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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4월 동티모르 팀 활동 보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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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6일 ~ 4월 25일까지의 활동을 동티모르 팀이 직접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파일 업로드 용량 제한 때문에 파일을 분할해서 올렸으며 확인하시는 방법은 -> 폴더 한개를 새로 만드신 후 2개의 첨부된 파일을 그곳에 다운받으셔서 알집(alz)파일의 압축을 풀면 2개의 파일이 합쳐지면서 새로 만들어진 파일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배움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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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 티모르 레스테(Timor Leste)에서 느낀 '배움'에 대한 짧은 생각들을 정리해보았습니다.# Culture Shock 동북아시아의 한 나라, 한국에서 보낸 이십여 년의 시간은 동남아시아로 먼 바다를 건너 동티모르에서 생활한다는데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가난의 자발적 체험이라는 타이틀로 지내게 될 5개월의 기간은 결코 이 문화를 체험한다거나 이해한다거나 쉽게 내 뱉을 수 있는 시간이 아니게 될 수 있다. 글 쓰는 자신의 주관적인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한 편만을 부각해서 의도적으로 편집하거나 글을 쓸 수도 있는 점이, 이 에세이를 쓰면서 가장 크게 염려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 곳에서 생활하면서 체험하고 느낀 것들을 차근차근 담아보고, 그 문화척 역사적 차이를 나름의 시각으로 전달하고픈 것이 내가 이 에세이를 남기는 가장 큰 목적임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한편으로는 나의 이러한 고민과 고찰이 앞으로 아시아를 다가가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객관적으로 쓰려는 노력을 할 것이지만 다분히 주관적인 내용이 들어갈 수 있음을 그리고 감상적으로 빠져들기도 하는 것을 이해해주셨으면 한다. # 소모초에서 얻은 것 이미 이 곳에서 보낸 시간이 한 달을 지나 두 달째에 접어들었다. 가끔씩 내가 바른길로 가고 있는가? 에 대한 질문을 던지곤 하는데 그 때마다 나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다. 현지에 온지 한 달이 채 안되었을 때, 이 곳 티모르 레스테(이하 동티모르)의 동부의 한 지역인 로스팔로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 NGO 지구촌나눔운동 사업단의 소모초 마을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동티모르의 최 동쪽 로스팔로스 지역의 2005년 당시 최빈마을이었던 소모초 마을은 2007-2008 2년간의 지역자치 활동을 도와 라온아띠 동티모르 팀이 방문할 당시에는 자치활동이 마을주민들을 중심으로 이루어 지고 있었다.) 소모초 마을은 지난 2년간 지구촌나눔운동 사업단의 지원과 주민들의 직접적인 참여로 운영되는 행복기금운동으로 자치기금을 조성하여 마을 성당 보수공사를 진행하였다. 마을에 수도를 설치하고, 마을 공동 우물을 만들어 2Km떨어진 이웃마을에서 물을 길어오는 수고를 덜었다. 이 곳에서 나는 현지에서의 활동이 변화(You cause ‘change’ whether it has positive effect or negative effect)를 이끌어 내고, 그 변화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발전의 밑바탕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문화권 혹은 생활권이 다른 곳에서 의견의 차이를 좁힌다는 것이 쉽지는 않는 것이 당연하고, 마찰을 빗고 오해를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현지에서 활동했던 이창덕 간사님도 어느 순간 마찰의 벽을 맞고, 회의를 느낀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과의 첫 번째 장벽이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들이 발전하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 즉, 변화중의 하나라고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았다고 했다. # 짧은 단상 흔히 실패 혹은 잘못이라 평가되는 활동들이 현지사람들에게 그리고 봉사자들에게 하나의 변화가 된다는 것을 염두 한다면, 그 것이 옳든 그르든 발전의 밑거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앞으로 남은 4개월, 동티모르에서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는 가늠조차 할 수 없지만, 한 가지 희망을 얻은 것은 좋든 나쁘든 나는 그리고 우리는 이 곳에 와서 현지의 이들과 살아가고 있고 숨쉬고 있고 또 이야기를 만들어 갈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들 곁에서 변화를 만들어 가고 있고, 이들은 좋게 보이든 나쁘게 보이든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Culture Shock: The Difference stage #1 배움에 대한 열의 # prolog 배움이라는 것 라온아띠 2기 국내 훈련 중, 들었던 강의 중의 하나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느 지역의 지역공동체를 도울 수 있는 길을 찾던 한 사람에게, 선진 교육을 필요로 했다고, 그래서 그 사람은 지역에 학교를 짓는 일로 남은 일생을 투자했다는 이야기. 정확한 이야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교육에 대한 현지인들의 욕구는 그들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막연했었던 것들이 그 테두리를 보여준 것 같았고, 실지로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나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 시작 우리 라온아띠 동티모르 팀은 현지 활동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오전에 현지 언어인 테툼 수업 그리고 딜리 지역YMCA 사업 중 하나인 테라산타 YMCA 커뮤니티 센터를 방문했다. 오전에 현지언어를 배우고, 오후에 센터에서 운영하는 컴퓨터 수업과 도서관 운영을 견학하면서 현지 적응을 해왔다. 처음에는 센터의 아이들과 그리고 청년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관심사를 찾지 못했고, 짧았던 현지의 언어가 그들과 좀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친분을 만들어주는데 벽이 되곤 했다. (물론 대부분의 아이들과 친분을 쌓는데 언어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이들과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도서관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 도서관이 테라산타의 아이들에게 의미하는 것 테라산타 지역의 아이들에게 YMCA 센터의 도서관은 그야말로 환상의 공간이다. 출판산업이 부실한 이 곳 티모르 레스테에서 책을 구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대부분의 책은 인도네시아에서 건너온 책이라 현지 어인 테툼어로 되어있는 책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심지어 국민 과반수의 종교가 카톨릭인 이 곳의 성경책 조차 인도네시아어를 알지 못하면 볼 수가 없다), 책장에 나열된 색색의 책들이 아이들의 눈에 비칠 때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닐 수가 없다. # 그들 앞에 책 읽어주는 외국인이 등장했다. 도서관이 운영된지 얼마 되지 않은 때, 우리는 테라산타를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딱히 맡은 일도 없었기에 도서관은 현지 언어에 익숙지 않은 우리들에게도 훌륭한 테툼어 교육장소가 되었다. 자연스레 아이들과 어울려 책을 읽어주고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테라산타의 청년들과 말을 트기 시작한 계기는, 현지언어를 지지리도 못하는 외국인이 영어를 조금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내게서 (물론 영어도 못했지만, 단지 외국인이라는 특별한 상황이 그들에게 현지인보다는 나을 거라는 기대를 주지 않았나 싶다) 영어를 배우고 싶어했고, 나는 테툼어를 배워야 했다. 우리는 서로 아구가 맞았다. # ZILOO 처음 질루를 보았을 때 그는 몇몇 청년등과 YMCA 센터 앞에서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 5시부터 6시까지 영어교육을 해주시는 수녀님이 늦으셨나 보다. 집에서 한 시간 반 가량을 걸어와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종이조각 하나와 잘 써지지 않는 펜을 들고 수업준비를 한 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현지언어인 테툼어가 서툴렀을 때 만났던 그는 여느 티모르 친구와 다르게 먼저 다가와서 테툼어를 가르쳐주면서 말을 트게 되었다. YMCA 영어교실을 보조하고 있고, 아이들과 청년들의 영어교육에 적지 않은 열성을 가진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로 기억된다. 얼마 전에 한국YMCA를 방문하셨던 어깨춤 임의진님이 해주셨던 말이 생각난다.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복잡한 언어는 오히려 벽을 쌓아갈 뿐인 거라고, 정말 단순한 말이야 말로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라고. 그와 나는 서투르지만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목표가 있었던 친구 남달리 영어를 유창하게 했던 한 친구가 있었다. 멀리서 유심히 나를 지켜보다가 다가왔던 그 친구는 외지에서 온 NGO단체에 대해 어느 정도의 불신이 있어 보였다. 아마도 첫 만남에서 그가 꺼낸 말이 언제 떠나느냐는 것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대화하는 내내 신경이 쓰였던 친구였다. 단 반나절이 이 친구와 만나 이야기한 시간이었고 그 후로 보지 못했는데, 이름을 잊어버린 것이 아쉽다. 테라산타에서 공부한 6개여 월의 기간 동안 익힌 영어실력으로 현재 호주NGO에서 일하는 친구는, 다른 여느 티모르의 청년들과 다를 것이 없는 일이 없어 방황하던 친구였다. 영어를 배우고 일을 할 수 있다는 목표가 생겼을 때, 그는 하루 종일 공부를 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흔히 6개월 영어 공부했다는 수준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했었다. YMCA PEACE CAMP에 참여해서 한국인 친구도 있는 친구는 당시 언어 소통의 어려움 때문에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더 컸던 것 같았다. 특별하게 이 친구에게 강한 목표가 생겼던 것일까? # 영어강의를 기다리는 청년들 이 외에도 스무 명 남짓의 청년들은 오후 5시 영어교육을 받으러 매일 YMCA센터로 향했고, 나는 아직도 그들과 삼십여 분 대화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있는 중이다. 티모르의 적지 않은 청년들은 할 일이 없어 오후 나절을 기타치고 노래 부르며 술로 밤을 맞이하고 있고, 그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질루와의 이야기는 매번 짧게 끝났었지만,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이전의 영어교육은 비 정규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던 영어과정이었다. 현지인 강사자의 스케줄에 따라 교육진행이 빈번하게 변경되었는데, 현재 YMCA센터에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3개월의 오후 영어프로그램을 계획했고, 5월부터 진행할 예정이다. 프로그램을 짜고 교육할 봉사자의 스케줄을 짜서, 예전의 틀이 없이 시간 되는대로 진행되었던 CLASS를 효과적으로 운영하고자 하는 의도를 엿보았다. 이 지역의 청년들이 반갑게 맞이할 만한 기획이라고 생각한다. # 배움에 대한 단상 나는 한국에서 자라 의무교육과정으로 고등학교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대학교에 재학 중이다. 나의 가정환경은 다르다고 생각해왔지만 고등교육과정까지 나의 혹은 우리의 목표는 좋은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른 친구들은 대학진학과 달리 일찍이 취직에 대한 나름의 길을 쌓아 나갔다.) 우리는 취직에 대한 걱정이 없고, 대학 진학에 무사히 발을 올려놓으면 힘겨운 배움과의 싸움도 끝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먹고대생이 내가 기대했던 그 무엇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취직을 하든 대학을 진학하든 더 나은 삶을 위한 욕구는 배움을 필요로 한다. 배움은 끝이 없다. 그리고 그 배움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생각해본다. # 티모르 청년들 2007년 DNS가 진행한 티모르 레스테 생활표준 조사자료에 따르면 19세부터 25세까지의 청년들의 진학률이 47.1%에 미치고 대학진학률은 3.7%에 불과하다. 동티모르의 대학교 진학률은 얼마 전 보도되었던 한국의 대학진학률이 80%를 넘어섰다는 한국 뉴스와 비교했을 때, 동티모르와 한국의 교육수준의 차이는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2002년 유엔의 독립선언과 동시에 세계의 유수한 인터내셔널 ngo들은 교육 시스템의 기반을 다지는데 많은 이바지를 해왔다. 적지 않은 초등에서 고등교육기관들은 ngo들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교육환경을 개선해 왔고, 2008년 UNESCO자료에 따르면 2005년도 초등학교 진학률이 32%였던 반면 2007년 DNS의 자료에는 취학아동이 69.7%를 기록하게 된다. 현지에서 유소년들을 만나 이야기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아니 많은 시간이 놀이라는 비언어적 활동이 대부분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청소년들과는 자신들의 생각을 짧게나마 들어볼 기회는 있었다. 그들의 한국에 대한 동경은 마치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할 때의 그 기쁨을 맞보려는 것 같고, 말라이(MALAY: 외국인)에 대한 태도는 단순히 자신들과 더 나은 삶을 사는 이들에 대한 호기심 혹은 돈 좀 있는 친구 곁에서 덕 좀 볼 수 있느냐는 심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목적이나 의도가 어찌되었든, 이들에게는 목표가 있다. 좀 더 발전했고, 좀 더 배워서 온 이들에게 배우고픈 욕망. 그들은 굶주려있다. 마지 생선을 먹어 본적도 없는 고양이가 한번 생선 맛을 보고서 미치도록 그 비린내에 열광하는 것처럼.p.s. 생각보다 단상의 폭이 넓어져서 제대로 수정이 안되고, 혹은 한 편에 치우져 써버린 내용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놓쳐버린 사소한 것이 있다면, 앞으로 써가면서 수정하도록 할테다.
티모르를 떠난지 한 달 후,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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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즘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답니다. 한국에 온지 이틀, 삼일째에는 5개월간 떠나있던 한국에 언제 다시 적응하나 싶었는데, 이젠 아이러니하게 내가 언제 당신과 5개월을 지냈나라는 생각이 드는거에요. 5개월간의 생활이 마치 한 달 전에 꾼 꿈처럼 문득 아련하게 떠오르는 정도의 기억에 불과하달까요. 그 동안 많은 것이 변했지만 지금 제 느낌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공간에 틈새를 내서 그 찰나에 다른 장소에 들렸다 다시 돌아온 것만 같아요. 제게 티모르에 갔었다는 것을 유일하게 느끼게 해주는 경로는 친구들이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물었을 때에요. 그 때는 타인의 이야기를 하듯 스토리를 술술 말하곤 하죠. 하지만 그걸 제외하고 5달x30일x24시간 같이 살던 친구들 없이 집에서 혼자 밥을 먹고, 커피 볶는 소리 대신 자판기의 둔탁한 소리를 듣고, 씻으면서 언제 전기가 나갈지 몰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한국의 생활에 티모르에서 생활을 하긴 한 건지 의문이 들 정도로 너무 자연스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전 이 곳에서의 부적응을 숨기기 위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걸까요, 아니면 점점 그 곳을 잊고 지내려는 준비작업을 하는 걸까요. 평생 5개월을 잊지 않겠다 다짐했던 나는 어디로 가고 현실과 타협해버린 간사한 제 자신만 여기에 있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아마 전 제 자신이 라온아띠에 스스로 지원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지 몰라요. 요즘 들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가 저를 사로잡아 티모르에서 남겨온 흔적 하나하나, 끄나풀이라도 잡고 싶단 생각이 부쩍 드네요. 이런 시시콜콜한 고민 역시 티모르가 제게 남긴 흔적이라면 좋을 정도로요.당신의 빈자리가 그리워요.. sao miguel 학교에서
Maubere의 티모르 음악 이야기 > 2. 티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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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rai Timor Hau hadomi tebes o 오~ 티모르여. 난 정말 사랑하네 husi o ami hotu moris 너로 인해 우리는 모두 살아가고 tan deit o ami hotu terus 너로 인해 우리 모두 고통스럽다 husu ba o atu hakmatek iha o nia fatin 너의 자리에서 편히 쉬길 원해라 keta tanis keta halerik beibeik 절대 울지 마라, 절대 항상 불평하지 말자. maibe nonok deit ba 그러나 그저 조용히 가자. o hau nia doben diak 오~ 나의 사랑아 o hau nia murak rai 오~ 나의 좋은 땅아 nai habadak ami terus nee 신이여 우리의 이 고통을 줄여주오 keta husik ami moris hamutuk iha nakukun laran 절대 어두운 속에서 함께 사는 우리의 삶을 포기하지 말아달라 hadok ami husi susar nebee atu haketak ami 우리를 갈라놓는 어려움으로부터 우리를 떨어뜨려달라 tasi mane sei siak hakilar 남쪽은 분노해 외칠 것이다 rai lakan mos sei tarutu 천둥 번개가 칠 것이다 temi o nia naran ba beibeik 항상 너의 이름을 부르리 Timor loro sae 동 티모르 =========처음 동티모르에 갔을 때, 가장 인상깊게 들려온 노래이다.구슬프고 비장하게 시작하는 이 노래, 동티모르에서는 꽤 유명한 노래이다.처음 이 곡을 듣고 너무 느낌이 좋아, 계속 친구들에게 연주를 해달라고 해서 배운 노래이다.재밌는 표현으로는 loro sae 가 있다.티모르 섬의 동쪽 부분만 우리가 흔히 지칭하는 동티모르라는 나라이기 때문에,티모르 섬의 서쪽부분과 구분하기위해, 동티모르라 부른다. 그들의 정식 국명인 Timor-Leste 에서 Leste란 포르투갈 어로 동쪽이란 뜻이다.loro 는 "해" sae는 "뜨다,오르다" 의 뜻으로써 loro sae란 해가 뜨는 곳, 즉 동쪽을 가리키는 테튬어의 표현이다.또한 남쪽으로 번역한 tasi mane의 단어 각각의 뜻은 tasi "바다", mane "남자" 란 뜻이다.하지만 tasi mane(남자 바다)란 뜻은 "남쪽"을 가리키고, tasi feto(여자 바다)란 "북쪽"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러한 유래에 관해서는 두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남쪽 바다가 북쪽 바다보다 거칠고 무섭기 때문에 남자 바다가 남쪽이라 불린다는 의견이고, 또 하나는 남쪽(남쪽바다) 지역의 사람들이 인도네시아에 맞서 게릴라로 대항했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남쪽의 사람들이 더 거칠다는 뜻에서 남자바다가 남쪽을 뜻한다고 한다. 그들의 삶에 대한 평온을 기원하는 가사가 구슬픈 곡조에 잘 어울렸다.
Maubere의 티모르 음악 이야기 > 1.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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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os nain (농부) Sai husi uma dadeersan nakukun 어두운 아침일찍 집을 나서 cafe manas copu ida hamanas netik kabun 따뜻한 커피 한잔이 배를 따스히 하는구나 ai farina baluk ida iha kohe laran 아이파리나(열대지방식물) 한 조각이 야자잎으로 만든 가방 속에 있다 hodi kaer netik kabun ba loron manas 뜨거운 날에도 배를 안고프게 한다 to'o loron kraik fila ba uma 오후에 집으로 돌아 간다 oan doben sira estuda ba halo diak 자식과 부인은 열심히 공부한다. ba loron ikus ita nian 너의(우리의) 마지막 날을 위하여. ba sa inan aman serivisu kolen 엄마 아빠의 일이 고되기 때문에 fila liman makas ba ita oan 열심히 일을 한다, 자식을 위하여. =====위 노래는 싱쿠스틱 이라는 티모르 가수의 노래이다.커피와 농업으로 대변되는 동티모르의 느낌을 잘 표현한 것 같다.이들의 가사를 다시 한번 음미해본다면, 고단한 하루하루의 느낌이 올 것이다^^
티모르에서는 무슨 말이 들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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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모르에서는 무슨 말이 들릴까? 동티모르의 언어는 테튬어이기는 하나, 쉽게 정의하기 어렵다. 수도인 딜리에서는 대부분이 테튬어를 구사하고,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테튬어는 문법이 복잡하지 않아 쉽게 배울 수 있는 언어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 표기법 등에 대한 정리가 완벽히 되지 않아, 다양하게 표기되기도 한다. 영어-테튬, 테튬-영어 사전은 현지에서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국어로써의 테튬어의 정리 및 보급이 미흡하여 지방에서는 다양한 지방언어가 사용되고 있고, 테튬어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곳도 많다. 테튬어의 정리 미흡과 함께 왕래가 힘든 동티모르의 산악 지형과 험한 도로, 열악한 정기공급과 대중매체(TV,라디오)의 보급 부족 등이 모두 테튬어가 공식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널리 보급되지 못하는데 기여한다. 거리의 인도네시아어들은 티모르의 아픈 역사의 흔적들을 보여준다. 거리 곳곳엔 인도네시아어로 된 문구들이 많고, 상점에서 가격은 인도네시아어로 불린다. 또한 종종 현지인들은 내가 외국인임을 알면 인도네시아 언어로 말을 걸기도 한다. (그럼 난 뿌듯한 표정으로 테튬어 할 줄 알아요~ 라고 살며시 말한다.) 거리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택시․버스에서 나오는 음악은 인도네시아 음악인 경우가 많다. 또한 대학교 교재는 대부분 인도네시아어로 되어있다. 교수들의 수업은 테튬어도 쓰고, 인도네시아어도 쓰고, 섞어 쓰기도 한다고 한다. 교수 대부분이 인도네시아에서 유학했을 뿐만 아니라 공부를 할 책이 대부분 인도네시아어기 때문에 대학에서의 인도네시아어 사용은 불가피하다. 자 이번엔 포르투갈어다. 초등학교에서는 포르투갈 숫자 세는 것을 배우고, 실생활 속에 쓰기도 한다. 또한 국가에서 교사들을 포르투갈 언어 연수를 보내고, 포르투갈어 수업을 하게 한다. 게다가 놀라운 것은 그들의 인사말인 본디아(아침인사), 보따르디(점심인사), 보노히티(저녁인사)가 모두 포르투갈어라는 사실이다. (가끔 영화에서 포르투갈계 언어를 쓰면, 자주 듣던 단어가 들리곤 한다. 테튬어로 생각했던 단어들이 포르투갈 어인 경우가 종종 있다.) 포르투갈 어는 현재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다. 과거의 포르투갈 식민시절부터 사회 고위층들이 포르투갈어를 사용했기에, 현재까지도 사회 지도층의 경우는 포르투갈어를 할 줄 안다. 그렇기에 공용어로 지정되었고, 공문서 등도 포르투갈어로 작성된다고 한다. 게다가 놀라운 것은 국가國歌에 해당하는 노래가 포르투갈어로 되어 있다! 하지만 포르투갈과 동티모르의 관계는 비록 식민지로 맺어진 관계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한국과 일본 같은 관계는 아닌 것 같다. 동티모르 현지 사람들은 포르투갈에 대한 반감이 신기할 정도로 적다. 동티모르와 포르투갈의 관계는 나중에 다시 다루어야겠다. 그 외 소수언어로는 싱숑어와 안녕하세요어를 들 수 있다. 싱숑어는 딜리를 포함한 동티모르 곳곳에서 오히려 테튬어보다 보급이 더 잘 된 언어이다. 딜리에는 화교 상점이 매우 많기 때문에 중국어를 쉽게 들을 수 있다. 또한 중국의 액션 영화를 본 사람들이 라온아띠가 트럭을 타고 지나가면, “씽쑝~ @#$%@#”라며 외치며 웃고들 한다. 혹은 “찌나(중국인)~”라고 외치기도 한다. 이는 현재 화교들이 티모르 상권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하고, 과거 중국인들이 매춘업에 종사하기도 했기에 중국인에 대한 약간의 반감과 놀림, 그리고 그저 재미 등등이 복합적으로 ‘싱숑어’의 보급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안녕하세요어는 최근 들어 급히 퍼지고 있는 소수 언어로, 한국어 강좌를 수강하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다. 이는 최근 고용허가제 양해각서를 체결한 한국과 동티모르 정부가 한국어 강좌를 개설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우리 숙소인 UNDIL 대학교와 한국어 강좌 건물이 바로 옆이기 때문에, 타이밍을 잘못 맞추면 안녕하세요 어 사용자들과 대거 마주칠 경우가 있다. 안녕하세요어를 사용해야할지, 테튬어를 사용해야할지, 난감한 순간이다.
마우베레(Maubere)의 티모르 역사 느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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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이미 한국으로 돌아와 티모르 감이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5개월이 지난 시점에서야, 그들의 삶과 사고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동안의 각각의 티모르에 관한 나의 궁금증들이 엉키고 섥혀 복잡한 한 덩어리로 남아있다. 그들의 무엇에 대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두렵기만 하다가, 먼저 그들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현재 그들의 삶은 이 시대 어느 땅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지난 역사들의 뒤엉킴으로 인한 결과일 것이다. 자, 이제 티모르의 역사를 가볍게 한번 훑어보자. (내용은 국방부에서 편찬한 ‘한국군 동티모르 파병과 띠모르레스떼 탄생’ 책을 거의 옮겨왔음을 밝혀둔다^^) 기원> 기원전 4만년부터 2만년 사이에 폴리네시아 인들이 티모르로 들어와 정착했다. 그 때 정착한 원주민이 아또니(Atony)족이다. 그 후 멜라네시아 계통의 인종과 원시 말레이계 인종이 티모르로 진출했다. 그들이 테툰(Tetun)쪽의 주류를 이루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포르투갈의 지배> 7세기 이후부터 중국과 티모르 간에는 부정기적으로 노예 ․ 야생 밀납 ․ 백단목 등의 거래를 위한 무역이 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많은 유럽인들이 동양에 호기심을 갖고 진출하던 1500년대 초, 동양에 진출했던 포르투갈 상인과 선교사들이 향교무역과 선교를 위해 인도네시아와 티모르에 상륙했다. 이들은 주로 향료의 원료가 되는 백단목 무역에 종사했다. 그리고는 1524년, 티모르 섬을 식민지로 삼았다. 하지만 섬 전체를 조직적으로 지배하지는 않았다. 포르투갈은 티모르를 지배하기 위한 개발이나 지배체제 구축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백단목 획득 등 단기적인 이익 착취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식민체제는 대체적으로 불안정했다. 1598년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상륙한 네덜란드는 1824년 인도네시아 전역을 식민지화하고, 포르투갈의 거점인 티모르섬으로 진출을 시작했다. 이에 1849년 포르투갈은 티모르섬을 동서로 양분해 서티모르를 네덜란드에 양도하기로 합의했다. 이러한 국경 조약은 1915년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그 때 서티모르에 포함되어 있던 오이쿠시 지역은 포르투갈이 계속 지배하기로 합의했다. 왜냐하면 오이쿠시 지역은 포르투갈의 최초 거점이자 서티모르 다수족인 아또니 족과 구별되는 테툰 쪽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주민 폭동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1910년 경 대규모 폭동이 18개월간 지속되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연합작전을 펼쳤고, 이때부터 티모르에서는 저항의 역사와 함께 영웅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일본의 점령>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1942. 2. 20 일본군이 티모르 섬의 쿠팡과 딜리에 상륙했다. 딜리(동티모르의 수도)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군과 연합해 저항하는 동티모르 게릴라들을 제압하지 못했다. 1945년 일본군은 철수했고, 잔학한 통치로 주민 4~6만명이 희생되었다. 포르투갈 재진주> 포르투갈은 일본의 항복 직후, 조속히 식민체제를 복원함으로써 큰 저항없이 동티모르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서티모르를 장악한 인도네시아가 반 포르투갈 세력을 공공연히 지원했다. 인도네시아의 개입으로 1959년 반 포르투갈 폭동이 발생했다. 포르투갈은 통제를 더욱 강화하고, 친 인도네시아 활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는 포르투갈의 식민지배에 대한 부당성을 외교활동으로 국제 사회에 제기했고, 당시 탈식민지화 바람과 함께 국제사회의 설득력을 얻었다. 이 뒷부분이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 국내의 정치상황이 복잡하게 연관을 맺고 있어서 내용이 너무 길었고, 미쳐 노트에 적어오지 못하는 바람에..^^ 가볍게 정리를 해봐야겠다,,ㅠㅠ 1975년 동티모르에서 포르투갈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9일 뒤에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27번 째 주로 강제합병하고 탄압을 시작했다. 이렇게 인도네시아 식민지 시기가 시작된다. 인도네시아 점령기간 중 동티모르에서의 인권탄압을 세계에 널리 알리며 독립에 큰 계기가 된 사건이 바로 ‘산타크루즈 학살사건’이다. 이 산타크루즈 학살 사건을 계기로 세계의 관심을 받으며 독립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 후 2002년 5월 20일, 신생독립국 티모르레스떼 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lic of Timor-Leste)가 탄생하게 된다. 1975년 이후에 인도네시아의 강제 점령기를 살펴보면, 냉혹한 세계 정세 속의 티모르를 볼 수 있다. 일부에서는 인도네시아의 군사 행동을 미국이 눈 감아 줬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이 시기의 역사를 좀 더 자세히 다루고 싶으나, 능력 밖의 일이기에..^^; 국방부에서 편찬한 “한국군 동티모르 파병과 띠모르레스떼 탄생”의 역사부분에 잘 나와있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 아, Maubere의 역사이야기에 Maubere에 대한 설명이 빠졌다. ‘마우베레’ 혹은 ‘모베레’로 읽히며, 티모르의 일반 대중을 뜻한다. “한국군 동티모르 파병과 띠모르레스떼 탄생”에서는 Maubere가 ‘가난하고 힘없는 동티모르 민중’을 뜻하는 말이라고 설명이 되어있다. Maubere라는 표현은 동티모르 현지 노래에 많이 등장하는데, 독립․혁명과 관련된 역사적이고 대중적인 표현이다. 그들의 저항의 역사 속에서 묻어나온 Maubere란 표현. 동티모르의 친구들이 나에게 고맙게도 Maubere라는 영광스럽고 역사적인 이름을 붙여주었다. 나에게 Maubere란 이름이 붙고 나니, 그들의 역사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세계 어느 곳의 역사가 다 그러하겠지만, 침략과 저항의 역사가 우리네 역사인 듯이 쓰라리게 다가왔다.
[Photo 24] 두번째 포토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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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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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정, 두보, 두호, 효정, 연지야!울 쉐이덜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구나.난 말라리아에 걸려보지 않아그것이 뭔지 모르지만그 녀석 치료약이 긴 베개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까까머리 양동화 머리도 많이 자란 것을 보니 시간이 많이 흐른 모양이다. 얼마후면 귀국하겠다.제대를 앞둔 말년 병장처럼 축 늘어져서 지내는 건 아닌지?너희들 한국돈 써보고 싶지?난 니네들 처럼 달러 써보고 싶다.한국 오면 연락해라.한 번 모여야지? 맛있는 거 먹게.양동화도 같이 와라.마지막까지 신나고 건강하게. 앗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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