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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 wat dee karp, thai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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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8월 5일.....언제오나 했던 날이... 오지 않을줄 알았던 날이 찾아왔다.하지만 당일이 되서도 한국에 간다는게... 이곳 삼캉펭YMCA를 떠난다는게 믿겨지지 않았다.언제나처럼 일어나서 1층에 내려간뒤 피낭과 피멈에게 '싸와디캅' 이라며 인사를 했고피낭이 요리해준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나서 평소처럼 샤워를 하고 방으로 돌아왔는데..방에 덩그러니 있는 캐리어를 보니 평소와의 일상과는 다른 한가지를 해야한다는게 생각났다.옷을 먼저 꾸깃꾸깃 쑤셔넣고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줄 선물을 집어넣을때 까진 늘상다니던 캠프에 가는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캠프가 끝나면 늘 그랬듯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것만 같은....하지만 이곳 친구들과 홈스테이를 하면서 받은 선물들을 캐리어에 집어넣기 시작했을때야비롯 깨달았다. 오늘이 바로 마지막 날이라는것을....사연이 담긴 물건들을 하나하나 캐리어에 집어넣으며 지난 추억들도 같이 집어넣었다. 분명 태국에 올때보다는 가벼워진 짐이었지만 지난 5개월간의 추억이 들어있기 떄문일까? 들기조차 버겁게 느껴진다..짐을 정리한후엔 1층으로 내려갔다. 늘 보던것과 같은 풍경이었지만, 이제부턴 늘 볼수없으리란 생각에 평소엔 찍을 생각을 안했었던 피낭과 피멈의 모습을 담아두고 싶었다. 매일 보기때문에 그동안 안찍었다면 핑계일까? 핑계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사진을 한장한장 찍었다.그리고 5개월간 지지고 볶고 했던 집을...삼캉펭 YMCA를 떠났다. ○ 피낭과 피멈과 함께솔직히 그 다음부터는 뭘 했는지조차 모르겠다. 정신이 들었을때는 터미널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서 작별인사를 하고 있는 팀원들과 피낭과 피멈의 우는 얼굴을 보고 덩달아 울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뿐....그제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정든 이곳을 떠나는구나...라고...○ 터미널에 들어가기 전친구라고 먼저 불러줬던 피요.쿤따라고 부르며 옆구리를 찔러대던 피똔예의범절이 몸에 베셨던 피푸.모든 이를 덱덱으로 취급하시는 호탕하신 피프레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시던 피낭삼캉펭에서 매일 우리 뒷바라지를 해주시던 피멈so cool하신 피샤언제나 안전운전..은 아니지만 편안한 여행길을 책임지셨던 피툰대장님이신 피디그리고 온, 프로그, 땡&모, 핌, 자캼 3총사와 띵똥3총사, 윌리엄, 치아, 왕녀를 배웅나온 아랍왕자와 여러 친구들...그네들을 보는게 오늘이 마지막은 아닐테지만 그래도 슬펐다. 이유없이 슬펐다. 하지만 인사는 해야겠지라면서 우는 얼굴로 떨리는 목소리로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한국에 돌아가면 good boy 가 되라며 웃음가득한 얼굴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던 피프레의미소를 뒤로 한 채 비행기를 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무언가가 발에 메여있는지 발걸음을 떼기가 힘들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겨 나갔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걸어갔다.그렇게 걸어가다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니 유난히 아름다웠다. 언제나 아름다웠던 태국하늘이지만유독 아름다웠다. 슬프도록 아름답게 물들어있는 하늘이었다. 이 하늘을 보는것은 오늘이 마지막이겠구나 라며 혼잣말을 하고 있을때 옆을 지나가던닥완(닥스훈트+따완)이 멋진 한마디를 해줬다."오늘 우리는 그 하늘을 날아가요"'그렇지! 하늘을 날아갈수 있지. 날아올 수도 있고!' 그제서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면서발걸음도 가벼워진듯한 기분이 들었다. ○ 아마도 태국과 한국의 중간지점 즈음..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그리운 고향에 발을 디뎠다. 5개월만에 만난 고향에 말이다.그렇게 귀국을 한 뒤 지금은 한국에 있는 집에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솔직히 5개월간 못본 한국이기에 한국에 돌아오면 자동차가 날아다닐줄 알았지만 너무나도 그대로였기에 태국에서의 5개월이 꿈만 같았다. 하지만 옆에 있는 사진들과 마음속에 담겨있는 것들을 보니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추억과 소중한 경험들이었다. 잊지 못하겠지...아니..어떻게 잊을수 있을까?타타의 메뉴가 머리속에 들어있고, 사람들의 웃는 얼굴이 눈에 박혀있고, 정복하지 못했던 팍치냄새가 코를 간질이고, 피낭이 해준 카오똠의 맛이 입안에서 멤도는데...그리고 태국에서의 황금빛으로 물든 추억들이 심장에 꽉 차있는데.....어찌 잊으랴??난 추억은 가슴으로 하는거고, 기억은 머리로 한다는 말을 하고 다닌다.태국에서의 5개월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두근 거린다.그렇기에 추억임이 분명하리라..추억은 전부 기억할수 있지만, 기억은 전부 추억할수 없기에 지난 5개월은 생에 다시없을시간들, 인생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할 아름다운 추억이고, 경험이고, 선물이다.꼭 기억할꺼다. 태국에서의 5개월을...'sa wat dee karp, thailand, pot kkan mai'
2009.08.01. Campaign in Samkhanpaeng street mark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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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아마도우리의마지막활동이될듯한캠페인...우리가 살고 있는(우리의 주요 숙소) 삼칸펭YMCA 바로 앞에는 Main street가 하나 있는데,이곳에서 매주 토요일 마다 STREET MARKET이 열린다.치앙마이에 있는 나이트바자나 선데이마켓보다 조금 더 서민적이고,외국인의 손길이 닿지 않는 정말로 태국스러운 곳이라서 우리가 좋아하는 이벤트 중에 하나이다. 바깥 생활이 자유롭지 못한 우리에게 토요일의 Street market은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였다.여기에서 지낼 땐 항상 토요일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뭔가 사고 싶어서라기 보단 그냥 그 분위기 자체를 즐겼달까, 아무튼 그런 느낌으로...6월 이후(사실은 5월 부터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에는 본격적으로 태국의 우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street market이 제대로 운영되고 있지 않을 때가 많았다.오늘은 살 수 있을까, 오늘은 비가 안와야 될 텐데 하면서 6, 7월을 보냈다.홈스테이도 하고 이런저런 일들이 있어서 제대로 street market을 가지 못했는데 벌써 마지막이다.이제 태국에서의 토요일도 마지막이야,바로 3일 뒤면 태국을 떠난다니 믿기지가 않는다.왠지 평생 살고 있을 것만 같았던 곳이여서 그랬나 ?어쨌든,7월 마지막 주 부터 태국팀은 좀 바빴다.태국으로 한국에서 오는 2팀의 단기 봉사팀이 들어오게 되어 송국장님과 피인타논의 부탁으로 심각하게 회의를 한 끝에(?) 더이따오팀은 주니어 라온아띠를 맡아서 활동하게 되었고 우리 미녀 람푼팀은(^^) 인천Y에서 오는 꼬꼬마들을 맡아서 활동하게 되었다.이제 끝일 것 같았던 홈스테이도 하고 벽화도 그렸다.그리고 오늘은 공식적으로 우리의 마지막 활동이 될 캠페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제대로 설명을 듣진 못했지만 (아마)1기 활동의 연장으로 앞으로도 계속 이 삼칸펭 street market에서의 캠페인활동은 이어질 것 같다.태국아이들은 전날 부터 삼칸펭에 머무르면서 이런 저런 준비도 하고 각 팀별로 퍼포먼스도 준비하고 전투적인(?)태세로 캠페인에 몰입했다.주니어 라온아띠 친구들, 그리고 인천Y 친구들 모두모두 열심히 다 참여해줘서 너무 고마웠고 또 성공리에 캠페인을 마칠 수 있었다.마지막에는 집에 옮겨심을 수 있는 새싹(?)과 재활용 가방을 팔았었는데 팔다가 노래부르다가 팔다가 춤추다가 태국친구들, 한국친구들 함께 즐길 수 있었다.우리의마지막활동이이렇게끝났다▲ 각자 팀을 나눠 준비한 주제로 사람들에게 홍보하고 발표▲ 피챠님의 반 협박으로 이뤄진 응원단(웃음)▲ 함께 즐겨준 고마운 인천Y 친구들 윗줄, 좌로부터 오플로이, 간지지수, 영어를잘할것만같은정열이, 김퐈, 구따완, 귀염둥이...▲ 찍사한다고 제대로 사진 못찍어서 같이 찍어준 친절한 애기들과 장마리
태국에 다시 와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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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한국에 돌아가면 가장 많이 그리울 것 같은 사람들과 장소는먹고 자고 싸고 일하고 싸우고 웃고 운동했던 숙소, 쌍캉펭YMCA나 YMCA 사람들이 아니라집 앞에 있는 작은 TESCO LOTUS와 그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어느 순간부터인가 이름을 묻고, 여기 왜 왔는지 묻기 시작했다.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사실 여기서 나는 봉사자가 아니다. 다치면 안되는 '귀빈'이다.내 이름은 춈푸, 박선하가 아니었고 '콘까올리(한국인)' 또는 '국민은행과 한국Y서포트를 받아서 온 아이' 였다.그것에 질리고 질려 있던 내게 막무가내로 반말을 찍찍 하며 이름을 묻던 그 아이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 가 없었다. Y에서 하지말라는 일은 다 종용하는 그 아이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내가 말을 못알아들으면 발차기부터 날라오는 게 그렇게 시원할 수 없었다. 지점장 아저씨가 돈도 안쓰고 앉아서 시끄럽게 놀다가 별 희한한 짓 다 하고 가는 나를 슬슬 째려보기 시작해도 나는 버티고 앉아 있었다.매일 심심하면 자전거를 타고 테스코에 가서 가끔 일도 하고, 발차기하고 머리 치면서 놀고, 되도 않는 태국어로 수다떨고, 그리고 그 앞에 앉아서 아이들과 술을 마셨다. 태국 Y의 답답함에 눌려 있던 내게 그 아이들은 오아시스 같았다.실제로 알콜을 공급해주는 오아시스였다. (ㅋㅋㅋ)나를 막 대해주는 그 아이들에게서 편안함을 느꼈다. (ㅋㅋㅋㅋ)쉬는 날에는 차나 오토바이로 시내에 놀러가기도 했다.유일한 여자아이인 BIW가 남자친구에게 차였을 때 같이 위로주를 마셨다.며칠씩 다른 지역을 가면 아이들은 언제 오냐, 선물 사와라며 계속 전화를 해댔다.그러면서 태국어가 참 많이 늘었다.영어를 하나도 못하는 아이들은 내게 태국어를 열심히 가르쳤다.그러던 내게 얼마 전한 친구가 물었다."6일날 우리 다같이 원숭이 보러 가기로 했어. 같이 갈꺼지?""나...사실 말 못했는데, 4일날 한국 가."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 친구가 중요한 선언을 하듯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음...... 그럼 비행기 표 바꾸면 되겠네. 더 있다 가."며칠 후, 내가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한 아이들은내 MP3에 태국 노래가 하나도 없는 것을 알고 자기 USB를 빌려줬다.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다음에 태국 또 놀러올 때, 그 때 돌려줘. 그니까 꼭 다시 와."인건비가 싸고 전자제품은 비싼 태국에서 비싼 물건일텐데,그만 염치도 없이 받고 말았다.꼭 다시 올게.이별이 아니라, 돌아가서도 처음 라온아띠 출국날짜를 설레며 기다렸던 것 처럼다시 너희를 만날 날을 설레게 손꼽으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게.4일, 이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이별을 고하기에도 내게는 부족한 시간.
순간을 믿어요
99+
'마 티여우 익 마이?' 안녕-안녕-하는 슬픈 말 대신 아이들은 내 손을 꼭 잡고 묻는다.한국 안보내 줄거야. 라고 억지를 부려보던 친구들도 이제는 체념한 듯 이렇게 묻는다.고작 3일동안 밥만 축내던 우리를 보내며 우리집 메(엄마)가 펑펑 우시며 물었다.모두들, 안녕이라는 인사는 하기 싫은지 내 손을 꼭 잡고 묻는다.'또 놀러 올거야?' 라고. 그럼 또 나는 되묻고 싶다.'왜 또 살러 올거냐고 묻지 않는거야?' 그들도, 나도 알고 있다. 이곳이 내게 영원히 머물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1달간의 홈스테이를 마치고 차에 탈 때 펑펑 울던 우리집 아이도,고작 3일간 많이 먹고 늦게 일어나던 게으른 우리를 보내며 펑펑 우시던 치앙라이 엄마도,나의 '탈선행각'에 큰 도움을 주었던 YMCA와 상관없는 동네 친구들도,매일 우리를 위해 밥을 해 주시던 스탭들도.나는 이곳을 5개월간 느리게 지나가는 사람.이제 나의 발걸음이 4박자를 맞추어 이 곳을 완전히 빠져나가면내가 없었다는 듯이 이 사람들의 일상은 돌아가겠지만아마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학교에 갈때마다 꼬질한 내가 뭐 그리 좋다고 달려들던 도이따오 아이들 얼굴 하나하나,자전거 타던 쌍캉펭의 예쁜 하늘,매일같이 놀러가서 요구르트 하나 사고 앉아서 놀았던 집 앞 TESCO 친구들,어디 멀리 가서 숙소에 없을 땐 전화를 해서 선물사오라며 한마디씩 시끄러웠던 그 아이들,그 앞에 앉아서 같이 맥주를 마시다가 봤던 밤 거리 풍경,길거리에서 지나가던 코끼리,내가 머리에 쓰고 다니던 수건이 보기 싫다며 확 뺏어버리던 도이따오 선생님들,나를 보내주며 펑펑 울던 매홍손의 꼽,벤이 아닌 자전거를 타며 달리던 길도이따오에서 9살짜리가 모는 오토바이 뒤에 타고 가던 길,음악을 연주하며 같이 태국 유행가를 불렀던 것놀아달라고 쫓아오는 아이들이 무서워서 자는척하다가 더워 질식할 뻔 했던 것,밤에 몰래 집 앞에 나갔다가 문이 잠겨서 담넘고 들어왔던 기억스탭이랑 잘 되지도 않는 영어로 싸우고 한달 넘게 말도 안하고 지냈던 것'깨- 너 맨날 까불지만 니가 참 좋은 애라는거 알아. 너 정말정말 좋아해' 했더니얼굴이 빨개지며 자전거로 저 끝까지 달려가 버리던 도이따오 산골아이'YOU! 띵똥 막막 러이 - (띵똥 : CRAZY / 막막 : 너무, 엄-청!)" 하던 치앙라이 아이들별 대단한 것들보다쉽게 지나칠 수 있던 순간들이 기억속에 선명하다.이제 곧 모두가 '과거'가 되겠지만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나를 위로해 준다.너의 영원한 미소 그리워 이 순간들을 다시 헤아려보니 그래도 내겐 기쁨이 더 많았어영원한것은 없다 생각하지는 말아요, 우리 기억속에 남은 순간을 믿어요이제 모두 영원한 순간이 되려하네참 잘 했다, 라고 스스로 뿌듯해 할 일이 많지는 않지만참 고마운 사람들이 많기에.
5월 :: 람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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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대략적인 현지적응을 마친 5월즈음에 이르러서 본격적인 홈스테이 활동을 시작. 람푼씨티에서 40분 거리에 있는 타캇이라는 동네로 입성하게 되었다.. 두둥! ▶그냥 마을 모습. 하늘이 참 예쁘다. 밤엔 별이 쏟아질거같이- 슬쩍 며칠쯤 지냈던 것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였으니.. 어쨌거나, 이곳에서 하게 된 일은 대략 학교가기+퇴근 후 마을생활하기 쯤이 되겠다. 일단 학교. ▶학교 간판(?). ▶학교 운동장 ▶학교 건물(교무실과 4~6학년 교실, 컴퓨터실, 도서실이 있다) ▶아침 조회모습. 아침마다 운동장에 모두 나와 조회를 한다. 국기 게양 후 선생님의 말씀, 아이들의 간단한 스피치 그리고 무예타이 체조로 시작되는 학교의 아침. ▶학교 부속 유치원 아가들도 조회에 함께한다. 교복위에 앞치마를 입은 모습. 아 이에 앞서 마을 입성 첫날에 이루어진 학교 선생님들의 축하회식! 어쩌면 이날부터 우리는 선생님들의 진면목을 적나라하게 봤을지도 모를.. 일이다... ▶회식중. 아직은 낮이라그런지 정갈한 맛이 나는 것 같... 태국인의 삶의 가장 큰 낙인 가라오케가 시작되고부터는 모두가 하나되는 진풍경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오프 더 레코드... 이렇게 시작된 홈스테이. 대략적인 일상을 살펴보자. ▶아침에 무척이나 일찍 등교하는 아이들. 모두가 학교 청소를 한다. 보통8시에서 8시 반쯤 조회가 시작되는데 7시쯤부터 학교에 모여드는.. 아침에 학교가기 싫어서 이불속에서 버둥댔던 나를 생각하면 참 기특한 일이다. 게다가 청소까지 하다니. ▶ 무예타이 체조를 하는 따완과 아이들. 저 너머로 파도 보인다. ▶ 요일마다 바뀌는 교복. 오늘은 예쁜 태국 전통의상을 입는 날. 노란 옷을 입은 아이들을 보면 병아리 같다. 물론 날보고 외치는 함성을 생각하면....-_-...닭이다... ▶ 학교 건물 안에서 바라본 창밖풍경. 불교국가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는 절들이 마을마다 꼭 하나씩 있다. 학교 옆에 있는 절. ▶아가들과 놀아주고 있는 파와 따완. 자갈을 쌓고 무너뜨리는 정체모를 놀이다. ▶방과후 모습.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를 하는데 수업이 끝나면 집에가서 옷을 갈아입고 학교로 다시 모여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학교가 공부만을 하는곳이라기 보다 아이들의 사랑방 역할까지 톡톡히 하고 있는 셈. 특별히 '피 까올리(한국언니, 누나)'를 집으로 모셔가야 하는 특명을 받은 아이들은 이곳에서 오랜시간 대기하기도 하는데.. ▶예쁜 하늘. 그러나 너무 더워서 기력이 쇠했던 기억뿐... ▶내동생 씨빗. 특히 홈스테이 초기에는 내가 어딜가나 뭘 하나 꼭 따라다녀야만 한다고 해서 나를 눈물흘리게 했던 녀석. 나중에는 나따위 아웃오브안중이긴 했다. ㅋㅋㅋ 저 캐리어식 책가방은 요즘 유행아이템인듯. 그야말로 '잇백'인 셈. ▶우리집에 놀러온 아이들. 재밌는건 내가 태국말을 잘 못하니까 아이들에게 애취급 당한다는 거다. 언어구사수준으로 레벨이정해 졌으니.. 아직 저렙이지만 언제나 만렙을 이상으로 하고있다. 어쨌든 나의 부족한 실력이나마 향상시켜준 원어민 선생님들인 셈. ▶이것은 비밀컷! 울 학교 교장쌤의 달콤한 낮잠 도촬 ㅋㅋㅋ 우리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셨던 얼리어답터 교장쌤! 물론 이렇게 주무시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며 대부분은 눈썹 휘날리시며 일하느라 바쁘시다. 하루종일 학교에 있어서 못 뵙는 경우도 있고잉. ▶우리 외증조할머니! 엄마의 엄마의 엄마다. 실제 연세로는 나의 할머니정도. 다들 일찍 결혼해서 일찍 아이를 낳으시는 바람에 외할머니의 연세가 한국엄마의 연세와 비슷했다는.. 외증조할머니께서 지금 하고 계신것은 대나무로 직물짜기(?). 이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것으로 모자를 만든다. 나름 손재주가 있다고 자만했건만 이 엮기를 배우는데 외증조할머니 애를 꽤 먹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인! ㅋㅋㅋㅋ ▶외증조 할머니께서 만드신 대나무줄기(?)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씨빗. 지금 씨빗이 쓰고 있는 모자같은것을 만든다. ▶ 외삼촌할아버지. 아까 외증조할머니께서 엮으신 것을 실로 밖아 모자를 만드신다. 2차원에서 3차원으로 변화하는 모습. 신기하다. ▶토요일 밤에 서는 싼캄팽 스트리트 마켓. 현지인들이 즐겨찾는 명소 중 하나. 매주 다양한 물건들이 착한 가격으로 선을 보인다. 현지 사장님들 역시 흔쾌히 깎아주시는 그야말로 매력만점 놀이터. ▶일한다.. 좌맥주 우마우스(혹은 키보드)로 일하는 모습. 대략 이정도. 사실 5월은 홈스테이 적응하느라 개인적으로 힘겨웠던 시기이기도 하다. 가족 외의 사람들과 살아본 경험이 없던 나로서는 말도 잘 안통하는 이들과 한집에 산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 이기도 했을 뿐더러.. 사생활(?)에 대한 문화차가 엄청난 폭풍으로 다가왔었기 때문에. 방문을 노크없이 열고 들어온다던가 창문에 커튼이 없어서 밖에서 다 보인다던가 하는 아주 사소한것들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한계를 슬슬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물론 현지 YMCA스탭들과 가족들의 도움으로 많은 부분 개선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게 맞춰주시려고 정말 많은 분들이 노력하신거지. 지독한 개인주의의 노예로 살아오던 내가 해방되는 순간일수도 있었을 게다. 그러나.. 까놓고 얘기하자면 그때의 난 돌아버릴것 같이 힘들기도 했다. '알을 깬다는게 이런거구나'라는 수준에도 이르지 못할 정도로...(의식이 희미해지고 있었던거 같다;; 덕분에 팀원들에게 보이지 않아도 좋을 모습까지 보이기도 했다. 미안..-_-*) 어쨌거나 이것이 홈스테이 시작의 단상.
아무데서나 잘 먹고 잘 자는 태국팀: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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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6. 23 태국에 온지 벌써 100일이 지났고,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기 40여일의 시간이 남았다. 이 곳에서 몸에 익숙해지고 배운 것 중에 이동식 생활을 통해 하나가 어디가던지 잘 먹고 잘 씻고 잘 잔다는 것… 베이스캠프인… 이제는 정말 집이라고밖에 생각 안 되는 쌈캉펭 YMCA외에도 정말 여러 곳에서 짧게는 1박2일 길게는 한달 정도의 시간을 숙박을 하였다. 아직 남은 기간 또 이동해서 머물러야 할 곳이 있긴 하지만… 지금까지 태국에서 머물렀던 숙소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1. 쌈캉펭 YMCA (3월 5일~8월4일) 우리의 집!!!! 가장 편한 곳~~ 처음 치앙마이 공항에 내려서 Y스탭들이 우리를 데려다 준 곳은 바로 이곳 쌈캉펭 YMCA이다. 빈 교실에 있는 책상을 싹 치우고 서랍장과 빨래 바구니, 옷걸이와 침대 메트리스, 이불, 베개… 이런 섬세한 배려까지 해주신 우리의 포근하고 아늑한 숙소이다. 태국팀 10명중 여자 8명은 한방에 4명씩 2층 205호와 206호에서 지내고 있고 남자 2명은 3층 한방을 쓰고 있다. 처음 왔을 때는 나는 사다리 타기로 뽑아서 따완(수진), 마리(민영), 꿀랍(자하)과 한방을 썼는데 4월이 되면서 플로이(서현), 퐈(희진), 마리(민영)와 한방을 쓰고 있다. 그 후에는 귀찮아서 그냥 방 안 바꾸고 쭉 살고 있다. 이곳의 음식은 Y 스탭이신 피멈과 피낭이 오셔서 아침 점심 저녁을 해주시고, 1층 부엌에 세탁기도 있어서 빨래도 쉽게 할 수 있다. 샤워시설은 화장실에서 하는데 벌레가 좀 많고 찬물만 나오긴 하지만 이젠 적응해서 샤워하는데 불편함은 없다. 다만 비가 온 날에는 날개 달리고 징그러운 벌레가 화장실 바닥과 세면대를 뒤덮고 있는 건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Day off를 보내고 있고 저녁이 되면 우리팀끼리만 남아서 각자 혼자 시간을 갖기도 하고 함께 보내기도 하면서 지내고 있다. 마음도 몸도 이곳에 오면 가장 편한 쌈캉펭 YMCA~! 정말 우리의 ‘집’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이 좋은 곳이다. 2. 람푼 홈스테이 (3월 16,17일 / 5월 19일~7월3일) 모든 라온아띠 멤버는 5명이 한 팀이 되서 각 나라로 파견되어 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태국팀만 람푼팀, 쌈캉펭 팀(지금은 더이따오 팀이지만) 이렇게 두 팀이 와서 10명이서 함께 생활하고 있다. 태국에서의 대부분의 생활은 10명이서 한팀처럼 같이 생활하고 있지만, 예외적으로 지역에 들어가는 기간에는 따로 지내고 있다. 우리팀인 람푼팀의 경우는 와타캇 스쿨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있고, 더이따오팀은 더이따오 프랭8스쿨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10명 한 명씩 다른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고 있는데, 나의 경우는 람푼팀이기에 람푼에서 생활하고 있다. 3월 중순에 홈스테이를 미리 체험해 보는 기간으로 람푼에서 2박, 더이따오에서 2박을 했었다. 람푼 우리 집에 촘푸랑 같이 2박을 했었는데 그 때는 근처 사는 아이들이 자기집인양 마구 놀러 와서 우리랑 놀아달라고 하고 사람들이랑 말도 통하지 않아서 어떻게 지내야 할지 막막하고 힘들었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고 5월 중순에 홈스테이 들어와서 계속 홈스테이를 하고 있는 현재는 태국에서의 생활이 많이 적응되어서 인지 불편하지 않고 난 오히려 집에 있으면 편하다. 우리 집 가족의 경우는 메(태국어로 엄마), 피웨(언니) , 피겜(삼촌?), 봇(우리애기), 야이(할머니) 이렇게 다섯명이서 살고 있는데 야이와 피겜은 나랑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는다. 보통 메가 밥 먹거나 여러가지 많이 챙겨 주시고, 피웨는 날 볼 때마다 옷이나 신발 같이 이것저것 선물을 많이 주신다. 그리고 우리 집 귀염둥이 봇은 낯가림이 심해서 처음엔 내가 불러도 들은채 만채 하더니 지금은 만나면 신나게 잡기 놀이를 하며 즐겁게 지내고 있다. 내 방은 굉장히 아담한데 큰 침대 메트리스가 방 전체를 차지 하고 있고 조그마한 테이블 하나가 앞에 있다. 그리고 나의 친구 도라에몽 인형도 함께 생활하고 있다. 23년만에 처음으로 혼자만의 방을 갖게 되었고, 방에 있으면 가족들이 부르긴 하지만 피곤하다고 하면 터치를 하지 않기 때문에 누워서 음악 듣거나 일기 쓰거나 편지 쓰거나… 그냥 그렇게 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샤워시설의 경우는 무려 뜨거운 물도 나와서 따땃한 물로 샤워를 하고 있으며, 빨래는 가끔 빨래 통에 넣어놓으면 세탁기에 돌려서 다 마르면 우리 방에 옷걸이에 걸어서 주시는데 언제 빨래를 주실지 몰라서 그냥 맘 편하게 쌈캉펭 YMCA가서 빨고 있다. 5월 중순부터 7월초까지 홈스테이 할 예정이고, 평가회를 빼면 이제 일주일도 홈스테이 기간이 남지 않았다. 주말은 항상 쌈캉펭 Y에 가거나 다른 지역에서 생활을 해서 평일에만 홈스테이를 했었는데, 우리 집 가족들이 정말 좋아서 그리울 것 같다. 남은 기간동안 우리 봇이랑 잘 놀고 메 말씀 잘 듣고 착하게 지내야 겠다. 3. 더이따오 홈스테이 ( 3월 18,19일) 3월 중순에 2박 했었던 더이따오 홈스테이. 난 더이따오 팀의 수은이(모아)와 함께 홈스테이를 했었다. 람푼 지역은 시골 동네에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는 분위기라면 더이따오 지역은 산동네(첩첩 산골은 아님)에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지는 않다. 수은이네 집은 할머니, 할아버지, 쨍이라는 유치원 아가와 지내고 있는데 애기도 귀엽고…(너무 놀아 달라고 하는게 수은이는 힘들다고 하지만)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친절하게 잘 챙겨주셔서 편했던 것 같다. 4. 도인타논 텐트 (4월 1일,2일) 태국에서 가장 높다는 도인타논. 이 곳에서 우리는 유스리더들과 캠핑을 했었다. 산속에서 이렇게 텐트치고 자고, 캠프파이어 한 것은 처음이라서 마냥 신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텐트에 2명이 함께 들어가 잠을 잤는데, 제비 뽑기로 라온아띠 한 명과 태국 유스리더 한 명이 짝이 되어 한 텐트에 들어갔다. 그러나 나는 어찌 된게 박촘푸, 김마리(장민영)..이렇게 콘까올리(한국사람) 셋이서 잠을 자게 됐다. 덕분에 밤새 옆 텐트가 시끄러울 정도로 민영이랑 떠들었지만… 이 곳에서 밥은 Y 스탭분들이 신경 써줘서 맛있게 먹었고, 샤워장은 근처 별장 같은 곳에서 편하게 했었다. 밤하늘을 이불삼고, 잔디밭을 요 삼아 잤던 기분… 밤에 산에서 아래를 내려보면서 느낀 자연을 통해 벅참 감동이 있었던 행복한 도인타논 캠핑이었다. 5. 도인타논 카렌족 마을 (4월 3일) 도인타논 텐트에서 2박을 하고 도인타논에서 살고 있는 카렌족 마을에 가서 1박을 했다. 홈스테이라고 볼 수는 없는 건 마을사람 집 한집을 통채로 빌려서 한집은 여자숙소, 한집은 남자숙소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텐트를 치고 잤다. 밥은 이번에도 Y스탭들이 해주셨다. 샤워는 화장실에서 했는데 화장실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안에 촛불을 키고 했었는데 그리 깨끗하진 않았지만 까올리 쏘까뽁(한국인 더러워)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 난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 그리고 도인타논에서의 잠은 둘 다 침낭에서 잤다.(텐트에서랑 카렌족 마을 집에서 둘다) 사실 침낭에서 잔건 라온아띠 국내 합숙훈련때 양평 가서가 처음이었는데… 이래저래 올해 침낭에서 많이 자게 된 것 같다. 6. Praw 마을 홈스테이 (4월 24일, 25일) 유기농 농산물을 키워 판다는 praw마을. 이 마을에 가서 두 명씩 짝을 지어 홈스테이를 했다. 이번 파트너는 따완(구수진)이었다. 이 마을에서의 기억은 더운 것밖에 없다. 태국은 4월에서 5월초가 건기라 정말 더운데, 이 더위는 살인적이라 한국에서는 느낄 수 없을 정도의 강한 햇볕에 몸이 녹아 내릴 지경이다. 쏭크란이 4월중순에 하는데 왜 그때 송크란을 하는지 알 것 같다. 쏭크란을 하면 신나게 물을 뿌리고 맞다 보면 더위를 잊고 오히려 추울 정도니깐… 홈스테이 기간에 잠시 농산물 수확 및 포장 도와 드리고 새벽시장 열리는 곳 따라가서 장사 조금 도와 드린 정도… 그냥 그럭저럭 이 때부터 홈스테이 및 짐싸기에 달인이 된 것 같다. 7. 치앙라이 Y호텔 (5월 10일 ~ 14일) 지금까지 묵었던 숙소중에 최고급 이었다. 무려 호텔이었으니깐… 오랜만에 누워보는 폭신폭신한 침대 메트리스, 하얀 시트와 이불, 그리고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시설...그리고 맛있는 식사까지!!! 치앙라이에 있었던 기간은 HIV마을 방문, VISA연장하러 미얀마 국경 방문, 댐 만들기 작업등 짧은 기간에 많은걸 경험하고 배운 시간이었고 아무리 힘든 일정 속에서도 숙소가 좋아서 몸과 마음이 편했다. 처음으로 쌈캉펭Y에 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자발적 가난, 자발적 불편함을 겪으러 왔다고 하지만…. 역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편한 것 익숙한 것이 좋은가 보다. 8. 더이따오 프랭8스쿨(6월 5일,6일) ‘Y volunteer for EARTH ‘camp를 하기 위해 유스리더들과 함께 더이따오 프랭8스쿨에 모였다. 프랭8스쿨의 도서관을 정리하고 페인트칠 및 벽화를 그리는 작업이었는데 람푼팀도 더이따오팀과 함께 했다. 오랜만에 간 더이따오였고, 당연히 3월 달에 왔던 홈스테이 집에서 잘 줄 알았는데 유스리더들과 함께 학교 교실에서 자게 됐다. 타이유스리더 아이들과 라온아띠는 다른 교실을 썼는데, 모기장도 쳐 주시고 침낭 속에서 잤다. 이제 침낭이 더 이상 낯설지 않는다. 9. 메홍손 지역 홈스테이 (6월 13일~15일) 원래는 없던 스케쥴 이었는데 우리의 요청과 여러 사람의 의견이 모아져 갑작스럽게 방문하게 된 메홍손. 도인타논에서도 봤었던 카렌족이 사는 마을에 방문하게 됐다. 태어나서 이렇게 길이 험하고, 첩첩 산골은 처음 가봤다. 치앙마이 쌈캉펭 Y에서 메홍손 시내까지 차로 3시간(이 길도 중간에 구불구불해서 편한 길은 아니었다.) 그리고 바퀴가 큰 썽태우를 타고 3시간 정도 가서 도착한 마을. 썽태우 타고 가는 길은 비포장 도로에 구불구불한 산길이라 어떻게 올라가나 싶을 정도로 험하고 멀었다. 이 곳에서도 홈스테이를 했는데, 이번엔 2인 한집이 아닌 one by one 한명 씩 한집에 들어가게 됐다. 나는 찐따나라는 13살짜리 소녀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방 한 개를 빌려줘서 편하게 잘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갔던 숙소 중에 환경은 최악이었다. 물도 빗물을 받아서 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석회가루가 섞여서 뿌연색이었고, 밤에는 불 안 들어 오는 집도 많고 거리에는 가로등이 하나도 없어서 저녁8시만 되면 밖은 달빛만 보일 정도로 깜깜했다. 씻을 때도 우리 집 화장실은 불이 안 들어와서 어둡고 냄새 나는 화장실에서 석회물로 씻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곳 저곳 홈스테이하고, 여기저기에서 자는 거에 단련이 되어서인지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다만 밤이 빨리 찾아와서 다른 곳에 있을 때보다 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지만… 태국에 살지만 태국인이 아닌 소수민족.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 사람들과 닮은 카렌족. 그들은 첩첩 산골에서 계속 살아왔기 때문에 그곳이 편해서 사는 걸까. 아니면 갈 곳이 없어서 계속 그곳에서 머물 수 밖에 없는 걸까. 나의 편견일 수도 있지만, 가진 것이 없어서 웃고 떠들고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이었지만, 이 사람들의 행복이 과연 어떤 색인가 생각해보게 되는 홈스테이 기간이었다. ------------------------------------------------------------ 이렇게 우리는 3달반동안 9곳의 숙소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덕분에 이젠 어디 간다고 하면 짐도 몇 분이면 금방 싸고 자는 것도 씻는 것도 먹는 것도 어디 가서든 적응을 잘 하게 되었다. 7월초에 일주일정도 휴가를 받아서 여행을 가게 됐는데, 아무리 싸고 질 나쁜숙소에 들어가도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끔 내가 태국에 와서 무엇을 배웠나. 얼마나 많이 변했는가를 생각하곤 한다. 그게 무엇이라고는 아직 확실하게 정의 내릴 순 없지만, 이렇게 태국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있고 생활할 수 있는 나와 우리팀원들을 보면 많이 성장하게 적응 한게 아닌가 싶다. 앞으로 남은 한달 반 동안의 태국에서의 기간도 태국을 좀 더 배우고 적응하면서 지내고 싶다.
아픔 속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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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7. 3람푼에서의 생활이 내일이면 작별을 한다. 학교에 오면 ‘피차엠~’ 하면서 나를 부르는 아이들을 보는 것도, 재밌고 친절하신 선생님들을 만나는 것도, 날 항상 보살펴 주시는 호스트패밀리와 함께 지내는 시간도, 우리의 ‘능썽쌈’하면서 펀치를 날렸던 무에타이 도장도, ‘히우카우’(배고파요) 하면서 양쁠라 두부 먹었던 식당도… 그 외 익숙한 람푼의 풍경들이 오늘 마지막 밤을 보내면 내일 다시 쌈캉펭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처음에 이 곳에 왔을 때 막막했었다. 어떻게 아이들을 대해야 할지, 어떻게 가족들을 대해야 할지… 아이들은 우리가 뭐가 좋은지, 피 까올리~(한국인), 혹은 우리의 태국이름을 부르면서 매일 쫓아 다녔다. 우리를 좋아해주고 받아 준 아이들이 예뻤던 것도 잠시… 우리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우리를 점점 지쳐가게 만들었다. 아이들과 노는 대신 우리는 교장실에 앉아서 책을읽고, 다이어리를 쓰고, 컴퓨터를 하고, 편지를 쓰는 등 각자 자기 할일을 하며 학교에서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사실, 태국은 이미 생활 기반이 잘 갖춰져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의 손길이 많이 필요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해외자원봉사의 개념은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고 같이 더러워지고 같이 아파 하는 숭고한 희생정신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태국에서의 자원봉사의 개념은 너무 달랐다. 우리가 주체적으로 활동을 찾기 보다는 YMCA에서 끌고 다니는 데로 따라 다녔고, 갑자기 스케쥴이 바껴도 우리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듣지 못했고, 심지어 자기네들 스타일에 맞추기를 요구하면서 보고서가 튕긴적도 있었다. 스케쥴은 유동적이었고, 여러 마을을 다니면서 잠깐씩 아이들과 만나는 시간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는 체계적으로 프로그램을 짜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보다는 항상 ‘안녕하세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다시 만나요’ 등의 짧은 인삿말들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고, 꼬리잡기, 말전달하기 게임, 나따라해봐요, 개구리송, 곰세마리 등 매일 비슷한 패턴의 수업을 하였다. 그리고 한국인만 보면 ‘땐 노바디~(노바디 춰주세요)’하는 사람들 속에서 작년 노바디 열풍때도 추지 않았던 노바디를 연습해서 사람들앞에서 춤을 췄다. 이 곳 생활을 하다 보면 말도 통하지 않고, 여기서 시키는 일조차 잘하는지 모르겠고, 스스로 무언가 찾아서 이곳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데 찾기 힘들었고, 모든게 다 제대로 되지 않는것 같아서 태국에 왜 왔는지에 대해 괴리감이 심했다. 그러나 태국에서의 생활도 엄연한 자원봉사였다. 며칠전에 중간평가를 하기 위해 송실장님과 인천 Y간사님께서 왔다 가셨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송실장님께 자원봉사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했다. 내가 생각했던 자원봉사는 바로 성과물이 보이는 일은 아니지만, 강요 받는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찾아서 즐거운 마음을 갖고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서로 행복해지는 모습을 서서히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곳에서는 항상 끌려 다녔고, 여기서 시키는 일 외에는 제대로 한 것이 없어서 답답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송실장님은 해외봉사의 경우 그 나라에 따라 자원활동의 내용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하셨다. 태국같이 기반이 잘 갖춰진 나라는 동티모르처럼 아무것도 없는 나라에서 하는 일대신 이 곳 사람들이 노바디를 춰달라고 하면 추는 것이 맞는 거라고 하셨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복지 뿐만 아니라, 중상층을 위한 복지도 필요한 것이고 피비랜내 나는 전쟁터에서 아이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 만이 숭고한 자원봉사가 아니라고 하셨다. 그러나 자원봉사 하면 절대 빈곤,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모습등이 먼저 떠오르는 고정관념을 갖고있는 나로서는 이미 기반이 잘 갖춰저 있는 태국이기 때문에 람푼에 와서도 우리가 과연 필요한 존재일지에 대해 회의감이 많이 들었었다. 처음에 나온 수업 시간표는 우리가 일주일에 8시간정도 아이들과 수업할 수 있는 시간이 할당되어 있었다. 그러나 3주차 쯤 되었을 때, 방콕에서 학교 평가를 오셔서 아이들은 우리들과의 수업대신 시험공부에 더 매진을 해야 했고, 우리들을 일주일에 한번 세 시간 몰아서 하는 수업시간 밖에 받지 못했다. 게다가 그 적은 수업 시간 조차도 매번 변동되는 YMCA 일정 때문에 지역활동 하다가 다른 곳에 갔다가 오면서 취소 되는 경우가 많아 제대로 수업했다고 하는 시간은 다섯손가락도 넘지 못한다. 이래선 우리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냥 시간떼우기 아닌가… 그리고 아이들한테 대체 뭘 가르쳐야 할지 혼란스러웠고 답답했다. 그러다 내가 찾은 해답은 – 정답이라고 는 확신할 수 없지만 – 무언가를 제대로 해야 겠다는 강박관념을 갖기 보다는 이대로 물같이 흘러가는 스케쥴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한달 반정도밖에 안되는 기간에 한국어를 아무리 체계적으로 가르친다 해도 아이들이 얼마나 기억 할 수 있을까? 심지어 난 고등학교때 제2외국어로 2년동안 수업 들었던 중국어도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매일 붙잡고 있는 영어도 잘하지 못한다. 이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체계적으로 가르친다는 것은 내 오만한 생각일 뿐이었다. 먼 한국에서 건너온 우리를 보며 신기하고 반가워 하는 아이들과 웃고 떠들고 뛰어다니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게 더 많은 것을 주는 거라고 깨달았다. 그리고 송실장님이 왔다 가면서 람푼지역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Y에서 왜 람푼과 더이따오를 활동지역으로 선택했는지 생각해 본 사람있냐는 질문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더이따오의 경우는 댐건설을 하면서 원래 있던 마을을 강제로 이주시킨 마을이고 삼모작에서 이모작 혹은 일모작밖에 할 수 없는 지역으로 오게된 마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보상을 해주지 않아 10년전에 농민운동으로 피비랜내 나는 지역이었다고 하였다. 왜 산골 마을에 있는 집들이 새 집 처럼 깔끔하고, 길이 반뜻하게 닦여 있는지 의문을 품지 않았냐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람푼의 경우는 원래 농촌마을이었는데 큰 공단을 들어서면서 갑자기 이주민들이 마을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원주민가 이주민간의 마찰이 생기면서 마을 환경이 급격히 변해 지역사회가 혼란스럽다고 하셨다. 항상 웃고 있고, 우리들에게 항상 호의적이었던 더이따오와 람푼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그런 아픔이 숨어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지역활동을 시작할때쯤 팀내부의 문제, 현지 스탭들과의 마찰, 일에대한 스트레스 등 여러가지가 겹쳐서 하루하루 이겨냈고 아이들에게 웃는 얼굴로 대하기 보다는 피곤하다고 피해버린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에 이 곳에 내가 왜 왔는지 생각하기 보다는 하루하루 버티는것도 힘든 날도 많았다. 한 달 좀 넘는 시간동안 내가 이 곳 람푼에 와타캇 스쿨에서 지낸 게 이들에게 어떤 의미일지는 아직도 잘은 모르겠다. 마을 전체가 알고 있는 깜짝 이벤트 일지도 모른다. 그 깜짝 이벤트가 이들을 즐겁게 했기에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고 싶어 지나친 관심을 표했고 친절을 베풀었다고 생각한다. 그 호의를 감당하기 힘든적도 있었지만 우리의 존재를 무시하고 냉소적으로 바라보지 않은점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겉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혼란한 시간을 겪고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우리의 존재가 즐거움이 되고 희망이 되었길 염치 없이 바랄 뿐이다. 지금까지 람푼지역에서 우리를 받아준 모든 분들께 다시한번 감사의 마을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귀여운 덱덱(아이들), 쿤 크루(선생님), 크럽쿠르아 컹 찬(나의 가족) 모두 보고싶을 것이다. 다시 내가 이 곳에 올 수 있을까? 아니 이곳에 오고 싶어 할까? 확실한건 이 곳을 그리워 하긴 할 것이다. 모두 컵쿤막막카. 싸와디카. 촉디나카. (정말 고마워요 안녕히 계세요, 행운을 빌여요)
namping의 이야기 - 3개월이 다 되어가는 어느 시점, 어느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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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태국에서 지낸지 3개월이 다되어간다.이제는 같은 팀원들도 이름보다는 '남삥' 이라는 이름이 입에 붙었는지 나를 부를때 '남삥오빠' 내지는 '남삥'이라고 부른다. 그나마 형 소리 안듣는게 다행이랄까..ㅡㅅ-;;하여튼 '김충현' 이라는 한국이름보다는 '남삥'이라는 태국이름이 더 익숙해져간다.요즘은 '더이따오'라는 곳에서 홈스테이를 하며 이곳에 있는 학교에서 아이들을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근데 이 학교가 '대안학교' 같은 형식이라 수업분위기가 상당히 자유분방하다. 쉽게 풀어쓰자면 수업시간인지 가끔 의문이다;;이런 분위기인지라 아이들을 가르치기가 좀 난감할때도 있다. 우리가 전적으로맡아서 하는 수업이라고 해봤자, 한국어클래스가 전부이지만;; 실은 다른 수업시간에도우리가 배정되긴 했는데 막상 들어가봤더니 그냥 수업보조, 다른 말로는 꿔다논 보릿자루?와 같은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가끔은 허탈하기도 하다. 하지만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웃고 떠드는 아이들과 지난 학창시절(?)의 나를 비교해보면 부럽기도 하다.다음날이 시험이어도 '빠이티여우마이?(놀러갈래?)' 라고 했던 우리집 꼬맹이.아이들이 돌아다녀도 그저 웃으시는 선생님(아닌 분도 계시지만;;)한국과 비교하면 할수록 이곳은 어린이들의 천국?이 아닐까 싶다.'우리나라엔 국제중학교같은 것도 생겨서 초등학교때부터 6년 내내 공부할텐데....중학교가면 좋은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3년 내내 공부할텐데...고등학교가면 좋은 대학교에 가기 위해 3년 내내 공부할텐데...대학교가면 좋은 직장에 가기 위해 4년 내내 공부할텐데...좋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직장에 들어간다고 과연 행복할수 있을까?어릴때 친구들과 뛰어놀던 소중한 기억들을 나는 가지고 있는데 요새 아이들은..나의 아들,딸은...가질수 있을까? 이곳의 아이들처럼 건강하고 해맑게 웃을수 있을까?'엊그제 '더이따오'의 아이들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생각해보니 3월에 태국에 온 이후 꽤 많은 곳(나름)에 다녀봤지만 축 쳐진 얼굴을 한 사람을 본 적이(내 기억이 맞다면) 없다. 물론 이곳 YMCA에서 보여주는것만 봐서 그럴수도 있지만 가능하다면 태국사람들 모두가 늘 웃는얼굴이었으면 한다.어쨌든 눈이 마주치면 인사를 건네며 웃어주는 사람들을 보면서 지금의 나보다는 행복하게 살고 있는거 같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의 난 다른이와눈이 마주쳤을대 웃어주면서 인사를 해줄만한 마음의 여유가 그리 많진 않았으니..태국사람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과연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이곳에서 내가 무엇을 할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했는데, 그 고민은 지금까지도 답이 안났다.하지만 정답없을 그 고민에 대해서 같이 행복하게 지내는게 어떻게 보면 지금의 내가 할수있는 최선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요즘엔 아이들과 좀 더 많이 놀아주고 있다. 아직까진 아이들과 놀아주는게 익숙하진 않지만 노력하는 수밖에;; 여하튼 자원활동을 하러 온 이곳이지만 되려 내가 배우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새삼스런 다짐을 한다.이곳에서의 남은 소중한 2개월,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지!라고~!!!그리고 언제나 태국사람들이 물어보는 질문을 나에게 던져본다."싸눅마이?(즐겁니?)""캅(네),싸눅막막캅(정말 즐거워요.)"
3.('♡') 우리의 태국이름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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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노마인드에 혹시 뭔일 날까봐 'ㄱㄴㄷ~' 순으로 정리하였습니다._꿀랍(Kularp) : 김자하'장미'_ 남삥(Namping) : 김충현(23)우리나라로 치면 '한강'과 같은 치앙마이의 젖줄_ 따완(Tawan) : 구수진'해, 태양'_ 똥카우(Tonkao) : 염훈(24)직역하면 밥나무, 의역하면 '벼'_ 마리(Mali) : 장민영'마리, 쟈스민'_ 부아(Bua) : 김수은'연꽃'_ 챠엠(Chaaim) : 조남주'허브'의 한 종류_ 쳠푸(Chompoo) : 박선하(25)'분홍빛(아무리봐도 다홍인데)'이 도는 태국 과일 이름_ 퐈(Fha) : 김희진'하늘'_ 플로이(Ploy) : 오서현'빨간 빛이 나는 보석, 반짝반짝'이런 이름을 갖게 된 이유, ?똥카우와 남삥은 그저 '남자' 라는 이유로(^^) 우리 팀 여자 8명을 책임져 주었으면 하는(생활에 없어서는 안되는 밥과 물)마음으로 지어주셨다고 한다. 따완은 처음에 '수리야(해의 다른 말)'라는 태국이름을 나름 지었었는데 '남자 이름'이라는 이유로 '따완'으로 바꿔주셨다. 마리는 따완과 마찬가지로 '마리'로 지어갔었다. 퐈는 아마 키가 커서?라고 추측한다. 플로이는 처음에 '파이툰(Cat's eye)'이라는 이름을 지어갔었는데 별로 좋지 않다고 해서 발음이 비슷한 '플로이'로 지어주셨다(참고로 플로이는 람푼팀이 지역훈련 할 때 구미Y에서 만난 태국 사람들이 '퐈'에게 지어준 이름이었는데 '퐈'언니가 태국에 도착했을 당시 기억을 못해서 말을 못했다.) 나머지 팀원들은 제대로 이야기를 못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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