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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18] 말라리아 첫 타자 기념 에세이 by 양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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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리아 첫 타자 기념 에세이 clear , sat 22 Nov 2008 D - 59 지난 9월초 일주일에 한 알씩 먹던 말라리아 예방약이 내 몸속에서 뒤틀렸다. SAO MIGUEL 학교에서 돌을 나르던 나는 화장실에서 헛구역질을 하고 빈혈이 쏟아지는 말라리아 부작용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날 이후로 효정이와 나는 그 비싼 9만원 돈의 말라리아 약을 접었고 그렇게 말라리아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그로부터 약 2개월이 훨씬 넘는 시간이 지났고 사메 에서의 활동으로 몸이 많이 지쳤다. 그리고 비자연장을 위해 인도네시아를 가야했고 일주일동안의 딜리 휴가가 다가왔다. 우리 팀은 흥분했다. 딜리에서는 답답하지만 인터넷도 할 수 있고 에어컨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세탁기도 있고 깨끗한 물도 있고 자동차도 있고 전기도 있고 고기도 먹을 수가 있다. 우리 팀은 딜리를 가자마자 인터넷 카페를 다녀오고 뷔페에 가서 고기도 실컷 먹었다. 죽었던 몸이 되살아나는 기분 이었다. 다음날부터 딜리의 풍부한 전기를 맛보기 위해 영화 황진이와 크로싱을 연달아 보는 중이었다. 보람언니가 튀겨온 설탕 듬뿍 묻은 빵이 속에서 느끼함으로 가득 찼다. 저녁에 되니 너무나 더부룩해 동티모르에 와서 처음으로 식사를 거르게 되었다. 저녁 시간 나는 온몸이 추웠고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갑자기 쐬어버린 에어컨 바람에 냉방병인줄만 알았다. 동화간사님은 나의 온도를 재더니 " 말라리아네 "라고 하셨고 나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괴로운 밤을 보냈다. 다음날 9명의 단원들은 인도네시아로 갔고 동티모르에 와서 가장 큰 발전을 보인 정현이는 뜨거운 물을 끓여 차를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 고마움을 느낄 새도 없이 아팠다. 나는 침대에 뻗었고 간사님은 클리닉에 가서 말라리아 체크를 해보자고 하셨다. 택시를 타려고 문을 열고 나갈 때 배가 심하게 아파왔다. " 간사님, 클리닉에 화장실 있어요? " " 화장실 가야돼? 그럼 여기 화장실 쓰고 가자 " 그대로 나는 앞이 보이지 않았고 화장실에서 30분 동안 앉아 있었다. 설사로 인해 밑으로 빠지고 헛구역질을 했다. 일어서자마자 1초도 되지 않아 머릿속의 뇌가 흘러내리는 기분이었고 빈혈은 최절정에 달했다. 나는 정말 한걸음도 걸을 힘이 없었다. 그대로 침대로 가 쓰러졌다. 간사님은 현지인 친구를 불렀고 YMCA 숙소 앞으로 '요디'라는 현지인 친구가 트럭을 몰고 왔다. 나는 그 트럭을 타고 클리닉으로 가는 도중에 창문 밖으로 노란 물을 퍽퍽 토해 내었다. 아.. 그 광경이란.. 무슨 트럭에 찌나인지 자판인지 꼬레아인지 모르는 외국인 여자애가 토를 하면서 지나간다.. 그때 수많은 현지인들의 눈빛을 나는 느꼈지만 그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 당장 나는 죽게 생겼으니까. 클리닉에 도착해 나의 짙은 피 몇 방울을 드리고 간사님과 요디는 마트에 금방 갔다 온다며 가버렸다. 나는 검사결과를 기다리기 위해 클리닉 앞 의자를 벽에 붙이고 쓰러져 있었다. 그때였다. 내 앞에 앉아있는 티모르 대학생 정도로 되 보이는 남자 3명이 내 사진을 찍는 것이다. 이런 죽일 놈들 내가 모를 줄 알고 3번씩이나 찍는 것들, 나는 맘 같아선 내 피를 헌혈해 말라리아에 걸리게 하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힘도 없었다. 의사는 나를 불렀다. " 말라리아 로스까? (말라리아 맞나요?) " "로스 (맞습니다) " 그대로 나는 약을 받아서 숙소로 돌아왔다. 하루 동안 아무것도 못 먹은 나를 위해 간사님은 한국에서 가져온 버섯스프와 식빵 두 개를 준비해 주셨다. "이것도 안 먹으면 약 먹고 속 더 뒤집어 진다 " 나는 오랫동안 식빵 두 개와 스프를 먹었고 딱 봐도 거부감이 생기는 말라리아 약 3개를 5분 간격으로 먹었다. 크기도 큰 알약은 내 목에 걸려 덕분에 식빵 한 개를 더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나는 침대로 또 쓰러졌다. 화장실을 몇 번이나 왔다갔다 거렸고 나는 이때의 생각을 말했다. " 간사님.. 제 나이가 한 60됐다면 안락사를 놓아달라고 했을 거예요 .. " 그렇게 생애 첫 말라리아를 만나고 딜리로 올라갔다. 아침이 밝아오기 전에 일은 또 터졌다. 배가 아파서 죽을 것 같은 것이다. 새벽3시50분.. 나는 아반을 깨우러 거실로 나갔다. " 아반.. 나 배가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아 손 좀 따줘 " 아반은 항상 그렇듯 어느 때 깨우더라도 안자고 있던 사람처럼 일어나 나를 간호해 주었고 곧 간사님도 함께 나를 간호해 주셨다. 따뜻한 팩을 배에 붙어주었고 아반은 내 옆에서 잤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나의 상태는 점점 양호해져 갔다. 로뚜뚜를 가는 날, 아직 호전되지 않은 나는 마흔 줄리앙운과 사메집에 남고 딜리팀과 간사님은 딜리로 우리팀은 로뚜뚜로 올라갔다. 처음 혼자 있어 보는 시간 나는 진정으로 무서웠다. 발자국 소리 하나에도 깜짝깜짝 놀랐고 그 첫날 저녁에 전기가 안 들어오는 날이었다면 나는 혀 깨물고 죽었을지도 모른다. 다음날도 그렇게 징그럽게 무서운 날을 보내려고 하는데 누누오빠 목소리가 들린다. 심오빠와 아반과 아띠도 왔다. 동티모르 특성상 수업이 없다는 통보를 받지 못해 고생해서 올라간 그 높은 로뚜뚜에서 "빨리 와" 내 한마디가 생각나 하루먼저 4시간 되는 그 거리를 2시간 만에 내려온 우리 팀.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에세이로 올릴까. 나 아팠다고 투정 부리는 거? 위로 받고 싶은 거? 3개월 동안 라온아띠 1기 단원으로 생활을 하면서 여기저기서 잡음이 들리고 슬픈 소식들이 들려오기도 한다. 나는 여기서 핸드폰 없이도 MP3없이도 internet없이도 전기 없이도 한국음식 없이도 씻을 물 없이도 다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이다. 사람은 사람 없이는 못 산다.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상대방 사람에게 기대어 사는 것 이다. 사람이 없다면 사람은 외로워서 살 수가 없다. 곧 죽을 것이다. '사람은 더불어 살아간다' 이 말이 내 가슴속에 들어와 나에게 깨달음을 주다니.. 국내훈련을 포함한 6개월의 시간이 나에게 도움을 줄지 손해를 줄지는 모르는 상황 이었다.모든 것은 내 자신에게 달려있었다. 지금 3개월이 된 시점에서 아직도 이 5개월 동안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단원들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깨달았다. 사람은 결국 사람으로 끝난다는 거. 나는 어쩌면 죽을 때 까지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 깨달음을 진정으로 깨달아 버린 것 이다. 더군다나 나는 보너스로 아시아 연대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과 실천 경험을 하고 있지 않은가. 거기에다가 제대로 손빨래 하는 법도 배웠다. 여러분 나는 이미 5개월을 성공 했습니다.
[에세이-17] 종교 관용? 동티모르 속 이슬람 by 심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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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관용? 동티모르 속 이슬람 2008년 6월 26일자 Dili Weekly에 관심 가는 기사가 보였다. 이슬람교에 관한 이야기였다. 언뜻 이해가지 않은 부분이었다. 동티모르 인구의 98%가 자신을 가톨릭이라 부른다.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영향이다. 이런 이유로 서쪽으로 인도네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지만, 1975년 인도네시아 침공 이전까지 이슬람과는 동떨어진 땅이었다. 이런 면에 비추어보았을 때 주간지에 한 면을 차지한 기사는 의외였다. 기사에 의하면, 과거 적지 않은 무슬림이 있었다. 하지만 1999년 자치-독립 선거 당시의 사태, 2006년 유혈 사태 등을 거치며 많은 무슬림이 떠나갔다. 떠나간 무슬림은 인도네시아 인이거나 인도네시아를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동티모르인 중에는 사실상 무슬림은 적었다는 것이다. 가톨릭은 동티모르의 어두웠던 시절에 호국 종교와 비슷한 존재였던 듯하다. 이제 남은 무슬림은 1%도 채 되지 않는다. 딜리 Markoni에 모스크가 있지만, 외국인을 위한 면이 많다. 모스크의 상황도 좋지 않다. 창유리 안쪽이 부서져 있고, 천장은 썩어있으며, 바닥 타일은 깨져있다. 딜리의 유일한 모스크는 재정적 기반을 상실한 상태이며 존재 자체가 가장 큰 의미이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는 무슬림에게 학교이며, 집이고, 연대의 장소이다. 또, 불안정한 정국에는 피난의 장소가 된다. 교육 방식은 동티모르의 방식과 현격히 다르다. 동티모르 학교의 경우, 강제적이지는 않지만, '레자'가 조례와 종례에 행해진다. 상세한 교육 내용도 판이하게 다를 것이다. 기사 중 가장 염두 하여 읽은 부분은 종교관용에 관한 부분이다. [ 2006년의 불안한 시기 동안, 딜리에서 몇 십 명이 목숨을 잃었고, 10만 명 이상이 집을 잃었다. 근처의 수 십 채의 오두막집은 불탔지만 모스크는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았다. 모스크의 직원은 어떠한 박해도 받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티모르는 이러한 종교적 관용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Srifulloh는 "우리는 모두 티모르인이다. 우리는 가톨릭과 무슬림 사이에 사실상 차이가 없음의 예시를 세계에 보여주길 원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모스크가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분명 직접적인 침입과 폭력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투석과 같은 간접적인 피해는 받았다. 이러한 점을 차치하면 2006년 사태에 무슬림이 희생자 그룹이 되지 않은 것은 다행할 일이다. 하지만 이를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종교적 관용, '나는 너의 종교를 인정하고, 너는 나의 종교를 인정한다.'라는 명제에 부합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할까. 항상 통계 이면엔 또 다른 현실이 있기 마련이다. 티모르의 98%가 가톨릭이고, 1%가 프로테스탄트, 1%보다 적은 무슬림이 있지만, 이들 사이엔 공통점이 있다. 100%가 전통을 중시한다는 것. 가톨릭 신자라 할지라도 전통을 넘어서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집에 조상을 모신다. 전통은 종교를 뛰어넘어 동티모르인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어쩌면 전통이란 더 강한 종교 아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무슬림이 존재하는 듯하다. 티모르 문화에는 Uma Adat(Spirit House)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마을 어른들을 모시고, 조상을 모신다. 무슬림은 개, 돼지 등을 먹지 않지만 전통은 지킨다. 혹은 집에 조상을 모시는 곳이 있지만 전통적 의례를 행하지는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결코 전통에서 동떨어져 나가진 않는다. 주위의 사람들을 보면, 자신을 가톨릭이라고 부르지만 정작 일요일에 성당을 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오랜 시간 가톨릭 속에서 살아왔던 탓일까. 이곳 사람에게는 신념과 절박함, 혹은 신성함으로써의 종교라기보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지 않을까. 관용을 떠나, 종교로 집단이 나뉜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일 런지도 모른다.
[에세이-16] 알록달록 지구별에서 by 홍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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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록달록 지구별에서 라온아띠 1기, 동티모르 사메팀 1. 내 또래의 친구들이 모두 기억을 하듯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어린이용 크레파스에는 ‘살색’이란 것이 있었다. 사실 굳이 따지고 보면 어릴 때에도 썩 내 피부색이 그 색 같다고 생각하진 않았었는데, 사람을 그릴 때면 으레 그 색깔을 쓰곤 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닳아 없어지는 색 중의 하나가 바로 ‘살색’이었다. 연한 살구 빛이기도 했고, 탁한 연주황 정도의 색이었다. 얼마 전 유색 인종의 인권과 관련된 문제를 근거로 그 ‘살색’이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잘된 일이다. 만화가 박광수 씨의 ‘광수생각’에도 나왔던 것처럼,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피부색이 존재하는데 감히 한낱 크레파스 하나가 ‘살색’이란 이름으로 서 있을 수 있으리오. 2. -말라이 무띤. 동티모르 사람들이 에마 꼬레아(한국 사람)를 보면 하는 소리다. ‘하얀 외국인’이라는 이야기인데,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사람은 황인종에 속한다는 걸 생각해보면 조금은 우스운 소리이긴 하나, 현지에선 일단 말라이 무띤으로 통한다. 호주와 가까워 호주에서 온 ‘백인(白人)’들이 많이 거주하는 동티모르에서, 그 많은 백인들을 두고 왜 우릴 보고 말라이 무띤이라 하는가. 어쩌다 한 번씩 현지 친구들과 서로 피부를 맞대고 피부색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참 재미있다. 길가에 지나가는 백인들을 가리키며, 하얀 사람들은 저 사람이고, 우리는 말라이 끼누르(노란 외국인)라고 이야길 하면, 단번에 아니라고 손을 휘저으며 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시라 말라이 메안!(쟤들은 빨간 외국인이지!)” 본디 하얀 피부의 백인종들이 쉽게 홍조를 띄는 걸 보고 나온 말일 거다. 와하하 웃고 말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말 백인들은 하얀 사람이기도 하지만 빨간 사람이기도 했다. 티모르 사람들이 관찰한 결과, 호주에서 온 백인들, UN 경찰로 근무하는 백인들은 아무래도 빨간 사람이고, 오직 한국 사람들만 하얗더라는 것이 그들의 지론이다. 아무래도 하얀 피부를 더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한국 사람을 크게 칭찬해주는 거니, 백인종이니 황인종이니 인종계에 관한 머리 아픈 이야기는 그만 해야 했다. 현지 사람들은 자신들의 피부색을 꼬르 카페(커피색 피부)라고 한다. 운딜 대학교의 한 친구는 ‘Sexy Chocolate’라며 극찬을 한 바로 그 색이다. 적도를 살짝 비켜간 남반구의 나라, 건기며 우기며 일 년 내내 따가운 태양이 내리쬐는 동티모르에서, 피부색이 커피색을 닮아가는 건 당연한 것이고, 가을과 겨울이라는 휴식기를 거치는 우리의 피부색이 동티모르 사람들보다 조금 덜 ‘섹시 초콜릿’인 건 역시나 당연한 것. 그러나 피부색 이야길 하며 그만큼 자신들의 피부색에 대해 자긍심을 가진 친구를 만난 건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커피 공정 무역: 피스 커피 프로젝트>를 함께 하고 있는 아저씨들과 어쩌다 수다 마당이 시작되면, ‘말라이 무띤’인 내 앞에서 에마 메딴(까만 사람) 아저씨들은 한없이 작아지곤 한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하얀 피부는 좋은 피부, 까맣게 그을린 피부는 나쁜 피부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아저씨들을 아무리 달래고 얼러도, 에마 무띤(하얀 사람)은 ‘그저 최고’라 하는 아저씨들. 그에 대한 나의 색깔론은 훨씬 더 정확하고 객관적이었다. (상대적으로) 하얀 피부를 가진 우리라는 것은 인정하되, 절대 허여멀건한 피부는 아니라는 걸 아띠(효정)의 피부로 설명하고(반례1), 나의 건강하게 탄 구릿빛 피부들(반례2)로 설명을 해도 고갤 절레절레 흔들자, 나는 라.면.을 가져왔다. 현지식 식사에 절대 빠지지 않는 인도네시아산 라면인 ‘슈퍼-미’. 우리나라 라면처럼 기름에 튀긴 인스턴트 면을 가리키며, 나는 정확하게 황인종을 표현할 수 있었다. “아미 에마 꼬르 슈퍼미.(Ami Ema-kor-Super-mi.)” 굳이 나의 뉘앙스와 함께 해석하자면, “우린 라면색 피부를 가진 노리끼리한 사람들이에요.” 정도가 맞지 않을까. 그러자 와하하하, 깔깔깔깔 호탕하게 웃는 아저씨들. 뜨거운 태양 아래 농사도 짓고 집도 짓고 말도 돌보고 소도 돌보며 일을 하는 사람들의 피부가 그을리는 건 나쁜 게 아니라 좋은 것이라고, 사람을 색깔로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가를 수는 없는 거라고, 그런 이야기들을 함께 나눴다. 3. 외국인을 만나면, 우리는 종종(어쩌면 자주) 상대적으로 누구의 피부색이 더 어둡냐 밝으냐를 비교하게 된다. 피부색이 백인에 가까울수록 더 나은 인종이라는 생각은 서구 유럽의 식민지 개척 시기 때부터 흉물처럼 남은 부산물이다. 그러나 나 역시도, 한국에서든 외국에서든 피부 하얀 사람을 만나면 조금 주눅이 드는 건 사실이다. (아반이여, 어깨를 펴라!) 동남아를 ‘관광’하는 한국 사람들을 보면, 체구가 왜소하고 피부가 우리보다 검은 동남아 사람들 앞에서 황제나 왕비라도 되는 냥 한껏 콧대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다. 잔뜩 어깨에 힘을 주고는 우쭐대면서 거만하게 행동하거나, 행동거지를 아무렇게나 해대며 얼토당토않은 우월의식에 젖은 꼴불견들을 자주 보게 된다. 단지, 피부색이 좀 더 백인에 가깝다는 사실 하나로 그렇게 우쭐해질 수 있다는 것이 지금 우리의 자화상이다. 우리의 생각이 크레파스의 색이름을 만들었고, 다시 우리의 생각이 크레파스의 색이름을 바꾸었다. 인간이란 본디 크레파스보다 만 배는 더 복잡다단하고 오묘한 생물인지라, 달깍, 바꾸자 한다고 바꿔지는 것은 아니지만, 피부색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조금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다. 유색인종론에 대한 탁한 오류를 뽑아내자. 빨간 사람, 노란 사람, 하얀 사람, 까만 사람, 파란 사람 모두가 사는 이 좋은 지구별 위에서, 최소한 크레파스보다는 위대하게, 서로 다른 모습에 유쾌해 하며 어우러질 때이다. 홍연지(Aban) iamheypk@gmail.com
[에세이-15] 딜리 팀과 함께한 가브라키 학교 by 배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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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19일 딜리 팀과 함께한 가브라키 학교.. 배효정 중간평가를 위해 사메로 올라온 딜리 팀과 함께 가브라키 학교에서 작은 체육대회를 열기로 하였다. 하지만 운동장이 없는 가브라키 학교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기란 너무나도 힘든 문제였다 우리들이 어렸을 때부터 해오던 그런 거창한 행사는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1·2교시 총 2시간 30분을 진행해야 했었는데 긴 회의를 거쳐 1교시는 작은 놀이 활동 시간. 2교시에는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씩 찍어주고 액자를 만들어서 선물하는 시간을 갖기로... 당일 아침. 학교에 도착해서 뜻밖에도 마지막 수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고... 갑작스런 일이라 당황을 했지만 이왕 마지막 수업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다들 열심히 하기로 했다. 1교시 1시간30분 동안에는 조를 편성해 다치지 않고, 간단히 할 수 있는 줄넘기. 신발 던지기. 풍선 떨어뜨리지 않기. 음악교실을 열어 진행하도록 하였다. 처음 시작하기 전에는 아이들이 관심을 가져줄지.. 재미있어할지 고민을 많이 하였으나 게임 진행하면서 넘어져도.. 신발이 학교 지붕에 올라가버려 집에 돌아갈 때 맨발로 걸어가야 하는 그런 상황에서도 즐거워하는 모습에. 괜한 걱정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부끄러워서 하지 않던 여자아이들은 쉬는 시간에 몰려들어 저희들끼리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2교시 수업시간에는 2교실이 있는데 한 교실에서는 액자를 만들고 또 한 교실에서는 사메팀 5명과 한 명씩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었다. 처음 보는 카메라에 얼마나 신기해하던지 진정시키느라 혼이났다. 사진 찍을 일이 없던 애들에게서는 환한 표정이 나오긴 힘들었는데 역시나 사진을 받고 자기 표정이 마음에 안들어서 삐져있는 아이들도 여럿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사진을 집에 가지고 갈 수 있다는 사실에 다들 들떠있었고. 서로서 자기 사진 자랑 하느라 진정시키는데는 엄청난 어려움이 따라야했다. 그렇게 갑작스런 마지막 시간이 흘러가고.. 열심히 참여해주고 즐겁게 해준 고마운 마음에 연필 한 자루와 지우개를 한명도 빠지지 않고 나누어 주었다. 하루 동안 연필. 지우개. 폴라로이드 사진. 그리고 전 날 미술시간에 만든 비누까지 너무나도 많은 걸 받아서인지 어리둥절한. 또는 어쩔 줄 몰라하는 아이들의 모습속에서 마지막 수업시간을.. 그렇게 마무리 지어야했다.
[에세이-14] 우기 by 심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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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 우기의 시작은 10월 말 즈음이다. 남반구니까 한국과 반대로 절기상 여름이기도 하다. 이즈음부터 바람은 동티모르 북쪽 바다로부터 불어온다. 바람은 물을 한껏 품고 온다. 물을 품고 온 바람은 동티모르 땅과 산을 만나 비구름을 만든다. 건기에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불어온다. 땅으로부터 시작된 바람이라 물을 품지 못한다. 건조한 바람. 이렇게 적도 근처에 있는 동티모르는 우기와 건기로 나뉜다. 내가 도착한 8월부터 9월, 10월은 그야말로 날씨가 한창 좋을 때였다. 덥긴 했지만 습도가 높지 않아 그늘은 시원했다. 항구도시인 딜리에는 항상 바닷바람이 불었다. 따갑게 더웠지만, 땀이 많이 나지 않는 그런 더위였다. 우기 때는 딜리에도 있어보았고, 산에도 있어보았지만 모두 건기보다 더웠다. 산에 있다 딜리에 가면 숨이 턱 막혔다. 산은 비교적 선선했지만 해가 따가울 때 걸을라치면 높은 습도 때문에 땀이 금방 얼굴을 덮었다. 그래도 좋은 점은 있다. 비가 온 후에는 동티모르에서 지냈던 그 어느 때보다 하늘이 맑고 선선했다. 밤하늘의 별은 무서울 치 만하게 빼곡하다. 별이 너무 많아 별자리조차 분간해내기 쉽지 않다. 또 하나 우기가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은 비가 내리는 시간이 일정하다는 것. 아침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 해가 가장 높은 곳을 찍고 내려올 무렵부터 비가 온다. 비가 내릴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 대비할 수 있다. 특히 이 곳 사람들은 기가 차게 잘 맞춘다. 하지만 우기의 비는 순간 하늘이 무너질 만치 내리기 때문에 조심해야하기도 한다. 동티모르로서는 우기를 다스리는 것이 발전과도 직결할 것이다. 올해부터 시작된 대대적인 수로와 도로 공사 성공 여부를 알 수 있는 시기는 아무래도 우기가 지난 다음이 아닐까 싶다. 우기 때면 비 때문에 무너져 내린 바위와 나무로 길이 막히기 십상이다. 땅도 질어져 차로 움직일 땐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산 중턱에서 차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해결할 뚜렷한 방안이 없기 때문이다. 12월이면 우기 한창 때이다. 판초우의 들고 다니기, 하늘의 구름색깔 보기, 비 내리는 오후에 책읽기. 나의 몸은 우기에 맞춰져 간다. 비는 그렇게 날 길들인다.
뉴스클리핑 5,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Doulos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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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Doulos 배. Doulos는 타이타닉 호보다 2살이 어린 배로써 1914년에 만들어졌고, 봉사자들을 포함해 320명의 선원이 지난 103년 동안 600개의 항구를 방문했고 2100만명의 방문객들을 맞이했다. Doulos는 2008년 11월 5일부터 10일까지 동티모르에 104번째의 나라로써 첫 방문을 했다. 여전히 활동적인 Doulos는 8000권 이상의 영어 책을 실은 도서관을 운영한다. Doulos의 동티모르 방문은 동티모르 국민들과의 지식 공유를 위함이다. 동티모르 교육부 장관은 이 유명한 배는 그 배의 도서관을 통해 전세계를 돌며 세계의 600개의 항구를 돌았다고 말했다. 교육부 장관에 따르면, Doulos의 방문은 모든 사람들에게 책을 읽을 큰 기회를 제공한다고 한다. 비록 대부분의 책이 영어로 된 책이지만, 이는 앞으로 9년 동안 초등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영어교육을 하게 될 동티모르에 중요하다. 정보와 기술의 급격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학생들이 그들의 삶에서 한번 읽은 책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 책들은 열린 세상에 대한 지식과 상상을 담고 있다. 책들은 정보를 주고 독자들에게 기쁨을 주고 독자들이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글쓴이의 뜻을 해석할 수 있는 시각을 열어준다. “동티모르가 처한 큰 문제는 비판적 상상력을 제공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적절한 책이 없다는 것이다. 이 것은 독자들이 무엇을 읽든 간에 단지 있는 그대로 소화하지 않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분석해 가며 읽는 큰 기회를 제공한다.” 라고 장관이 말했다. 영어를 3학기 째 전공하고 있는 UNTL(Universidade National Timor Leste-티모르 국립 대학교)의 한 학생은 티모르에는 학생들이 유용하게 참고할 만한 자료들이 있는 공공 도서관이 없기 때문에 책을 필요로 하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그들은 그들이 필요한 많은 자료를 얻을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초등 교육자 한 사람은 이 배에 대한 그녀의 행복을 표현했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배에 방문하게 된 것이 매우 기쁘다고 말했다. == Doulos 라는 배가 동티모르 딜리 항구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저희 팀원들도 직접 가 보았다. 처음에는 위의 기사처럼 도서관 개념으로 생각을 하고 갔는데, 서점이 느낌이 더 강했다고 해야 할까,, 음... 공간의 한계와 사람들의 폭발적인 반응으로 차분히 책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Doulos 라는 배가 세계의 많은 항구를 돌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흥미로웠고 이미 한국에도 들렸던 적이 있다고 한다. 또한 당시의 사람들의 책에 대한 관심은 현지 YMCA의 도서관 사업과도 관련이 있었다. 동티모르 YMCA에서는 Youth Center 에 도서관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와 영어로 된 책을 사서 현지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현지어인 테튬어로 번역을 하여 준비를 하고 있다. 이 도서관을 통하여 마을 주민들과 아이들이 더 많은 책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우리 5명의 라온아띠는 이 도서관에 쓰일 책장 만들기 작업을 했다. 총 8개의 책장을 만들었고, 예쁘게 노란색으로 페인트 칠을 하여 며칠전 준비가 한창인 도서관에 옮겨다 놓았다 ^^
뉴스클리핑 4 ^^ - 산타크루즈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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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30. The Dili Weekly 동티모르와 인도네시아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제목이 좀...^^;) 동티모르의 대통령 호르타는 동티모르 국민들에게 동티모르와 인도네시아가 서로 사랑할 것을 요구했다. 1991년 11월 12일에 일어난 산타크루즈 사건은 인도네시아 점령기의 결정으로부터 발생했다. “우리는 많은 인도네시아 군인들이 정치 체제 때문에 우리 나라에 와서 죽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부모와 자식들과 부인 또한 그들의 부모와 남편을 잃은 것이다.” 호르타는 지난주에 딜리에서 열린 17번째 세레모니에서 말했다. 지도자들을 포함해 거의 5000명의 사람들이 세레모니에 참가했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젊은이들이 특별히 참가했다. 그들은 딜리에서 11월 12일부터 15일까지 열린 International Youth Conference에 참가하기 위해 동티모르에 온 학생들이었다. 그는 최근에 동티모르와 인도네시아가 좋은 관계를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두 국가 간의 관계 강화의 목적은 사람들이 평화 상태 속에서 사는 것을 보장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최근 인도네시아가 정부와 그 밖에서 큰 변화를 겪는 것을 보았다. 2000년 2월 인도네시아 전 대통령이 동티모르를 방문했었고, 2007년 4월에도 대통령이 동티모르를 방문했다. 그 둘은 모두 산타크루즈를 방문했고, 인도네시아가 그 사건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호르타 대통령이 말했다. 비록, 호르타가 인지하고 있지만, 24년간의 인도네시아 점령기 동안 수천 명의 사람들이 폭력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동티모르는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고통을 겪었고, 결국 독립을 쟁취했다. Sebastiao Gomes의 사건에서부터 산타크루즈 학살 사건까지는 동티모르 문제에 대한 세상의 인식을 열었다. Max Sthall 의 영상은 대학살과 독립을 갈망하는 동티모르 국민들의 모습의 진실한 증거가 되었다. 1999년 대다수의 국민들은 독립을 택했다. 2002년 UN은 동티모르에 완전한 독립을 주었다. 독립 이후 발전기간 동안, 동티모르는 함께 일하고, 서로 도와줄 필요가 있다. “나는 서부지역과 동부지역의 동티모르 국민들이 단결하고 사랑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나라를 더 발전된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호르타가 덧붙였다. === 산타클루즈 사건에 대하여 이시바시 간사님과 스터디한 내용을 함께 올립니다. 산타클루즈는 Saint + cross라는 뜻의 지명이고 이곳은 원래 공동묘지로 쓰이고 있었다. ‘세바스찬 고메즈’라는 청년이 저항세력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해서 그 청년이 죽음을 당했다. 그는 산타클루즈 묘지에 묻혔고, 그를 애도하기 위해 묘지로 미사 행진할 때, 인도네시아 군이 학살을 일으켰다. 행진이 자연스레 동티모르의 자유와 해방을 외치는 행진(시위)로 번졌고, 인도네시아 군과 시위대가 산타클루즈에서 대립했고, 인도네시아군이 발포했다. 미국사람들에 의한 자료에서는 사망자 271명과 278명 부상, 그 중 104명이 입원. 행방불명자 27*명으로 나온다. 다른 책에는 사망자 100명 정도로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다. 외국인 저널리스트가 당시의 상황을 비디오로 촬영하여 해외로 알렸다. 당시의 영상은 Youtube 동영상사이트에서 검색하여 볼 수 있다. 이 영상을 통하여 해외의 인도네시아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어났다. === 산타클루즈 사건을 애도하기 위해 현재 YMCA 숙소와 붙어있는 딜리 대학교에서 행사를 했다. 사건 기념 전날, 대학생들이 라온아띠 친구들을 초대해서 우리도 참가했다. 전날밤 행사에는 산타클루즈 사건에 대한 연극과 연설, 그리고 티모르 노래가 이어졌다. 그리고서는 산타클루즈 학살사건이라고 적힌 바닥에 사람들이 촛불을 전달해 올려놓고 함께 기도를 드렸다. 전날밤 애도 행사와 다음날 오전 산타클루즈 묘지에 직접 다녀온 사진을 함께 올립니다~
(11. 23) 에세이4. 지난 절반을 돌아보며 - 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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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절반을 돌아보며. 어느덧 동티모르에 와서 지낸 지도 3개월이 다 되었다. 처음에는 모든 게 어색하였지만 지금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동티모르 식 인사인 눈인사를 나누며 인사를 하고, 날마다 조롱조로 듣는 “xina xina” 라는 소리도 웃으면서 넘기는 정도가 되었다. 이곳에서 봉사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 보게 된다. 처음에 고등학교 때 봉사를 했을 때에는 “다른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봉사를 한다.” 라고 말하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에는 진정으로 봉사를 하는 것이 아닌, 봉사활동을 하면서 따라오는 여러 가지 부가적인 영향 (봉사시간의 증가, 여러 봉사대회에서 상을 타는 것)을 보면서 했던 것이 없지 않아 있다. 처음에 라온 아띠에 지원했을 때에도 사람들이 말하기를 “해외봉사 가면 나중에 이력서를 쓸 때에도 많은 도움이 되니 정말 좋은 기회다.” 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여기에 3개월 정도 봉사를 하고 나니 처음에 오기 전에 들었던 그 생각보다는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요즘은 sao Miguel 이라는 초등학교에 가서 아이들과 같이 종이 접기 수업을 하고 있다. 한 반에 70~80명이나 되는 아이들과 함께 종이 접기를 하려니 아이들이 진정도 안 되고, 버벅 되는 부분도 많아서 힘들긴 하지만 종이 접기 수업을 끝낸 후에 아이들이 결과를 보고 좋아하고, 나중에 만나게 되었을 때 우리가 가르쳐주는 종이 접기를 하고 있는 걸 보면 정말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낄 때가 많다. 이런 걸 보면서 많이 느낀다. 사람들이 봉사를 하는 목적은 내 편의를 위해서나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 안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기 때문에 봉사를 한다는 것을. 새로운 경험들. 티모르에 와서 한국에서는 경험하지 못할 많은 경험을 하고 있다. 충전 식으로 쓰는 전화. 열매로 보는 망고나 잠부아(자몽), 구아바, 코코넛. 나무에 매달려 있는 파인애플, 사진이나 다큐멘터리에서만 보던 맑고 깨끗한 에메랄드 빛 색 바다. 맹그로브 숲. 우리나라의
[에세이-13] 난민 혹은 범죄자 by 심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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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엘메라도 앗사베 마을에서는 서티모르에서 귀환했던 난민의 습격을 받아 주민 5명이 살해된 사건이 발생했다. 그와 반대로 귀환했던 통합파의 민병이 주민들로부터 공격받았다는 보고도 있다. 동티모르의 난민 문제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동티모르의 난민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분류를 하자면, 다음과 같이 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인도네시아 침공 시기에 외국으로 나갔던 사람, 두 번째로 1999년 소란 이전 인도네시아 점령 시기에 떠난 사람, 세 번째는 1999년 소란 시 탈출했던 30만 명이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경우는 인도네시아에 대항했던 세력이고, 세 번째의 경우가 복잡한 양상을 띤다. 세 번째의 경우는 인도네시아의 다른 지역에서 동티모르로 이주했던 인도네시아 사람들, 동티모르 사람이지만 인도네시아의 통치를 원했던 사람들, 인도네시아와의 합병을 주장했던 통합파 민병으로 범죄를 저질렀던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제로 연행되었던 사람들과 정치적 신조와 무관하게 폭력을 피해 갔던 사람들로 나눌 수 있다. 보통 지금의 난민 문제는 세 번째 경우에서 발생하고 있다. 반 인도네시아 합병의 성향인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경우는 귀환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보복이나 법에 의한 처벌에 있어서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동티모르 정부와 UNHCR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많은 수가 돌아왔고, 대략 2만 5000명 정도(2005년 추정)가 외국에 난민으로 체류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남은 이들은 귀환 후 복수를 우려하고 있거나, 실제 민병대로 활동을 하며 살인을 했던 사람으로 추정되고 있다. 물론 범죄의 사실이 있을 경우, 동티모르 정부에 의해 재판을 받게 된다. 2005년 여름, 자발적 귀환은 거의 끝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로 인해 귀환과 재정착을 위해서는 특별한 배려가 필요하게 되었다. 보통의 방법이라면 도저히 해결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통합파의 유력자와 민병대 활동 경력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구분이다. 이들을 전쟁 난민으로 분류해야 할지, 전쟁 범죄자로 고려해야 할지 쉽지 않은 결정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귀환이 정치적 문제가 되어 다시금 복수의 피바람이 일어날 수 있다. 이 어려운 결정 사이에서 동티모르 내부와 국제사회 모두 확실한 해결책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진실 화해 위원회’와 같은 정부 기관과 몇 개의 NGO(한국의 경우, ‘개척자들’)은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은 감정의 고리를 풀기 위해 여러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있다. 오래 떨어진 사람 사이의 영상을 운반해주거나, 서로에게 일어난 일을 확인하고 이해하고 화해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프로그램이 진행되었거나 진행 중이다. 이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한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전체로 본다면 극히 적은 사람들의 경우이다. 가족의 죽음, 친구의 죽음, 격변의 시기의 감정의 골이 한 세대 안에서 모두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는 낙관적이다 못해 어설픈 기대가 아닐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과거 문제는 해결하기 어려워진다. 몇 해 전, 한국에도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가 만들어졌지만, 사법적인 힘은 없었다. 친일파 규정문제에서도 많은 논란을 빚었다. 한세대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끝내 해결되지 못한 응어리로 남아있는 것이다. 시간이 해결해주리라는 어설픈 낙관은 미래에 더 큰 문제로, 해결하기 점점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진 후에야 날개를 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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