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중순 한국은 눈이 많이 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하지만 이곳은 여전히 한 낮의 태양이 나의 이마와 콧등에 땀방울을 맺히게 할 만큼 강렬하다. 매서운 바람 때문에 시린 손을 호호 불 필요도, 가슴 속까지 불어 닥칠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꽁꽁 싸맬 필요도 없는 썸머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야 하는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뜨거운 태양 아래 노동의 땀을 흘린 후 차가운 물로 샤워할 때의 시원함과 고된 일정 뒤 마시는 한잔의 얼음물은 추운 날 포장마차에서 호호 불어가면 마시는 어묵 국물 한잔과 비교하여 전혀 손색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필리핀, 그 처음
어느덧, 한국을 떠나온 시간보다는 한국에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나를 돌아보았다. 처음에 느꼈던 이곳만의 독특한 향취가 익숙해져 가는 시간만큼 그리고 내 피부가 검게 그을려져 온 시간 동안 내 자신이 보고 듣고 느꼈던 나의 이야기들을 아름답게 미화하지도 이곳을 지상 낙원인 마냥 묘사하지도 않은 채 내가 서 있는 지금을 중심으로 돌아보고 싶다.
첫 사랑, 첫 직장, 첫 차, 첫 집… 우리는 이렇게 처음이라는 사실을 특별히 기억하며 아니 심지어 평생 잊지 못한 채 살아간다. 처음이라는 설렘 때문에 잊지 못할 수도 아니면, 처음이라 겪었던 두려움을 이겨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라온아띠가 되어 처음으로 우리 팀을 만나던 순간, 처음으로 필리핀에 땅을 내딛던 순간, 처음으로 필리핀 통솔자인 쿠야 모리토를 만나던 순간, 처음으로 아이들을 만났던 순간 등 내겐 잊을 수 없는 첫 경험들이 2010년 쏟아져 나왔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9월, 새로움이 많을수록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관찰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새로운 물건을 발견할 때 마다 이리저리 돌려보며 관찰하고 입안에도 넣어봤다 던져도 보는 것처럼 필리핀에서의 처음 접하는 모든 것을 관찰하고 또 관찰하며 새로운 곳을 알아가는 것이 앞으로 좋은 친구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라는 사실을 이곳에서 관찰하며 알게 되었다.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떠나온 나였기에 처음에 관찰만 하는 것에 불만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뒤로 한 걸을 물러서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하는 것이 더 멀리 나갈 수 있는 방법이 되기에 난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3인칭 관찰자 시점을 택했다. 이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한 걸음 물러서 관찰하며 이 곳 사람들의 생각, 행동 패턴, 그리고 문화적 차이를 관찰하는데 9월을 보냈다.
대화, 소통의 소중함
처음엔 낯설기만 하던 길들이 내 눈에 익을 때쯤, 짝짝짝 박수를 치며 트라이시클을 부를 때쯤, 점점 모든 것이 익숙해 질 때쯤, 나와는 다른 점을 가끔 틀린 것이라 착각하는 경우가 생겼다. 처음엔 다름을 인정하지만 다름이 지속되다 보면 틀렸다고 생각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서 각각 다른 인격체들이 만나 하나의 팀을 이뤄 함께 간다는 것이 어찌나 어려운 일인지… 그것도 다른 사상 그리고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생활한다는 의미는 서로간의 많은 이해와 더 많은 배려를 필요로 한다는 의미와도 같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생활하면서 깨닫게 된 사실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가끔은 무거운 대화를 해야 하는 상황이 싫어 자리를 회피하기도 하지만 그런 어려운 과정을 통해 다른 사람을 알아가고 이해하게 되며 심지어 쌓였던 오해들을 풀 수도 있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리핀 생활이 익숙해 지던 10월, 10월이 나에게 ‘대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었고 이 깨달음이 나의 작은 생일 선물 되어주었다. 가끔은 다른 언어 때문에 내가 하고 싶던 말을 정확히 전달할 수 없을 때도 있지만 대화를 함께 한 시간만큼 그 사람과 가까워 지고 그 사람에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며 깨닫게 될 수 있었다.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며 가끔은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힌드 아코 마르농 막따갈로그(전 따갈로그어를 잘 못해요.)’라고 말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다는 것은 대화를 하지 못한다는 말이고 대화를 하지 못한다면 내가 그 사람과 친구가 되기 힘들다는 것일까?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한국사람들과 말이 잘 통한다고 모두하고 친구로 지내는 것도 아니며 이 곳에서 말 통하지 않는 사람을 만났다고 해서 내가 친구가 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세계 공용어인 바디랭귀지를 사용하라고 한다. 하지만 이 바디랭귀지보다 더 강력한 대화 방법이 있다. 바로 마음이다. 마음이라는 것이 보이는 것도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우린 느낄 수 있다. 진심은 통한다는 말을 필리핀에서 사람들과 마음으로 대화하며 느꼈다.
필리핀에 와서 무엇을 가장 많이 얻었냐고 물어보면 내 대답은 항상 가족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 곳에 와서 많은 가족들이 내 가족이 되었고 많은 엄마들이 나의 엄마가 되어주셨다. 내가 그들 가족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그들의 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서로 마음을 주고 받았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아도 손길에서 느껴지는 따뜻함, 그저 바라만 바도 느낄 수 있는 그들의 배려, 그들의 눈빛이 나에게 말해주었다. 너는 내 가족이야 그리고 내 딸이라고 말이다. 탈도 많고 일도 많았던 11월에 갯벌 속 진주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픔이 있었기에 느낄 수 있었던 그들의 마음과 사랑이 진주가 되어 내 마음속에 전해 졌다.
난 지금 12월 중반에 살고 있다. 이제는 이 곳에 남겨두고 갈 아이들을 그리워할 생각에 그리고 혹시나 내 머리가 그들을 잊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에게 부탁하고 있다. 두근두근 마음이 뛸 때 마다 이곳 사람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이다. 아직은 이른 마무리라 말할 수 있겠지만 프로그램이 하나씩 끝나가면서 나도 내 마음속의 이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가고 있다.
감사하며,
처음에 그저 열악한 환경에 사는 아이들 때문에 가슴 아파하던 마음을 앞으로는 아이들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과 함께 정리해가고 있으며, 사람들이 다가 오기 전까지 기다리기만 하던 나 자신을 먼저 다른 이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단련 시키며 정리해 가고 있다.
라온아띠 4기 필리핀팀으로 이 곳에서 하루하루 아니 매 순간순간 얻었던 깨달음들을 적어 내려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그리고 이 에세이를 통해 다시 내 자신을 정리할 수 있던 기회를 주심에 감사하며 남은 기간 동안도 감사하며 살아가길 바라길 기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