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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6월 5일 ~ 6월 12일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여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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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6월 5일 ~ 6월 12일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여행길. 9일 새벽 바기오를 떠난 우리는 북으로 북으로 향했다. ‘culture trip’의 컨셉에 가장 맞는 일로코스 지역을 둘러보기 위함이었다. 한 번,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익사할 뻔 했던 나인지라 우리 스탭의 ‘보라카이 예찬론’에도 시큰둥했거늘, 식민지 시절의 흔적이 300년 넘게 보존되어 있는 곳, 400년이 넘은 교회가 있는 곳, 원주민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고 설명 된 북쪽 지역을 여행책에서 확인하는 순간, 바로 여기라며 내 돈을 털어서라도 가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정말 내 돈을 털게 되었다.-_-;;;;;;;; 그럴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했다. 계단식 논을 볼 수 있는 바나우에를 못 간건 천추의 한이 되었지만. 바기오에서 비간으로 향할 땐 이미 우리의 여행길이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것이었음을 잊고 있었다. 잘 털렸다는 말도 나오는 마당에 트라우마는 무슨. 그냥 즐기는 거다. 여행의 목적은 여행 그 자체여야 한다. 무언가를 위한 여행은 이미 순수한 설렘을 잃은 것이다. 2. 비간과 라왁, 사라지지 않은 역사의 흔적 9일, 비간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1시. 그렇게 크지 않은 비간이라는 도시는 고풍스러움이 집약되어 있는 곳이었다. 비간에 있던 메스티조 지역은 여행책자에 의하면, 스페인풍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중국식과 멕시코 식이 혼합된 양식의 옛스러운 집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 보수가 된 모습들이긴 하지만 300년 넘게 보존되어 있는 그 거리는 뭔가, 세상의 모든 행, 불행을 다 겪은 노인의 얼굴 같았다. 수많은 전쟁이 있었던 필리핀에서 거의 유일하게 폭격을 피했던 곳, 그래서 다 부숴진 벽돌들로 지어진 집들이 거짓말처럼 우뚝 서 있는 곳, 또각거리는 마차소리가 그윽한 울림을 반복하는 곳, 비간은 이런 곳이다. 사실 우리가 둘러본 곳은 얼마 되지 않는다. 비간이 어떤 도시라고 얘기하기도 쑥스러울 정도로 잠시 잠깐 머물렀을 뿐이다. 요 것이 이번 여행에서 땅을 치고 아쉬워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 날 하룻밤을 묵은 곳은 비간에서 30분 가량 떨어져 있는 라왁이라는 도시이다. 라왁 은 ‘일로코스 노르테(필리핀 최북단에 있는 주)’에 속한 지역으로 비간보다는 조금 더 ‘기록화 된 역사’를 감상할 수 있었다. 이렇게 느낀 이유는 사실, 비간에 있는 박물관이나 갤러리 같은 곳을 가지 못했기 때문도 있겠지만 라왁에는 ‘마르코스’의 흔적이 살아 숨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코스는 1965년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989년 망명 도중 사망할 때까지 필리핀을 통치한 인물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어떤 전 대통령처럼 긍, 부정적인 평가를 모두 받고 있는 독재자이자 번영의 구세주이자 전설이다. 라왁 씨티는 그의 고향이기도 하고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곳이었다. 저녁이 되기 전 마르코스 박물관에 들렀을 때 우리는 역사적 인물의 실제 시신을 보게 되었다. 곧 망자의 혼이 튀어나올 듯한 시꺼먼 방에 유리와 온갖 꽃에 둘러싸여 있던 그. 한 때는 대통령이었고, 사치 심한 미스 마닐라 출신 미녀의 남편이었고, 또 한 때는 망명자였던 꽤 거창한 삶을 산 사람이 지금은 방부제와 에어컨 바람에 의해 겨우 그 색을 유지하고 있는 시체가 되어 누워있는 것이다. 죽으면 아무것도 아닐 것을. 쯧. 조금, 허망함을 느꼈다. 라왁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밤, 김희곤 단원은 라왁까지 갔으면서 또 졸리비에서 치킨을 시켜댔다. 이러다 알을 낳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쨌든 그가 주문한 스파이시 치킨은 하나도 맵지 않았고 이에 이의 제기를 했다. 그러자.. 종업원은 닭의 살점에다 ‘spicy’’라고 써 있는 깃발을 하나 퐉 꽂아주었다. 허허. 마술의 깃발인가. 꼽기만 하면 치킨이 매워 지는가.. 허허허허-_-^^^ 10일 아침, 우리는 필리핀 북부의 바다를 감상하러 떠났다. 바다는 언제나 그렇듯 맑고 투명하고 푸르렀다. 차를 타고 조금만 달려도 바다가 지천으로 있는 필리핀에서 그닥 새로울 풍경은 아니었지만 신기하게도 바다를 볼 때마다 마음이 차분해진다. 여행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동반자임을 심히 확인시켜 준 다툼이 있었는데 아직 그것들이 가시지 않아 나는 분노에 차 있을 때 였다. 그러나 뭐 금방…. 바다와 풍차와 등대 같은 이름만 들어도 산뜻한 피조물들을 보고 나니 조금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자연의 힘은 위대하기 이를 데 없다. 이후엔 또 다시 마르코스와 그의 가족이 20년간 살았다던 사저를 둘러보고 400년 넘게 보존되어 있는 파오아이 성당을 보았다. 종교에 관련해선 지식이 전무한 나라, 뭐 그 성당을 보고 한 생각이라고는.. 한 자리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인간의 추태를 지켜봐야만 했던 그 성당이 참 불운하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신에게 내리는 가장 큰 형벌은 인간과의 결혼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 죽음을 맞을 수 밖에 없는데 신은 불멸의 존재이니 그저 사랑하는 이들의 부재를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왜 그 성당을 보고 문득 그 신화가 떠올랐는지.. 어쨌든, 난 그 곳이 좀 안쓰러웠다. 라왁에서의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비간으로 돌아갔다. 덜 본 듯한 미미함에 견딜 수 없어 없는 시간을 쪼개서 발걸음을 돌린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빡빡했지만 그 아련한 느낌을 지속할 수는 있었다. 다시 보니 300년 넘은 건물 양식 따라 만든 초현대식 레스토랑이 눈에 걸렸다. 마치 한글로 정갈하게 ‘스타벅스’라고 써 놓은 것과 같이 뭔가 어긋난 느낌이랄까. 그 유명한 ‘맥도널드’도 메스티조 지역의 건물 양식으로 지어졌고 사람들은 그 거리 입구에 있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팬피자를 즐기고 있었다. 에잇, 좀 그렇다. 어쨌든 우리도 저녁을 체인점에서 먹긴 했다. 김희곤 단원은 또, 또 졸리비에 가고-_- 마닐라에서 또 하룻밤을 보내고 12일에 레가스피로 돌아오던 길, 북쪽으로의 여행길을 돌아보며 역사를 훔쳐보는 것은 사뭇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언젠가 ‘훔쳐봄’을 당할 수 있는 역사적 인물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다들 돌을 던질텐가. 후훗. 쥐도새도 모르게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싶다면 어디 던져보시지. 괜찮은 여행을 했다. 물론 유쾌하지 않은 기억도 있다만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신비한 곳을 많이 다녀왔다. 모든 것이 여행의 추억이겠거니 싶다. 희.노.애.락이 다 있었다. ‘애’는 어디에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여튼. 쿨한 날씨와 녹음이 인상적이었던 바기오, 고풍스러움의 극치 비간, 볼 것 없다고 책에 나왔지만 자연스러운 매력이 눈부셨던 라왁, 이젠 좀 지겨워진 마닐라 호텔ㅋ 명소들을 둘러본 것도 물론 좋았지만 우리끼리 그렇게 미친듯이 웃으며 여행을 했다는 것이 그저 좋았다. 차 안에 압축되어서도 엄청 웃고 풀밭에 갖다 풀어놔도 웃고.. 조증이었다.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오니 할 일이 산더미. 후우, 남은 날들은 점점 줄어드는데 할 일은 늘어나는 이상한 구조다. 괜찮다. 일 하다가 짜증나면 800장이 넘는 우리의 여행 사진을 보고 또 웃어제끼면 된다. 괜찮아 그래 괜찮아!!!!!
# 2. 6월 5일 ~ 6월 12일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여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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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6월 5일 ~ 6월 12일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여행길. 5월 말까지 계획되어 있던 놀이터, 데이케어센터 일까지 모두 끝낸 우리에겐 휴식이 필요했다. 프로젝트가 끝나던 날 했던 세레모니를 보고 감동 받으신 필리핀Y 사무총장님께서도 마침 “일도 성공적으로 마쳤고 안 좋은 일도 있었으니 휴식 겸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여행을 떠나면 좋겠다.”는 존경스러운 말씀을 하셨다. 이리하여 우리는 제대로 된 여행을 하기 위한 길을 떠났다. ‘작은 물병 하나, 먼지 낀 카메라, 때묻은 지도 가방 안에 넣고서 언덕을 넘어 숲길을 헤치며 가벼운 발걸음 닫는대로’ 갔던 여행은 아니었다. 버스도 타고 기차도 타며 길을 찾아 헤메는 모험을 기대했으나 다른 라온아띠들도 그렇겠지만.. 극심한 보호를 받는 우리들이 아닌가. 6월 5일, 우리는 밴을 빌려 새우자세로 잠을 청하며 장장 14시간을 달려 마닐라에 도착했다. 예전에 혼자 여행을 할 때도 숙박비 아끼겠다고 밤에 버스로 이동하곤 했었는데 해가 뜨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 때문에 이번엔 눈 부릅뜨고 벼르고 벼르다가 찬란한 일출을 목격했다. 나는 차 안에서 계속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냥 그 자리에서 솟아 오르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던 태양이, 어스름했던 풍광을 오렌지 빛으로 서서히 물들이며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경이롭기 이를 데 없었다. 이번 여행에서 잊지 못할 순간이 몇 번 있었는데 그 중 단연 첫 번째였다. 새벽을 맞은 어느 이국의 풍경이란… 그저 신선할 뿐. 1. 바기오, 이모님과 호돌이. 5일 오후 마닐라에 도착해 저녁을 먹고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버린 YMCA호텔에서 1박을 한 후 6일 아침에 바기오로 향했다. 차 안에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것을 구경하고, 핫초코를 마시며 과자들을 주워먹고, 책을 보고, 음악을 듣고, 잠 자는 옆 친구도 구경하자니 드디어 차가 산을 타기 시작했다. 바기오로 가는 길은 끊임없는 오르막길이었다. 에어컨도 안 나와 창문을 열고 안개 낀 풍경과 산 중턱에 집이 즐비한 광경들을 보는데.. 그 순간이 너무 생소하면서도 아름다웠다. 덥디 더운 필리핀이란 나라엔 전혀 있을 것 같지 않았던 높은 지대. 대관령 아흔아홉 굽이를 능가하는 그 격하고 높은 커브. 안개마저 서린 풍경의 신비함은 가면 갈수록 오묘해졌다. 반나절을 달려 도착한 바기오는 북적거렸다. 게다가 생소하게도 날씨가 추웠다. 맨발에 슬리퍼만 신고 있던 나는 정말 오랜만에 ‘발이 시렵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좋았던 점은 레가스피엔 하나도 없는 한국 식당이 수없이 많았다는 점. 이미 맥주 한 잔을 걸친 우리의 눈에 들어 온 것은 한국 음식점 ‘이모네’ 아… 우리 이모님들은 왜 이렇게 전 세계에서 국위선양을 하고 계시는지… 한 번 방문해드려 그간 그리웠던 이모의 음식솜씨와 천 페소를 바꿨다-_-; 바기오에서의 여행 일정은 무척이나 빡셌다;;; 조금 더 여유롭게 감상하고 싶었으나 패키지 상품 통해 온 단체 관광객 마냥 스탭으로부터 빨리 차로 돌아오라는 문자가 연신 왔다. 딸기 농장, 필리핀 식 중국 절, 공원 등등을 초단시간 내에 둘러보았다. 다른 지역과 사뭇 다른 기온 덕에 바기오엔 신선한 야채와 과일이 유명하다고 했으나… 우린 딸기 농장에 가서 리치만 엄청 먹고 왔다. 딸기는 자라지도 않은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연신 낄낄대며 맑고 밝은 그 풍경과 함께 어우러졌다. 도심은 여전히 매연에 찌들어 있었지만 조금만 벗어나면 푸르른 녹음을 마주할 수 있는 축복받은 환경이었다. 요즘엔 개발 붐이 일어 나무들을 잘라낸다고 어른들은 개탄하셨지만. 이 곳 저 곳, 유명한 곳을 모두 다 둘러보고 배가 고파졌을 때, 우리는 또 하나의 구수한 식당을 발견한다. 이름하여 ‘호돌이 식당’.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고고씽. 순두부 찌개를 비롯해 먹고 싶어 죽을뻔했던 한국 음식들을 다 시키고 눈물, 콧물 다 흘리며 먹었다. 나라에 대한 애국심은 제로에 가깝지만 한국 음식이라면 내 밤새 찬양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난 이렇게 3개월만에 처음 맛보는 고향의 맛에 감탄하였으나 오리지널은 아니라는 미식가 강세민씨의 품평회는 시끄럽게 계속 되었다. 그럼 드시지 마시던가요-_-^ 바기오에서의 마지막 날, 역시나 빡센 여행이 계속되었다. 아침부터 200개가 넘는 계단 위의 성당까지 올라가란다. 그래도 뭐, 우린 즐겁다^^ 성당에서 정성스레 초를 꼽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며 다소 경건한 마음으로 바기오의 아침을 만끽했다. 그림 그리는 남자 김희곤 단원은 그 새를 놓치지 않고 성당을 스케치하는 예술가 정신을 발휘해 우리를 감탄하게 했다. 부러운 재주다. 여행책자를 보며 바기오에 가면 가장 들르고 싶었던 예술가 마을 탐아완 빌리지를 가게 되었다. 탐아완 빌리지는 필리핀 원주민 중 한 부족인 이푸가오족의 전통 가옥이 있고 그들의 예술과 문화를 보존하고자 조성한, 일종의 관광지이다. 불임인 부부들이 하루를 묵으면 아이가 생긴다는 오두막 집도 군데군데 있었다. 그냥 자기만 해도 아이가 저절로 생기냐고 다같이 캐물었지만 가이드를 해주었던 청년은 얼굴을 붉히며 “I don’t know”만 연발했다^^ 재밌다. 탐아완이 너무너무 기억에 남는 이유는 아마 다른 나라의, 혹은 다른 지역의 관광지와는 다르게 정제되지 않은 모습 때문이었다. 보통의 관광지라면(특히 이렇게 산 속에 있는 곳의 경우) 방향을 안내하는 화살표 천지라 관광의 자유와 시선의 자유를 빼앗기 일쑤인데 우리는 심지어 ‘오지 탐사’를 했다. 올라가기 전 기본적인 도형으로만 그려진 지도 한 장 주고 ‘다녀오시오’ 이런 정도라 알아서 돌아와야만 하는 구조였다. 길도 말끔히 정돈되어 있지 않아 늘어진 가지를 헤치고 올라가는 재미가 있었다. 지도에는 길이 있는데 실제로 보니 덤불이었던 것이다-_-;; 그래, 이런 게 우리 스타일의 여행이지. 진흙 바닥에 넘어지기도 하며 양평에서의 훈련이 이렇데 도움이 되냐며 또 깔깔대었다. 또 가고 싶을 뿐이다ㅠ 점심을 먹은 후 들른 곳은 캠프 존 헤이와 식물원이었다. 말도 안되게 쭉쭉 뻗은 나무들 틈새에서 뒹굴고 뛰고 걷고 웃고를 반복했다. 잔디밭에서 동그랗게 누워 사진을 찍으며, 괜히 도망가는 고양이를 쫓아 뛰던 강세민 단원을 보며, 온 천지가 녹색이던 그 절경을 보며 우린 참 행복했었던 것 같다. 즐겁고 유쾌했다. 여행의 묘미란, 이렇게 별 대단한 걸 보지 않아도 함께 하는 사람들 덕분에 느끼는 행복이다. 그 날 밤, 전 날 먹은 한국 음식으로는 성에 안 차 세민오빠와 나는 결국, 밤 중에 먹어야 더 맛있다는 라면을 먹기 위해 다시 호돌이로 향했다. 문을 닫는 와중에도 굳이굳이 라면을 사서 봉지에 끓는 물을 넣고 ‘뽀글이’를 만들었다. 민폐라면서도 우린 연신.. “저, 화장실 좀.. 써도 될까요?” “저…뜨거운 물 좀…” “저.. 물 좀 더 주실 수 있나요?.. 짤 것 같은데..;;”…………. 창피하다. 주인 아주머니께선 매일 보시는 한국인인 우리를 쫓아내시지 않은 데엔 강세민 단원의 거지꼴이 한 몫 했으리라 믿는다. 라면 봉지를 움켜쥐고 숙소로 돌아갔으나 문은 굳게 잠기고… 일단 우리는 그 앞 계단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 날, 바기오 시내를 내려다보며 먹은 그 너구리 한 마리.. 조금 오버해서, 태어나서 먹은 너구리 중 가장 맛있었다. 안 익으면 어떤가, 비행기를 타야지만 갈 수 있는 어느 타국의 도시에서 내 옹색한 자취 생활의 친구가 되어 주었던 너구리 한 마리를 몰고 가는데 어찌 감동적이지 않을 수 있겠느냔 말이다. 별이 극악스럽게 초롱거리던 추운 밤, 쭈그리고 앉아 너구리를 먹으며 몸을 데우던 그 때를 잊을 수 없다. 아마 세민오빠와 나는 ‘다시마를 먹어야 하나, 버려야 하나’를 놓고 언쟁을 했었지. 차마 달라고는 못하고 계속 곁눈질을 하던 나에게 칼국수 한 젓가락 안 줬으면서 다시마를 안 먹는다며 구박-_-..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 날의 그 기분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행복감이었다. 별 거 아닌 일에도 이렇게 행복할 수 있는 너그러움이야말로 여행이 창출해내는 가장 큰 이윤이 아닐까. (이런 자본주의적 감상-_-^)
the story of team Phil. # 1. 5월 13일, 소리없이 다녀가신 밤 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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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 온 지도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어느 덧 귀국은 한 달 앞으로 다가오고 슬슬 한국에 두고 온 지인들로부턴 기념품을 사오라는 사랑스러운 압박이 들어오고 있다. 여행을 온 것도 아니고 그저 이 지역 주민의 한명이 되어 살았을 뿐인데 여기 왔다 가는 것을 꼭 그런 식으로 ‘기념’할 필요가 있나 싶다. 게다가 아무리 뒤지고 뒤져도 이 곳에 대한 것을 완벽히 드러내줄만한 기념품도 못 찾겠다. 내 고향 춘천에 왔다가 욘사마 양말이나 사가는 일본인 관광객 같이 되고 싶진 않고.. 난감하기 짝이 없지만 어쨌든 내 지인들이 한국에 있을 동안 다른 공간에 있었던 티는 내고 싶기에 오늘도 기념품 리스트를 정리하고 앉아 있다. 송실장님 아시면 욕이나 한 바가지 던지실 일이다. 조악한 기념품 몇 개를 사는 것 보다 중요한 일은 물론 마음 속으로 내가 보낸 시간을 정리하는 일이겠다. 많은 날들을 보냈고, 많은 일들이 있었기에 시간을 되돌아보는 일엔 일기장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후우, 불만도 참 많았고 좋았다고 낄낄 댄 적도 많았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명언 따르느라 한국 가고싶다고 칭얼댄 적도 많았다. 아이들이 ‘아떼 유림’이라고 부르며 잡기에도 조심스러운 그 작고 연약한 손을 내밀었을 때 가슴이 설레어서 날아가는 글씨로 일기를 썼었다. 참… 다양한 희노애락들이 손바닥만한 수첩에 빼곡히 적혀있다. 행복했던 그렇지 않았던 모두 값진 시간들이었다. 그래서 내가 보낸 그 값진 시간들 중 일부를 이 글을 볼 당신과 공유하고 싶다. 바람이 있다면, 타국에서 엄마 생각하고 있을, 너무 보고 싶은 다른 라온아띠들이 무릎치며 공감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 1. 5월 13일, 소리없이 다녀가신 밤 손님. 한 달도 더 지난 이제와선 제법 웃음지으며 얘기할 만한 배짱이 생겼다. 심지어 “그래 뭐 잘 털렸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후훗, 그러나 이건 오직 우리만 할 수 있는 얘기다. 팀원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저렇게 말 한다면 아직도 화가 날 것 같다. “뭘 안다고 그래??!!” 라고 윽박지를지도 모르는 일이다. 활동이 중반에 접어들며 이래저래 고민이 많았다. 다른 팀원들은 여전히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었지만 포지션이라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없었던 나는 심란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팀 리더라는 허울좋은 명목 아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철저히 제한되어 있었고 자괴감 및 무력감이 겹겹이 쌓여 혼자선 마음을 추스릴 수 없는 날이 허다했다. 그래서 그 날도 그렇게 늦게까지 1층에 앉아 넋을 놓고 있다가 두시 반이 되어서야 터벅터벅 2층 침실로 올랐다. 그 시간까지 깨어 있느라 심신이 몽롱했지만 리포트를 수정하느라 1층에 놓아두었던 노트북 두 개를 2층에 올려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리의 모든 날들이 들어있는 귀중품이었기에 없어지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때문에 나는 가장 늦게 잠드는 자의 책임을 완수했다. 뭐, 불 끄고 문단속 하는 거야 당연하고 말이다. 얼마만에 잠들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다. 눈을 뜬 게 네 시 가량이었으니 한 시간 반 남짓이었던 같다. 잠결에 들은 말이라곤 “도둑 맞았어.”라는 희곤이의 목소리 뿐이었다. 우리는 모두 1층으로 뛰어내려 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내용물이 다 빠져 쭈글쭈글 해 진 지은이의 여행가방과 널부러져 있던 옷들이었고 뒤이어 어떻게 거기까지 옮겨졌는지 궁금해질 만큼 커다란 민하의 캐리어, 그리고 지하실 입구 앞에서 뒹굴던 내 캐리어. 아……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이미 노트북 세개를 비롯한 디카, 핸드폰, 전자사전, 지갑 등등이 다 없어졌음을 확인한 뒤였다. 참 말끔히도 털어갔다. 자기 전 내가 시간을 확인했을 때 2시 37분이었는데 최대 한 시간 반 사이에 그 모든 걸 쓸어간 것이다. 도둑은 집 밖에서 불이 꺼지길 기다리고 있었을 거다. 혼자 거실에 앉아 멍하니 있던 나를, 그 사람들이 밖에서 지켜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훅 끼쳤다. 침착하자고 다짐하며 일단 바로 뒷 집에 사는 스탭에게 전화를 걸었다. 머리맡에 놓아두었기에 살아 있었던 내 핸드폰이 고마웠던 순간이었다. 조금있다 스탭이 오고 두 시간쯤 지나 경찰이 왔다. 사건 현장을 처음 본 띠야(집안일을 해 주시는 아주머니)는 벌써 서너번 째 사건의 정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우리는 경찰의 지시에 따라 없어진 물건의 목록을 작성했고 그들은 도둑의 동선을 추정하기 시작했다. 아….. 갑자기 이게 무슨 난리인가. 우리는 그저 우리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아니,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 자체를 고려하지 않았었다. 왜 우린 우리가 무사할 거라고만 생각했었는지. 여긴 안타깝게도, 남자 하나가 제 집에 가려고 뒤에서 걸어오기만 해도 변태 취급을 하는 대한민국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그래서 경찰이 밤에 열심히 돌고 또 돌고 사람들은 몸을 사리고 사려 이런 일 한 번 터지면 세상이 뒤집히고 뉴스에 나지만 여긴 사고가 나면 그냥 그런거다. 그 날은 정말 배알이 꼴려 삐딱선을 탔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도둑으로 보였다. 내가 여기 자원봉사를 하러 왔는데, 나도 나름대로 손해를 감수하며 오기로 결심했고 덥고 습한 날씨 참아가며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그래 너희들이 우리에게 하는 건 이런 거냐, 어쩜 이럴 수가 있나.. 경찰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수사 결과라고는 ‘노트북 한 대가 동네에서 매물로 나왔는데 우리 껀 아니다’는 거…. ‘용의자는 세 명인데 각기 다른 바랑가이(‘부락’정도를 뜻하는 말) 사람들이다.’ 이 정도다. 주변인들은 찾을 거라고 기대 하지 말란다. 난 또 화가 났고 스탭은 말했다. “여긴 필리핀이다. 이게 필리핀의 현실이다. 우린 전쟁은 없지만 가난이 있다.”……. 그런가? 가난하면 남의 물건 훔쳐도 되는 건가? 그럼 가난한 사람들은 다 그런가? 몇 주 후 필리핀Y 사무총장과 함께 한 자리에서 얘기를 하던 도중, 이런 일이 이렇게 자주 벌어진다면 경찰들이 나서서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을 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따져 물었지만 그들은 씁쓸하게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내 불행이 가장 커 보여서.. 내 나라만 생각하고 그렇지 않은 이 곳의 시스템을 비난하며 주변인들에게 하나 둘 상처가 될 말들을 던지고 있었다. 함께 일하는 이 지역 대학생 자원봉사자도 “노트북 잃어 버렸으면 다시 사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해 사이가 틀어져버렸다. 필리핀에 사는 그들에게 난, 부자나라에서 온 사람이라 노트북 하나쯤 다시 사는 건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보이는건데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그 사람들을 원망했다. 왜냐하면 나는 우리의 모든 기록들과 사진들 그리고 내가 노트북, 디카 등등을 가진 이후 보내왔던 2년여의 시간을 날려보냈으니까. 힘들게 돈 벌어서 산 물건들이 다 없어졌으니까. ………내 상황만 심각했으니까. 얼마나 무지했는지 이제서야 느낀다. 참… 난 이 나라에 대한 이해를 전혀 하고 있지 못했다. 그저 오만했다. 내가 그토록 부정해도 난 선진국에서 온 생각 짧은 아이가 맞았다. 난 내 나라의 모순을 알기에 절대 잘 산다고 생각치도 않고 나 자체도 부자가 아닌데 왜 무조건 ‘부자 나라에서 온 돈 많은 아이’로만 치부하는 건지. 처음엔 참 불편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럴 수 밖에 없다. 가난하면 남의 물건 훔쳐도 되는 거냐고?… 헛웃음이 날 정도로 모자른 생각이다. 난 가난을 겪어본 적이 없다. 내가 키가 작은 이유는 운동을 안 해서지 절대 못 먹어서가 아니며 단지 끼니를 때우기 위해 일 해 본 적도 없고, 온갖 재난 때문에 고향 떠나 흙바닥에서 천막치고 1년이 넘는 시간을 보낸 적도 없다. 전기가 없어서, 물이 안 나와서 고생해 본 적도 없다. 그리고…. 죽었다 살아나 본 적도 없다. 내가 일하고 있는 곳에서 끔찍이 아끼는 세살박이가 한 명 있는데 그 아이는 8개월 때 태풍에 화산 피해로 거의 죽을 뻔 했단다. 비록 세살이지만 나보다 산전수전을 더 많이 겪은 그 아이가 “넌 우리가 겪은 것의 백분의 일도 겪어 본 것이 없지 않느냐. 이해하는 척 마라.”고 소리친다고 해도 할 말 없다. 오히려 고개만 더 수그러들 것 같다. 나는 결국 도도한 우리 스탭으로부터 “여긴 가난한 나라다, 너희들이 이해해야 한다.”는 말까지 들었다. 무지한 날 위해 그 불편한 현실을 토로하는 것이 그녀에게 참 힘든 일이었을텐데 나, 참 대단한 일 했다. 내 무식한 짱돌이 이렇게 빛을 발하는구나. 모두에게 미안하다. 사과하고 싶다. 졸속으로 발전한 어떤 선진국에서 온 철없는 아이였거니… 다들 날 이렇게 생각할테지. 뭐.. 그래도 할 수 없다. 뿌린대로 거뒀다. 쳇, 국내 훈련 기간 내내 주옥 같은 강의 듣고 고개 끄덕인 거 말짱 헛것이다. 아니, 3년 넘게 ‘문화인류학’ 공부한 것도 다 필요없다. 오기 전에 다짐했었다. 내가 함부로 내 뱉는 말 한마디, 무의식 중에 보이는 표정 하나, 행동 하나에 그들은 상처 입을 수 있으니 무조건 조심하자고. 그런데 난 내 물건이 없어진 것에 화가 나 얼마나 많은 사람을 범인으로 몰고 마음 속으로 원망했나. 그들에게 말로써 직접적인 상처를 준 것이 아닐지라도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난 이미 죄를 진 것이다. 생각할수록 내가 우습다. 아직 많이 어리구나, 지은이 말대로 라온아띠는 사람되라고 보낸 것임이 틀림없다. 거식증에 향수병으로 괴로워하던 그 날, 불면증까지 겹칠 것 같아 계속 그 방에서 잘 수가 없었다. 하여 우리는 남정네들 방에서 다 같이 자게 되었다. 침대를 벽 쪽으로 최대한 붙이고 지은이와 민하와 나의 매트리스를 바닥에 깔았다. 게다가 누군가 또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방문에 창문까지 다 잠그고 선풍기 하나만을 튼 채로 잠을 청했다. 그래도 겁이 났다. 하필 난 문가에서 자 10분에 한 번씩 깬 데다가 더워서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다섯명이 함께 한 공간에서 잠을 청했던 것,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하루를 보낸 우리끼리 잠들기 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이 좋았다고 한다면 난… 철없는 걸까?^^ 그 후, 모든 문명의 이기에서 벗어난 우린 갑자기 책을 읽기 시작하고 모여 앉아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껄껄대며 다 같이 웃기도 잘 웃었고 사돈의 팔촌 얘기까지 들먹거리며 쓸데 있는 얘기, 없는 얘기들을 나눴다. 마치.. 노트북 카메라 핸드폰과 팀웍을 맞바꾼 듯 하다. 그래서 우린 종종 말한다. “까짓 꺼, 잘 털렸다!!” 그래도 전자사전은 좀 아깝다… 컬러에 중국어 일본어 다 되는 거 였는데…..;; 몸에서 사리 나올 만큼이나 귀중한 깨달음 그리고 팀원들과의 돈독함이 그 값이었다면 뭐.. 알바 더 할 수 있다. 에잇!!!!!!!!
부끄러운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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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쩌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할 수 있겠거니 막연하게 생각하면서 이 프로그램을 지원했고, 이곳에 오게 되었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컴퓨터 전원을 키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양한 경험을 가슴에 담을 수 있었지만, 극적으로 변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 친구들한테 쓰는 엽서에도 이러한 생각을 적으면서 다시 한 번, 여기에서의 내 삶을 돌아보았다. 나는 바라기만 하면서 움직이지 않고, 그저 환경이 나를 바꾸어주길 바란 것 같다. 그것은 매우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지금까지 경험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역시 이러한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 스스로 바꾸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생각과 그것을 옮기는 것은 별개의 일. 나는 타성에 젖어 마치 늪에 빠진 마냥 가라앉고 있었다. 그러다가 발생한 어떠한 사건으로 문명의 이기는 모두 사라졌고, 우리는 무소유의 시간을 누리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나는 잃어버렸던 내 소중한 것을 다시 되찾고, 관계도 회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그리 바뀌지 않은 걸 수도 있다. 단지 환경이 바뀌었을 뿐 나는 또 되돌아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잊어버리지 않게 노력할 것이고, 지금의 이 마음가짐으로 한걸음 더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조금씩 slow but steady 때론 실수할 수도, 멀리 돌아 갈 때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고 싶다.
[4월]활동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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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4월 30일
the story of 강세민, by 김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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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팀은 아주 행복하게 필리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보고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누군가가 필자에게 강세민씨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난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음..엄..음..’ 한 사람을 딱히 무엇이라 정의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행위지만 이 사람은 겪을수록 더욱 모르겠다는 것이 필자의 관점이다. 간단하게 짧은 문장들로 강세민씨를 정의하면 나름대로 다음과 표현할 수 있겠다. 1. 적지 않은 나이에 귀여운 척(강세민씨의 주옥 같은 사진들을 보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빠른 이해를 돕기 위해 사진 하나 첨부하겠다.) 2. 기죽지 않는 성격과 낙관적인 자세 3. 흐름을 끊는 재주와 재미없는 농담 4. 조심성 없는 성격 (필리핀에 와서만 컵을 이미 3개 이상 깼다. 아무 것도 없는 길에서 혼자 걸려 넘어 지는 것도 이제는 예삿일이다.) 5. 듣지 못하는 그의 귀 6. 잠을 컨트롤 하지 못하는 그 (잠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되어 이것이 회의시간에 화두가 된 적도 있었다. 이것도 이해를 돋기 위해 밑에 사진 첨부하겠다.) 이런 글을 쓰게 되면 항상 객관적인 사실들을 부정하고 내 안에 있는 주관적인 의견을 내보이기 쉬워 객관적으로 그 사람을 말하는 것이 쉽지 않다. 어떻게 써야 할까 고민하다가 고등학교 국어책에나 나올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글을 쓰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 객관적 사실들을 나열하며 글을 쓰려면, 관찰대상과 공유하는 무언가와 관찰할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요즘 오후 4시부터 10까지 일을 하는 필자에게 오전 8시 반부터 4시 반까지 일하는 강세민씨를 관찰할 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럼 이 글을 어떻게 써야 할까 고민을 하다. ‘어쩔 수 없다. 필자 속에 있는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수 밖에’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됐고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우선 강세민이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할 필요가 있다. 그는 경기도 일산에 산다. 1984년 7월 6일에 태어났다. 그는 지금 라온아띠 프로그램으로 필리핀에 와 있으며 우리의 활동지역(이미 앞의 다른 에세이에서 거론되었기에 지역설명은 생략함)에서 놀이터를 만들고 있다. 이것이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큼직한 사실들이다. 나름의 객관적 사실들을 쓰고 싶은 마음에 주의에 있는 필리핀 친구들에게 그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한 친구가 그가 너무 귀엽고 잘생겼다고 이야기 했다. 괜히 물었다. 그래도 제대로 된 답이 하나 나오지 않을까 했던 나의 기대를 현지 스텝이 저버리지 않는다. “그는 내 타입이 아니야, 난 지루하고 조심성 없는 사람은 싫어.”라고 대답한다. 그래 정답이다. 사실 필리핀에 와서 필리피나(필리핀의 여성을 지칭하는 말)들이 강세민씨에게 관심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 ‘의자왕’이라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3000 궁녀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수의 여자들이 그를 따랐기 때문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사실이기에 현지 자원봉사자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넌 정말 세민이 잘 생겼다고 생각하니?’ 그러자 뜬금없이 자원봉사자는 필자에게 지나가는 사람 중 잘 생기고 예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보면 자신에게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마침 굉장히 잘 생긴 필리피노가 지나가기에 ‘저 사람 정말 잘생겼다.’라고 이야기 했다. 자원봉사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저 사람은 내가 보기에 굉장히 평범한걸. 아마 우리가 이렇데 다르게 생각하는 건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것에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라. 그리고 내가 항상 민하는 예쁘고, 세민이 잘 생겼다고 말하면 'I don't think so.'를 연발하는 너와 같은 이유겠지. 너희는 우리와 다른 피부색을 가졌고 다른 생김새를 가졌으니까. 그게 멋지게 보이는 거야.’ 너무 분명한 해석에 더 이상 어떤 말도 덧붙일 수 없었다. 자원봉사자와의 대화를 통해 강세민씨의 ‘미남론’을 조금은 이해 할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강세민씨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밖에 꿀떡이라도 숨겨 놓은 아이마냥 곧장 밖으로 뛰쳐 나간다. 강세민씨 나름의 필리핀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함이라 생각되나 그 내용은 확인된 바 없다. 그러나 분명 확실한 것은 지금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그들은 항상 강세민씨를 찾는다는 것이다. ‘where is Semin’은 이제 듣는 것조차 지겨울 정도니 말이다. 근데 왜 그들이 강세민씨를 찾는지 알 수 없기에 어떻게 글을 풀어 나가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하다. 확인된 사실이 아니기에 추론을 사실처럼 포장해서 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감히 필자의 추론을 하나 써보자면 그는 이미 너무 자연스럽게 그들과 함께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밖에서 사람들과 이야기 하고 있는 소리가 들려 그 곳에 슬쩍 엉덩이를 들이민 적이 있었다. 근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사람들이 갑자기 아무 대화도 하지 않고 먼 곳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원체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있는 것이 싫은 필자이기에 그 자리가 불편하기만 했고 오래 견디지 못하고 슬쩍 빠져 나온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그때 강세민씨는 그들과 너무 자연스럽게 함께하고 있었다.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이야기를 듣는 것만이 진정한 소통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필자에게 비록 아무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서로에게 조금씩 유대감을 쌓게 해준다는 것을 강세민씨가 몸소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강세민씨를 그렇게 찾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사실 필리핀에 와서 필자에게 많은 고민들을 하게끔 만드는 사람이 두 명 있다면 그것은 강세민씨와 현지 스텝일 것이다. 너무 다른 환경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 왔기에 이해해야 한다는 마음이 가슴속 깊이 자리 잡고 있지만 그럼에도 잘 안 되는 것이 사람의 심리임을 모두는 알고 있을 것이다. 항상 다름을 차이가 아닌 다름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한다고들 말하지만, 정말 말이 쉽다. 다름을 그 자체로 이해하고 받아 들이려면 자신의 것을 그만큼 포기하고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누가 자신의 것을 쉬 포기 할 수 있겠는가. 한편으로는 이해하려 노력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가슴속에 뭉치기 마련이다. 생활습관, 가치관, 성격 - 어느 것 하나 비슷한 것이 없는 강세민씨와 필자의 관계는 어떻게 이것들을 이해하고 받아 들여야 하는가가 필자의 ‘필리핀 라온아띠 프로젝트’의 또 다른 과제라고 생각한다. 다름을 다름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 마치 외국을 나가 외국 친구들을 만났을 때만 적용될 것 같은 이 이야기를 같은 민족, 같은 언어, 같은 성(性)을 가진 사람과 함께 살아가며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남은 3개월 동안 우린 앞으로도 조금 더 물어 뜯으며, 기존의 것과 같은 친근한 유대감이 아닌 또 다른 형태의 유대감을 쌓아 나가길 기대해 본다. 객관적 사실, 뭐 말이 좋다. 아무리 객관적이려고 노력해도 선택된 사실들은 이미 필자의 주관적 견해에 맞추어 선택된 사실들이기에 100%로 객관관성이라는 것은 사실 전체를 옮기지 않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난 이미 200%로 주관적인 글을 쓰고 있다. 단,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지금 그 사람과 필자는 한 집에서 그리고 한 방에서 같이 살고 있다. 원체 살갑지 않고 퉁명스러운 필자이기에 뭐 이래저래 묻거나, 웃으며 농담을 거는 일은 거의 없지만 정말 다른 우리가 아직 한 공간에서 살고 있고 아직 그 누구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만 보아도 우린 그렇게 나쁘지 않다. 그리고 누군가에 대해 이렇게 솔직하게 말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만큼 서로에 대한 유대관계가 돈독하고,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쓰면 쓸수록 ‘정말 모르겠다’는 것이 필자의 답이지만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좀 더 관찰하고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것이 작은 바람이다. 한국에 돌아갈 때 5명 모두가 정상으로 살아서 돌아가길 바라며 글을 마무리 짓는다. 이 글을 보고 아무 오해 없으시길 재차 당부함.
the story of 원지은, by 이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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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우리가 알아볼 라온아띠 멤버는 필리핀 팀의 원지은 양이다. 라온아띠 중에는 그녀를 잘 아는 멤버도 있을테고, 잘 모르는 멤버도 있을 것이다. 잘 알든, 잘 알지 못하든 아마 필리핀에서 보이는 원지은 양의 모습은 국내 훈련과 사뭇 다른 점이 많아 아마 이 에세이의 내용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오리라고 필자는 기대한다. 그녀가 여기서 어떠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지를 가장 잘 표현하는 건 아마 우리가 붙여준 그녀의 별명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포토제닉”! 이미 라온아띠 싸이 클럽에 투표가 붙여졌을 만큼 그녀는 필리핀 생활 초기부터 신이 내려준 동작과 표정으로 포토제닉의 자리를 항상 호시탐탐 노려왔다. 이제는 우리 팀 중 아무도 대적할 수 없을 정도의 프로 정신을 발휘하여, 하나를 갖추기도 어렵다는 “웃긴 동작”과 “우스운 표정”을 동시에 나타내는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때론 진지한 사진에서조차 그녀의 숨길 수 없는 포토제닉에 대한 야망이 표출되어, 팀 활동 사진을 모아 스크랩북을 만들어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가끔은 사진 선별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우리가 사진을 고르는 시간보다 사진을 보고 웃고 있는 사진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포토제닉 여왕 자리는 더욱 빛나고 있다. 가끔 김희곤이라는 라이벌이 등장하여 포토제닉의 자리가 위태로워 지기도 하지만, 천부적인 타이밍과 포즈로 포토제닉 타이틀 방어에 계속 성공하고 있다. 어디가서 지고는 못사는 강한 승부욕에 우리모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포토제닉의 재능을 찾기 전 한국에서 찍은 셀카를 보면 사진 속의 인물이 지금 우리 옆에 있는 포토제닉 여왕과 동일인물인지 의문이 들만큼 필리핀에서 그녀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 덕분에 우리는 주옥 같은 사진들을 소장하게 되는 영광을 얻었고 우울할 때 그 우울함을 떨쳐버릴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생겨 든든하기까지 하다. 그녀를 위한 또 다른 문장이 갖춰져 있다. “막내가 제일 무섭다.” 라는 말. 장유유서의 문화가 뿌리깊은 한국에서 “막내”라는 지위는, 때론 양보해야 할 것이 많거나 부당한 것들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참아야 하는 약자의 입장에 놓일 때가 많다. 하지만 여기, 필리핀 팀에서는 그렇지 않다. 장유유서의 문화가 흔들리면서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가장 연장자인 강세민씨다. 여자가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오빠”라는 호칭을 쓰는 한국의 고유한 전통문화는 그녀에게 가끔 너무 당연하게 사라져버려, 그 피해자(Victim)보다 주변인들이 오히려 더 놀라는 경우를 만들기도 한다. (필리핀이 영어를 쓰는 국가라서 이름만 부르는 것이 이곳 문화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여기도 오빠라는 의미를 가진 “쿠야”라는 단어가 항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드린다. 하지만 또한 보청기가 필요할 만큼 자기 이름을 듣지 못하는 강세민씨의 문제도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또한 알려드린다.) 나이가 어리다고 약간 주눅들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21세기 선구적인 “막내”의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선뜻 먼저 나서서 말하기 어려운 것들을 당당하게 내 뱉는다는 건 필자도 그녀에게서 배우고 싶은 모습 중 하나이다. 물론 이 두 별명으로 그녀를 모두 설명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사람은 다층적이고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핸드폰에 있는 남자친구 사진을 보면서 우리모두의 염장을 지르기도 하면서도 은근 시크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Day Care Center 에서 한번에 40명 되는 아이들을 가르칠 때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아이들과 같이 뛰놀고 웃으면서 노는 모습을 보면 참 순수해 보인다. 팀이 중간에 바뀌어서 국내 훈련 첫날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나는 그때 그녀가 우리 팀에 적응하기 어려울까봐 사실 약간은 걱정을 했었다. (왜냐면 첫날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서울 지리를 모르는 그녀는 강세민씨랑 같이 여의도에 왔는데, 늦었다고 갑자기 냅다 뛰기 시작한 강세민씨를 영문도 모른 채 같이 뛰어 쫓아가야 해서 매우 피곤했던 사실이 있었다. )그 때의 나의 고민이 지금 와서는 내가 그런 고민을 했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할 만큼 이미 너무나 잘 적응한 그녀의 모습에 내가 뿌듯해지기까지 하다. 물론 우리팀에 적응하는 과정 속에서 어려움이 있었을테고, 필리핀에서 적응하는 것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항상 밝은 모습으로 지내는 모습은 같이 지내는 사람들이 같이 에너지를 얻기에 충분하다. 아직도 그녀를 100% 이해하거나 알진 못하지만 그것들을 알아가는 과정도, 함께 지내는 생활도 또한 매우 즐겁다.
the story of 송유림, by 원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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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팀은 지난 일요일 유림이 언니의 제안으로 이런 재미있는 에세이를 쓰게 되었다. 우리는 3차 시도 끝에 에세이 쓸 사람을 정했다. 난 유림이언니가 뽑혔다. 필리핀의 여름. 이사온 후로는 밤에도 덥다. 그래서 우린 늘 선풍기를 켜놓고 잔다. 왜냐하면 방 구조상 침대를 다 붙이지 않으면 바람을 쐴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침대를 붙여서 지내고 있다. 그 덕분에 나의 잠버릇도 빛을 발하고 있다. 언니는 아침마다 내 잠버릇을 얘기해 주곤 하는데 (아마 이건 나에 대해 쓰는 사람이 쓸 것 같다) 언니도 아침에 눈을 뜨면 이불을 돌돌 싸맨 채로 애벌레처럼 자고 있어 날 놀래키곤 한다. 사진을 너무 찍고 싶지만 목숨이 두 개가 아니기에 못 찍었다. 저번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쓴 채로 너무 눈앞에 있어서 깜짝 놀란 적도 있다. 아, 또 한번은 언니가 아침에 일어나서 피식 피식 웃더니 꿈 얘기를 해주었다. 꿈에서 미래의 남자친구로 추정되는 사람과 손을 잡고 있었는데 일어나보니 언니가 내 손을 잡고 자고 있었다고 했다. 요 몇 일 그런 꿈을 꿨다고 했는데 어쩐지 요즘 들어 자면서 내 옆으로 다가오곤 한다. 언니는 커피를 좋아해서 아침에 종종 커피를 마신다. 언니는 블랙커피를 좋아하는데 특히나 내가 탄 커피를 좋아한다. 분명 언니는 내가 탄 커피를 좋아한다고 한 적은 없고 잘 탄다고만 했는데 우린 듣고 싶은 대로 듣기 때문에 난 그렇게 생각한다. 어쨌든 그래서 내가 “언니 커피 마실래요?” 라고 물으면 언니는 “왜이래?”라고 말하고 그럼 난 “아마추어라서요”라고 맞받아치면서 웃는다. 속이 약한 편인 언니는 여기 와서 제일 많이 체한 팀원이 되었다. 그 때문인지 한 번씩 헛구역질도 하는데 우리는 그걸 보면서 태기가 있는 게 아니냐며 놀리곤 한다. 마닐라에 도착하고 언니가 체해서 모든 팀원들이 등 두드려주고, 팔 잡아주고, 따주고 그 모습을 동영상도 찍는 아름다운 장면이 연출됐었다. 또 한번은 음식점에서 체해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먹지 못했었다. 솔직히 이 날은 체한 건지 뭔지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아파서 먼저 숙소로 돌아갔었다. 어쨌든 그 후로도 언니는 한번씩 속이 좋지 않을 때가 있었는데, 그 때마다 따주겠다고 하면 언니는 손사래를 치며 됐다고 한다. 아침을 먹고 세민오빠, 민하언니, 나는 우리의 일터인 ‘Anislag’로 떠나고 유림언니는 우리의 현지스텝인 틴과 집에서 사무를 보면서 바쁜 하루를 보낸다. (희곤오빠는 4시부터 10시까지 부스에서 일하기 때문에 같이 안 나간다.) 왜냐하면 우리 팀은 필리핀에 도착하고 리더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사무보조가 리더나 마찬가지인 영광스러운 자리를 유림언니가 맡게 되었고, 그 덕분에 언니는 늘 리포트와 미팅, 우리의 프로포잘들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요즘은 틴의 미팅이 많아서 언니는 더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래서 언니는 ‘Anislag’에 자주 가고 싶어 하지만 못 간다. 우리는 일하러 갈 때 트라이시클을 타고 올라가는데 오토바이 뒤쪽은 제일 불편해서 우리 다 선호하지 않는다. 근데 그 자리를 언니는 재미있다고 트라이시클이 너무 좋다고 한다. 덕분에 민하언니랑 나는 편하게 앉아서 올라간다. 하지만 매일 탄다면 언니도 싫어할 것 같다. 그런데 언니는 가고 싶은 ‘Anislag’에 갈 수 있는 날에도 가끔 잠에 취해서 가자고 졸라도 안 갈 때도 있다. 언니가 일 때문에 늦게 자서 피곤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꼭 이 일 때문에 늦게 자는 건 아니다. 언니는 어느 라디오드라마 작가라서 대본도 쓰는데, 우리가 레가스피에 도착하고 한창 정신이 없을 3월 말에 대본을 보내야 한다고 했었다. 그래서 몇 일 동안 늦게까지 컴퓨터를 붙잡고 있었다. 언니는 외계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를 쓰려고 했으나 시간이 없어서 그냥 다른 대본을 보냈는데, 외계인에서도 다른 대본에서도 주인공 이름에 내 이름을 써주었다. 다른 대본은 내 성격을 100% 반영한 거라 대본을 쓰기 쉬웠다고 했다. 솔직히 나도 읽으면서 뜨끔했다. 나는 언니가 외계인 대본을 쓸 때도 영감이 떠오르게 도와줬다. 특히 내가 샤워하고 나올 때 언니는 영감을 많이 받는다고 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모습이 진짜 외계인 같다고 그래도 난 언니의 글을 좋아한다. 저번에 언니가 썼던 대본을 봤는데 끝난 이야기인데도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뒷이야기를 물어봐 언니를 당황하게 했었다. 그래서 나는 언니가 글을 쓰고 있으면 다 쓰기도 전에 읽고 싶다고 보챈다. 이번 에세이도 너무 궁금하지만 일요일까지 참기로 했다. 지금 다른 에세이를 쓰고 있다고 했는데 빨리 쓰라고 졸라야겠다. 언니는 책도 좋아하고, 기자로 일한 적이 있어서 글을 잘 쓰는 것 같다. 언니는 여러 활동을 많이 했었다. 그래서 언니의 그런 경험담을 듣는 건 너무 재미있다. 그리고 나를 여러 활동에 도전하고 싶게 만든다. 그리고 언니는 영어도 잘한다. 국내훈련 기간 중 아이코리아에서 필리핀 YMCA사무총장인 앨씨를 만났을 때에도 언니랑 민하언니가 통역을 해주었었다. 우리의 천사친구 다이앤도 언니의 리포트를 보면서 잘 썼다고 했다. 그래서 3월에 희곤 오빠랑 언니랑 스터디를 하자고 했으나 지금까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일을 시작하고 모두가 바빠서 저녁에도 일하는 날도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니는 어떻게 공부를 했었는지 친절히 일러주곤 한다. 언니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 팀원 모두가 파티나 미팅 등에 가면 언니는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한다. 저번에 앨씨가 레가스피에 왔을 때에도 언니랑 앨씨와 농담도 하고 많은 얘기를 했었다.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언니는 지친 표정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이 시간에는 언니의 눈치를 살짝 보게 된다. 언니의 하루를 표정에서 다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언니는 다양한 표정으로 우리를 웃겨주곤 하는데, (분명 언니는 그런 의도는 없었겠지만) 일이 너무 많은 날에는 다양한 표정 중 정말 지친 표정을 하고 있다. 이 때는 조심해야 한다. 낮에는 인터넷이 간간히 잡히는데 인터넷을 했을 때는 기분이 좋아서 우리에게 누구 만났다고 어떻게 지낸다고 얘기해주고 저장해 놓은 사진이나 에세이들을 보여준다. 요즘 레가스피는 건기임에도 불구하고 우기처럼 비가 내리고 있다. 특히나 오늘은 비가 많이 내린다. 그래서인지 천장에서 비가 새는데 하필 언니 자리다. 그래서 언니는 지금 급하게 매트릭스를 바닥에 내리고 우리의 스케줄을 검토하고 있다. 언니는 종종 말한다. “왜 나한테만 이렇게 가혹한 거야?”, “너 왜이래?”, “한 번에 가자.” 이 말을 할 때 언니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웃기다. 조금 전에도 난 인터넷이 잡혀서 잘 쓰다가 언니에게 넘겨줬는데 바로 끊겼다. 이럴 때면 괜스레 미안해진다. 그리고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또 엊그저껜 너무 느려서 희곤오빠하라고 줬는데 희곤오빠가 인터넷 할 땐 엄청 빨랐다. 우리는 주말마다 우리가 저녁을 만들어 먹으려고 한다. 맨 처음엔 김치전을 만들었었다. 하지만 후라이팬이 자꾸 눌러 붙어서 언니랑 땀으로 샤워를 했었다. 하지만 맛은 정말 맛있었다. 아 또 먹고 싶다. 그리고 어젠 감자전과 된장찌개를 만들었는데 언니는 맛 없다고 실패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맛있었다. 뭐 어쨌든 요리 잘하는 언니 덕에 가끔 한국의 맛을 느끼곤 한다. 언니는 필리핀에 구두를 가지고 왔으나 내 기억으론 한번인가 신었다. 그래서 저번엔 밤에 구두가 너무 신고 싶다며 추리닝이 구두를 신고 집안을 돌아다녀서 우리모두 한바탕 웃었다. 이런 작은 일에 언니의 시크한 말 한마디가 더 웃기게 한다. 저번에는 누가 “옥구슬이 은쟁반 굴러가는 목소리”라고 했는데 언니가 “옥구슬 재주도 좋아?”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민하언니랑 셋이서 배꼽잡고 웃었다. 이상하게 우리는 밤만 되면 빵빵 터진다. 또 언니는 언니의 어머니에 대해서 많이 얘기해 주는데 언니의 거침없는 입담으로 말을 너무 재미있게 해서 어머니를 실제로 만나고 싶을 정도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가면 언니네 집에 가자고 나 혼자 약속했다. 그 외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갑자기 생각하려고 하니깐 잘 생각이 안 나지만 매일매일 웃음의 연속이다. 안산에서 우리가 서로 싫어하는 것과 조심해야 할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언니는 냄새와 소리에 민감하고 가끔은 밤에 노래 듣다가 울 수도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냄새는 안산에 있을 때 민감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았다. 안산숙소에서 이불에 이상한 냄새가 났는데 언니는 못 느꼈었다. 그래서 언니는 냄새에 그닥 민감하지 않은 것을 알았다. 그리고 아직 노래 듣다가 우는 것도 못 봤지만 하이킥 보다가 우는 것은 봤다. 하이킥을 보고 울다니 민하언니랑 나는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알고보니 그 편은 서민정과 최민용이 헤어지는 편이었는데 나중에 다같이 그 편을 봤지만 민하언니는 왜 울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민하언니는 종종 유림이언니에게 “우쭈쭈쭈”하면서 애기처럼 언니를 대한다. 하지만 그 때마다 언니는 무표정이거나 매우 도도하게 “왜이래?” 라고 말한다. 아무리 언니가 이렇게 도도하게 대해도 본심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원래 겉으로는 툴툴대는 사람이 속은 따뜻하니깐. 아직 2달 밖에 지나지 않아서 언니에 대해 뭐라고 쓸 수는 없지만 처음에 만났을 때와 지금 언니 이미지는 완전 다르다. 처음엔 내가 관심이 없던 인류학을 전공하는 언니가 마냥 신기했고, 무척이나 도도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다. 뭐 일을 할 때나 기분이 안 좋아 보일 땐 도도해 보이지만 평상시엔 너무 재미있다. 아무래도 언니의 거침없는 입담 때문인 것 같다. 참, 생각해보니 아직 언니와 호주여행을 끝내지 않았다. 언니 호주에서 여행했던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호주여행을 했는데 갑자기 일이 많아져서 자꾸 연기됐다. 생각난 김에 오늘은 호주여행하자고 해야겠다. 언니덕분에 난 호주에 더 가고 싶어졌다. 그리고 팀탐도 먹고 싶어졌다. 너무 비싸서 못 사먹는 팀탐T.T 호주하니 언니가 캄보디아 못 가서 울었다는 얘기도 생각난다. 이번에 언니가 잘하는 것이 많은 걸 알았다. 배워야 할 점들도 … 아직 3개월이 남아 있으니 많이 배워야겠다. 옆 침대니깐 쏙쏙 다 뽑아 가야겠다. *^^*
the story of 이민하, by 강세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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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상~~~. 우리가 민하를 부를 때 쓰는 단어이지. 고3 때 민하라고 부르면 왠지 내려가는 이미지라 대학에 떨어질지 모르니 민상으로 부르자는 담임의 억지에 의해서 불렸다고 한번 말했을 뿐인 별명이 우리 입에 착 달라붙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단 말이지. 그러고 보니 어떻게 내가 민상을 맡게 되었는지 궁금하다고? 복잡한 절차와 공정한 심사로 사람을 정하다 보니 민상이 내가 맡은 에세이의 주인공이 된거지. 이왕 이렇게 된 바 한번 철저하게 파헤쳐 보려 해. 나이는 24세, 생일은 5월 26일 키는 163정도. 몸무게는 비밀? 민하가 운동을 열심히 하게 된 이유는 몸이 약하기 때문에 시작했다고 해. 처음엔 단지 건강을 위해서 복싱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말은 했지만 글쎄 얼마 전에 맞아본 주먹의 강도는 단지 건강상의 이유로 배웠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랐어. 무척! 이나 아팠거든. 물론 복싱 말고도 여러 스포츠를 섭렵한 민하이기에 다양한 운동을 즐길 줄 알지. 이렇게 스포티한 민상이지만, 처음에 볼 땐 어찌 보면 얌전하고 조용한 아이로 착각(?) 할 수도 있어. 실제로 우리 팀의 지은이도 민하의 첫 이미지를 그렇게 평가했으니 말이야.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지. 또 어떻게 보면 무표정하고, 왠지 화가 난 듯도 해서 말 걸기가 힘들 수도 있어. 하지만 속단은 금물. 겪어보다보면 어찌나 웃음이 많던지 이렇게 잘 웃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니까? 그렇다고 되도 않는 농담으로 웃겨보려고 시도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분위기가 이상하다 싶으면 주위를 잘 살펴봐. 조용히 너를 바라보고 있는 민상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여중, 여고를 나오고 여대를 다니고 있는 민상은 어찌 보면 주위에 여자 친구가 극단적으로 많다고 하더군. 심지어 다니는 교회마저 남자보다 여자가 많다고 하던데……. 자 이정도 떡밥을 던졌으면 다음엔 알아서 행동할 수 있겠지? 한 가지만 더 힌트를 주자면 민상은 배가 고프면 예민해지는 타입이니까 밥을 사주면서 이야기를 하면 더 좋을 거야. 평소에 먹어보지 않은 음식은 먹어볼 시도조차 안한다는 민상이 필리핀에 와서는 참 다양한 음식을 먹어봤다고 하더라. 필리핀에 와서 받은 혹독한 신고식에서 수많은 기괴한 음식들을 처음으로 시도해 본 주인공도 바로 민상이야. 그러한 행동에 많은 필리피노들이 호응을 해줬지? 나는 뭘 했냐고? 그 장면들을 열심히 보고 지금 이렇게 얘기를 해주는 것 아니겠어? 자 말 좀 끊지 말고, 질문은 나중에~. 한번만 더 말을 끊으면 이야기고 뭐고 없을 테니까 조심하라고. 민상이 밴드에 속해 있으면서,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는 건 알고 있지? 민상네 밴드가 주로 연주했던 장르는 하드 록이라더군.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의 밴드였었는데 숨겨진 뜻이 있다고 하니, 한번 연구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야. 민상이 여기 필리핀에 와서 맡은 분야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지. 거창하게 말하면 데이케어센터이고, 가볍게 말하면 유치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거야. 처음에 민상은 무척이나 걱정을 했었어. 아이들을 가르치기는커녕, 어울려 본 경험도 별로 없었다고 하더군.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이건 웬걸. 같이 일하는 누군가의 제보에 따르면, 자신보다 더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모습을 느낀다는 거지. 말도 안 통하는 꼬마 아이들을 상대하다보니 마음고생을 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보면 잘 적응했다고 말 할 수 있어. 이러한 민상에게 한 가지 약점이 있으니 바로 매운 음식이야. 민상은 매운 음식을 먹으면 다음날 심하게 아플 정도로 몸에서 잘 안 받는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매운 음식이 먹고 싶을 때는 날을 잡아서 먹기도 한 대. 필리핀에 와서는 매운 음식을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을 수 없으니 어찌 보면 다행이기도 하지만, 매운 음식이 그리워져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나봐. 요즘 민상이 가장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은 닭갈비니 누군가 민상에게 밥을 사 주기로 결심했다면 닭갈비를 한번 고려해봐. 아마 점수 한번 두둑이 딸 수 있을 거야. 지금부터 맛있는 집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야. 어이쿠 저기 기다리던 차가 오는군. 혹여나 이야기가 더 듣고 싶다면 다음에는 그럴싸한 술 한 병 준비하라고. 언제든지 달려올 테니. 그럼 오늘은 반가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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