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있을 때, 매일 비슷비슷한 생활과 이제 어느 정도 안정된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소소한 갈등과 어려움은 항상 존재했다. 하물며 말도 잘 안통하는 타지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현지인 뿐만 아니라 팀원들 역시 포함) 살아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누군가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 과정에선 성장통처럼 따라오는 고통이 여전히 힘들지만, 언젠가 이 통증이 끝나면 그 전보다는 한뼘 쑤욱-더 성장해있을 거라 생각하며 다시 힘을 낸다.
그렇게 성장통을 겪고 또 겪고 여러 번 겪다보면 그땐 정말 어른이 되어있겠지-
PART 1. 현지인과의 갈등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우리가 이 곳에서 하는 프로젝트는 커다란 상승폭을 그리며 성장하고 있다.
그 중 하나인 아순시온 YMCA 유치원은 괄목할만한 성장을 하고 있다. 우리가 처음 계획해서 직접 운영하기까지 얼마나 어설픈 과정과 시행착오들을 거쳤던가. 아순시온 YMCA에 딱 4명 있는 우리 또래의 스탭들은 모두가 좋은 사람들이긴 하지만, 일에서 우리가 믿고 의지하기엔 우리만큼 어리고 부족한 부분이 많아서, 우리 스스로가 독립심을 갖고 주체적으로 일을 해나가야 했다.
사실, 그런 사실을 인정하기까지도 쉽지 않았다. 백팔번뇌를 거치며. 프로젝트에 대한 스탭들의 무책임함에 분노하고 겨우 가라앉히고 그러다 다시 끓어오르면 밖에 나가 가슴을 주먹으로 몇 번 치고 돌아오곤 했다. 미팅을 하면서 스탭들에게 여러 번 거듭 강조하고 마지막엔 애원하다시피 최소한의 책임감을 갖고 일하자고 말을 했지만 소 귀에 경 읽기였다.
YMCA 유치원 준비물로 필요한 것을 말하면 3주가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 아이들 따갈로그 어와 음악을 담당하는 스탭은 하기 싫은 날엔 말없이 사라져버린다거나 아주 사소한 업무만 생겨도 나 오늘 바빠서 수업 못해- 하는 식으로 나와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10월 말경에, 간사님들이 오셨다가 가신 후 스탭과 우리와의 관계가 급속도로 나빠졌다. 간사님들이 사무총장님께 부탁드리고 가셨던 몇 가지 사항들이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매주 주말마다 있는 홈스테이 때문에 우리가 자신을 충전할 수 있는 날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아신 간사님들이 홈스테이를 줄일 것을 요청하셨는데, 홈 스테이는 2주에 한번으로 줄어들었지만 홈 스테이가 없는 날은 15KM 걷기를 한다던지, 홈 스테이는 아니지만 다른 이름으로 필리핀 가정에 가서 잠을 잔다던지 하는 다른 일정을 매번 잡으셔서 결국 우리는 아직도 이 곳 필리핀에 와서 4개월 동안 제대로 쉬어 본 적이 거의 없다.
또 하나는 미팅인데, 아이코리아에서 우리가 했던 잦은 회의들이 무색할 정도로 이 곳 스탭들은 미팅을 갖지 않는다. 아주 중요하고 큰 행사가 있을 때 가끔 미팅이 열리는 데, 그것은 미팅이라기보다 단순한 공지사항을 알리는 성격이 짙다. 사무총장님이 일방적으로 공지를 하시면 스탭들은 따른다.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는 것을 염려하신 간사님들께서 미팅을 자주 해주실 것을 부탁하셨는데 역시 전혀 지켜지질 않았다. 우리는 미팅하자고 스탭들에게 요청을 하면 귀찮은 표정이 역력했다. 큰 행사가 잡힌 것도 아닌 데 도대체 왜 미팅을 하자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일관하는 스탭들 때문에 우리도 마음이 상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미팅 때 스탭이 가장 먼저 하는 말이다. 역으로 그들은 우리에게 할 말이 없다는 뜻이 된다. 미팅의 의미부터 서로가 다르게 해석하고 있었으니. 잘 될 턱이 없었다. 어쩌다 스탭들에게 바라는 점을 얘기하면 -예를 들어 자기가 맡은 수업은 책임감을 갖고 하자 혹은 사정이 생겨 수업을 못하게 되면 최소한 전날에라도 미리 말을 하자. 정도의 것들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드러냈다.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우리는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며칠을 고민을 했다. 라온아띠 룰 중에 모든 것은 스탭이 정하는 대로, 스탭의 의견이 최우선이라고 했으니 이 곳의 방식을 따를까. 거기다 스탭과 갈등 일으키다 경고 두 번이면 우리 한국가야 하잖아 아무것도 문제제기도 하지 말고 몇 달만 더 참을까. 고름은 결국 터뜨려야 낫는다. 참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니까 내일이라도 당장 질러버리자! (당시 분노모드였던 나)
투명인간이라 생각하고 무시해버리자, 사무총장님께 가서 스탭들의 만행을 다 일러버리자 등등 여러 가지 해결책(?)이 나왔다.
“우리가 직접 그들에게 보여주자.”
우리의 마지막 결론이었다.
그 이후로 우리는 주체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우리는 아순시온 YMCA에게 손님이 아니라 스탭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 곳 스탭들이 우리를 언제까지나 손님처럼 잘 대해줘야 한다고 기대하는 것을 버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스탭들이 미팅을 원치 않으니 우리끼리라도 미팅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근무 시간엔 사무총장님이 안 계신다고 해서 음악을 크게 틀고 노래를 부르는 시간이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 했다. 스탭에게 무언가를 요청하면 나한테 말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말 하라고 빙빙 돌리기 때문에, 우리는 직접 사무총장님과 이야기를 하고 일을 추진했다. 유치원을 운영하는 일도, 꾸미는 일도, 다 우리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했다.
색지에 아이들 사진으로 벽에 붙일 벽보를 만들었다.
지혜가 밑그림을 그리고 나와 언니가 그라데이션을 몽글몽글 주고 있는 중.(아트 티처로서)
우리가 아이들 출석표를 작성하고 색지로 개인 출석카드를 일일이 만들어 왔을 때 스탭들이 다가와 이게 뭐냐며 관심을 보였다. 이름표를 직접 만들고 회색 YMCA 사무실이 칙칙해 아이들 사진을 찍고 색지로 벽면을 꾸몄다. 얼마전부턴 크리스마스 트리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이제 스탭들이 우리보고 아티스트라며 칭찬도 해주고 우리가 무언갈 열심히 만들고 있으면 와서 도와줄 거 없냐며 먼저 묻기도 한다. 미팅도 여전히 먼저 요청하지는 않지만 예전만큼의 거부는 보이지 않는다.
어제부터 만들기 시작한 크리스마스 트리. 아직 산타와 루돌프가 없다.
트리에는 아이들이 직접 그린 그림을 불일 생각이다.^^
어제는 작은 변화 하나가 보였다.
전에 우리가 벽을 꾸미려고 샀던 색지 중에 노란색 종이가 한 장 없어진 것이다. 어디 갔나 했더니 저쪽 책상위에 노란색이 보인다. 다가가서 봤더니 스탭들이 우리가 만들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사진을 붙이고 주위에 색연필로 꽃을 그려 색칠을 해놨더라. 쓰려고 남겨뒀더니 말 한마디 없이 맘대로 쓴 게 아주 잠깐 괘씸하기도 했지만,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서 피식피식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근데 나비랑 꽃 모양도 똑같이 그려놨네. 젊은 사람들이 창의력 없기는 쯔쯔. 그 땐 별말 않더니 그래도 내심 꽤 괜찮아보였나 보지?
스탭이 어떤 자세와 태도를 가져야 하는 건지를 너희가 직접 보여주고 실천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긍정적인 자극을 줄 수 있는 촉매제가 되어라-
간사님들이 말씀하셨던 그 방법이 그들에게 조금씩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우리가 말로 그들을 닦달하는 건 잔소리밖에 되지 않고 자칫 그들에게 자격지심을 불러일으켜 상처를 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팝송이 볼륨 가득 빵빵 틀어져 있는 사무실 한가운데서 우리끼리 회의를 하면서도 -이거 지금 자극되고 있긴 하는 거지? 우리가 지금 회의를 하고 있다는 걸 쟤네들이 알고 있긴 해? - 참 효과가 의심되는, 속도가 더딘 방법이었지만 분명 긍정적인 자극이 된 것 같다.
아! 그리고 혹시 오해할까봐 덧붙이지만, 우리와 스탭과의 갈등은 거의 대부분 업무에 한해서였고 그 이외의 시간에는 다들 단세포들처럼 같이 노래 부르고 시시한 농담 따먹기(예를 들어 배나온 정도에 따라 임신 몇 개월인지 나눠대는, 어디 초등학생때나 했을법한.) 를 하릴없이 해대는 또래의 친구로 순식간에 다시 컴백!
초영 언니 생일파티때 우린 모두 광란의 밤을 보냈다.
옆에는 우리의 세컨 보스 "또또"
그러나 나는 그와 사진찍은 기억이 없다.....(과음에 파리해진 저 얼굴을 보라)
YMCA 스탭인 앨빈과 또또.
노란색 옷을 입은 앨빈은 나와 동갑인 21살인데, 여자친구와 춤에 푹 빠져
YMCA는 그에게 있어 3순위 안에도 못든다.
심심치 않게 음악 수업을 안하고 어디론가 도망가버려 항상 우리의 속을 썩이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성격이 참으로 밝아서 미워할 수가 없다.
주황색 옷을 입으신 분은 우리 사무총장님.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처럼 나온 또또.
그리고 그 옆에 검은 색 티셔츠는 오늘의 주인공 마리즈. 분홍색 티셔츠는 아이린.
마리즈 생일을 맞아 우리는 시티에 가서 케잌을 샀다.
사무실에서 생일 파티를 조촐하게 열고, 그리고 나서 우리는 케잌을 철저히 부셔버렸다.
I'll eat you up~ na na na naaa~♩
아카데미 올림픽 때 찍은 YMCA 스탭 단체사진.
빨간색 옷입은 남자분은 이름이 "바봉" 인데, 사무총장님 보디가드이다.
처음엔 너무 무서웠는데 이제 초영 언니에게 맨날 "바보이(돼지)" 라고 놀림받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사무총장님 보디가드인데도, 사람들 붐비는 곳에 가면 가방 크로스로 매라며
챙겨주는 바봉이 있어 마음이 참 든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