고통스럽다 husu ba o atu hakmatek iha o nia fatin 너의 자리에서 편히 쉬길 원해라 keta tanis keta halerik beibeik 절대 울지 마라, 절대 항상 불평하지 말자. maibe nonok deit ba 그러나 그저 조용히 가자. o hau nia doben diak 오~ 나의 사랑아 o hau nia murak rai 오~ 나의 좋은 땅아 nai habadak ami terus nee 신이여 우리의 이 고통을 줄여주오 keta husik ami moris hamutuk iha nakukun laran 절대 어두운 속에서 함께 사는 우리의 삶을 포기하지 말아달라 hadok ami husi susar nebee atu haketak ami 우리를 갈라놓는 어려움으로부터 우리를 떨어뜨려달라 tasi mane sei siak hakilar 남쪽은 분노해 외칠 것이다 rai lakan mos sei tarutu 천둥 번개가 칠 것이다 temi o nia naran ba beibeik 항상 너의 이름을 부르리 Timor loro sae 동 티모르 =========처음 동티모르에 갔을 때, 가장 인상깊게 들려온 노래이다.구슬프고 비장하게 시작하는 이 노래, 동티모르에서는 꽤 유명한 노래이다.처음 이 곡을 듣고 너무 느낌이 좋아, 계속 친구들에게 연주를 해달라고 해서 배운 노래이다.재밌는 표현으로는 loro sae 가 있다.티모르 섬의 동쪽 부분만 우리가 흔히 지칭하는 동티모르라는 나라이기 때문에,티모르 섬의 서쪽부분과 구분하기위해, 동티모르라 부른다. 그들의 정식 국명인 Timor-Leste 에서 Leste란 포르투갈 어로 동쪽이란 뜻이다.loro 는 "해" sae는 "뜨다,오르다" 의 뜻으로써 loro sae란 해가 뜨는 곳, 즉 동쪽을 가리키는 테튬어의 표현이다.또한 남쪽으로 번역한 tasi mane의 단어 각각의 뜻은 tasi "바다", mane "남자" 란 뜻이다.하지만 tasi mane(남자 바다)란 뜻은 "남쪽"을 가리키고, tasi feto(여자 바다)란 "북쪽"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러한 유래에 관해서는 두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남쪽 바다가 북쪽 바다보다 거칠고 무섭기 때문에 남자 바다가 남쪽이라 불린다는 의견이고, 또 하나는 남쪽(남쪽바다) 지역의 사람들이 인도네시아에 맞서 게릴라로 대항했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남쪽의 사람들이 더 거칠다는 뜻에서 남자바다가 남쪽을 뜻한다고 한다. 그들의 삶에 대한 평온을 기원하는 가사가 구슬픈 곡조에 잘 어울렸다.
Maubere의 티모르 음악 이야기 > 1.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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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os nain (농부) Sai husi uma dadeersan nakukun 어두운 아침일찍 집을 나서 cafe manas copu ida hamanas netik kabun 따뜻한 커피 한잔이 배를 따스히 하는구나 ai farina baluk ida iha kohe laran 아이파리나(열대지방식물) 한 조각이 야자잎으로 만든 가방 속에 있다 hodi kaer netik kabun ba loron manas 뜨거운 날에도 배를 안고프게 한다 to'o loron kraik fila ba uma 오후에 집으로 돌아 간다 oan doben sira estuda ba halo diak 자식과 부인은 열심히 공부한다. ba loron ikus ita nian 너의(우리의) 마지막 날을 위하여. ba sa inan aman serivisu kolen 엄마 아빠의 일이 고되기 때문에 fila liman makas ba ita oan 열심히 일을 한다, 자식을 위하여. =====위 노래는 싱쿠스틱 이라는 티모르 가수의 노래이다.커피와 농업으로 대변되는 동티모르의 느낌을 잘 표현한 것 같다.이들의 가사를 다시 한번 음미해본다면, 고단한 하루하루의 느낌이 올 것이다^^
티모르에서는 무슨 말이 들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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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모르에서는 무슨 말이 들릴까? 동티모르의 언어는 테튬어이기는 하나, 쉽게 정의하기 어렵다. 수도인 딜리에서는 대부분이 테튬어를 구사하고,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테튬어는 문법이 복잡하지 않아 쉽게 배울 수 있는 언어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 표기법 등에 대한 정리가 완벽히 되지 않아, 다양하게 표기되기도 한다. 영어-테튬, 테튬-영어 사전은 현지에서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국어로써의 테튬어의 정리 및 보급이 미흡하여 지방에서는 다양한 지방언어가 사용되고 있고, 테튬어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곳도 많다. 테튬어의 정리 미흡과 함께 왕래가 힘든 동티모르의 산악 지형과 험한 도로, 열악한 정기공급과 대중매체(TV,라디오)의 보급 부족 등이 모두 테튬어가 공식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널리 보급되지 못하는데 기여한다. 거리의 인도네시아어들은 티모르의 아픈 역사의 흔적들을 보여준다. 거리 곳곳엔 인도네시아어로 된 문구들이 많고, 상점에서 가격은 인도네시아어로 불린다. 또한 종종 현지인들은 내가 외국인임을 알면 인도네시아 언어로 말을 걸기도 한다. (그럼 난 뿌듯한 표정으로 테튬어 할 줄 알아요~ 라고 살며시 말한다.) 거리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택시․버스에서 나오는 음악은 인도네시아 음악인 경우가 많다. 또한 대학교 교재는 대부분 인도네시아어로 되어있다. 교수들의 수업은 테튬어도 쓰고, 인도네시아어도 쓰고, 섞어 쓰기도 한다고 한다. 교수 대부분이 인도네시아에서 유학했을 뿐만 아니라 공부를 할 책이 대부분 인도네시아어기 때문에 대학에서의 인도네시아어 사용은 불가피하다. 자 이번엔 포르투갈어다. 초등학교에서는 포르투갈 숫자 세는 것을 배우고, 실생활 속에 쓰기도 한다. 또한 국가에서 교사들을 포르투갈 언어 연수를 보내고, 포르투갈어 수업을 하게 한다. 게다가 놀라운 것은 그들의 인사말인 본디아(아침인사), 보따르디(점심인사), 보노히티(저녁인사)가 모두 포르투갈어라는 사실이다. (가끔 영화에서 포르투갈계 언어를 쓰면, 자주 듣던 단어가 들리곤 한다. 테튬어로 생각했던 단어들이 포르투갈 어인 경우가 종종 있다.) 포르투갈 어는 현재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다. 과거의 포르투갈 식민시절부터 사회 고위층들이 포르투갈어를 사용했기에, 현재까지도 사회 지도층의 경우는 포르투갈어를 할 줄 안다. 그렇기에 공용어로 지정되었고, 공문서 등도 포르투갈어로 작성된다고 한다. 게다가 놀라운 것은 국가國歌에 해당하는 노래가 포르투갈어로 되어 있다! 하지만 포르투갈과 동티모르의 관계는 비록 식민지로 맺어진 관계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한국과 일본 같은 관계는 아닌 것 같다. 동티모르 현지 사람들은 포르투갈에 대한 반감이 신기할 정도로 적다. 동티모르와 포르투갈의 관계는 나중에 다시 다루어야겠다. 그 외 소수언어로는 싱숑어와 안녕하세요어를 들 수 있다. 싱숑어는 딜리를 포함한 동티모르 곳곳에서 오히려 테튬어보다 보급이 더 잘 된 언어이다. 딜리에는 화교 상점이 매우 많기 때문에 중국어를 쉽게 들을 수 있다. 또한 중국의 액션 영화를 본 사람들이 라온아띠가 트럭을 타고 지나가면, “씽쑝~ @#$%@#”라며 외치며 웃고들 한다. 혹은 “찌나(중국인)~”라고 외치기도 한다. 이는 현재 화교들이 티모르 상권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하고, 과거 중국인들이 매춘업에 종사하기도 했기에 중국인에 대한 약간의 반감과 놀림, 그리고 그저 재미 등등이 복합적으로 ‘싱숑어’의 보급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안녕하세요어는 최근 들어 급히 퍼지고 있는 소수 언어로, 한국어 강좌를 수강하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다. 이는 최근 고용허가제 양해각서를 체결한 한국과 동티모르 정부가 한국어 강좌를 개설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우리 숙소인 UNDIL 대학교와 한국어 강좌 건물이 바로 옆이기 때문에, 타이밍을 잘못 맞추면 안녕하세요 어 사용자들과 대거 마주칠 경우가 있다. 안녕하세요어를 사용해야할지, 테튬어를 사용해야할지, 난감한 순간이다.
마우베레(Maubere)의 티모르 역사 느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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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이미 한국으로 돌아와 티모르 감이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5개월이 지난 시점에서야, 그들의 삶과 사고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동안의 각각의 티모르에 관한 나의 궁금증들이 엉키고 섥혀 복잡한 한 덩어리로 남아있다. 그들의 무엇에 대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두렵기만 하다가, 먼저 그들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현재 그들의 삶은 이 시대 어느 땅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지난 역사들의 뒤엉킴으로 인한 결과일 것이다. 자, 이제 티모르의 역사를 가볍게 한번 훑어보자. (내용은 국방부에서 편찬한 ‘한국군 동티모르 파병과 띠모르레스떼 탄생’ 책을 거의 옮겨왔음을 밝혀둔다^^) 기원> 기원전 4만년부터 2만년 사이에 폴리네시아 인들이 티모르로 들어와 정착했다. 그 때 정착한 원주민이 아또니(Atony)족이다. 그 후 멜라네시아 계통의 인종과 원시 말레이계 인종이 티모르로 진출했다. 그들이 테툰(Tetun)쪽의 주류를 이루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포르투갈의 지배> 7세기 이후부터 중국과 티모르 간에는 부정기적으로 노예 ․ 야생 밀납 ․ 백단목 등의 거래를 위한 무역이 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많은 유럽인들이 동양에 호기심을 갖고 진출하던 1500년대 초, 동양에 진출했던 포르투갈 상인과 선교사들이 향교무역과 선교를 위해 인도네시아와 티모르에 상륙했다. 이들은 주로 향료의 원료가 되는 백단목 무역에 종사했다. 그리고는 1524년, 티모르 섬을 식민지로 삼았다. 하지만 섬 전체를 조직적으로 지배하지는 않았다. 포르투갈은 티모르를 지배하기 위한 개발이나 지배체제 구축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백단목 획득 등 단기적인 이익 착취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식민체제는 대체적으로 불안정했다. 1598년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상륙한 네덜란드는 1824년 인도네시아 전역을 식민지화하고, 포르투갈의 거점인 티모르섬으로 진출을 시작했다. 이에 1849년 포르투갈은 티모르섬을 동서로 양분해 서티모르를 네덜란드에 양도하기로 합의했다. 이러한 국경 조약은 1915년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그 때 서티모르에 포함되어 있던 오이쿠시 지역은 포르투갈이 계속 지배하기로 합의했다. 왜냐하면 오이쿠시 지역은 포르투갈의 최초 거점이자 서티모르 다수족인 아또니 족과 구별되는 테툰 쪽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주민 폭동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1910년 경 대규모 폭동이 18개월간 지속되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연합작전을 펼쳤고, 이때부터 티모르에서는 저항의 역사와 함께 영웅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일본의 점령>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1942. 2. 20 일본군이 티모르 섬의 쿠팡과 딜리에 상륙했다. 딜리(동티모르의 수도)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군과 연합해 저항하는 동티모르 게릴라들을 제압하지 못했다. 1945년 일본군은 철수했고, 잔학한 통치로 주민 4~6만명이 희생되었다. 포르투갈 재진주> 포르투갈은 일본의 항복 직후, 조속히 식민체제를 복원함으로써 큰 저항없이 동티모르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서티모르를 장악한 인도네시아가 반 포르투갈 세력을 공공연히 지원했다. 인도네시아의 개입으로 1959년 반 포르투갈 폭동이 발생했다. 포르투갈은 통제를 더욱 강화하고, 친 인도네시아 활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는 포르투갈의 식민지배에 대한 부당성을 외교활동으로 국제 사회에 제기했고, 당시 탈식민지화 바람과 함께 국제사회의 설득력을 얻었다. 이 뒷부분이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 국내의 정치상황이 복잡하게 연관을 맺고 있어서 내용이 너무 길었고, 미쳐 노트에 적어오지 못하는 바람에..^^ 가볍게 정리를 해봐야겠다,,ㅠㅠ 1975년 동티모르에서 포르투갈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9일 뒤에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27번 째 주로 강제합병하고 탄압을 시작했다. 이렇게 인도네시아 식민지 시기가 시작된다. 인도네시아 점령기간 중 동티모르에서의 인권탄압을 세계에 널리 알리며 독립에 큰 계기가 된 사건이 바로 ‘산타크루즈 학살사건’이다. 이 산타크루즈 학살 사건을 계기로 세계의 관심을 받으며 독립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 후 2002년 5월 20일, 신생독립국 티모르레스떼 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lic of Timor-Leste)가 탄생하게 된다. 1975년 이후에 인도네시아의 강제 점령기를 살펴보면, 냉혹한 세계 정세 속의 티모르를 볼 수 있다. 일부에서는 인도네시아의 군사 행동을 미국이 눈 감아 줬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이 시기의 역사를 좀 더 자세히 다루고 싶으나, 능력 밖의 일이기에..^^; 국방부에서 편찬한 “한국군 동티모르 파병과 띠모르레스떼 탄생”의 역사부분에 잘 나와있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 아, Maubere의 역사이야기에 Maubere에 대한 설명이 빠졌다. ‘마우베레’ 혹은 ‘모베레’로 읽히며, 티모르의 일반 대중을 뜻한다. “한국군 동티모르 파병과 띠모르레스떼 탄생”에서는 Maubere가 ‘가난하고 힘없는 동티모르 민중’을 뜻하는 말이라고 설명이 되어있다. Maubere라는 표현은 동티모르 현지 노래에 많이 등장하는데, 독립․혁명과 관련된 역사적이고 대중적인 표현이다. 그들의 저항의 역사 속에서 묻어나온 Maubere란 표현. 동티모르의 친구들이 나에게 고맙게도 Maubere라는 영광스럽고 역사적인 이름을 붙여주었다. 나에게 Maubere란 이름이 붙고 나니, 그들의 역사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세계 어느 곳의 역사가 다 그러하겠지만, 침략과 저항의 역사가 우리네 역사인 듯이 쓰라리게 다가왔다.
[Photo 24] 두번째 포토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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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_5] 드림씨의 마지막 에세이 - 내생에 가장 큰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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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생에 가장 큰 선물 태국에 와서 코코넛의 맛을 알게 되었다. 참고로 이곳에서는 코코넛 하나에 한화 500원 정도다. 마을을 떠나기 전, 짐을 싸다 말고는 동네아이들을 불러 아이들과 마지막 동네 투어를 결심했다.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집집마다 동네 분들께 인사도 할 겸 말이다. 그러다 내가 아끼는 동생 '암'이라는 녀석의 집에 들릴 기회가 생겼다. 집 구경도 하고, 가족사진 구경하고, 물도 마시고, 이것 저것 이야기도 나누고 그렇게 잠시 잠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인사를 하고 다른 집으로 향하기 위해 발걸음을 돌리는 순간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다름아닌 코코넛 나무였다. “우와! 암! 너희 집에 코코넛 나무가 있구나~ 부러워! 저거 먹을 수 있니?” 라고 ‘암’이에게 물었다. “먹지 않는다. 먹을 수없다” 라고 대답했다. “왜? 한국에는 코코넛 나무를 보기 힘들어, 그리고 코코넛은 비싸서 먹기 힘들어.” 라고 했더니 “따는 것이 힘들다.” 라고 말한다. “아, 그렇구나. 그래 내일 보자” 하며 인사를 하고서 발걸음을 돌리려던 차에 “기다려요” 하고 ‘암’이 말한다. 아이들끼리 수근수근 하더니 나보고 기다리라고 한다. 그리고선 ‘암’이 코코넛 나무 위에 오르기 시작한다. “지금 뭐해?” 라고 옆에 있는 녀석에게 물어보니 “p 수진, 첩 코코넛.” [수진누나는 코코넛을 좋아한다. ] 라고 대답한다. “난 괜찮아! 내려와” 라고 말해도 한사코 사양하는 녀석. 주변에 있는 아이들이 “누나에게 줄 선물.”이라고 말했다. 나무에 올라갔다, 긴~장대로 툭툭 건드려 보기도 했다가. 장대를 던지기도 했다. 키 작은 12살 소년의 코코넛 나무와 벌였던 40분간의 실랑이 덕분이었을까.마침내 코코넛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순간 “우와, 깽막! [최고다!] ” 함께 있던 아이들 모두가 환호를 지른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딱딱한 코코넛을 깨어야만 했다. 녀석이 어디선가 커다란 칼을 가져와서는 코코넛을 내리치기 시작한다. 소년이 하기에 결코 쉽지 않아 보였다. 내가 한다고 했지만 한사코 그 녀석이 사양했다. 그렇게 20분이 또 지났다. 코코넛이 산산조각이 날 무렵이었다. “다되었다.” 라고 하더니 칼로 한번 툭 치자 코코넛이 깨지고 코코넛의 하얀 속살이 들어났다. 함께하던 아이들 모두가 환호했고, 그녀석은 마지막 선물이라면서, 코코넛을 내게 권한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내게 있어 무척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 작은 코코넛 하나로 함께하던 모든 이들이 행복할 수 있었다. 사람과 사람의 교감에 있어서, 말없이 보여준 그 녀석의 노력은세상 그 어느 선물보다도 내게 소중한 선물이었고,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만큼 감사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그 사랑 잊지 않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잘 지내요. 나중에 꼭 다시 만나요 =) 지난 5개월간 5회 차의 에세이를 쓰면서 그 상황과 그 순간에 대한 나의 기억을 되짚어 본다. 라온아띠가 라온아띠 됨에 있어 내 목적은 - + × ÷ 이었다.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더하고, 사랑에 사랑을 곱하고 그리고 그 사랑을 나누기 위함이 나의 목적이었다. 그랬기에 5개월간의 긴시간을 타국에서 보내기로 결심할 수있었다. 하지만 지난 5개월을 되짚어 보면 그 목표달성에 있어서는 잘 모르겠다. 사랑을 나누기는커녕 비교도 안될 만큼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아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너무 고마워서 울어버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고, 사랑하고 행복해서 울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이별의 아픔에 울었던 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 난 성장할 수있었다. 지난 20년간 내 삶에 있어 그 여느 때 보다 행복했던 5개월이었고 날마다가 배움이었고, 감사함이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이말밖에는 내 마음을 표현할 수있는 단어가 어디있을까요. 지난 5개월간 감사했습니다. 태국이라는 타국에서 저는 너무 많은 관심과 배려를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그리고 안녕히 계세요.
에세이12. 보고 듣고 느끼는 '마이크로 크레딧' _ In 일로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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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 크레딧마이크로크레딧(microcredit) 은 우리나라 말로 무담보 소액대출을 말한다. 영세민에게 자활을 할 수 있도록 자금과 사업기회를 마련해 주기 위해 실시하는 대출사업이다. 필리핀Y에서도 진행하고 있는 이 사업은 선정된 커뮤니티에(주로 여성들을 위해, 농촌지역에) 일정한 돈을 빌려주고 사업을 진행하여 일정기가내에 원금을 돌려받는 시스템이다. 이자가 없이 원금만 돌려주는 것이므로 자활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또한 원금 반납후에 벌어들이는 커뮤니티의 수입은 다른 프로젝트로 연계하여 진행 한다.여성임파워먼트?동남아시아는 아직 여성이 일어설 자리가 없다.필리핀은 다른 나라에 비해 여성의 권위가 높은 편이지만 아직 많은 지역에서특히, 농촌에서는 남성 집안의 가장이라는 생각이 만연하다.이러한 여성의 위치 대해 필리핀 네셔널 Y의 총장인 엘씨는 ( 엘씨 역시 여성이다) 대학 시절부터 많은 관심을 가져왔고 '마이크로크레딧과 여성임파워먼트'라는 프로젝트로 사업을 시작하였다. 현재 일로코스, 아순시온, 투딩 등의 지역에서 진행 중이다.마이크로 크레딧과 여성임파워먼트 , 그 사례와 과정 - 투딩(Tuding) _벵겟(Benguet)투딩 지역은 우리가 사업에 참여 했던 곳이다.이곳은 'hog raising(양돈)' 으로 이제 막 시작한 단계에 있다.'hog raising'은 이곳의 여성들 스스로가 제안한 프로젝트로, 현재 오리엔테이션과 조직을 구성을 마치고 돼지 2마리를 구입해 공동으로 돌보고 있다.출산 후엔(3월이 출산 예정일이다) 각각 돼지를 나누어 기른다.이것을 지속하여 후에 돼지의 가공과 비빙카와 싸리싸리 스토어등의 다른프로젝트와의 연계를 목표로 삼고있다.- 딩글라스 (Dingras) _일로코스 (Ilrocos)딩글라스지역은 사업을 시작한지 8년이지나 원금을 갚고, 이익을 내고 있는 단계에 있다. 팝스(네셔널Y 스태프)의 고향이자 엘씨(네셔널Y 사무총장)가 처음으로 성공한 모범지역이라 우리는 몇일동안 머물면서 이사업에대해 더 알아 볼 수 있었다.8년전, 네셔널Y와 일로코스의Y는 연계하여 사업을 진행하기로 하고 빈곤층이 많은 아킨수요 딩글라스 지역을 선정하였다.이곳엔 해외에서 돈을 벌고 돌아오면 돈이없는 마이그런트가 많이 거주한다. 대부분이 농업(토마토와 쌀생산)을 주업으로 하고 생활비외에 아이들의 교육비에 많은 돈이 필요로 한다.이 사업에서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시기는 지역선정 이후 조사 단계이다.일로코스의 경우 이를 위해 1년동안 인근지역의 대학생과 스태프가 홈스테이를 하며 같이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커뮤티니 분들과 친해지고 어떤생각을 갖고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이해를 우선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를 찾는것이 주요 과제 이다.또한 이 기간동안 마이크로 크레딧과 여성임파워먼트에대한 세마나와 워크샵이 진행되었다.돈을 왜 모아야하는지, 돈을 왜 갚아야 하는지 - 조차 모르는 이분들에게 이것에 대한 개념의 이해는 필수였다. 이 과정에서 1년이 걸렸다는 말에 함께하는 것,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과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 시간들이 결코 쉽지않았을텐데 .다음 단계는 조직 구성과 사업의 진행이다. 조직은 프레지던트, 바이스프레지던트,회계 등으로 구성되고 커뮤니티 멤버로 가입시p.100을내고 매달 p20씩 돈을 걷어 원금을 갚아나간다. 처음멤버는 18명이였고 현재는 20명이다. 매달 첫째주 토요일에 정기적인 미팅을 갖고 문제가 생기면 회의를 통해 결정한다.일로코스 역시 'hog raising'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처음받는 p6.000으로 돼지 4마리를 사고 분양까지 이루어졌다.프로젝트 시작 후 2년동안 원금반납이 착실하게 이루어져 Y로 부터 인센티브를 지급받기도 하였으며 사업의 진행된지 3년만에 원금을 가고 이익을 창출하기 시작하였다.얻어진 수익으로 커뮤니티 멤버들에게 1%의 이자를 받고 대출을 하는 프로젝트로 이어졌다.(정부에서 빌리면 10%의 이자를 내야한다고 한다. 빌린돈은 각각의 수익증진을위한 사업에 이용한다) 빌린돈에 1%만큼 더 추가하여 갚는다.만약 정해진 기간내에 돈을 갚지 못하면 5일간의 추가 기간를 주고 , 추가기간이 지나면p.500의 벌금을 낸다.또한 , 돈을 갚지 못하면 다시는 빌리수 없다.(빌리려면 갚아야한다)p.500의 벌금이 크기때문에 실제로 돈을 갚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한다. 그 밖의 공동 사업으로 Feed store와 베이커리도 행해지고 이다.베이커리는 작년 11월 부터 시작하여 주문이 들어오면 공동으로 빵을 제조한다.정부에서도 베이커리 무료 교육을 시행하는 등의 지원이 있었다.스태프의 개입은 처음 교육과 조직구성 까지이며 기반을 잡은 후엔 여성들 스스로 커뮤니티를 운영한다. 현재 커뮤니티는 p200.000 + p53.000 (feed store)의 돈을 모은 상태이며 처음의 p.6000과 비교하였을때 많은 발전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수익으로 멤버들은 p3.000씩 돈을 받았다.어려운점과 앞으로의 방향?초기에는 사업에 대한 개념 이해도 개인차가 있어 모두의 기본적인 이해를 위해 많은시간이 걸렸다. 공동의 일외에 공적인 문서작성 등의 업무를 대표에게만 떠안기는 어려움도 있었다고 한다.돈을 빌리는 데 있어 그 사용이 사업이 아닌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용하거나, feed store에서 돈을 안내고 먹이를 빌려가는 경우가 있다고한다. 멤버간에 좀더 엄격한 운영이 필요할 것이다.어느덧 8년.이익을 창출하는 단계에 있는 그들은 커뮤니티 멤버의 확대 와 새로운 프로젝트의 진행을 꿈꾸고 있다. 하지만 그 방법 (커뮤니티를 벗어나 기업으로 사업확대등의) 을 몰라 어려움이 있다. 엘씨 역시 이에대해 공감하였고 커뮤니티에 새로운 교육과 현재의 리더들을 중심으로 다른 조직으로 더 키워 나가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프로젝트에 참여후 달라진점은?커뮤니티의 어머니들에게 '수입의 증대외에 달라진점에는 어느것이 있는지' 인터뷰를 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가장 큰 변화는 '공동체 의식의 향상' 이였다. 커뮤티의 멤버로 가입을 하고 함께 사업을 진행하고 회의를 하면서 단지 같은 공간에서 생화을 하던 시간들과는 다른, 공동체 의식이 생겼을 것으로 생각된다.다음으로는 리더쉽 (주체의식) 과 규칙의 중요성이해, 지식증대(돈에 대한 개념이해) 등이 달라진 점으로 꼽혔다.프레지던트 어머니의 경우, 어떻게 사람을 조직하고 관려하는지 배울수 있었다고 한다. 보고, 듣고 , 느낀 '마이크로 크레딧 _우먼 임파워먼트'우리의 메인 프로젝트는 '마이크로 크레딧과 우먼임파워먼트' 일단 난 영어를 싫어하고 단어자체가 생소했다. 하지만 커뮤니티에서 생활하면서 -그리고 경영학에 대한 지식은 무지 하지만 , 나의 소속은 어쨋든 경영학과이기때문에 '마이크로 크레딧'과 여기에 접목식킨 '우먼임파워 먼트'에 점점 흥미를 갖게 되었다. 투딩은 아직 시작단계라 멀리 까지 보지 못해 답답했었는데 일로코스의 사례를 직접 보고 들으니 투딩의 몇 년 후는 어떨지 기대가 된다. 이 나라에서 p6000는 결코 작은 돈이 아니다.p1(페소) 는 우리나라돈으로 약 25원 에 해당한다. 내가 아는 액수를 다 동원하자면 지프니는 p8 ,밥값은 보통 p50, 음 한달 집값이 p1000?이분들이 보통 버는 한 달 월급은 p500~1000 .이러한 돈을 기부가 아니라, 이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드리는 이유는 무엇일까?그것은 '고기를 가져다 주는것' 이 아니라 '고기를 잡는법'을 알려주기 위함이다.고기 잡는 법을 배울 기회가 없던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일회성에 끝나는 보기좋은 떡이아닌 계속해서 수익을 증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우먼 임파워먼트의 부분에 있어서전에 안산에서 트레이닝을 할때 마을만들기 운동으로 어머니들의 회의에 참여했었는데 그 수준에 감탄 했었다. 이곳 커뮤니티도 마찬가지로 여성이란 신분과 나이라는 숫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걸 느꼈다.프로젝트의 과정을 통해 주체성을 갖고 '여성이 하는일이 집안일 뿐 만 아니다.' 는걸 깨닫게 하는것, 여성을 통해 그의 남편과 아이들- 가정에서 사회로 그 생각이 전해 지길 바란다- 는 엘씨의 생각을 함께 그리며, 그것이 그리 멀지않은 미래임을 알 수 있다.
아이들에게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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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을 통해 나를 다듬는 기회 ) 3달간의 치앙마이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람푼 라오빠꺼이 학교에서 11월 3일 처음 들어왔다. 처음 학교에 도착해서 우리를 환영해 주는 환영식을 보며 나는 " 이 아이들과 어떤 귀한 관계를 만들 수 있을까, 서로에게 사랑의 기억, 추억으로 남을 수 있을까 " 라는 생각이 들면서 " 이 아이들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 라는 걱정도 한편으로 들었다.# 언어의 소통 라오빠꺼이 초등학교에 있으면서 아이들이 나에게 태국어로 관심을 가지며 말을 걸어온다. 아이들은 열심히 말을 하는데 나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몇 번이고 다시 물어봐 이야기를 한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나에게 (또는 우리에게) 쉽게 쉽게 천천히 이야기 해주었다. 내 눈을 바라보며 내가 하는 이야기 잘 들어주고 기다려 주면서 잘 한다고 칭찬해주는 아이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아이들과 나 (우리).우리의 모국어는 다르지만 서로의 다름을 이해해 가며 소통을 할 수 있었다. # 활짝 웃기.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웃는 법을 배운다. 억지로 인위적으로 웃으면서 마음이 불편한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그래서 마음까지 즐겁게 웃는 방법을 배운다. 나도 이렇게 밝게 해맑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 라는 사실을 아이들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다. # 컴퓨터하기 보다 더 즐거운 아이들 집 방문하기. 학교를 가지 않는 주말에는 아이들의 집에 놀러가거나 껨남 (저수지)에 가서 낚시를 하고 아이들과 함께 저수지 근처를 자전거 타며 돌아다닌다. 매주 주말이면 밖에 나가기보다는 집에 앉아 컴퓨터만 하던 나였는데 이렇게 주말에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산책하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동네에 사는 아이들 집에 가보기가 재밌는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알게 되었다.나는 그동안 물질 문명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던지 한시라도 내 곁에 티비, 컴퓨터가 없으면 불안해 하고 외로워했는데.. 한국에 가서도 라오빠꺼이에서 주말에 생활했던 것 처럼 자연과 함께 하며 사람들과 함께 하며 지내봐야 겠다.그리고 땡볕에 아이들의 집을 찾아가다가 덥고 지치면 잠시 길에 벌러덩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며 쉬기도 하였다. 하늘을 바라보며 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다가 지치면 잠시 쉬어도 될잖아. 그동안 나는 왜 그렇게 무엇을 하며 바쁘게 살았을까?취업, 대학입시, 사람과의 관계에서 경쟁적, 전투적으로 살았던 것은 아닌가. "쉬어가기도 하자. # 지금은 사랑할 시간. 라오빠꺼이 학교에서 치앙마이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으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꽈~악 나에게 안겨 내가 숨 막힐 때가 더 좋은 거 같다는 생각.아이들이 마음껏 사랑을 표현하고, 우리도 아이들에게 마음껏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우리가 있는 이곳에서의 시간. 사랑하기도 바쁘구나...------------------------------------------------------------------------ 내가 외국인이라서아이들이 배려를 해주는 것도 많을 수 있지만 라오빠꺼이에 있으면서 아이들에게 배운점이 많다.내가 이곳에서 느끼고 배운 것을 단순히 내 생각에만 머물며 지낼 것이 아니라 내 삶에 적용시켜야 봐야 겠다. 자, 지금은 끝이 아니고 또 다른 시작이구나. 내 삶에서 잘 적용시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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