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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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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 티모르 레스테(Timor Leste)에서 느낀 '배움'에 대한 짧은 생각들을 정리해보았습니다.# Culture Shock 동북아시아의 한 나라, 한국에서 보낸 이십여 년의 시간은 동남아시아로 먼 바다를 건너 동티모르에서 생활한다는데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가난의 자발적 체험이라는 타이틀로 지내게 될 5개월의 기간은 결코 이 문화를 체험한다거나 이해한다거나 쉽게 내 뱉을 수 있는 시간이 아니게 될 수 있다. 글 쓰는 자신의 주관적인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한 편만을 부각해서 의도적으로 편집하거나 글을 쓸 수도 있는 점이, 이 에세이를 쓰면서 가장 크게 염려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 곳에서 생활하면서 체험하고 느낀 것들을 차근차근 담아보고, 그 문화척 역사적 차이를 나름의 시각으로 전달하고픈 것이 내가 이 에세이를 남기는 가장 큰 목적임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한편으로는 나의 이러한 고민과 고찰이 앞으로 아시아를 다가가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객관적으로 쓰려는 노력을 할 것이지만 다분히 주관적인 내용이 들어갈 수 있음을 그리고 감상적으로 빠져들기도 하는 것을 이해해주셨으면 한다. # 소모초에서 얻은 것 이미 이 곳에서 보낸 시간이 한 달을 지나 두 달째에 접어들었다. 가끔씩 내가 바른길로 가고 있는가? 에 대한 질문을 던지곤 하는데 그 때마다 나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다. 현지에 온지 한 달이 채 안되었을 때, 이 곳 티모르 레스테(이하 동티모르)의 동부의 한 지역인 로스팔로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 NGO 지구촌나눔운동 사업단의 소모초 마을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동티모르의 최 동쪽 로스팔로스 지역의 2005년 당시 최빈마을이었던 소모초 마을은 2007-2008 2년간의 지역자치 활동을 도와 라온아띠 동티모르 팀이 방문할 당시에는 자치활동이 마을주민들을 중심으로 이루어 지고 있었다.) 소모초 마을은 지난 2년간 지구촌나눔운동 사업단의 지원과 주민들의 직접적인 참여로 운영되는 행복기금운동으로 자치기금을 조성하여 마을 성당 보수공사를 진행하였다. 마을에 수도를 설치하고, 마을 공동 우물을 만들어 2Km떨어진 이웃마을에서 물을 길어오는 수고를 덜었다. 이 곳에서 나는 현지에서의 활동이 변화(You cause ‘change’ whether it has positive effect or negative effect)를 이끌어 내고, 그 변화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발전의 밑바탕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문화권 혹은 생활권이 다른 곳에서 의견의 차이를 좁힌다는 것이 쉽지는 않는 것이 당연하고, 마찰을 빗고 오해를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현지에서 활동했던 이창덕 간사님도 어느 순간 마찰의 벽을 맞고, 회의를 느낀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과의 첫 번째 장벽이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들이 발전하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 즉, 변화중의 하나라고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았다고 했다. # 짧은 단상 흔히 실패 혹은 잘못이라 평가되는 활동들이 현지사람들에게 그리고 봉사자들에게 하나의 변화가 된다는 것을 염두 한다면, 그 것이 옳든 그르든 발전의 밑거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앞으로 남은 4개월, 동티모르에서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는 가늠조차 할 수 없지만, 한 가지 희망을 얻은 것은 좋든 나쁘든 나는 그리고 우리는 이 곳에 와서 현지의 이들과 살아가고 있고 숨쉬고 있고 또 이야기를 만들어 갈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들 곁에서 변화를 만들어 가고 있고, 이들은 좋게 보이든 나쁘게 보이든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Culture Shock: The Difference stage #1 배움에 대한 열의 # prolog 배움이라는 것 라온아띠 2기 국내 훈련 중, 들었던 강의 중의 하나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느 지역의 지역공동체를 도울 수 있는 길을 찾던 한 사람에게, 선진 교육을 필요로 했다고, 그래서 그 사람은 지역에 학교를 짓는 일로 남은 일생을 투자했다는 이야기. 정확한 이야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교육에 대한 현지인들의 욕구는 그들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막연했었던 것들이 그 테두리를 보여준 것 같았고, 실지로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나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 시작 우리 라온아띠 동티모르 팀은 현지 활동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오전에 현지 언어인 테툼 수업 그리고 딜리 지역YMCA 사업 중 하나인 테라산타 YMCA 커뮤니티 센터를 방문했다. 오전에 현지언어를 배우고, 오후에 센터에서 운영하는 컴퓨터 수업과 도서관 운영을 견학하면서 현지 적응을 해왔다. 처음에는 센터의 아이들과 그리고 청년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관심사를 찾지 못했고, 짧았던 현지의 언어가 그들과 좀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친분을 만들어주는데 벽이 되곤 했다. (물론 대부분의 아이들과 친분을 쌓는데 언어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이들과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도서관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 도서관이 테라산타의 아이들에게 의미하는 것 테라산타 지역의 아이들에게 YMCA 센터의 도서관은 그야말로 환상의 공간이다. 출판산업이 부실한 이 곳 티모르 레스테에서 책을 구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대부분의 책은 인도네시아에서 건너온 책이라 현지 어인 테툼어로 되어있는 책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심지어 국민 과반수의 종교가 카톨릭인 이 곳의 성경책 조차 인도네시아어를 알지 못하면 볼 수가 없다), 책장에 나열된 색색의 책들이 아이들의 눈에 비칠 때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닐 수가 없다. # 그들 앞에 책 읽어주는 외국인이 등장했다. 도서관이 운영된지 얼마 되지 않은 때, 우리는 테라산타를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딱히 맡은 일도 없었기에 도서관은 현지 언어에 익숙지 않은 우리들에게도 훌륭한 테툼어 교육장소가 되었다. 자연스레 아이들과 어울려 책을 읽어주고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테라산타의 청년들과 말을 트기 시작한 계기는, 현지언어를 지지리도 못하는 외국인이 영어를 조금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내게서 (물론 영어도 못했지만, 단지 외국인이라는 특별한 상황이 그들에게 현지인보다는 나을 거라는 기대를 주지 않았나 싶다) 영어를 배우고 싶어했고, 나는 테툼어를 배워야 했다. 우리는 서로 아구가 맞았다. # ZILOO 처음 질루를 보았을 때 그는 몇몇 청년등과 YMCA 센터 앞에서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 5시부터 6시까지 영어교육을 해주시는 수녀님이 늦으셨나 보다. 집에서 한 시간 반 가량을 걸어와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종이조각 하나와 잘 써지지 않는 펜을 들고 수업준비를 한 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현지언어인 테툼어가 서툴렀을 때 만났던 그는 여느 티모르 친구와 다르게 먼저 다가와서 테툼어를 가르쳐주면서 말을 트게 되었다. YMCA 영어교실을 보조하고 있고, 아이들과 청년들의 영어교육에 적지 않은 열성을 가진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로 기억된다. 얼마 전에 한국YMCA를 방문하셨던 어깨춤 임의진님이 해주셨던 말이 생각난다.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복잡한 언어는 오히려 벽을 쌓아갈 뿐인 거라고, 정말 단순한 말이야 말로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라고. 그와 나는 서투르지만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목표가 있었던 친구 남달리 영어를 유창하게 했던 한 친구가 있었다. 멀리서 유심히 나를 지켜보다가 다가왔던 그 친구는 외지에서 온 NGO단체에 대해 어느 정도의 불신이 있어 보였다. 아마도 첫 만남에서 그가 꺼낸 말이 언제 떠나느냐는 것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대화하는 내내 신경이 쓰였던 친구였다. 단 반나절이 이 친구와 만나 이야기한 시간이었고 그 후로 보지 못했는데, 이름을 잊어버린 것이 아쉽다. 테라산타에서 공부한 6개여 월의 기간 동안 익힌 영어실력으로 현재 호주NGO에서 일하는 친구는, 다른 여느 티모르의 청년들과 다를 것이 없는 일이 없어 방황하던 친구였다. 영어를 배우고 일을 할 수 있다는 목표가 생겼을 때, 그는 하루 종일 공부를 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흔히 6개월 영어 공부했다는 수준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했었다. YMCA PEACE CAMP에 참여해서 한국인 친구도 있는 친구는 당시 언어 소통의 어려움 때문에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더 컸던 것 같았다. 특별하게 이 친구에게 강한 목표가 생겼던 것일까? # 영어강의를 기다리는 청년들 이 외에도 스무 명 남짓의 청년들은 오후 5시 영어교육을 받으러 매일 YMCA센터로 향했고, 나는 아직도 그들과 삼십여 분 대화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있는 중이다. 티모르의 적지 않은 청년들은 할 일이 없어 오후 나절을 기타치고 노래 부르며 술로 밤을 맞이하고 있고, 그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질루와의 이야기는 매번 짧게 끝났었지만,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이전의 영어교육은 비 정규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던 영어과정이었다. 현지인 강사자의 스케줄에 따라 교육진행이 빈번하게 변경되었는데, 현재 YMCA센터에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3개월의 오후 영어프로그램을 계획했고, 5월부터 진행할 예정이다. 프로그램을 짜고 교육할 봉사자의 스케줄을 짜서, 예전의 틀이 없이 시간 되는대로 진행되었던 CLASS를 효과적으로 운영하고자 하는 의도를 엿보았다. 이 지역의 청년들이 반갑게 맞이할 만한 기획이라고 생각한다. # 배움에 대한 단상 나는 한국에서 자라 의무교육과정으로 고등학교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대학교에 재학 중이다. 나의 가정환경은 다르다고 생각해왔지만 고등교육과정까지 나의 혹은 우리의 목표는 좋은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른 친구들은 대학진학과 달리 일찍이 취직에 대한 나름의 길을 쌓아 나갔다.) 우리는 취직에 대한 걱정이 없고, 대학 진학에 무사히 발을 올려놓으면 힘겨운 배움과의 싸움도 끝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먹고대생이 내가 기대했던 그 무엇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취직을 하든 대학을 진학하든 더 나은 삶을 위한 욕구는 배움을 필요로 한다. 배움은 끝이 없다. 그리고 그 배움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생각해본다. # 티모르 청년들 2007년 DNS가 진행한 티모르 레스테 생활표준 조사자료에 따르면 19세부터 25세까지의 청년들의 진학률이 47.1%에 미치고 대학진학률은 3.7%에 불과하다. 동티모르의 대학교 진학률은 얼마 전 보도되었던 한국의 대학진학률이 80%를 넘어섰다는 한국 뉴스와 비교했을 때, 동티모르와 한국의 교육수준의 차이는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2002년 유엔의 독립선언과 동시에 세계의 유수한 인터내셔널 ngo들은 교육 시스템의 기반을 다지는데 많은 이바지를 해왔다. 적지 않은 초등에서 고등교육기관들은 ngo들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교육환경을 개선해 왔고, 2008년 UNESCO자료에 따르면 2005년도 초등학교 진학률이 32%였던 반면 2007년 DNS의 자료에는 취학아동이 69.7%를 기록하게 된다. 현지에서 유소년들을 만나 이야기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아니 많은 시간이 놀이라는 비언어적 활동이 대부분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청소년들과는 자신들의 생각을 짧게나마 들어볼 기회는 있었다. 그들의 한국에 대한 동경은 마치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할 때의 그 기쁨을 맞보려는 것 같고, 말라이(MALAY: 외국인)에 대한 태도는 단순히 자신들과 더 나은 삶을 사는 이들에 대한 호기심 혹은 돈 좀 있는 친구 곁에서 덕 좀 볼 수 있느냐는 심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목적이나 의도가 어찌되었든, 이들에게는 목표가 있다. 좀 더 발전했고, 좀 더 배워서 온 이들에게 배우고픈 욕망. 그들은 굶주려있다. 마지 생선을 먹어 본적도 없는 고양이가 한번 생선 맛을 보고서 미치도록 그 비린내에 열광하는 것처럼.p.s. 생각보다 단상의 폭이 넓어져서 제대로 수정이 안되고, 혹은 한 편에 치우져 써버린 내용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놓쳐버린 사소한 것이 있다면, 앞으로 써가면서 수정하도록 할테다.
BERITA MALAYSIA #1 (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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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ITA MALAYSIA #1 (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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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했던 신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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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ory of Team Philippines 2009, 3, 9 두번째. 혹독했던 신고식 송유림 3월 9일, 우리는 마욘화산을 보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짐을 정리하고 잠깐 들른 YMCA사무실에서 지역 문화에 대한 강의를 잠시 듣고 린뇬 힐로 향했다. 린뇬 힐은 레가스피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힐’이라고는 하지만 나에게는 ‘산’에 가까웠다. 둔하디 둔한 몸을 이끌고 올라가는 힘겨운 산행이었지만 괜스레 들떠서 깔깔대는 우리들의 모습이 좋아 전혀 고되지 않았다. 린뇬 힐의 정상에 올라 조우한 레가스피의 전경은 실로 엄청났다. 높은 곳에서 보는 풍경은 어떤 곳이든 늘 낯선 매력이 있게 마련이지만 레가스피의 모습은 그 느낌이 사뭇 달랐다. 해질 녘의 전망이 근사했음은 물론이거니와 내 새로운 생활의 범주를 확인한 느낌이랄까. 그간의 일상과 사뭇 다를 날들이 지속될 터전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매우 거룩해졌고 그 곳이 그렇게 아름다웠던 것 또한 감동스러웠다.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일부분이 별로 발달하지 않은 나는, 모든 것을 내가 체감한 느낌으로만 기억하는데 그 날 린뇬힐에 서 있었던 그 시간은 유독 선명하다. 아마도 그 멋진 모습을 감상하며 한편으로는 앞날에 대한 나름의 다짐을 거듭했기 때문일 것이다. 5개월 동안, 혹은 그보다 더 많은 날 동안 내 뇌가 이 기억을 삭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다소 무리한 바람을 가져보았다. INITIATION 일단, initiation을 거칠게 번역하자면 ‘신고식’ 정도이다. 신고식이란 늘 그렇듯, 절대 기대하지 않은 것들을, 매우 갑작스레 하게 되는 법이다. 누구도 우리에게 첫 날 이런 걸 하게 될 것이라고 귀띔하지 않았는데 (혹은 말을 했는데 못 알아 들었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엄청나게 혹독하고도 어안이 벙벙한 신고식을 하게 되었다. 린뇬힐 하이킹을 마친 우리는 집으로 가는 대신 YMCA로 돌아갔다. 안으로 들어서니 “2009 YMCA-KB RAONATTI PROJECT” 라고 쓰여진 현수막이 정면에 걸려 있었고 의자 약 20개 정도가 같은 쪽을 향해 정렬되어 있었다. 일단 우리가 새로 왔으니 대충 '인사 정도 시키겠지'라고 생각을 하긴 했으나 그것이 우리의 환영식이라고는 짐작할 수 없었다. 어떤 예고도 없었던 데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환영의 식을 받을 만한 위치라고 생각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만을 위한 자리가 맞았고 어리둥절하며 서 있던 우리를 맨 앞에 일렬로 앉히고 나서부터 전혀 기대하지 않은 일들이 연속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알바이 지역 대학 Y멤버들이 행사를 진행하기 시작했고 린뇬힐에 같이 올랐던 친구가 그 때 흥얼댔던 한국 가요를 불렀으나 사실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외국 생활 좀 해봤다고 뻐기면서도 나는 이 날 영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해 대체 우리에 대해 뭐라고 얘기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나는 못 알아들어도 그냥 싱긋 웃는 것에 너무나 능숙해 그저 하회탈처럼 웃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사진을 본다면 표정이 계속해서 굳어가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 다음부터 진행된 순서 때문이었다. 그건 정말이지 진정한 '신고식'이었다. 진행을 하던 친구들은 준비한 것들을 쭉 보여주었다. 돌도 있었고, 물이 들어있는 유리병 같은 것도 있었는데 색깔은 탁했고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밀폐용기부터 하여튼 여러가지였다. 그러더니 자신들이 준비한 것들을 먹어야 된단다. 내가 춘천에서 태어나 걸음마를 떼면서부터 닭갈비를 먹고 자랐듯이 어느 지역이나 그 곳에서만 유독 맛있는 음식이 있게 마련이니 뭐 그런 것 중 하나겠지 싶었다. 그런데 말을 되짚어보니 언뜻 이런 말을 들은 것 같았다. “ I hate this moment to let you do this.” 그제서야 우리 먹으라고 준비한 음식이 ‘음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우리를 보고 있던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것들을 먹어야만 했다. 그들이 처음으로 권한 것은 (사실, 권한 것도 아니다. 그건 강제였다.) 돌이었다. 정말 그냥 돌이다. 한 번 깨물고 물로 입을 헹구면 되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가 싶었다. 다음 순서는 과일이라고 해 잠시 잠깐 행복했었다. 분명 멜론이라고 했는데 앞에 아주 아름다운 수식어가 하나 붙었다. Bitter melon………..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 멜론에서 이런 맛도 났었던가. 얘들은 왜 내게 익숙한 맛을 가진 것은 권하지 않는 걸까. 피클같이 쭈글쭈글하게 썰린 그 멜론 조각이 혀에 닿는 순간, 쓴 것도 신 것도 아닌 뭐가 신비한 맛의 세계를 엿본 것 같으면서도 앞으로 난 미맹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에 먹은 것은, 그들의 말에 의하면 누군가의 침이었다. 믿기 싫었고 별로 믿기지도 않았지만 색깔이 꼭 그것인 것도 같았다. ‘이걸 어떻게 먹어..’ 라는 의문을 가질 시간이나 주면 반항이라도 했을 텐데 친절히 한 스푼 가득 떠 올려 내미는 걸 막아낼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우린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침을 꿀꺽 삼켜버렸다. 그리고 또 하나 든 절망적인 생각. ‘갈수록 태산…………..;;’ 다음 것은 좀 맛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색깔도 노르스름한 게 단호박 같았는데 분명 그들은 누군가의 변이라고 얘기했다. 아마 새똥이라 했을 것이다. 뭐 이제 거기까지 갔으면 더 이상의 엽기적인 것은 나올 수가 없지 않겠는가. 앞으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 나올 것이란 기대를 하며 그 ‘변’을 먹으려고 할 때, 앞에 앉아 있던 우리 팀 멤버 강모씨가 “야, 그건 좀 먹을 만 해. 맛있어.” 라며 오지랖을 넓혔다. 똥이라고 했는데… 맛있단다. 우리의 적응 속도도 참 어지간히 빠르다 싶었다. 어쨌든 그 것은 정말 ‘먹을 만’ 했다. 그러나 ‘먹을 만 하다’는 의견에는 절대 ‘값을 지불하고 사먹고 싶다’는 뜻은 포함되지 않는다. 이제는 마지막이겠다 싶었던 네 번째. 내 생애 가장 끔찍했던 순간이었다. 현지인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무언가를 함께 해야 라뽀가 쉽게 형성된다는 인류학의 가르침을 받아온 지 어언 4년째. 그렇다면 나는 그들이 즐겨 먹기 때문에 나에게 권했을 그 음식을 꼭 먹어야만 했는데 정말.. 그 것만큼은 먹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권한 것은 소의 눈이었다. 눈알 말이다. 그 전까지는 라뽀를 형성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주는 대로 먹었는데 그 눈알을 마주한 순간 심박수가 남달라졌다. 생김새로는 그것이 ‘눈’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없었기에, 어차피 먹일꺼면서 ‘그건 소의 눈이야’라고 친절한 설명을 곁들여 준 그들이 미웠다. 어쨌든 난 그 커다란 것을 입에 넣었다. 입에 넣고 맛을 보다가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에 뱉고 물을 내린 후 뭔가를 올려 보내려는 위를 진정시켰다. 그 물질을 선뜻 씹을 수 없던 이유는 그것이 입안을 가득 메울 정도로 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런 생각을 해 본적이 있는가. ‘내 입안엔 지금 누군가의 눈알이 들어있다….’ 그래도 그것을 씹을 수 있다면 그 자에게 우리가 다음에 먹은 것을 권하고 싶다. 드디어 악명 높은 그것이 등장했다. 국내 훈련 때 아주 많이 들었던 그 음식. ‘부화가 덜 된 달걀’ 이름하여 ‘발롯’이다. 달걀이 나타난 순간, 아. 이게 나온다면 정말 마지막이구나 싶었을 정도로 그것은 위대한 먹거리였다. 계란 모양이고 맛은 맥반석 달걀 같이 부드럽고 고소하다. 그러나 그 적당히 맛 좋은 노른자 위에 있던 그 것. 껍질을 깨부수는 순간 나를 경악케 했던 그 것. 모양새를 형용할 수 없는 그 것은 아직 병아리가 되지 못한 채 죽임을 당한 꾸물꾸물한 새끼였다. 사람으로 치면 태아 정도라고나 할까. 그 부분을 보지 못했더라면 난 그냥 덤덤히 먹을 수도 있었을텐데 운 없게도 유독 나만, 껍질을 깨자마자 그 안에 있던 그 친구와 아이컨택을 해버렸다. 몇 초간 세상의 시간은 멈춘 것 같았고 그걸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어쨌든 부숴진 껍질을 이용해 꾸물꾸물한 그 것을 긁어 내리고 ‘이건 그냥 계란이야’라는 별 말도 안 되는 최면을 걸어가며 태연한 척 먹었다. 그리고 심지어 다 먹는 순간 ‘맛있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내 참, 사막에 갖다 놔도 살아 날 팔자라는 내 사주는 틀리지 않았다. 이리하여, 별 생각 없이 시작했다가 된통 당한 신고식은 충격만 안겨준 채 끝났다. 그리고 우린 바로 밖으로 호송되어 초청받은 댄스 팀과 가수의 노래를 들었다. 우리 같은 평범한 대학생일 뿐이지만 가무에 능한 필리피노답게 정말 멋지게, 또 즐거이 우리를 위해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줬다. 그러나 식이 점점 진행 될 수록 우리의 '아노미현상'은 심해졌다. 우리는 여기서 어떠한 ‘손님’이기에 이리 분에 넘치는 환영식을 받고 있는 건지, 우리는 봉사가 뭔지도 모르고 그걸 하러 온 이방인일 뿐인데, 이들은 우리에게 특별히 뭔가를 기대하는 걸까, 혹은 hospitality정신이 충만하다고 자부하는 만큼 이런 환대의 문화는 일반적인 걸까.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맘 편히 즐기기만 할 수 없었던 이유는 YMCA 앞마당에 정말 우리 다섯 명만 나란히 앉아 오롯이 우리만을 위해 춤을 추는 친구들을 보고 있자니 황송하기 이를 데 없었기 때문이다. 그 분위기는 마치 회갑연을 하는 것과 같았는데 우리를 위해 이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준비했다는 것 자체도 신기하고 그냥 그 자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너무 갑작스러웠고 어안이 벙벙했다. 보는 내내 내가 반복해서 웅얼거렸던 말이 기억난다. "대체 우리가 뭐라고....." 생전 처음 보는 음식으로 우리를 당황하게 한 것도 관심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비록 우리는 그 날 ‘우리를 놀려 먹으려는 건가’라는 도전적인 생각을 했지만 그것은 우리를 환영하고, 좀 더 빨리 확실하게 이 곳을 소개하고 싶었고 또 우리를 받아들이려고 했던 그들 나름의 방식이었다. 난 사실, 매우 고맙다. 그리고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오늘은 그들이 우리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춤을 춰 주고 악수를 청하고 인사를 해 주었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먼저 해 주고 싶다. 뭐.. 워낙 까끌까끌한 성격이라 가능할 지는 모르겠으나 필리핀 친구들의 10%만 친절하게 해도 강산이 변한 것보다 큰 변화가 될 것이다. 난 오늘도 라온아띠가 된 나의 행운에 엄청나게 감사하고 있다. Tip: 우리가 먹었던 음식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돌을 먹은 건 ‘자연과 가까워지기 위한 의식’이라는 뜻이 있었구요, 비터멜론은 몸에 좋아서 약용으로도 쓰인다고 하네요. 침은 진짜 침이 아니라 계란 흰자인데 그게 끈적하니까 서로한테 착착 붙는 걸 의미한다고 해서 ‘가까워진다’뭐 이런 상징이 있습니다. 발롯, 소 눈은 현지인들이 즐겨 먹는다고 해서 우리에게도 먹인 건데 어쨌든 그것도 여기서는 먹는 사람이 많진 않은 것 같습니다. 참고로 발롯은 그 모양새가 너무 심해서.. 밤에만 팝니다. 밤엔 잘 안보이니까요ㅋㅋㅋ-_-^
내 친한 친구 캄보디아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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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말실수로 숙소를 우리 집이라고 하고 캄보디아를 우리나라라고 할 정도로 친숙해져버린 캄보디아!!! 8월에 한국에 돌아가야 하는데 한국에 돌아가는 걸 상상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나에게 정든 캄보디아!!! 네이버, 구글 등 인터넷 사이트에서 검색하면 나오는 캄보디아 소개를 잠깐 접어두고 지금까지 한 달 반가량 캄보디아에서 생활하면서 내가 느낀 캄보디아, 내 나름의 캄보디아를 정의 내리고자 한다. 첫째, 캄보디아는 공 하나로 어린아이부터 청장년층 까지 함께 친해질 수 있는 곳이다. 내가 공하나 들고 마을에 들어가면 어린아이부터 청장년층까지 모든 사람들이 순식간에 삼삼오오 모이고 나를 환영한다. 공 하나에 이런 환영을 받을 줄이야;; 크나 큰 환영에 정말 놀랍고, 고마운 곳. 바로 캄보디아다. 또 나이차가 심하게 나는대도 불구하고 공놀이를 함께 즐길 수 있는 나라, 전혀 어색하지 않는 나라, 캄보디아다.둘째, 나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인정 있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 캄보디아다. 나는 배구를 좋아한다. 시간이 남으면 자전거를 타고 이 마을, 저 마을 가서 배구를 하곤 한다. 자전거를 타고 마을에 가면 친절히 자전거 그늘에 두라고, 좋은 장소까지 알려준다. 그리고 배구 하다가 지쳐 있으면 배구 같이 한 친구가 집이 먼데도 불구하고 뛰어가서 물 먹으라고 물도 가져다준다. 물이 많이 부족한 나라인데도 나에게 물까지 내어주는 사람들, 고마워서 눈물이 난 적이 많다. 부부싸움, 아이들 싸움이 나의 등장으로 멈춘 적도 있었다. 내가 특별한 존재도 아닌데, 이 곳 사람들은 나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센터에서 멀리 사는 아이들을 센터로 데리고 오기 위해 현지스텝분과 함께 오토바이 개조해서 아이들이 많이 탈 수 있게 만든 것을 타고 마을로 자주 간다.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서서 탈 정도인데도 불구하고 내 자리를 만들어주는 아이들, "봉쁘럭, 쏨 언꼬이" (형, 여기 앉아)를 외치는 아이들. 이처럼 내가 특별해 질 수 있는 곳, 착한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 바로 캄보디아다.셋째, 지금 습도 50퍼센트, 기온도 40~45도씨 정도인데도 불쾌지수가 높아지지 않는 신기한 나라, 캄보디아다. 한국에서 만약 이 날씨가 지속된다면 짜증나서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근데 캄보디아에서는 짜증나긴 커녕 언제나 써바이 써바이하다.(행복하다. 즐겁다)넷째, 다양성이 충만한 곳이라 지겹지 않는 곳, 바로 캄보디아다.다일에서의 밥퍼나눔활동이 반복된 생활이라 지겨울 만하지만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못한다. 아이들을 비롯한 사람들이 다양하고 개, 소, 닭, 풀, 꽃, 과일, 나무 등 자연이 나에게 주는 것도 다양하고 하루하루가 똑같은 것 같으면서도 느끼는 것이 매번 다르고 새로움이 많다. 신기하다. 일상에서의 권태라는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지금까지 한 달반 가량 살면서 내가 느낀 캄보디아는 위의 적어 놓은 것과 같지만 앞으로 남은 생활동안 캄보디아는 나에게 어떤 의미로 채워질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내가 가진 게 캄보디아 사람들보다 많다 적다를 떠나서 지금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내 마음, 시간, 열정이라는 걸 마음 속 깊이 새겨 남은 캄보디아 생활이 나에게 안으로 충만한 시간이기를 바란다.
[짧은생각] 작은 것에 감사할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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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의 흐름과는 상관 없지만 팀원 모두가 너무 이쁘게 나와서 첨부합니다.^^ >저희가 활동하고 있는 이곳 호치민 YMCA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습니다. 항상 우리에게 즐거운 웃음과 맛있는 음식을 제공해 주시는 ‘꼬남’이라는 베트남 최고의 요리사(전적으로 저의 생각입니다^^)와 많은 직원들, 그리고 YMCA 2층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많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친구들과 있었던 짧은 하루를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호치민 YMCA에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저녁을 맛있게 먹은 후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친구들과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잠시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일하는 다른 몇 몇의 남자들과 이곳의 대중놀이인 da cao(한국의 제기차기와 비슷한 놀이) 를 함께 하고, 많은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전부터 저와 스캔들이 조심스레 일고있는 이잉 과 봉제학원의 실세인 것으로 판단되는 화와 함께 che(한국의 팥빙수와 비슷함)를 먹으러 가자며 자신들이 사주겠다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과 그동안 배운 베트남어를 사용하며 시간을 보내며 그 둘을 기다렸고, che 를 먹기 위해 함께 YMCA를 나섰습니다.저희는 이것저것 하루일과를 나누었습니다. 물론 제가 알고 있는 베트남어에 한해서 정말 한정된 언어로 서로 의사소통을 합니다. 그래도 이제는 대충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고, 어떠한 의미인지는 파악이 되기에 더불어 웃고 함께 재잘거립니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che 를 시켜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평소에 궁금했던 질문을 조심스럽게 던졌습니다. Tai sao khong di hoc? ( 왜 학교에 가지않아? )그들은 한결같은 목소리로 대답합니다.Khong co tien. ( 돈이 없어서 )현재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친구들은 15세~24세로 다양한 연령대의 친구들이 있습니다. 지금 마땅히 학교에 다녀할 친구들이 돈이 없어서 학교에 가지 못한다는 이야기에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제 주머니를 뒤져 보았습니다. 그들이 가진 것보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지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 얼굴에 웃음은 그들보다 훨씬 적고, 내가 느끼는 행복감은 그들보다 훨씬 얕았음을 느꼈습니다.다시금 물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진부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을 자꾸 느낍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굉장히 시끄러운 상황이라고 인터넷을 통하여 접해 들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저 또한 현재 대학교 4학년에 진학예정인 상황에서 좀 더 좋은 직장, 좋은 연봉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왔던 제 모습이 한없이 초라함을 느꼈습니다. 저는 잠시 화장실 다녀온다고 이야기 한 후 카운터에서 저희가 먹은 che 값을 계산하였습니다. 제가 계산한 것을 알고는 처음에는 흠칫 놀라더니 이내 좋아합니다. 그렇습니다. 가졌다가 이럴 때 쓰라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저녁 짧은 시간동안 그들의 웃음과 생각. 그리고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제가 가지고 있던 편견, 물질에 매여있는 저의 모습이 점차 깨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달 넘게 아무런 활동도 없이 호치민 YMCA에서 베트남어만 배우고 있던 저에게 제가 가지고 있던 가치관이 하나씩 깨어져 가는 모습을 보고, 앞으로 베트남에서 생활이 더욱더 기대가 되고, 과연 4개월 후 제가 어떤 고민거리들을 안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까 궁금증이 더해가는 하루 였던 것 같습니다.
[Xin chao VN] 베트남에 오시면은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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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 오시면은요~ 전쟁박물관 어느 나라든 전쟁을 겪었다면, 이기든 지든 스스로에게 많은 상처를 남기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불과 몇 분 전에 내 눈앞에서 해맑게 웃던 가족들이 한순간의 재로 사라지는 시간이 바로 전쟁의 시간일 수 있으니까요. 그런 전쟁을 베트남은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베트남 역사를 잘 살펴보면 역사의 반은 침략이고 나머지 반은 거의 전쟁입니다. 자체적으로 세미나를 열서 베트남에 대해 조사를 할 당시 베트남 내에서 발발 했던 전쟁은 우리를 놀라게 할 만큼 많고 길었습니다. 대략, 30~40년은 되는 것 같아요. 우리가 알고 있는 월남 전쟁, 즉 베트남 전쟁도 사실 1차, 2차, 3차로 3번에 나누어서 전쟁을 했었고, 마지막 전쟁인 3차 베트남 전쟁이 1981년에 끝났으니까 꽤 최근까지 전쟁을 했었습니다. 전쟁박물관은 이러한 전쟁의 역사와 무기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곳입니다. 규모는 생각보다 작지만, 그 안은 상당히 알차게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밖에는 탱크와 비행기가 있고요. 안에는 무기들 소개와 함께 베트공들의 활약상을 담은 사진과 학살이나 사람들의 사체 사진 등 상당히 생생하게 담겨져 있습니다. 접근성이 좋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자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찾아가기가 수월하고요. 자국인에게는 돈을 안 받아서 좀 더 자유롭게 이용 할 수 있는 듯싶습니다. 아마도 베트남 사람들은 이 곳을 통해서 자신의 역사와도 다를 바 없는 전쟁을 좀 더 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몇 가지 테마가 있는데요. 굳이 다 말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밖의 탱크나 비행기는 우리 또한 자주 봐오던 것들이라서 그렇게 관심을 끌진 않았고요. 안의 사진은 약간 잔인(?)하달까요? 너무 생생하게 담겨져 있어서 비위 약한 저는 오래 있지 못 했습니다. 그 밖에 전쟁의 흐름, 쓰여진 포탄의 양 따위를 그래프로 나타난 방도 있었는데요. 재미없었습니다. 제 관심을 끌던 방은 적게는 9살에서 많게는 15살 정도의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전시된 방입니다. 사진들이 너무 강한 인상을 남겨서 약간은 뭍혀지는 듯한 느낌을 받긴 했는데요. 저 처럼 약간 예외의 사람들이 그 쪽을 먼저 가는 것 같더라고요. 그냥 단순한 그림 전시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전쟁에 대한 베트남 아이들의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담은 단순한 그림일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요. 제 오만이더라고요. 이 아이들은 우리와는 확실히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느끼고 다른 것을 생각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간단한 질물은 하나 할까해요. 만약에 당신이라면 전쟁에 대한 그림을 그리라고 했을 때 무엇을 그리시겠어요? 전쟁을 모르는 우리로써는 전쟁을 그리라고 하면 단순히 탱크나 비행기가 싸우는 것을 연상하기가 쉬울 거 같아요. 물론 비둘기 한 마리 그려 놓고 평화를 외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마치 자기가 군인이라도 된 것 마냥 앞장서서 적을 때려 눞히는 그림을 그릴 것 같기도 하네요. 아직 우리는 인종을 뛰어넘은 평화를 쉬이 생각 하지 않을 것 같아요. 아직 우리는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 하지 않을 것 같아요. 아직 우리는 전쟁의 생생한 학살에 대해서는 생각치 못 할 것 같아요. 아직 어린 아이들이에요. 9살이면 초등학교 2학년이죠. 이 9살 아이의 그림은요. 피의 강에 죽은 사체들이 둥둥 떠있는 그림이에요. 누가 상상했을까요. 피의 강이라는 것 자체를 쉬이 떠올릴 수 있을 만한 단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한국에서 누가 그러한 그림을 그렸으면, 아마 애를 상담소에 보내고 정신과 진료를 받게 할지도 모르겠네요. 그 만큼 우리가 사는 환경은 그러한 그림을 담아낼 수 있을 만한 환경은 아니니까요. 그 외에 'Please Don't'이라는 작품이 있어요. 15살이 그린 그림이에요. 저 그림을 그리면서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전쟁이라는 것이 누군가를 괴롭히는 일이라고 생각 했을까요? 아니면 단순히 전쟁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담고 싶어 했을까요? 제가 작가가 아니라서 뭐가 옳다고 말 할 수는 없지만 제가 확실히 말 할 수 있는 것은 이 곳에 아이들이 보는 것과 우리 한국에서 보는 것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이죠. - 그 외 갑자기 생각나네요.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책을 쓴 이스마엘(풀네임이 생각이 안나요.) 자신의 전쟁의 경험담을 생생하게 담아 책으로 출간을 했습니다. 그 안에서 작가는 12살의 나이에 부모를 잃고 전쟁이란는 상황 속에서 집도 없이 오직 자기가 살기 위한 삶을 살아 왔습니다. 어린나이에 총을 잡아야 했고, 어리 나이에 마약을 해야 했으며, 어린 나이에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한 죄책감은 느끼지 못하는 곳에서 생활 해야 했습니다. 전쟁은 단순한 국가와 국가간의 싸움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안에서 군인이든 아니든 누군가가 죽는 다면 그로인해 생기는 누군가의 슬픔은 누가 책임 져주나요? 그로 인해 고통받는 것이 아이라면 그 아이를 어떻게 보상을 해줄 것인가요? 아이가 가질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앞으로의 생활을 누가 책임져주나요? 이스마엘이 그랬어요. 자신이 살았던 환경과 다른 곳이 있는 줄은 몰랐다고. 만약 이 시간 전쟁터에 있는 아이들이 있다면 그 아이들도 비슷한 생각을 할까요? 자신은 총을 몸에 품고 내가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삶을 살지만 지구 어딘가에는 편안히 잠자고 게임하고 놀고 쓸데 없는 반찬투정을 하는 아이가 있다고 알고는 있을까요? 물론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알고 아이의 행복을 우리가 어떻게 해서 정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을 압니다. 하지만 보통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한다고 합의 된 것들, 적어도 1달러 미만으로 사는 아이들이 좀 더 적었으면 좋겠고, 좀 더 가족의 품에서 행복한 웃음 띄며 살았으면 좋겠고, 좀 더 어린나이부터 일하기 보다는 좀 더 놀았으면 좋겠고, 그러한 바람들이 그러한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고 싶네요.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많은 곳에서 정말 활발히 진행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곳에서 사는 아이들은, 우리는 그 아이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궁금하네요. 이스마엘 처럼 운일지 아니면 자신이 개척한 것일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전쟁이라는 곳에서 해방되어 살아가는 아이들이 당연히 있지만 정말 그렇지 못한 곳에서 사는 아이들은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사는 것인지 그 삶이 당연하다고 느끼는 아이들에게는 아이다운 혹은 아이처럼 생활할 환경을 마련 해 주어도 그것을 힘들어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무더운 봄 날씨에 우리를 찾아온 Duy에게 아직도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기 시간을 할애해서 우리에게 봉사를 해주는 그 고마움을 어떻게 표시할 수 있을까요. 등이 땀에 흠뻑 젖어 가면서 잘 모르는 호치민 시 시내를 소개 해 주기 위해서 정말 많이 걷고 걸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는 그냥 전쟁 박물관만 가고 안가기로 했어요. 사실 우리가 너무 힘들었고, 아직 죽음의 12시에 움직일 용기가 안났던 것 같아요. 제발이지, 썬크림이 태닝크림으로 변하는 12시에는 움직이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린 항상 12시에 그렇게 돌아 다녔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여러 생각이 겹쳐서 너무 글이 산재되있는 듯 하네요. 정리를 하고 싶지만, 그러자니 추가를 해서 더 복잡해지면 더 복잡해지지 정리 될 거란 생각은 안들어서 그냥 올립니다. 머리아프시거나 글읽다고 힘드시면 그냥 살포시 알트 F4를 누르시는게 나을거 같아요. 저도 다시 읽고 나니 그냥 끄고 싶긴하네요. 그냥... 너무 생각없이 쓴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 ㅜ.ㅜ
슈퍼맨은 개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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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무엇을 쓰려고 이렇게 펜을 아니 타자를 치다 보면 무엇을 써야 할지 막막해 질 때가 있다. 머릿속에서는 할 말들이 아우성을 치며 나오고 싶어 하지만 정작 내 손은 엉뚱한 잡담 같은 글을 길게 늘이며 망설이고 있다. 그래도 한번 뽑아보는 시도라도 해보련다. 왜 우리의 옛말 중에도 있지 않은가. 사내가 칼을 뽑으면 무라도 썰어야 한다고. 자원봉사자. 이곳 필리핀에 와서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쓰는 말이다. 한국에 있을 때 꼭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이곳에 와서 많은 일들을 하고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개뿔 나는 슈퍼맨이 아닌 것이다. 결국에 와서 내가 하는 일은 아이들을 위해서 운동장을 만드는 일이다. 여기 와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은 무엇일까? 곰곰이 돌아보면 사실 별 것 없다. 엄밀히 따져 보자면 운동장 만드는 것이야 일꾼만 고용하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나를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놈의 몸뚱이가 그런 일에는 워낙 도가 터서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것일 리는 없을 테고, 그 돈이면 전문가를 고용해서 5달 동안 파견해도 무언가 더 색다른 것이 나오리라. 그렇다면 무엇일까? 대학생이란 신분으로, 그것도 졸업할 때가 다 되어가는 이젠 정말 고학번이라 후배만 마주쳐도 계면쩍어지는, 지나가면 아저씨 소리를 들을법한 삭은 얼굴을 가진 내가 여기 와서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술도 마시면서 어울리는 것. 그것 말고는 딱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저녁마다 종종 나가 길거리를 배회하며 바람을 쐰다. 어슬렁어슬렁 내가 목적지로 하는 곳으로 걸어가 보면 이미 두어 명씩 모여 있다. 그러면 나 또한 씩 웃어주며 좋은 저녁이라느니 오늘은 좀 덥지 않느냐며 넉살좋게 한마디 던지며 슬그머니 엉덩이를 들이민다. 차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모기에게 피도 좀 헌혈하고, 멍하니 서 있다가 한 두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따갈로그어로 그들끼리 대화하는 걸 지켜보다 다시 한두 마디씩 끼어들고 다시 또 서로를 바라보기도 하고 다른 곳을 바라보기도 하며 느지막한 저녁을 보낸다. 때로는 술을 마시러 가자는 정말 매력적인 제안 앞에 줄 묶인 강아지마냥 졸졸 쫓아가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나는 이 사람들과 진정 함께하는 것일까? 무엇을 공유하고 있는 것일까? 글쎄 이러한 표현이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단지 나는 그들과 함께 있고 싶을 뿐이고, 이러한 내 모습이 어찌 보면 시간을 버리는 아까운 짓일 수도 있다. 누군가가 나를 바라본다면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것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5개월 뒤엔 또 어떠한 생각을 가지며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을지 나도 모르겠다. 지금 드는 생각은 난 아직 젊기에(외국 나와서 좋은 점 중에 하나는 24살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 나이일 것이다.) 나를 굳이 정형화할 필요도 없고, 상황에 따라 배워가는 것 또한 늘어 갈 테고, 그럴 때마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영향을 받지 않을까 한다. 지금의 이 에세이 또한 훗날 볼 때 ‘이때는 이렇게 생각했나?’ 하며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질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나는 지금 필리핀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며, 밥을 먹고, 일을 한다는 것이다. 이 안에서 더욱 무언가를 알아보려 발버둥 치고 싶다. 삶이라는 매력적인, 정말 가슴 설레게 만드는 길을 걸어가는 중인 것이다. 남은 100여일 동안 열심히 걷고 뛰며 글을 적어보련다. 그런 후에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철없는 춈푸와 놀아주는 아름다운 그들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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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나의 화두는 사람이었다.한국에서도, 남들이 딱히 관심갖지 않는 NGO활동에 그리 마음의 자리를 내줬던것도 나와 함께했던 다양한 국적의,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 덕분이었다. 태국에서도 마찬가지. 길과 하늘, 야자수, 수없이 예쁜것이 많지만 가장 예쁜것은 사람이다. 가장 아름다운것은 우리의 인연이다.그 사람- 중에서도. 오늘은 내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가르치는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 해 보려고 한다. 우리가 비비적대고있는 이곳 쌈캉펭 YMCA는 여름에 슈퍼키드 캠프등의 데이캠프를 진행하거나 주말에 정규 수업, 평일 태권도수업 등을 진행해서 아이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다. 워낙 아이들을 좋아해서, 나는 항상 "정신연령이 똑같다"는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이며 열심히 놀고있다. 그런데, 공부방 봉사를 해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많은 아이들을 단체로 만난것이 처음이어서, 정말, 아이들이 나를 가르친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그리고 내가 미워했던 선생님들에 대해서도 다시한 번 떠올리게 된다. 자질이 부족해서일까, 아무래도 예쁜 아이 있고 놀아주기 힘든 아이가 있다.특히 가장 힘든 아이들은 질투심이 많은 아이. 자기에게서 눈이 조금이라도 돌아가면 바로 뾰루퉁한 표정을 짓는 아이. 옆에 내 손을 잡은 약한 친구의 손을 거칠게 떼어내는 아이. 아이가 미워지는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당황스러운 경우가 많다.도이따오에서도, 람푼에서도, 쌈캉펭에서도, 가는곳마다 그런 아이들이 있다.그리고 사람 마음이란것이- 그런 아이들보다는 그 아이들에게 밀려나는 작은 아이들에게, 그러면서도 수줍은 미소로 곁에서 맴도는 '착한'아이들에게 마음이 쓰이는것이 사실이다. 쌈캉펭 YMCA의 대표적인 '나의' 골칫덩이였던 눅.나는 자주 카운터쪽으로 놀러나가서 거기서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들고, 돌리고, 집어던지고, 신발벗기고, 소리지르고 하면서 놀았다. - 그러다 혼도 많이났다 - 항상 나와 함께하는 대표적인 아이들은 빅, 리우, 눅 삼총사. 참 신기한 삼총사였다.빅은 거칠고 시끄럽고 꽥꽥거리고 두 다리를 쉬지않고 움직이는 전형적인 남자아이(이 사진에서 마지막이 '빅')그리고 사진은 안찍었나보다. 리우는 빅보다 덩치도 작고, 더 여자아이처럼 부드럽고, 수줍게 웃는 남자아이.눅은 이 셋 중에서 대장 역할을 하는 기 세고, 고집 세고, 욕심 많은 여자아이.역시 처음 셋이 놀때는 가장 약한 리우에게 마음이 갔다. 하지만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됬다. 리우보다 힘이 센 빅이, 거칠게 장난치는 것 같지만 항상 리우를 챙겨준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던 것이다.그동안 질투심에 친구를 밀어낸 아이들을 많이 봐서, 주로 그럴거라 생각했던 나에게 잔잔한 감동이었다. 슈퍼키드 캠프에는 눅과 빅만 있어서, 계속 리우가 아픈줄알고 리우를 찾는 나에게 리우가 주말에 오자마자 손을 끌고 와서 내 품에 안겨주던 아이, 장난치다가 리우가 속도가 떨어지면 살며시 와서 리우도 들어올 수 있게 도와주던 착한 빅!그리고 빅과의 심한 장난에 빨개진 내 손등을 가져가 입으로 후후 불어주던 사랑스러운 리우는 정말 나에게 자식같은 (?) 완소남들이 되었다.문제는 눅. 이 세명이 어찌 친구인가 싶을 정도로 눅은 욕심이 많았다. 내 한쪽 손은 자기가 나와 떨어져 있을때도 자기 전담 자리로 비워놓아야 하고, 다른아이와 놀아주고 있을때도 마구 끼어들어 놀아달라며 손을 내밀고, 내 옆을 차지한 아이를 밀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런 눅을 어떻게 해야할까 참 많이 고민하던 나는, 다른 아이들이 섭섭해할까봐, 눅이 내미는 손을 조금 모른 척 하기로 했다.그렇게 몇 일을, 눅보다 다른 약한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졌더니, 드디어 눅이 삐졌다.나를 봐도 아는척도 안하고, 혼자 쀼루퉁한 얼굴을 하고 멀찌감찌 앉아있었다.언제는 내가 인사를 하니, "이제 삐 쳠푸랑은 안놀아!" 로 추정되는 말을 뱉고 뒤돌아갔다.옆에서 바라보던 피 멈이 그저 웃었다.사실은 눅은 상대하기가 많이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고, 눅 때문에 의기소침해진 다른 아이들을 많이 봐 온 터라, 눅이 다가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차라리 편하기도 했다. 선생님의 자질이 참 없는 생각이었지만.그러기를 며칠째, 눅이 표정이 심통에서 점점 가끔 슬퍼보이는 것이 신경쓰일 무렵.빅과 리우가 나에게 와서 말을 걸었다. 확실히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가서 눅과 놀아주라는 말 같았다. 그리고 내 손을 잡고 눅에게 다가가고, 그리고 눅이 삐져서 지나가니 자기들도 어쩔 줄 모르고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했다. 그 진지한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참 멋있기 까지 했다! 그 후로 자기들끼리 온 힘을 다해 나와 눅이 화해하도록 노력하는 것이었다.그 때 생각했다.나는, 무슨 기준으로 - 나의 편협한 눈으로 - 그 아이들의 관계를 규정짓고, 눅의 욕심많은 성격 때문에 상대적으로 약한 리우, 상대적으로 마음 넓은 빅이 마음아플꺼라고 생각했을까? 사실 그것은 그냥 나의 귀찮음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투심이 많고 욕심이 많다해도 결국 사랑이 필요한 어린아이에 불과한 것을. 내가 참 어리다는 생각이 들었다.사실 아이들은 그렇다. 공부방을 나갔을 때도, 아이들 사이의 룰은 어쩌면 어른의 그것보다 현명하고 평등하고, 엄격하다는 것을 깨닫고 감탄하곤 했었다.간단하다, 그저 누군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들의 관계를 맺어가는것.나는 그 아이들을, 어른의 눈으로 보며- 힘 센 아이가 권력관계를 가지고 작은 아이를 밀어낸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그 아이들 사이에는 분명 우정이 있고 그나름의 평화로운 관계가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 아마 귀찮음과 당황스러움이란 것에 두 눈이 가려 - 못 본, 아니 '안 본' 것이었다.그 후, 빅과 리우마저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어느날 빅과 리우와 같이 신발뺏고, 코알라 놀이를 하며 소리지르다가 그걸 바라보고만 있는 눅에게 자연스럽게 장난을 걸었다. 며칠 나를 무시하던 눅이 기다렸다는듯이, 처음보는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장난에 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때, 빅과 리우의 표정도 한층 빛이났다. 신나게 웃었다.그렇게, 눅은 다시 나의 친구가 되기로 한 것 같다. 왠지 나는, 내가 아이의 마음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그 작은 아이가 나의 좁은 마음을 이해하고 용서해 준 것 같았다. 그 날 눅이 내밀었던 시큼한 맛의 과일은 진짜 맛있었다.명절 1주일간 사랑스러운 슈퍼키드들과 그 삼총사를 못봤다.내일 아침, 아이들을 만나면 꼭 안아줘야지.어느때보다 아이들을 만나는 시간이 기다려지고 설렌다.아이들 뿐만이 아니라,여기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가르친다.우리 팀원,스탭- 피 낭, 피 멈, 피 매, 피 푸, 피 프레, 피 페차린, 피 툰, 피 똔, 피 샤, 요 옹*꽃보다 남자 홀릭 닝, 너무너무 귀여운 바이!유스리더 - 여자 3총사 "똥먹어!" 에 이어 "똥구* 먹어"까지 내게 가르친 빳,넌,웨제발 팬츠업, 뿌이. 코는 파지만 순정사나이 윌리엄. 볼때마다 새로운 위.1+2 3종세트 고딩이들 스낵홀릭 겜, 변태손금 북, 맨날 나랑 싸우는 뱅,독특한 펀, 못본지 오래된 땡,모,위, 등등, 쏭끄란때 너무 이쁜모습으로 나타나 여자팀원들이 서로 쳐다보며 "각성하라!" 라고 소리치게 만든 까터이(레이디보이) 핌, 한번씩 스치는 미소짓는 사람들,집 앞 아이스크림가게 쏘쿨한 아저씨, 집 옆 슈퍼 항상 볼때마다 강아지 앞발들고 싸왓디쨔오 라고 인사시키는 아주머니,벌써 보고픈 우리 서양동생 볼수록 귀여운 왕국이-로빈슨 지하 1층에 있는 시원시원한 성격의 언니와 이승기닮은 훈남청년람푼의 내새끼 폿!떠이 하우스의 그들 ㅋㅋㅋ보고픈 범이, 아짠 아리, 크루 게, 애, 닝 등등 작년 한국방문멤버!워킹스트릿 사이즈 맞추는 아줌마, 똥아저씨와 친구들!음...그리고..쨈....그래 쨈도...쨈..쨈도 좋은아이입니다...하하......지금 당장은 생각나지 않아서 까먹었던 수많은 사람들이나를 행복하게하고, 시간이 가는걸 아깝게하고, 가르친다. :)내가 '감히' 돕는다고 나서거나 알린다고 나설것이 없다는 것이 느껴진다면겸허히, 열심히 배우고 오는것도 좋은 봉사. 열심히,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즐기고, 열심히 대화하고, 열심히 웃고.그 눈동자 하나하나를 마음에 담으면 :)마지막은람푼으로 어제 떠난 보고픈 왕국이를 추억하며 ㅠㅠ작캄 하이스쿨은 왕국이를 돌려내라 돌려내라!!왕국이의 솔로콘서트, 맨발, 춈푸 굿모닝? 하는 인사, 맥북, 스투피드! 러브신 헌터 등등을 매일처럼 봤는데 이제 한참 기다려야 다시 본다니.ㅠㅠ완전한 이별은 아니지만, 타지에서의 안녕은 언제나 마음이 아프다.다음에 또 만나! 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게. 누구와의 이별이라도.오늘 다음에봐- 라고 인사하고 돌아선 이가 우리의 일정과 얽힌다면 그것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항상 머릿속에 맴돌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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