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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3) 동티모르 딜리에서, 에세이 그 두번째 - 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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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 딜리에서, 에세이 그 두번째2008.09.23written by - 함보람‘ 찌나 찌나~ ‘ 처음 이 곳에 와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찌나 찌나~” 길거리에 지나다니거나 이동할 때 트럭 뒤에 타고 있는 우리를 보고 현지인들이 던지는 말이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으나 알고 보니 중국인들을 부르는 테툼어였다. 화교들이 상권을 거의 장악하고 있는 딜리 시내에서 동양인들을 보면 의례히 중국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처음 들었을 때에는 별 생각 없이 흘려 들었지만 오후에 외출하거나 밖에 나갈 때 마다 우리를 놀리는 듯한 어투로 ‘찌나’ 라고 외치는 현지인들을 마주 치는 것이 짜증나기 시작했다. 간사님께서 그냥 무시하고 대꾸하지 말고 지나가라고 말씀해주셨지만 나도 감정이 있는 ‘사람’인지라 썩 유쾌하지 않은 말을 그냥 흘려 보내기란 쉽지 않았다. 사실 지금도 여전히 길에 지나다니다가 이 말을 들으면 짜증이 난다. 일부러 MP3 음악 소리 볼륨을 귀에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키우고 다니기도 한다. 하지만 문득 든 생각이, 어렸을 때 파란 눈의 외국인이 지나가면 괜한 호기심에 “Hi” “Hello” 같은 인사말을 건네면서 친구들끼리 키득키득 웃었던 경험이 있으리라. 낯선 생김새의 외국인에 대한 큰 의미 없는 단순한 호기심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동티모르에서 내가 그런 ‘외국인’의 입장인 셈이다. 호기심 섞인 장난 조차 웃음으로 받을 수 없는 내 자신이 왠지 작아 보였다. 여전히 나는 닫혀있는 것만 같은 생각에 거리를 걸을 때 마다 발걸음이 무겁다. ‘ 무료함과 여유 사이 에서 ’ 여기 도착해서 처음으로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무료함이라는 것이다. 아침에 학교에 갔다가 점심을 먹고 5시에 테툼어 수업 시작까지 자유시간이 주어진다. 책도 계속 읽다 보니 지루하고 날씨도 더운 곳에서 딱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해야 할 고민과 끝내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아 무료함이란 것은 사치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만 생각했던 무료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다. 비슷한 어려움을 팀원들이 대부분 겪고 있었다. 이대로 쭉 가다 보면 이 무료함에 지쳐 무기력으로 이어질 것이 뻔했다. 무언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 무료함을 어떻게 체득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꼭 해야 할 일’ 이 없는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긴 시간을 고민한 끝에 나름의 답을 얻었다. 그것은‘ 비어있는 시간 ‘을 ‘ 할 일 없는 따분함 ‘ 이 아니라 여유로움으로 머리 속으로 끊임 없이 되뇌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수많은 일들에 치여 미처 생각하고 고민하지 못했던 것을 되돌아보고 그리고 사치라고만 여겨졌던 여유를 즐기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부터 쉬운 것은 아니었다. 쉬면서도 불안한 이 느낌. 양치질 하고 제대로 헹구지 못한 것 마냥 찝찝했다. 하지만 하루 하루 나도 모르게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 익숙해 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의 전환을 시도하는 것, 그 동안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을 한 번 뒤집어 보고 그 것에 나를 맞추어 본다는 것. 현지 적응의 가장 첫 걸음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동티모르 생활 한달 차 풋내기의 동티모르 생활 팁’ 1. 물건을 살 때에는 우선 반 값으로 깎고 본다. 외국인은 무조건 돈이 많은 줄 알고 값을 높게 부르는 경향이 있다. 2. 유제품은 되도록 사먹지 않는 것이 좋다. 대부분의 유제품들이 외국에서 수입되는 것들인데, 냉장보관을 제대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통기한이 모조리 한 달 이상인 것을 발견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방부제가 들어갔길래 유제품의 유통기한이 그리 길 수 있다는 말인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신빙성 없는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어서 선택은 개인에게 달렸다. 그러나, 나는 사먹지 않는다. 3. 택시를 탈 때에는 흥정을 먼저 한다. 딜리 시내가 좁아서 웬만한 거리는 택시로 2 달러 정도면 모두 갈 수 있다. 하지만 타기 전에 미리 흥정을 하고 타는 것이 좋다. 내릴 때 값을 비싸게 부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흥정을 해도 도통 먹히지 않을 떄가 있다. 그럴 떄는 과감하게 보내버린다. 왜냐고?! 택시는 널리고 널렸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미터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운전 기사의 판단에 따라 값을 부르기 때문에 얼마든지 합당한 값에 목적지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더운 볕에서 택시를 잡고 흥정하는 수고는 감수해야한다. 4. 길을 건널 때에는 무조건 오른쪽을 먼저 살핀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나라랑 교통 방향이 모조리 반대이기 때문이다. 운전석도 반대다. 5. 점심시간에 상점을 방문하는 것은 헛탕 칠 가능성이 많다. 물론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상점들이 점심시간에는 문을 닫기 때문이다. 큰 마켓조차 점심시간이라고 문을 닫아놔서 땡볕에서 말 없이 되돌아 왔던 경험이 있다. + 사진 (첨부파일 참고해주세요) - 구아바 사진 - 구아바 구아바~ 여기 사람들은 너무 흔한 구아바를 왜 먹는지 이해 못한다고 한다! 이렇게 맛있는 구아바를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한 아름의 구아바를 안고 며칠이나 행복했다 - 3달러 사진 -열 명이 넘는 입들의 아침을 행복하게 해주는 3$ .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라는 의문이 들 것이다.- 빵사러 가는 길, 빵 사진 - 하지만, 여기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 안개 자욱한 길을 걸어가면 큰 시장이 나타나는데 그 곳에서 이렇게 생긴 빵들을 많이 판다. 흡사 바게트마냥 겉은 딱딱하지만 속은 부드러운 것이 담백하고 느끼하지 않아 크게 질리지 않는다. 포르투갈의 식민지를 오래 받은 동티모르이기 때문에 아침을 빵과 커피로 한다고 한다. 사진에 나온 빵이 가장 기본적이고 다른 모양의 빵들이 두어가지 더 있지만 맛은 사실 비슷비슷하다.
(09.23) 판이의 뉴스 클리핑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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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 Thursday, 28 August 2008] Little hands should carry schoolbooks 아이들의 손은 교과서를 들어야 한다 When I moved abroad, and more specifically when I moved to Dili from the districts, I thought my politics on consumerism - my belief that countries that refuse to allow unions or protect the rights of their workers should not benefit from my money - would be in the majority or at least enjoy some comfortable numbers. I assumed that aid workers, many of whom come from first world countries and are well aware of the politics of child labour, would be vigorously opposed to child labour. But I was wrong. I have written briefly once before about the wrongness of supporting child phone card sellers, but of course it is more than that. Every weekend, armies of school aged children wander along the beach selling fruit and peanuts. All along the boulevards of Dili, children sell water, snacks, beer and cigarettes, all of which foreigners buy. Indeed, on the cover of the Report on Human Rights Development in Timor -Leste released this month by UNMIT, there is a large colour photo of a child selling fruit. Apparently the UN could find no clearer image of a human rights abuse than a working child. It is true there are almost no factories in Timor and Nike isn't coming anytime soon. But the principle is the same - child labour in wrong, for a number of reasons, some ethical and others logical. If a foreigner who works on a livelihoods project buys a bottle of water from a school aged child, she has just contributed to the problem she's trying to eradicate. As that child sells water, his older brother or sister is (if they are lucky) sitting in a skills training program or at home, unemployed. Timorese need money and all of us should support micro-economies by buying from local produce vendors down the street or from neighbourhood kiosks whenever possible, but children should be in school. Every time a child is rewarded for selling a phone card, the more the child is encouraged to sell instead of attend school. Can it possibly be that children only work on holidays or after school? Riiight. And even if they did, what kind of a callous adult would wish upon a child a day of school lessons followed by a day of work, instead of a childhood of games and fun? Jobs statistics gathered by a survey of employed adults paint an inaccurate picture of Timor, since they ignore a majority of the real workforce. Until there are no more unemployed adults, there is no reason to have even a single child at work in Dili. So what can we do about this? To start with, don't buy anything from small children, ever. And don't simply refuse to buy anything, tell them why. Because most small children don't know English (or math or Portuguese or science or the alphabet or much of anything else because they're too busy selling you oranges to attend class), here's how to make the piont in Tetun, "O nia tinan la to'o, entaun hau lakohi hola buat nee. Hau la hola sasan husi labarik kiik oan." Imagine a Dili where every foreigner did this. The kids would go home and say, "Mom, people aren't buying anything from me. They said I should go to school!" Just imagine! Within a month or two the beaches would be full of teenaged brothers and sisters carrying a stick heavy with fruit. Livelihoods classes would empty. This should be enough to fix the problem, but of course, it isn't. Non governmental organisations and aid agencies themselves have to make this problem a priority. The International Labour Organisation, amongst others, must have fairly strict anti-child policies, but to date I've seen nothing done about the problem. We need posters ("Little hands should carry schoolbooks!"), we need classroom curricula, we need law enforcement to get on board and we need to get on the radio, television and newspapers and scream from the rooftops : Child labour is always wrong. We need to change some minds at the local level. Foreigners mostly come here to try to make life a little better for the people here and the Timorese welcome them because they hope they can help develop their country. Turning a nation's children into robot waiters while depriving them of an deucation isn't going to do either one of those things. We can't afford to forget that. 2008년 8월 28일 사설 아이들의 손은 교과서를 들어야 한다 내가 밖에 나갈 때, 특히 지방에서 딜리로 이동할 때, 나는 나의 소비 옹호론이-내 신조는 노동조합 결성이나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를 거부하는 나라들은 내 돈으로부터 이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수의 의견이거나 적어도 납득할만한 수의 의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대부분은 1세계 국가들에서 왔고 아동 노동에 대해 잘 아는 국제 구호자들이 아동 노동에 대해 강하게 반대할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나는 틀렸다. 이전에 간단히 전화카드를 파는 아이들을 지원해 주는 것에 대한 지적을 한 적이 있지만, 물론 상황은 그보다 더하다. 매주 취학 연령의 어린이들의 떼가 과일과 땅콩들을 팔며 해변가를 떠돈다. 딜리의 가로수길가에서 아이들은 물, 과자, 맥주, 담배를 파는데 대부분 외국인들이 산다. 정말로, UNMIT에서 이번달에 발행한 동티모르의 인권 성장(개발)에 관한 보고서에는, 과일을 팔고 있는 아이의 커다란 칼라 사진이 있다. 분명히 UN은 일하는 아동보다 인권 학대에 대한 확실한 그림을 찾을 수 없다. 티모르에는 거의 공장이 없고, 나이키 같은 회사가 바로 들어 올 것도 아니다. 그러나 원칙은 같다. 아동 노동은 윤리적이거나 논리적인 여러의 이유로 잘못된 것이다. 만약 한 외국인이 취학 연령의 아동에게 물을 산다면, 그녀는 곧 그녀가 해결하려는 문제에 기여하는 꼴이다. 그 어린이가 물을 팔고 있기에, 운이 좋다면 그의 형이나 누나는 기술 교육 프로그램에 앉아 있거나, 무직인 상태로 집에 있을 것이다. 티모르 사람들은 돈이 필요하고, 우리는 가능하다면, 길가의 지역 상품 상인이나 이웃의 가판대에서 구매를 함으로써 지역경제(또는 마을 단위의 작은 경제규모?)를 지원해야 한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학교에 있어야 한다. 아이들이 전화 카드를 팔아서 보상을 받을 때마다, 아이들은 더더욱 학교에 가기 보다는 물건을 팔려고만 할 것이다. 과연 아이들이 오직 휴일이나 방과 후에만 일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으~렇다. 만약 그렇다면, 얼마만큼의 무감각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하루의 일을 마치고 어린시절의 놀이와 즐거움 대신, 그날 그날의 학교 교과에 대해 공부하기를 바랄까? 고용에 대한 조사에서의 직업 통계는 티모르의 상황을 잘못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다수의 실제 노동력을 모른체 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실업상태의 어른들이 없을 때가 돼서야, 딜리에서 단 한명의 어린이라도 일을 해야 할 이유가 없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첫째로, 어린 아이들로부터 아무것도 사지 마라. 그리고 단지 구매를 거절하지만 말고, 그들에게 이유를 말해라. 대부분의 어린 아이들은 영어를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당신에게 오렌지를 파느라 매우 바빠서 수업에 참가할 시간이 없었기에 수학, 포르투갈어, 과학, 알파벳 등을 모른다) 여기에 테튬어로 어떻게 말하는지 적어둔다. “ 너의 나이는 충분치 않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이것들을 사고 싶지 않다. 나는 어린 아이들에게 물건들을 사지 않는다.” 딜리의 모든 외국인들이 이렇게 한다고 상상해보라. 그 아이는 집에 가서 말할 것이다. “엄마, 사람들이 저한테서 물건을 안사요. 저는 학교에 가야 된데요!” 상상해보라! 한달이나 두달 안에 해안가는 과일로 가득한 막대를 든 십대인 형 누나들로 가득 찰 것이다. 동네 교실을 비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문제를 해결하기에 충분치 않다. 비정부기구와 국제 구호단체들은 이 문제를 우선 사항으로 정해야 한다. 다른 단체들 중에 국제 노동 기구는 공정하고 엄격한 아동 노동 반대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는 이 문제와 관련되어 아무 것도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우리는 포스터가 필요하다 (“아이들의 손은 교과서를 들어야 한다!”), 우리는 교실이 필요하다, 우리는 안내판(아동 노동에 대한?)을 걸어야할 법적 강제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라디오와 텔레비전과 신문에 연락할 필요가 있고, 지붕위에서 외쳐야한다. 아동 노동을 언제나 잘못된 것이라고. 우리는 지역적 수준에서 마음의 자세를 바꿀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현지의 사람들이 조금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고자 이곳에 왔고, 티모르 사람들은 외국인들이 티모르를 발전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기에 외국인들을 반긴다. 나라의 아이들을 교육으로부터 떼어놓는 동시에 로봇 웨이터로 변하게 하는 것은 나라의 발전에 아무런 도움도 안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을 여유가 없다. * 본 해석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밑줄 친 부분은 해석이 심히 의심스러운 부분입니다.
(09.23) 판이의 뉴스 클리핑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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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 동티모르] [Editorial - Thursday, 7 February 2008 Jobs, not rations, key to independence This week is a week of mixed progress in Timor-Leste. Monday the Untied Nations Police handed over three neighborhood police posts to the National Police of Timor-Leste as a sign of trust and faith in our local police. If PNTL can manage this without a spike in criminal activity, this may be taken as a positivefirst step in a long goodbye to foreign peace keepers. If this move proves successful, no one will regret it. Another step toward normalcy-though this one much more dubious-is the reduction of rations for the internally displaced people(IDPs). Three years ago only widows, veterans and victims of natural disasters got regular government handouts. Then, in th last two years tens of thousands of people suddenly demanded the government's aid. And surely there are many tens of thousands of these people who are truly needy and there are few among us so callous as to deny a genuinely needy person his rations. However many registered names, possibly up to a third, are fraudulent. That is to say, tens of thousands of people who should not be getting rice, oil, beans and tents. And there are few among us who would accept this. But can the government really slash food rations by half? Who here is so well off as to not need some extra beans or rice? The price of rice is rising in Dili as well as in Oecusse (where locals say it's already reached $40 a bag) following flooding in Thailand and Vietnam. And now, after our own recent spate of natural disasters in the west, it seems likely times will get worse before they get better. It seems clear that, even if one is not a legitimate IDP, one could still use the government's handouts. But of course, a handout based economy is a fraudulent economy. Moreover, there is a certain shame to constant dependence that we cannot tolerate. If we do not produce, if we do not create or strive to progress and move forward then we will become a begging bowl society. We struggled for decades against colonialist oppressors and high odds to determine our own path and that path must be one of self reliance. Work and sweat in Timor are hot, hard, bitter things, but the fruits of one's labor are still sweeter than free handouts from foreigners. Much like PNTL with UNPol, we can take lessons from the foreigners but we cannot depend on them. What the government should do then is offer greater work opportunities to everyone-not just the IDPs. The government should take the money it spends on rice, oil, etc and spend it on work programs across the nation. Anyone who needs work should be able to find it. There is a vast potential for work here. Until every last piece of litter is picked up, until the seafront sparkles from sand rather than Aqua bottles, until every last hole is patched and all the roads paved and until all the public buildings are painted and the parks maintained only then will we believe that there is no more work to be had in Timor. We will be independent only when most able bodied people have means to support themselves and their families. So we ask the government to remember, jobs are the key, After the rations have been taken away and the food prices go up and the bellies get hungry, what then? If there are no jobs to be had, what then? 2008.2.7 사설 배급이 아닌 일자리가 독립의 관건이다. 이번 주는 동티모르에 복합적인 발전의 한주이다. 월요일에는, UN경찰이 3개 지역의 경찰서를 동티모를 경찰에게 우리 경찰에 대한 믿음과 신뢰의 표시로 양도했다. 만약 동티모르 경찰이 특별한 범죄행위 없이 잘 운영한다면, 이것은 외국의 평화지킴이들에 대한 긴 이별의 긍정적인 첫 걸음으로 여겨질 것이다. 만약 이런 움직임이 성공적으로 입증된다면, 아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정상적인 상태를 향한 다른 한 걸음은-비록 이것은 더 의심스럽긴 하지만- 국내의 난민들에 대한 배급의 감소이다. 3년 전에는 오직 미망인, 퇴역 군인, 자연 재해의 피해자들만이 정부의 보조(금)를 받았다. 그 다음에는 지난 2년간, 수만명의 사람들이 갑자기 정부의 원조를 요구했다. 그리고 분명히 정말로 빈곤한 많은 사람들이 있고, 우리 중에는 정말로 빈곤한 사람들에 대한 배급을 반대할 만큼 냉정한 사람들이 없다. 그러나 등록된 사람들 중의 많게는 1/3정도까지가 거짓이다. 즉, 쌀과 기름과 콩과 천막을 받지 말아야 할 수많은 사람들이 쌀과 기름과 콩과 천막을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 중에는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과연 식량배급을 반으로 줄일 수 있을까? 여기의 누가 약간의 콩과 쌀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부유할까? 태국과 베트남의 홍수 때문에 오이쿠시 지역(한 가마니에 이미 $40에 달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딜리도 쌀 값이 오르고 있다. 그리고 최근 서부(?)에서 자연 재해가 일어나고, 그들이 회복되기 전에 더 악화될 것으로 보인다. 비록 어느 사람이 합법적인 난민이 아닐지라도, 그가 정부의 원조를 계속 받을 수 있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만, 경제에 기반을 둔 원조는 허울 경제일 뿐이다. 더욱이, 지속되는 의존에 대한 참을수 없는 수치심이 있다. 만약 우리가 생산하지 않거나, 발전하고 더욱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구걸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우리는 수십년간 식민 통치자들과 우리의 독립의 길에 대한 결정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저항했다. 티모르에서의 일과 땀은 덥고, 힘들고, 쓰다. 그러나 노동에 대한 결실은 여전히 외국의 무상 원조보다 달다. 동티모르 경찰과 유엔 경찰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외국인으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들에게 의존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많은 일자리를 단지 난민들이 아닌 모든이들을 위해 제공하는 것이다. 정부는 쌀, 기름 등등에 쓰이는 돈을 거두어서 전국에 걸친 일자리 프로그램에 써야 한다. 일자리를 원하는 이는 누구나 일자리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여기는 거대한 노동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 쓰레기 한 조각이 주워 질 때까지, 해안이 아쿠아 물병(*현지 생수 브랜드)보다는 모래에서 빛날 때까지, 모든 구멍을 메꾸어 모든 도로가 포장될 때까지, 모든 공공 건물이 페인트칠 되고 모든 공원이 유지될 때까지. 그제서야 우리는 티모르에 더 이상의 할 일이 없다고 믿을 것이다. 우리는 유능한 사람들이 그들 자신과 그들의 가족을 지원할 수단을 갖게 될 때가 돼서야 독립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부에게 일자리가 관건이라는 것을 기억할 것을 요구한다. 배급이 끝나고, 식량값이 오르고, 배가 고파지면, 그 다음엔? 만약 일자리가 없다면, 그러면? * 본 해석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밑줄 친 부분은 해석이 심히 의심스러운 부분입니다.
[에세이-3]산타끄루즈 묘지를 다녀와서 by 양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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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9-2008 , Sunday , timor Leste Dili , ANJU 민족의 대 명절, 추석. 오전시간에 산따끄루스 답사가 있던 날이었다. 일주일 전부터 이시바시 간사님께서 일정을 잡았을때부터 막연한 기대를 하였다. 왠 크리스마스 마을인가 하고 괜한 기대를 한 것이다. 하지만 답사 전 약간의 오리엔테이션과 동영상으로 인해서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산따끄루스 대학살’사건은 1991년 10월 28일 인도네시아 군인과 경찰이 ‘고메즈’라는 청년을 붙잡아 저항세력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살해하고 40여명의 청년을 연행한 사건이다. 11월 2일, 무덤에 꽃을 놓는 동티모르 관습에 따라 수 천 명의 주민들이 독립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며 고메스의 유해가 안장된 산따끄루스 묘지를 향해 행진했다. 그때 인도네시아군의 무차별 발포로 273명이 사망했고, 250여명이 실종됐으며, 370여명이 부상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사건으로 동티모르가 단번에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동티모르의 참혹한 인권상황이 국제문제로 부각되는 계기가 됐다. 그럴수록 인도네시아 정부는 강압적인 통치로 침공 1년 동안 동티모르 저항군과 주민 10만명이 사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영상속의 총을 맞고 쓰러져있는 아저씨와 가족인냥 보이는 남자가 그를 안고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고 그저 안고 있는 모습에서 나도모르게 눈물이 핑 돌면서 한국전쟁이 생각 났다. 겪어보지 않은 일인데도 그렇게 마음이 아픈데 이 사람들을 그 아픔을 가슴에 묻고 사는 구나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이 사건이 100년전 50년전에 일어난 일도 아니다. 그들의 유족들이 아직 이 사건을 기억 하고 있고 가슴속에 묻었을 것이다. 라온아띠에 선발되고 동티모르로 확정이 되고 집에서 보는 올림픽 개막식에는 동티모르 선수들이 나오고 있었었다. 해설자는 동티모르.. 참 슬픈 나라라며 소개를 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당연히 슬픈나라겠지 라는 생각을 했던 나는 그 전에 많은 지식을 쌓지 못한 봉사단원으로써의 내 마음가짐이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묘지로 가는길.. 산따끄루즈 바로 앞에서는 인도네시아 군인들의 묘지가 있었다. 이 무슨 기묘한 현실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를 죽인자와 죽은자들의 무덤이 쌍방을 향하여 있고 인도네시아 군들의 묘지는 정갈하게.. 산따끄루즈 묘지는 한자리가 비좁다 하고 틈을 두지 않고 묘지가 빽빽히 있었다. 이시바시 간사님은 “결국은 모두가 죽었다”라고 하였다. 나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고 어쨌든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라는 것을 다시 느꼈다. 산타 끄루스 묘지에는 한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들부터 어른까지, 무자비 하게 죽은 자들의 묘지가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우리나라 였다면 이렇게 어린아이들은 화장을 했을텐데 라는 생각과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독립을 한 이후에도 인도네시아 군의 묘지를 유지하고 있는 부분에서 이런 동티모르의 현실이 안타까웠다. 이시바시 간사님께서는 죽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하였다.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총 하나로 목숨을 잃었을 생각을 하니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틈도 없이 가슴이 아팠다. 나는 오늘부터 ‘띠모르레스떼 탄생’책을 열심히 읽어 보아야 겠다. 다른 친구들에게 동티모르는 어떤 나라냐고 물어보면 친구들이 바로 이해 할수 있게 말이다. 그리고 식민지배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겠다.
(09.12) 동티모르 딜리에서, 에세이 그 첫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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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 딜리팀 에세이 (2008.08.21~2008.09.10) - 서영주 - 전통가옥 구조로 신을 모시는 사당 - 예전에는 사람도 같이 살았지만 지금은 그냥 신만 모시는 곳이라고 한다. 가축 축사 - 동물들이(특히 닭) 계단을 통해서 넘어간다. 정보도 없었던 만큼 기대도 되었던 동티모르에서의 합숙이 시작되었다. 다들 걱정이 많았던 우리 동티모르팀!!! 처음에 공항에 왔을 때 이곳은 다른 곳과 달랐다. 공항 건물부터 시작해서 일일이 손으로 수작업하는 공항직원들.. 요즘 정보화 시대에 보기 힘든 모습이라 색다른 모습이었다. “korea time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의 무감각한 시간개념” 처음 간사님들께서 우리를 만나서 하시는 말씀이 ‘오늘 온다고 했나?’ 라고 긴가민가하는 상황에서 우리들을 기다리셨다고 하셨다. 그 말씀 중에 '안 오면 담에 오려나?' 하는 느긋한 모습이 보여 의아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지내면서 이해하게 되었다. 바쁘지 않고 조급해하지 않는 느긋함.. 동티모르는 시간개념이 우리와 다른 것 같다. 한 예로 출근시간이 9시라면 9시까지 출근하는 사람은 갓 출근하는 외국인뿐.. 10시나 11쯤이 되어야 모두다 출근을 한다는 것이다. 또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출근을 제때하지 않아서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점점 이곳에서 지내면 지낼수록 이해가 되어간다. 나또한 그들처럼 느긋해진다. 이처럼 동티모르는 시간 속에 얽매여 매일 짜여진 각본에 의해 차근차근 움직였던 이제까지의 우리의 생활 관념을 무너뜨렸다. 하루의 일정이 빡빡하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움직이는.. 게을러 보이기도 하지만 이곳에서 우리가 배울 점도 있을 것이다. “동티모르는 애매하다?” 딜리는 특별한 특징이 보이지 않는다. 오직 동티모르만의, 딜리만의 특징을 드러내지 않고 애매하다. 완전 숲과 어우러져 있는 상태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나무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냥 정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집이 듬성듬성 있는 것 같았다. 또한 길거리에 쓰레기는 이곳저곳 아무데나 버려져있고 먼지마저 너무 많다. 건축양식도 일정하지 않고 다들 각기 제각각의 모습형태를 띄고 있다. 이것은 독립한 지 몇 년이 흐르지 않아서 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 특색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딜리만의 동티모르만의 특색이라고 한다. 티모르에 와서 이시바시 간사님과 티모르에 대해 공부를 하였다. 그 도중에 ‘동티모르는 아시아 속의 라틴이다’라는 문구가 나왔다. 아무래도 포르투갈과 인도네시아 지배를 받아서인지 여러 가지 특색이 뒤섞여 애매한 것을 만든 듯싶다. 그래서 그것이 지금의 동티모르의 특색으로 띄는 것 같고... 그래서인지 언어만큼이나 이곳 문화도 다양한 것 같았다. 나는 한 나라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은 수도가 띄는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수도 딜리의 모습 특색이 곧 동티모르의 특색이 아닐까?!! 이 시점 나는 궁금한 게 있다. 시간이 흐르면 이곳은 이 애매한 특성이 자리를 잡아 애매한 특색으로 비췰지 아니면 내가 찾지 못한 보지 못한 동티모르의 또 다른 모습으로 비췰지 말이다. 언젠가는 동티모르도 서서히 자리를 잡아 동티모르만의 동티모르를 대표할 수 있는 특색이 보일 것이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예쁜 바다” 이곳 바다는 정말 예쁘다!! 한 바다에서 여러 가지 색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나도 바닷가 쪽에서 태어나 바다에 대한 느낌이 별로 없었는데 동티모르의 바다는 오염이 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라고나 할까!!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예쁜 바다이다!! 지금까지 내가 보고 느낀 동티모르는 ‘애매하다’라는 말이 참 잘 어울린다. 그래서 여기서의 프로젝트도 우리가 생각하고 만들어 가야하는 것인가? 지금 내 인생도 ‘애매하다’라는 말이 어울렸다면 이곳에서 팀원들과 함께 작지만 하나하나씩 만들어서 이루어 나가 나의 정체성도 찾고 싶다!
[뉴스 클리핑-1]가진 자와 못 가진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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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i Weekly는 딜리의 주간지이다. 좋은 기사를 발췌하여 번역해서 올리는 방식으로 뉴스 클리핑의 일정 부분을 소화해 나갈 예정이다. 이 기사는 8월 말의 내용이다. 번역이기 때문에 내용이 다를 수도 있다. 너무 믿지 마시길...2008년 8월 21일, 목요일*가진 자와 못 가진 자는 여전하다(사설)-동티모르가 독립한지 거의 10년이 되어 간다. 수도와 여타 지역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우선, 딜리는 명백하게 동티모르의 일부분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보통 국가를 생각할 때, 우리는 도시로 한계지어서가 아니라 국경을 경계로 기준을 잡고 고려하기 때문이다. 차를 타고 수도 딜리 밖으로 20-30분만 나가면, 우리는 진짜 동티모르로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티모르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Metinaro 혹은 Tibar 표지판이 진짜 티모르로 들어가는 지점을 표시하고 있을 테다. 환영합니다! 동티모르의 인구는 대략 100만 명 정도이다. 딜리에 10만 이상이 거주하고 있고, 나머지 지역에 90만 명이 12개로 나누어진 지방에 살고 있다. 지금은 딜리와 지방을 나누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누어 비교해 볼 수 있겠다. 우선, 가장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 논해 보겠다. 음식에 대한 접근성, 깨끗한 물, 교통, 기본적인 의료 그리고 교육을 기본적인 요소들로 규정지을 수 있다. 다소 추상적인 것, 자유, 독립, 안전, 안정성, 정의 또는 지역 청사의 건물과 같은 것들은 논외로 하겠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굶주림은 이러한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니까. 어느 날, TV 프로그램에 한 가냘프게 보이는 고등학생이 나온 적이 있다. 선생님이 아파보인다고 말하자, 그 학생은 집에 음식이 하나도 없어 하루 종일 굶었다고 대답했다. 실제 상황이다. 동티모르 전역에 걸쳐 대부분 가계는 하루에 한 끼를 먹고 있다. 그나마도 영양가가 거의 없는 음식이다. 생존에 가장 기초적인 음식은 건강한 몸과 건정한 정신에 필수적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이 일반적이다. 독립 후 10년간의 통계를 보면, 대부분의 주민이 하루에 60센트, 한 달에 20달러 미만의 돈으로 생활을 꾸려 나간다. 이 돈으로 초라한 집과 음식을 마련해야 하고, 가족을 부양해야 하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약품과 옷 등을 사야한다. 중요한 점은 엄청나게 비싼 동티모르의 물가이다. 딜리는 지금 계속 커나가는 수도이다. 많은 차와 잘 차려입은 사람들로 거리가 채워져 나가고 있다. 하지만 동티모르의 지방 지역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문제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딜리를 제외한 지역이 아무것도 가지지 못할 때 딜리는 많을 것을 가지고 있다. 딜리는 여타 도시와 달리 특별하다. 주로 딜리에서 일하고 사는 4000명이 넘는 외국인이 수도에 살고 있다. 도시의 외국인은 하루에 150달러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반면 딜리를 제외한 지역은 하루 60센트이다. 이러한 차이는 외국인과 국내의 현지인 사이의 불평등을 보여준다. 예로, 외국인은 1.5달러로 신선한 우유를 살 수 있다면, 지방에서는 농축된 우유 캔만 살 수 있다. 그것도 살 돈이 있다면 그렇다. 외국인에서는 좋은 쌀을 구할 수 있는 반면, 지방에서는 오래되고 질이 낮은 쌀이 보통이다. 외국인은 자가용으로 거리를 달리지만, 지방은 만원 버스를 타야하거나 걸어야 한다. 외국인에서는 양질의 특허 받은 약을 구입할 수 있다면, 지방에서는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는 위조 약을 산다. 외국인은 슈퍼마켓에서 고기를 살 수 있지만, 지방에서는 파리가 꼬인 고기가 전부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질이다. 외국인은 질 좋은 제품을 살 수 있지만, 티모르인은 높은 가격의 질 낮은 제품을 산다. 아마도 이것이 시장 경제의 결과이리라. 모든 것을 가진 자(외국인), 대부분의 사람보다 더 가진 자(딜리의 사람들), 가진 것이 거의 없는 자(지방에 살고 있는 90만 명의 티모르인) 사이의 삶의 질의 불일치는 계속 되어오고 있다. 이것이 왜 우리의 관계와 국제사회에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하는 이유이다. 어떻게 해야 독립된 티모르의 대다수의 생활에 변화를 줄 수 있을 것인가? 과거의 10년 혹은 나라가 세워질 때와 달리 지금은 어떠한 것이 도움이 될 것인가? 많은 인적 자원이 훈련되고 개발의 빛을 보지 못 했던 사람들이 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일을 할 때는 언제가 될 것인가? 이라크의 경우, WFP은 1년 긴급 구호로 약 100만 명의 이라크 난민에게 1억 2천 6백만 달러의 비용을 지원했다. 1999년 이래, 약 40억 달러가 직간접적 원조로 동티모르에 쓰였고, 쓰여질 예정이다. WFP의 자료에 의하면, 10억 달러 이상이 10년 동안(1999-2008) 기본적인 요소들(음식, 옷, 교육, 의료)을 동티모르 주민에게 제공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10억 달러는 2009년부터 2018년까지 같은 목적으로 사용 될 것이고, 20억 달러는 그 10년 간 국가를 재건하는 방향으로 사용될 것이라 한다. 이 돈은 잘 쓰여지고 있는 것일까?
[에세이-2]동남아 오리엔탈리즘 by 심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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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은 서방세계에서 동양을 보는 시각을 이야기한다. 동양을 서양과 구분해 덩어리로 취급하며 일방적인 성격을 부여한다. 최근 여러 분야에서 아시아적 가치가 부각되는 것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근본적 가치가 아닌 피상적인 오리엔탈적 가치에만 관심을 갖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리엔트 중 하나인 한국에서도 동남아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에 빠져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중일은 아시아에 속하면서도 극동아시아의 범주에 속하길 원하며, 동남아시아와 구분되길 기대한다. 이러한 바람은 동남아 오리엔탈리즘을 만든다. 개발도상국, 가난한 나라, 타락한 정부 관료와 타성적인 국민, 더운 나라 특유의 게으름 등 동남아시아에 대한 편견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오리엔탈리즘은 애초에 구분 짓기를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원인보다 결과를 중요시 한다. 동티모르 역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동남아 오리엔탈리즘)을 확인할 수 있는 요소가 다분하다. 하지만 문제는 원인이 사라져버리는 것에 있다. 서구에서 오리엔탈리즘을 동양을 상대적으로 낮추거나 신비화하여 자신들의 합리성을 강조하려 했던 것에 비교해보면, 우리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리고 라온아띠는 동남아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고 있을까. 이 곳 동티모르에서는 과거 우리가 경험했었던 그리고 경험하고 있는 일을 다시금 볼 수 있다. 채 정비되지 않은 도로 시설, 학교 속의 군대 문화, 인맥, 지연이 그렇다. 또, 1999년 자치-독립 선거, 2002년 독립, 2006년 분쟁 등 치열한 21세기를 거친 마지막 독립국으로 여러 강대국의 영향력에 크게 좌지우지되고 있는 정세도 그러하다. 국가의 발전 정도는 다만 속도와 위치의 차이가 있다. 문화 역시 문화상대주의가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시대에 우열은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기준은 어디에 있을 수 있을까. 우리보다 느리면 게으른 것이라는 명제가 성립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곳에서 한국에서와 같은 속도로 일 한다면 과로로 쓰러지고 말 것이다. 친인척 공동체가 일반적인 문화에서 무조건적으로 인연과 지연을 끊어버리라고 하는 것이 가능할까. 또 부족한 학교와 교수 수에도 불구하고 민주적이고 창의적인 교육을 실시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합당한가. 대안이 없는 비판은 욕설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대안은 피상적인 모습에서 나올 수 없다. 대안이라 함은 문제의 본질, 즉 이유를 알아야만 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봉사나 자원활동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도 이러한 대안이 필요하다. 이유를 알아내고, 근본적인 대안을 찾는 것. 이것은 계몽적인 봉사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곧잘 행해지고 있는-혹 많은 선교사들이 하고 있는- 제 3세계 곳곳의 계몽적 봉사 활동 장소가 비판을 받곤 하는 근본적 이유이다. 오리엔탈리즘의 극복은 호기심과 소일거리로 갖는 관심을 버리는 것이다. 차라리 어설픈 관심으로 편견과 왜곡을 만드느니 아예 관심을 끊는 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이 시대에 서로의 관계는 끊어질 수 없으며 더욱 굵게 이어질 것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오리엔탈리즘,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동남아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애착과 관심을 갖는 것, 그것을 통해 피상적 표피를 뚫고 진정한 이해를 하는 것이다. 남은 기간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일 테다. (이곳 동티모르에서 4개월 남짓의 시간이 나에게 주어졌다. 진정한 이해를 위해서는 결코 부족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3주간 지내면서 봉사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할 수 있었고, 여러 편견과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또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느끼며, 많은 것을 생각하기에 한국의 일상을 벗어나 멀다면 먼 티모르 섬 어딘가에 있어본다는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인 것 같다. 앞으로의 4개월의 시간이 그 너머의 긴 시간에 의미가 있길 바란다.)
[에세이-1]동티모르의 일상 by 김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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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8. 21(목)20일에 대한항공을 타고 인천에서 출발하여 발리에서 하루를 보냈다. 처음 타보는 비행기에 처음 나와보는 외국이다. 인도네시아 발리 공항의 현지 직원들의 표정은 묵묵했고, 서핑을 즐기기 위한 서양 관광객들이 많았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아스토닉 호텔로 갔다. 호텔의 홀에는 작은 수영장이 있어서 간단히 산책을 하고 출국 후 첫잠을 잤다. 발리를 떠나 동티모르 딜리 공항에 도착하였을 때 양동화, 이시바시 간사님 그리고 일본 친구 유타가 마중 나와 있었다. 서로 간단한 인사 후 트럭 짐칸에 타고 운딜 대학교 옆에 위치한 YMCA 숙소로 왔다. YMCA에는 딜리 대학교 학생들이 스텝으로 있었다. 다들 모여 현지 음식을 먹었는데 약간 싱거운 맛이 나는 우리나라 음식 맛과 비슷했다. 다들 배가 고파서인지 맛있게 먹었다. 현지 음식 적응하는 걱정은 많이 안 해도 될 거 같다. 8. 22(금) 오전에 트럭 뒤에 타서 시티투어를 하였다. 그 느낌은 퍼레이드를 하는 기분이었다. 현지인들은 우리들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동티모르식 현지 인사를 하면 다들 좋아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받아준다. 가늘고 높은 “히야~ 후아~~”라는 소리를 내면서, 인사를 건네면 엄청나게 좋아해준다. 팀원들 중에서 내가 가장 현지 인사를 잘한다고 간사님께서 칭찬해 주셨다. 오후에는 동티모르 한국 대사관을 방문했다. 대사관님과 전체 대화 후 바로 앞에 있는 해변에 가서 잠깐의 휴식을 취했다. 어제 새로 오셨다는 영사관님이 어제 발리 공항에서 만났던 한국 아저씨였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한국에서 동티모르로 공사 감독하러 오시는 직원으로 생각했었는데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어설픈 판단을 하면 안 된다. 저녁에는 배드민턴을 쳤다. 효정이와 같이 플레이를 하고 있었는데 동네 아이들과 청년들이 구경하러 왔다. 같이 하자(jogu hamutuk)라고 하면 좋아하면서 열심히 같이 쳐준다. 딜리에도 배드민턴 라켓과 셔틀콕을 판다. 그리고 농구공, 배구공, 축구공도 있다. UN군이 주둔하고 있어서 큰 마트가 있고 웬만한 운동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구 코트도 있어서 다음에 운딜 대학교 학생들과 함께 경기 하기로 약속했다. 8. 23(토) 오전에 걸어서 딜리 시내 답사를 하였다. YMCA를 떠나 야시장을 지나갔다. 처음 보는 각종 과일과 채소가 많았다. 시장 주민들은 우리들을 정말 신기하게 쳐다본다. 같은 아시아 사람인데 이렇게 특이하게 보는 이유가 무엇일까? 동티모르 사람들은 피부색이 검은색이 아닌 짙은 브라운 색이다. 그래서 자신들은 초콜릿색 피부라고 말하고는 한다. 정부 청사 앞에 있는 바다에서 잠깐 쉬고, 인터넷 카페 위치를 익히고, 대략적인 시내 구조를 알아갔다. 오후에는 테라산타 지역에 있는 Sao Miguel(성 미구엘) 학교에 가서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었다. 500명이 넘는 학생수에 비해 턱 없이 부족한 교사 수에 힘들어 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출신의 수녀 분의 송별회에 같이 참석하게 되었고, 2시간 동안의 송별회 시간 동안 테툼어가 많이 오고 갔지만 거의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수월하게 그리고 깊게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으려면 테툼어를 최대한 빨리 익혀야겠다. 8. 24(일) 동티모르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일요일이다. 동티모르에서는 97%의 인구가 천주교인이다. 성당에 대해 알고 느끼고 싶어 연지와 함께 아침 일찍 성당으로 갔다. 정문 앞에는 깔끔한 차림의 청년들이 서 있었고, 서로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여성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예쁜 옷을 입고 온다고 한다. 대부분 원피스를 입었고 오늘은 특별히 결혼식이 있어서 전통 의상인 “다이시”를 입은 여성이 몇몇 있었다. 결혼식 외에 여러 행사가 겹치게 되어 미사를 2시간 동안 진행하여 결국 중간에 꾸벅꾸벅 졸았다. 긴 시간 동안 한 명의 조는 사람 없이 엄숙한 자세를 유지하는 딜리 시민들은 주일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한단다. 오후에는 내일 일본으로 떠나는 유타를 위해 환송회 준비 음식을 마련하였다. 한국 음식으로 된장국, 제육볶음, 소 불고기를 하였고, 또 내일 한국으로 캠프를 떠나는 운딜 대학생들과 함께 음식을 준비하였다. 오랜만에 김치를 먹고, 음식을 배불리 먹은 다음에 댄스 타임을 가졌다. Hadomi Timor(사랑해요, 티모르)라는 노래에 다같이 서로 눈치보지 않고 신나게 춤을 췄다. 춤과 노래로 인해 한결 서로에 다가가게 되었다. 모든 일과가 끝나고 내 침대에 앉아있는데 약간 술에 취한 유타가 들어왔다. 판이가 유타에게 우리 여학생 중에 맘에 드는 아이가 있냐고 물었더니 보람이가 좋다고 했다. 평소 거의 말이 없는 유타가 오늘은 스스로 말이 너무 많아서 너무 웃겼다. 유타와 내가 좋아하는 일본 SMAP 라는 구룹의 “요조라노 무코니와”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부르고, 바로 코를 골면서 자버렸다. 친해지려고 하니깐 헤어지게 돼서 너무 아쉽다. 이런 만남과 헤어짐을 잘 극복해야만 나중에 모든 일정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 힘들지 않을 거 같다. 8. 25(월)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현지 일과가 시작되었다. 성 미구엘 학교에서 화단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였다. 커다란 돌들을 골라내는 작업을 하는데 삽과 도구가 전혀 없어서 맨손으로 작업을 하였다. 나중엔 나무판자로 삽을 대신하고 시멘트 포대로 돌을 옮겼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날씨가 더워서 고단한 시간이었다. 오후 4시부터는 테툼어 전문 강사님이 와서 언어 수업을 하였다. 영어공부를 이렇게 했으면 실력이 상당할 것이다. 팀원들끼리 서로 경쟁하면서 실전 연습을 하며 언어를 익히니 금방 실력이 느는 것 같다. 밤에는 기타 치는 동네 청년들이 있어 같이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O Rai Timor라는 여기에서 아주 유명한 노래이다. 티모르여 영원 하라 라는 주제의 노래인데 음이 생소하여 배우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영상으로 찍어서 자주 연습해야겠다. 8. 26(화) 판이와 함께 딜리 축구장을 가서 경기를 구경하였다. 전문 축구선수들은 아니지만 상당한 실력들이었다. 운딜 대학 학생들이 경기한다기에 응원하려고 왔더니 딜리 국립 대학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고 오게 되었다. 근처 상점에 가서 축구공을 하나 샀다. 가장 좋은 것으로 골랐는데 12달러에서 10달러로 깎아서 사게 되었다. 밤에는 그 공으로 족구를 하려고 나갔다가 동네 청년들이 갑자기 끼어들어 족구가 아닌 공차기가 되어버렸다. 바디 랭귀지와 어설픈 테툼어로 규칙을 계속해서 설명하여 1시간 후에는 어느 정도 갖추어진 족구경기를 할 수 있었다. 동네 청년들은 한국을 좋아한다면서 나에게 팔에 있는 문신을 보여주었다. 팔에는 “저예요”, “아기” 라는 글자가 문신으로 되어 있어 엄청 크게 웃었다. 큰 걱정과 근심 없이 즐겁게 사는 여기 청년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8. 29(금) 사메의 첫경험 2박 3일 일정으로 딜리에서 사메로 왔다. 사메는 1200m 고지에 있는 산악 도시이다. 딜리에서 사메로 오는 길은 포장 보다는 비포장 도로가 더 많다. 그리고 산사태가 많아 엄청 위험한 도로이다. 하지만 풍경은 지금껏 내가 봐온 것 중에 최고였다. 하늘과 구별이 가지 않은 바다색에 나에 눈이 놀라고, 나보다 밑이 있는 구름을 보면서 나에 마음이 흔들렸다. 딜리와는 완전 다른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중간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저녁이 되어서야 사메 YMCA 사무실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좋은 집이었고, 현지 스텝들과 인사를 나누고 마운 말세로와 함께 양초와 램프를 사기 위해 근처 마켓으로 갔다. 딜리와는 다른 엄숙한 분위기의 사람들. 먼저 나에게 인사를 보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주민들과 어색한 눈인사만 나누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마운 줄리앙이 해주는 저녁을 먹고 밤하늘의 많은 별을 보면서 팀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오랜만에 사메팀만의 모임에 마음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숙소는 2층 침대이고 나를 반겨주는 것은 “때끼”라고 부르는 작은 도마뱀이었다. 뒤뜰에는 마운 말세로가 직접 만들 운동기구가 있어 두보와 함께 운동을 했다. 사메에는 계곡이 있어 물이 풍부하지만 석회질 성분이 너무 많아 식수로는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 전기는 저녁부터 밤12시까지만 들어오고, 긴급상황 시에만 발전기를 사용한다. 잠깐 동안의 동네 아이들과의 만남이 있었는데 내가 동물원의 동물이 된 기분이었다. 손님이 아닌 현지인과 잘 어울리기 위해 내가 어떤 노력을 해야 될까.. 좀 더 고민해봐야겠다. 9. 1(월) 아침식사 당번인지라 파트너인 정현이와 6시에 빵을 사러 시장으로 나갔다. 빵집 주인이 나를 알아보고 반갑다는 표현을 하셨다. 3달러 빵을 사고 돌아와서, 커피를 만들고, 버터에 발라먹는 빵의 맛은 여기 동티모르라서 맛있다. 오늘은 성 미구엘 학교에 개학 날이다. 군대식으로 정렬된 아이들. 채찍을 들고 위협하며 아이들을 지도하는 교장. 하늘색 셔츠에 하얀 바지의 예쁜 교복과 상반되게 엄격한 통제의 학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메 아이들에게서 느껴지는 순수함과 풋풋함은 없고, 사회 물을 먹은 딜리 아이들이 썩 예뻐 보이지가 않았다. 남자 아이들은 젤리를 듬뿍 바른 헤어스타일. 핸드폰을 들고 다니는 여자 아이들. 건방지게 앉아있는 아이들. “딜리는 티모르가 아니다”라는 신문기사에 나온 기자의 말에 공감이 되는 부분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9. 3(수) 500명의 학생을 10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라온아띠 멤버들이 각 그룹에 한 명씩 배정이 되었다. 나에 그룹 명은 “Estrera”이다. 다른 그룹들은 교실로 배정이 되었는데 우리는 공사중인 건물 안으로 배정이 되서 처음 분위기는 음산했다. 이런 분위기를 깨기 위해서인지 고학년 학생들이 나서서 학생들을 무작위로 골라 강제로 노래를 시켰다. 폭력과 욕설을 하면서 후배들을 혼내는 학생들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Agus(아구스)라는 학생이 많이 도와줘서 수월하게 다른 학생들과 이야기 할 수 있었다. David(다비드), Abeto(아베토)도 친절하게 도와주었다. 오늘의 그룹 활동을 정리하자만 충격이었고 안타까웠다. 어린 학생들이 벌써 계급사회를 배웠고, 권력의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선배가 후배를 때리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닌 듯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이 예전 우리나라를 보는 것 같다. 9. 4(목) 평소에 계속 연습했던 O Rai Timor를 부를 수 있는 기회가 있어 손을 들고 노래를 부르겠다고 신청했다. 토요일에 있는 축제 때문에 학생들끼리 노래를 부르면서 대표를 선출하는 과정에 내가 끼어든 것이다. 학생들 앞에 나가서 짧은 내 소개를 하고 함께 노래 부르자고 하니 이 노래를 모르는 학생이 없었다. 웃는 모습으로 즐겁게 따라 불러주는 아이들이 너무 고마웠고, 반응이 너무나 좋았어 힘껏 목소리를 높여 불렀다. 노래가 끝난 후 우레와 같은 박수에 내 기분이 들떴다. 이제 가사를 완벽하게 외워서 안보고 불러야지. 한 여자 아이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나에 핸드폰 번호를 물어보았다. 기분이 좋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상당히 놀랬다. 갑자기 내 손을 꼬옥 잡더니 놓지 않고 못 알아 듣는 말을 해줬다. 마음은 고마웠지만 난 봉사자라서 아무것도 답례를 해줄 수 가 없었다. 나에 처음 에세이는 이렇게 일기 형식으로 쓰기로 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 나에 생각과 느낀 점을 정리하는 글을 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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