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패턴 속에서 매일매일이 새로울 수 있을까-?
유인선
서울로부터 5천 6백여km 떨어져 있는 동티모르에서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
인선이의, 그리고 동티모르 딜리의 일상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는 광고 카피가 있듯이 우리는 보통 너무 바쁜 생활로 인해 피로를 호소하고, 달콤한 휴식을 갈망하곤 한다. 나 역시 한국에서 학교에 동아리, 아르바이트까지 하느라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와서 몸이 3개여도 부족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라온아띠 단원에 선발되어 이 곳 동티모르에 오게 된지도 벌써 2개월 차. 내가 본 이 곳 동티모르는 한국과 달리 일상에 여유와 휴식이 묻어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 나에게 동티모르에서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음식이나 더위가 아닌 바로 ‘여유로움’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게도 원했던 휴식이건만 오히려 무한 반복되는 한가한 일상에 적응하기가 힘들었고, 그 한가함 때문에 피곤하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우리의 일정이라고 하면 매일 오전에 학교에 가서 아이들과 놀고, 오후에는 바깥을 돌아다니거나 침대 위에서 뒹구는 생활이 하루의 전부였다. 따라서 우리의 일정 중에는 자원활동 자체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만큼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었고 이 생활 패턴이 매일매일 반복됐다. 밖에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고, 방 안에서 자거나 책만 읽어도 아무도 터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매우 편한 생활이었다. 하지만 쉬는 것도 한 두 번일 뿐 한 달이 넘도록 그러고 있으려니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막막했다. 더군다나 우리는 여기에 요양하러 온 것도, 쉬러 온 것도 아니기에 마음도 편치 않았다. 그런데 왜 매일 같이 이러고 있을까, 이래도 되는 것인가, 바쁘게 살 수는 없을까? 이런 물음에 대해 나는, 그리고 우리는 한 달이 넘도록 끊임없이 고민하고 현 상황에서 벗어나려 부단히 애썼다. 한국에서는 동티모르의 생활을 상상했을 때 눈코 뜰 새 없는 바쁜 생활 속에서 아이들과 지역 주민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육체적 노동 또는 교육을 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 곳에 실제로 와보니 뭐 내가 마땅히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여기 사람들은 우리가 없어도 잘 살았을 것 같단 생각이 들 정도로 평온했다. 그리고 결국엔 매일 반복되는 생활패턴으로부터 지루함과 대체 나는 왜 이 곳에 왔는가에 대한 회의감이 물씬물씬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상상했던 자원활동과 전혀 다른 모습을 경험함으로써 딜레마가 찾아왔던 것이다. 학교까지 휴학하고 5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투자해서 가족 품을 떠나 머나먼 곳까지 왔는데 어디에서도 뚜렷하게 하는 일 없이, 숙소 안에서 뒹구는 시간이 훨씬 많으니 누구라도 불안할 수밖에.
그런데 말이다. 신기하게도 1개월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는 조금 생각이 바뀐 것 같다. 과연 내가 지겨워하는 이 모든 일상이 우리가 하고자 하는 자원활동과 동떨어져 있는 단지 ‘휴식’이라 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어느 날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자원활동과 현지의 생활은 결코 떨어트려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연관되어 있다고 들어왔지만 나는 그것을 단지 하나의 경험담 또는 관념으로 생각했다. 나는 나 스스로를 이 곳의 생활패턴에 적응하지 못하는 한 명의 말라이(외국인)로 만들어 놓고선 여기에서 많은 것들을 하고 돌아가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학교에서, 혹은 길을 지나면서, 동티모르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살펴본 결과 내가 이 곳에서 한국처럼 빨리빨리 움직인다고 해서 진행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 사람들은 그저 길가에 앉아있거나 서있는 경우가 많고, 12시부터 2시까지는 점심시간이라 아예 상점들이 모두 문을 닫는다. 한국에서 우리가 바쁘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처럼 여기선 이런 생활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아시아권 국가 중에서 우리나라가 오히려 특이한 케이스일지도 모른다는 간사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이 곳 동티모르에서 쉬는 것은 ‘휴식’이 아닌 ‘삶’ 그 자체이다. 즉, 나 역시 아무 것도 안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지금까지 끊임없이 동티모르화 되었던 것 같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에 리듬을 맡기고 있으면 지혜가 모든 것을 알려준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재는 조금이나마 여기 생활 패턴을 이해하고 현지의 관점에서 일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어떤 사람이든 동일한 강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강물은 항상 흐르고 있기 때문에 동일한 강, 그리고 동일한 위치에 들어가더라도 두 번째 들어간 강은 다른 강이며, 사람도 역시 미미하지만 변화하였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변화하기에 하루하루는 매일매일이 새로운 날이고 매 순간은 시간 상에서 하나의 새로운 찰나이다. 나는 나의 집에서 5천 6백여km 떨어진 이 곳 동티모르에서 매일매일이 새로운,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