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과 큰 관련은 없지만, 1월 3일 우리에게도 두 분의 간사님이 방문하셨다.자랑하려고.]
1. 1월 4일부터 1월 10일.
여행을 다녀왔다. 우리는 일주일의 휴가를 베트남 와이에게 제안했고, 각자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고 이야기 했다. 따로 갈 수도 있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이야기 했는데, 의외로 베트남 와이는 의연하게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도와주었다.
갈등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조금은 어려운 시기를 지났다. 갈등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아마 각자 조금은 불편하고 부자유스러운 시기가 있었다. 다섯명이 함께 지내는 5개월에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우리는 아직 내공이 부족해서 갈등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이것을 자유 여행이라고 불렀는데, 아마 그것은 굉장히 1박 2일 탓이라고 생각한다. 자유여행일 수도 있고, 마무리 여행일 수도 있고, 여행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그 무궁무진한 긍정적 측면을 생각해 본다면, 그냥 여행이라고 불러도 충분할 것 같다.
어쨌든 우리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고, 계속 다섯이 같이 있었다.
1월 쯤에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베트남에서의 욕심이 부딪힐 때가 되었다. 게다가 아주 자연스럽게도 1월의 우리의 스케쥴은 우리의 몫이었기에, 부딪힐 수도 있었다.
고백하지만, 이렇게 따로 떠나는 여행에 가장 부정적인 것은 나였는지도 모른다. 안전과 같은 문제는 둘째 문제였고, 뭔가 다섯이 함께 하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던 나의 기대와 욕심이 첫째 이유였던 것 같다. 그래서 위와 같은 생각을 겪었다. 150일 중의 7일이라면 혼자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의미 있을 수 있겠다고 나를 설득했다. 다섯이 7일간 충분히 충전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좋은 여행이잖아,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건 정당화라기 보다는 아주 자연스러운 연습의 과정이라고 지금은 진심으로 이 기회에 고마워 하고 있다.
하노이로, 냐짱으로, 메콩으로, 앙코르와트로.
잘 다녀왔다. 모두 그런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고 출발했지만, 다들 5개월을 정리하고, 충전했다. 역시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2. 1월 11일부터 1월 20일.
"만나는 사람, YMCA 사람들, 자전거를 고쳐준 오토바이 수리집의 청년들, 수연이가 교통사고를 낸 구멍가게 아줌마들, 호텔 주인가족. 그들의 친절만으로도 열심히 해야 겠다고 불탔다. (2008년 8월 21일의 일기)"
"고마움을 잘 표현하는 연습을 해야하는 시기가 되었다. 고마움의 마음은 그 때 그 때의 감정에 충실하게 충분히 표현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내 애정이 담긴 물건은 언제라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줄 준비가 되어있다. (유치원에서의 작별을 준비하던 2008년 11월 27일의 일기)"
5개월의 생활 중 제일 많이 했던 생각은 우리는 정말 많이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장애인 클럽에서도 유치원에서도 우리는 늘 도움을 받았다. 어디에서도 우리가 가장 빨리 지치고, 자주 아펐다. 그것이 자괴감(자신이 괴로운 감정)이 될 때도 있었다. 우리가 도와주고, 우리가 없으면 안되고, 우리가 주체적인 상황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호의와 친절을 그대로 잘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멋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고마움을 있는 그대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받은 고마움으로 따뜻함이 넘쳐 나는 사람이 되서 나도 그런 호의와 친절을 어디서나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되겠구나. 꼭 Give and Take 가 아니어도 되는거겠구나.
이제 정말 그 고마움을 있는 그대로 충분히 표현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나는 지금 이 시간들이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헤어질 때의 따뜻함, 약속이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오늘은 희망 직업학교를 다녀왔다. 우리가 베트남어를 처음 공부하던 9월에 우리는 그 곳에서 학생들과 대화를 하면서 연습을 했었다. 레포트를 쓰던 12월에 우리는 그곳의 학생들로부터 설문지를 받고 선생님들과 인터뷰를 했다. 이런 인연이 있는 곳인데, 사실 제일 겁났다. 우리가 방문하기로 한 기관들 중에 제일 우리와 안 친한 기관이었다. 그 이상의 친분이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이 위대한 것은 역시, 우리는 여기서 따뜻함을 충분히 받아왔다. 사실 교실로 들어가서 학생들과 작별인사를 하는 시간에는 무척 부끄러웠지만,(9월달과 학생들이 바뀌어 있어서, 처음 봤는데 작별했다.) 그래도 그런 시간을 마련해주던 선생님들과 그 선생님들과의 식사, 커피, 그리고 차 선물. (우리가 선생님들이 끓여준 차에 대해 관심을 표했더니, 경비 할아버지께서 오토바이를 타고 나가서 사와주셨다. ) 이 모든 것이 따뜻해서 소중했다. 메일 주소를 교환했다. 선생님이 언젠가 다시 베트남에 와서 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쳐줄 수 있겠니 하고 물어서 우리는 돈이 없어서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헤어질 때 선생님이 한국 가면 공부 열심히 하고 돈 잘 벌어서 다시 베트남 오면 희망 직업학교에도 오라고 하셨다. 물론 메일을 교환하고, 그런 인사말들이 실제로 어떻게 될지는 늘 모르는 문제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역시 모르는 문제이다. 그래도 늘 그 순간은 참 소중하다. 설령 그것이 미래에는 빈말이 되더라도 지금은 그렇게도 참 소중한 순간들이다.
내일은 장애인 클럽, 그 다음날은 유치원, 그 다음날은 봉제학원이다.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만날까 고민한다. 오늘은 장애인 클럽에 줄 편지를 썼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표현은 "정말 고맙습니다." 라는 것이 아쉽다. "정말"을 아주 강조하는 것이 그나마 좀 더 적극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이것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온 얼굴로 모든 몸짓으로 이 고마움을 충분히 표현하는 연습을 해야 겠다.
3. 1월 20일부터.
억지로 어떻게 이어져야 하는가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5개월의 생활 중에 우리에게 붙은 실력이 개개인의 생활공간에서 발휘될 수도 있고, 여기와 관련된 일감을 계획할 수도 있고, 사람을 모을 수도 있겠다.
확실한 것은 이제 베트남은 내게 미국이나 프랑스 등의 나라를 주변에서 들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을 주는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고, 베트남 사람을 만난다면 이것 역시 미국 사람이나 프랑스 사람을 만났을 때와는 다른 감흥을 주는 만남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시작하고, 제안하고, 가능한 범위에서 도전도 하고.
난 충분히 이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