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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베레(Maubere)의 티모르 역사 느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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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이미 한국으로 돌아와 티모르 감이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5개월이 지난 시점에서야, 그들의 삶과 사고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동안의 각각의 티모르에 관한 나의 궁금증들이 엉키고 섥혀 복잡한 한 덩어리로 남아있다. 그들의 무엇에 대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두렵기만 하다가, 먼저 그들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현재 그들의 삶은 이 시대 어느 땅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지난 역사들의 뒤엉킴으로 인한 결과일 것이다. 자, 이제 티모르의 역사를 가볍게 한번 훑어보자. (내용은 국방부에서 편찬한 ‘한국군 동티모르 파병과 띠모르레스떼 탄생’ 책을 거의 옮겨왔음을 밝혀둔다^^) 기원> 기원전 4만년부터 2만년 사이에 폴리네시아 인들이 티모르로 들어와 정착했다. 그 때 정착한 원주민이 아또니(Atony)족이다. 그 후 멜라네시아 계통의 인종과 원시 말레이계 인종이 티모르로 진출했다. 그들이 테툰(Tetun)쪽의 주류를 이루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포르투갈의 지배> 7세기 이후부터 중국과 티모르 간에는 부정기적으로 노예 ․ 야생 밀납 ․ 백단목 등의 거래를 위한 무역이 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많은 유럽인들이 동양에 호기심을 갖고 진출하던 1500년대 초, 동양에 진출했던 포르투갈 상인과 선교사들이 향교무역과 선교를 위해 인도네시아와 티모르에 상륙했다. 이들은 주로 향료의 원료가 되는 백단목 무역에 종사했다. 그리고는 1524년, 티모르 섬을 식민지로 삼았다. 하지만 섬 전체를 조직적으로 지배하지는 않았다. 포르투갈은 티모르를 지배하기 위한 개발이나 지배체제 구축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백단목 획득 등 단기적인 이익 착취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식민체제는 대체적으로 불안정했다. 1598년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상륙한 네덜란드는 1824년 인도네시아 전역을 식민지화하고, 포르투갈의 거점인 티모르섬으로 진출을 시작했다. 이에 1849년 포르투갈은 티모르섬을 동서로 양분해 서티모르를 네덜란드에 양도하기로 합의했다. 이러한 국경 조약은 1915년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그 때 서티모르에 포함되어 있던 오이쿠시 지역은 포르투갈이 계속 지배하기로 합의했다. 왜냐하면 오이쿠시 지역은 포르투갈의 최초 거점이자 서티모르 다수족인 아또니 족과 구별되는 테툰 쪽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주민 폭동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1910년 경 대규모 폭동이 18개월간 지속되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연합작전을 펼쳤고, 이때부터 티모르에서는 저항의 역사와 함께 영웅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일본의 점령>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1942. 2. 20 일본군이 티모르 섬의 쿠팡과 딜리에 상륙했다. 딜리(동티모르의 수도)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군과 연합해 저항하는 동티모르 게릴라들을 제압하지 못했다. 1945년 일본군은 철수했고, 잔학한 통치로 주민 4~6만명이 희생되었다. 포르투갈 재진주> 포르투갈은 일본의 항복 직후, 조속히 식민체제를 복원함으로써 큰 저항없이 동티모르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서티모르를 장악한 인도네시아가 반 포르투갈 세력을 공공연히 지원했다. 인도네시아의 개입으로 1959년 반 포르투갈 폭동이 발생했다. 포르투갈은 통제를 더욱 강화하고, 친 인도네시아 활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는 포르투갈의 식민지배에 대한 부당성을 외교활동으로 국제 사회에 제기했고, 당시 탈식민지화 바람과 함께 국제사회의 설득력을 얻었다. 이 뒷부분이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 국내의 정치상황이 복잡하게 연관을 맺고 있어서 내용이 너무 길었고, 미쳐 노트에 적어오지 못하는 바람에..^^ 가볍게 정리를 해봐야겠다,,ㅠㅠ 1975년 동티모르에서 포르투갈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9일 뒤에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27번 째 주로 강제합병하고 탄압을 시작했다. 이렇게 인도네시아 식민지 시기가 시작된다. 인도네시아 점령기간 중 동티모르에서의 인권탄압을 세계에 널리 알리며 독립에 큰 계기가 된 사건이 바로 ‘산타크루즈 학살사건’이다. 이 산타크루즈 학살 사건을 계기로 세계의 관심을 받으며 독립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 후 2002년 5월 20일, 신생독립국 티모르레스떼 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lic of Timor-Leste)가 탄생하게 된다. 1975년 이후에 인도네시아의 강제 점령기를 살펴보면, 냉혹한 세계 정세 속의 티모르를 볼 수 있다. 일부에서는 인도네시아의 군사 행동을 미국이 눈 감아 줬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이 시기의 역사를 좀 더 자세히 다루고 싶으나, 능력 밖의 일이기에..^^; 국방부에서 편찬한 “한국군 동티모르 파병과 띠모르레스떼 탄생”의 역사부분에 잘 나와있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 아, Maubere의 역사이야기에 Maubere에 대한 설명이 빠졌다. ‘마우베레’ 혹은 ‘모베레’로 읽히며, 티모르의 일반 대중을 뜻한다. “한국군 동티모르 파병과 띠모르레스떼 탄생”에서는 Maubere가 ‘가난하고 힘없는 동티모르 민중’을 뜻하는 말이라고 설명이 되어있다. Maubere라는 표현은 동티모르 현지 노래에 많이 등장하는데, 독립․혁명과 관련된 역사적이고 대중적인 표현이다. 그들의 저항의 역사 속에서 묻어나온 Maubere란 표현. 동티모르의 친구들이 나에게 고맙게도 Maubere라는 영광스럽고 역사적인 이름을 붙여주었다. 나에게 Maubere란 이름이 붙고 나니, 그들의 역사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세계 어느 곳의 역사가 다 그러하겠지만, 침략과 저항의 역사가 우리네 역사인 듯이 쓰라리게 다가왔다.
[Photo 24] 두번째 포토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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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_5] 드림씨의 마지막 에세이 - 내생에 가장 큰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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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생에 가장 큰 선물 태국에 와서 코코넛의 맛을 알게 되었다. 참고로 이곳에서는 코코넛 하나에 한화 500원 정도다. 마을을 떠나기 전, 짐을 싸다 말고는 동네아이들을 불러 아이들과 마지막 동네 투어를 결심했다.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집집마다 동네 분들께 인사도 할 겸 말이다. 그러다 내가 아끼는 동생 '암'이라는 녀석의 집에 들릴 기회가 생겼다. 집 구경도 하고, 가족사진 구경하고, 물도 마시고, 이것 저것 이야기도 나누고 그렇게 잠시 잠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인사를 하고 다른 집으로 향하기 위해 발걸음을 돌리는 순간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다름아닌 코코넛 나무였다. “우와! 암! 너희 집에 코코넛 나무가 있구나~ 부러워! 저거 먹을 수 있니?” 라고 ‘암’이에게 물었다. “먹지 않는다. 먹을 수없다” 라고 대답했다. “왜? 한국에는 코코넛 나무를 보기 힘들어, 그리고 코코넛은 비싸서 먹기 힘들어.” 라고 했더니 “따는 것이 힘들다.” 라고 말한다. “아, 그렇구나. 그래 내일 보자” 하며 인사를 하고서 발걸음을 돌리려던 차에 “기다려요” 하고 ‘암’이 말한다. 아이들끼리 수근수근 하더니 나보고 기다리라고 한다. 그리고선 ‘암’이 코코넛 나무 위에 오르기 시작한다. “지금 뭐해?” 라고 옆에 있는 녀석에게 물어보니 “p 수진, 첩 코코넛.” [수진누나는 코코넛을 좋아한다. ] 라고 대답한다. “난 괜찮아! 내려와” 라고 말해도 한사코 사양하는 녀석. 주변에 있는 아이들이 “누나에게 줄 선물.”이라고 말했다. 나무에 올라갔다, 긴~장대로 툭툭 건드려 보기도 했다가. 장대를 던지기도 했다. 키 작은 12살 소년의 코코넛 나무와 벌였던 40분간의 실랑이 덕분이었을까.마침내 코코넛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순간 “우와, 깽막! [최고다!] ” 함께 있던 아이들 모두가 환호를 지른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딱딱한 코코넛을 깨어야만 했다. 녀석이 어디선가 커다란 칼을 가져와서는 코코넛을 내리치기 시작한다. 소년이 하기에 결코 쉽지 않아 보였다. 내가 한다고 했지만 한사코 그 녀석이 사양했다. 그렇게 20분이 또 지났다. 코코넛이 산산조각이 날 무렵이었다. “다되었다.” 라고 하더니 칼로 한번 툭 치자 코코넛이 깨지고 코코넛의 하얀 속살이 들어났다. 함께하던 아이들 모두가 환호했고, 그녀석은 마지막 선물이라면서, 코코넛을 내게 권한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내게 있어 무척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 작은 코코넛 하나로 함께하던 모든 이들이 행복할 수 있었다. 사람과 사람의 교감에 있어서, 말없이 보여준 그 녀석의 노력은세상 그 어느 선물보다도 내게 소중한 선물이었고,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만큼 감사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그 사랑 잊지 않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잘 지내요. 나중에 꼭 다시 만나요 =) 지난 5개월간 5회 차의 에세이를 쓰면서 그 상황과 그 순간에 대한 나의 기억을 되짚어 본다. 라온아띠가 라온아띠 됨에 있어 내 목적은 - + × ÷ 이었다.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더하고, 사랑에 사랑을 곱하고 그리고 그 사랑을 나누기 위함이 나의 목적이었다. 그랬기에 5개월간의 긴시간을 타국에서 보내기로 결심할 수있었다. 하지만 지난 5개월을 되짚어 보면 그 목표달성에 있어서는 잘 모르겠다. 사랑을 나누기는커녕 비교도 안될 만큼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아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너무 고마워서 울어버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고, 사랑하고 행복해서 울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이별의 아픔에 울었던 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 난 성장할 수있었다. 지난 20년간 내 삶에 있어 그 여느 때 보다 행복했던 5개월이었고 날마다가 배움이었고, 감사함이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이말밖에는 내 마음을 표현할 수있는 단어가 어디있을까요. 지난 5개월간 감사했습니다. 태국이라는 타국에서 저는 너무 많은 관심과 배려를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그리고 안녕히 계세요.
에세이12. 보고 듣고 느끼는 '마이크로 크레딧' _ In 일로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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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 크레딧마이크로크레딧(microcredit) 은 우리나라 말로 무담보 소액대출을 말한다. 영세민에게 자활을 할 수 있도록 자금과 사업기회를 마련해 주기 위해 실시하는 대출사업이다. 필리핀Y에서도 진행하고 있는 이 사업은 선정된 커뮤니티에(주로 여성들을 위해, 농촌지역에) 일정한 돈을 빌려주고 사업을 진행하여 일정기가내에 원금을 돌려받는 시스템이다. 이자가 없이 원금만 돌려주는 것이므로 자활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또한 원금 반납후에 벌어들이는 커뮤니티의 수입은 다른 프로젝트로 연계하여 진행 한다.여성임파워먼트?동남아시아는 아직 여성이 일어설 자리가 없다.필리핀은 다른 나라에 비해 여성의 권위가 높은 편이지만 아직 많은 지역에서특히, 농촌에서는 남성 집안의 가장이라는 생각이 만연하다.이러한 여성의 위치 대해 필리핀 네셔널 Y의 총장인 엘씨는 ( 엘씨 역시 여성이다) 대학 시절부터 많은 관심을 가져왔고 '마이크로크레딧과 여성임파워먼트'라는 프로젝트로 사업을 시작하였다. 현재 일로코스, 아순시온, 투딩 등의 지역에서 진행 중이다.마이크로 크레딧과 여성임파워먼트 , 그 사례와 과정 - 투딩(Tuding) _벵겟(Benguet)투딩 지역은 우리가 사업에 참여 했던 곳이다.이곳은 'hog raising(양돈)' 으로 이제 막 시작한 단계에 있다.'hog raising'은 이곳의 여성들 스스로가 제안한 프로젝트로, 현재 오리엔테이션과 조직을 구성을 마치고 돼지 2마리를 구입해 공동으로 돌보고 있다.출산 후엔(3월이 출산 예정일이다) 각각 돼지를 나누어 기른다.이것을 지속하여 후에 돼지의 가공과 비빙카와 싸리싸리 스토어등의 다른프로젝트와의 연계를 목표로 삼고있다.- 딩글라스 (Dingras) _일로코스 (Ilrocos)딩글라스지역은 사업을 시작한지 8년이지나 원금을 갚고, 이익을 내고 있는 단계에 있다. 팝스(네셔널Y 스태프)의 고향이자 엘씨(네셔널Y 사무총장)가 처음으로 성공한 모범지역이라 우리는 몇일동안 머물면서 이사업에대해 더 알아 볼 수 있었다.8년전, 네셔널Y와 일로코스의Y는 연계하여 사업을 진행하기로 하고 빈곤층이 많은 아킨수요 딩글라스 지역을 선정하였다.이곳엔 해외에서 돈을 벌고 돌아오면 돈이없는 마이그런트가 많이 거주한다. 대부분이 농업(토마토와 쌀생산)을 주업으로 하고 생활비외에 아이들의 교육비에 많은 돈이 필요로 한다.이 사업에서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시기는 지역선정 이후 조사 단계이다.일로코스의 경우 이를 위해 1년동안 인근지역의 대학생과 스태프가 홈스테이를 하며 같이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커뮤티니 분들과 친해지고 어떤생각을 갖고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이해를 우선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를 찾는것이 주요 과제 이다.또한 이 기간동안 마이크로 크레딧과 여성임파워먼트에대한 세마나와 워크샵이 진행되었다.돈을 왜 모아야하는지, 돈을 왜 갚아야 하는지 - 조차 모르는 이분들에게 이것에 대한 개념의 이해는 필수였다. 이 과정에서 1년이 걸렸다는 말에 함께하는 것,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과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 시간들이 결코 쉽지않았을텐데 .다음 단계는 조직 구성과 사업의 진행이다. 조직은 프레지던트, 바이스프레지던트,회계 등으로 구성되고 커뮤니티 멤버로 가입시p.100을내고 매달 p20씩 돈을 걷어 원금을 갚아나간다. 처음멤버는 18명이였고 현재는 20명이다. 매달 첫째주 토요일에 정기적인 미팅을 갖고 문제가 생기면 회의를 통해 결정한다.일로코스 역시 'hog raising'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처음받는 p6.000으로 돼지 4마리를 사고 분양까지 이루어졌다.프로젝트 시작 후 2년동안 원금반납이 착실하게 이루어져 Y로 부터 인센티브를 지급받기도 하였으며 사업의 진행된지 3년만에 원금을 가고 이익을 창출하기 시작하였다.얻어진 수익으로 커뮤니티 멤버들에게 1%의 이자를 받고 대출을 하는 프로젝트로 이어졌다.(정부에서 빌리면 10%의 이자를 내야한다고 한다. 빌린돈은 각각의 수익증진을위한 사업에 이용한다) 빌린돈에 1%만큼 더 추가하여 갚는다.만약 정해진 기간내에 돈을 갚지 못하면 5일간의 추가 기간를 주고 , 추가기간이 지나면p.500의 벌금을 낸다.또한 , 돈을 갚지 못하면 다시는 빌리수 없다.(빌리려면 갚아야한다)p.500의 벌금이 크기때문에 실제로 돈을 갚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한다. 그 밖의 공동 사업으로 Feed store와 베이커리도 행해지고 이다.베이커리는 작년 11월 부터 시작하여 주문이 들어오면 공동으로 빵을 제조한다.정부에서도 베이커리 무료 교육을 시행하는 등의 지원이 있었다.스태프의 개입은 처음 교육과 조직구성 까지이며 기반을 잡은 후엔 여성들 스스로 커뮤니티를 운영한다. 현재 커뮤니티는 p200.000 + p53.000 (feed store)의 돈을 모은 상태이며 처음의 p.6000과 비교하였을때 많은 발전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수익으로 멤버들은 p3.000씩 돈을 받았다.어려운점과 앞으로의 방향?초기에는 사업에 대한 개념 이해도 개인차가 있어 모두의 기본적인 이해를 위해 많은시간이 걸렸다. 공동의 일외에 공적인 문서작성 등의 업무를 대표에게만 떠안기는 어려움도 있었다고 한다.돈을 빌리는 데 있어 그 사용이 사업이 아닌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용하거나, feed store에서 돈을 안내고 먹이를 빌려가는 경우가 있다고한다. 멤버간에 좀더 엄격한 운영이 필요할 것이다.어느덧 8년.이익을 창출하는 단계에 있는 그들은 커뮤니티 멤버의 확대 와 새로운 프로젝트의 진행을 꿈꾸고 있다. 하지만 그 방법 (커뮤니티를 벗어나 기업으로 사업확대등의) 을 몰라 어려움이 있다. 엘씨 역시 이에대해 공감하였고 커뮤니티에 새로운 교육과 현재의 리더들을 중심으로 다른 조직으로 더 키워 나가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프로젝트에 참여후 달라진점은?커뮤니티의 어머니들에게 '수입의 증대외에 달라진점에는 어느것이 있는지' 인터뷰를 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가장 큰 변화는 '공동체 의식의 향상' 이였다. 커뮤티의 멤버로 가입을 하고 함께 사업을 진행하고 회의를 하면서 단지 같은 공간에서 생화을 하던 시간들과는 다른, 공동체 의식이 생겼을 것으로 생각된다.다음으로는 리더쉽 (주체의식) 과 규칙의 중요성이해, 지식증대(돈에 대한 개념이해) 등이 달라진 점으로 꼽혔다.프레지던트 어머니의 경우, 어떻게 사람을 조직하고 관려하는지 배울수 있었다고 한다. 보고, 듣고 , 느낀 '마이크로 크레딧 _우먼 임파워먼트'우리의 메인 프로젝트는 '마이크로 크레딧과 우먼임파워먼트' 일단 난 영어를 싫어하고 단어자체가 생소했다. 하지만 커뮤니티에서 생활하면서 -그리고 경영학에 대한 지식은 무지 하지만 , 나의 소속은 어쨋든 경영학과이기때문에 '마이크로 크레딧'과 여기에 접목식킨 '우먼임파워 먼트'에 점점 흥미를 갖게 되었다. 투딩은 아직 시작단계라 멀리 까지 보지 못해 답답했었는데 일로코스의 사례를 직접 보고 들으니 투딩의 몇 년 후는 어떨지 기대가 된다. 이 나라에서 p6000는 결코 작은 돈이 아니다.p1(페소) 는 우리나라돈으로 약 25원 에 해당한다. 내가 아는 액수를 다 동원하자면 지프니는 p8 ,밥값은 보통 p50, 음 한달 집값이 p1000?이분들이 보통 버는 한 달 월급은 p500~1000 .이러한 돈을 기부가 아니라, 이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드리는 이유는 무엇일까?그것은 '고기를 가져다 주는것' 이 아니라 '고기를 잡는법'을 알려주기 위함이다.고기 잡는 법을 배울 기회가 없던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일회성에 끝나는 보기좋은 떡이아닌 계속해서 수익을 증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우먼 임파워먼트의 부분에 있어서전에 안산에서 트레이닝을 할때 마을만들기 운동으로 어머니들의 회의에 참여했었는데 그 수준에 감탄 했었다. 이곳 커뮤니티도 마찬가지로 여성이란 신분과 나이라는 숫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걸 느꼈다.프로젝트의 과정을 통해 주체성을 갖고 '여성이 하는일이 집안일 뿐 만 아니다.' 는걸 깨닫게 하는것, 여성을 통해 그의 남편과 아이들- 가정에서 사회로 그 생각이 전해 지길 바란다- 는 엘씨의 생각을 함께 그리며, 그것이 그리 멀지않은 미래임을 알 수 있다.
아이들에게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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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을 통해 나를 다듬는 기회 ) 3달간의 치앙마이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람푼 라오빠꺼이 학교에서 11월 3일 처음 들어왔다. 처음 학교에 도착해서 우리를 환영해 주는 환영식을 보며 나는 " 이 아이들과 어떤 귀한 관계를 만들 수 있을까, 서로에게 사랑의 기억, 추억으로 남을 수 있을까 " 라는 생각이 들면서 " 이 아이들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 라는 걱정도 한편으로 들었다.# 언어의 소통 라오빠꺼이 초등학교에 있으면서 아이들이 나에게 태국어로 관심을 가지며 말을 걸어온다. 아이들은 열심히 말을 하는데 나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몇 번이고 다시 물어봐 이야기를 한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나에게 (또는 우리에게) 쉽게 쉽게 천천히 이야기 해주었다. 내 눈을 바라보며 내가 하는 이야기 잘 들어주고 기다려 주면서 잘 한다고 칭찬해주는 아이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아이들과 나 (우리).우리의 모국어는 다르지만 서로의 다름을 이해해 가며 소통을 할 수 있었다. # 활짝 웃기.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웃는 법을 배운다. 억지로 인위적으로 웃으면서 마음이 불편한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그래서 마음까지 즐겁게 웃는 방법을 배운다. 나도 이렇게 밝게 해맑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 라는 사실을 아이들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다. # 컴퓨터하기 보다 더 즐거운 아이들 집 방문하기. 학교를 가지 않는 주말에는 아이들의 집에 놀러가거나 껨남 (저수지)에 가서 낚시를 하고 아이들과 함께 저수지 근처를 자전거 타며 돌아다닌다. 매주 주말이면 밖에 나가기보다는 집에 앉아 컴퓨터만 하던 나였는데 이렇게 주말에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산책하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동네에 사는 아이들 집에 가보기가 재밌는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알게 되었다.나는 그동안 물질 문명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던지 한시라도 내 곁에 티비, 컴퓨터가 없으면 불안해 하고 외로워했는데.. 한국에 가서도 라오빠꺼이에서 주말에 생활했던 것 처럼 자연과 함께 하며 사람들과 함께 하며 지내봐야 겠다.그리고 땡볕에 아이들의 집을 찾아가다가 덥고 지치면 잠시 길에 벌러덩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며 쉬기도 하였다. 하늘을 바라보며 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다가 지치면 잠시 쉬어도 될잖아. 그동안 나는 왜 그렇게 무엇을 하며 바쁘게 살았을까?취업, 대학입시, 사람과의 관계에서 경쟁적, 전투적으로 살았던 것은 아닌가. "쉬어가기도 하자. # 지금은 사랑할 시간. 라오빠꺼이 학교에서 치앙마이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으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꽈~악 나에게 안겨 내가 숨 막힐 때가 더 좋은 거 같다는 생각.아이들이 마음껏 사랑을 표현하고, 우리도 아이들에게 마음껏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우리가 있는 이곳에서의 시간. 사랑하기도 바쁘구나...------------------------------------------------------------------------ 내가 외국인이라서아이들이 배려를 해주는 것도 많을 수 있지만 라오빠꺼이에 있으면서 아이들에게 배운점이 많다.내가 이곳에서 느끼고 배운 것을 단순히 내 생각에만 머물며 지낼 것이 아니라 내 삶에 적용시켜야 봐야 겠다. 자, 지금은 끝이 아니고 또 다른 시작이구나. 내 삶에서 잘 적용시켜보자.
피썹의 에세이2) 태국팀 되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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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태국으로 파견된 라온아띠 람푼 팀이다.이화여대 선구,경북대 세미,계명대 수진,영남대 수현,대구가톨릭대의 나, 이렇게 각기다른 학교,학과,성격,사는곳도 제각각인 남자2명,여자3명의 우리 람푼팀이 여기 태국에서의 생활을 한지도 140여 일이 지났다.한국에서의 면접과 국내훈련까지 포함한다면 6개월 정도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이제는 서로의 얼굴이 지겹다며 농담을 하기도 하며 ‘현지인’이라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태국서의 생활이 쉽지 만은 않았다.음식.,물,날씨,언어 ,사람들의 성향까지. 우리 람푼팀 은 올해 여름 8월20일에 출국하여 이제 1월 귀국까지 5개월간의 기간을 두고 활동을 하고 있으며, 귀국까지 일주일의 시간을 남겨두고 있다함께 지내고 있는 ‘프레팀’도 마찬가지이다. 태국팀은 크게 환경과 평화 캠프,HIV보균자 학교캠프와 수업,study trip ,환경과 대체에너지 (람푼 ,프레 )지역 학교수업과 지역 호스트 패밀리 가족과 생활하게 되어있었다 라온아띠 는 YMCA와 국민은행의 파트너십으로 만들어진 조직이었다.한국 YMCA와 태국YMCA 와도 자연히 함께 하다 보니 YMCA라는 조직을 조금씩 알게 되기도 하고 한국과 태국Y와의 관계가 50년 이상의 교류를 통해 끈끈해져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우리는 여기서 태국Y의 도움을 받고 ‘캠프’라는 활동을 가장많이 진행한 것 같다. ‘라온아띠’ 봉사단은 봉사경력이 전무한 사람도 ,해외경험이 전무한사람도,영어를 잘하지 못해도 그런건 문제될게 없었다.실제 ‘영어”만 놓고 봤을때 원어민 수준의 멤버가 있다고는 못하겠다.처음엔 손짓과 발짓과 개개인의 짧은 영어회화가 전부였고 이제는 태국어로 말을 하는데 더 익숙해진 것 같다. 람푼에 머물던 시간들을 떠올려본다. 한국시간으로 아침 7:30분.태국시간으로 새벽 5시30분에 나는 저절로 눈이 떠진다.나와 수현이는 졸린 눈을 비비고 급하게 세수만 한후 5분거리인 학교로 뛰어갔다.단 한명도 빠짐없이 아이들은 아직은 어두컴컴한 새벽에 우리보다 먼저 학교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다음주에 있는 지역 초,중학교 체육대회를 대비해 아이들과 아침마다조깅,달리기연습,축구연습을 하기로 약속 했기 때문이다.갑자기 추워진12월의 태국날씨 덕분에 추위에 떨며 자던 수현이와 나는 우리집 호스패밀리 엄마 ‘미’에게 따뜻한 잠옷도 선물받고 오늘도 이렇게 아이들과 아침운동을 하러 나온것이다.장난끼 많고 피부가 까무잡잡한 태국아이들이 언제나처럼 교문뒤에 숨어서 “짠” 하고 나타나며 우리를 놀래키려 한다.아이들은 추워진 날씨 탓에 낙엽과 나뭇가지로 작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불을쬐며 “ 나우마이?” (춥지않니?)를 연신 묻는다.태국의 겨울날씨는 한국만큼 춥진 않지만 갑자기 떨어진 기온탓에 추위를 많이 느끼는 태국아이들은 저마다 두꺼운 점퍼를 입고 왔다.그래봤자 뛰면 덥다고 냅다 팽개치고 뛰어올거면서 자기는 두꺼운 옷 입어서 춥지않다며 “히죽”웃는 아이들이 귀엽기만 하다.그렇게 아이들과 우리는 아침운동을 시작으로 8:30분에 아침조회, 9시부터 4시까지는 한국어 수업, 오후4시~5시까지 클럽활동을 함께하면 어느새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된다. 이곳은 태국북북 ‘람푼’ 지역의 ‘라오빠꺼이’초등학교이다.전교생(유치원포함)하여 87명에 선생님 8분이 근무하고 계신다. 람푼팀 5명의 주무대 이다. 아이들과의 아침운동후 아침식사를 하고 8:30까지 학교로 향하는 길.채5분도 안되는 거리지만 많은마을주민들이 마주치면 반갑게 아침인사를 건네주신다.“싸와디 캅”(안녕하세요) 이젠 마을사람들이 우리의 얼굴을 모르는 분이 없다.한국에서 왔다고 한마디 더 건네주시고 한번 더 미소지어주는 사람들이 정겹다.학교 정문 앞은 아이들의 등교를 위해 저마다 어머님,아버님 들의 오토바이 엔진소리가 요란하다.교문을 들어서면 아침청소를 하고있는 아이들이 쉽게 눈에 들어온다.인사를 나누면 수줍어 하는 여자아이에서 오늘은 자기반 수업을 들어오라며 손가락으로 자기네 반 숫자를 손가락으로 펼쳐 보이며 묻기도 하는 남자 아이 까지 .. 아침조회 시간은 학생 회장 ‘푸룩’과 ‘또또’가 전교생 앞에서 진행을 하는 목소리로 시작한다.불교국가,국왕을 존경하고 숭배하는 국민답게 학교마다 조회대 앞은 큰 불상이 있으며 국왕의 사진과 국기앞에 태국국가를 부르고 선생님의 훈시로 마무리 된다.조회가 끝나면 우리 5명은 오늘있을 한국어 수업을 위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거나 준비물을 챙긴다.“오늘은 말 안 듣는 ‘요”가 있는 6학년 반이니 효섭 오빠가 집중마크 좀 해주세요”6학년 진행담임 선생님인 수진이가 제일 먼저 나에게 말한다.“저번 시간에 너무 산만해서 동요를 가지고 ‘가나다’노래를 부르니 훨씬 잘 따라하더라구,” 1학년을 맡은 선구도 저학년이다 보니 만만치 않은가 보다.한국어 수업을 하다 보면 여간 어려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언어 라는 것이 처음엔 무작정 외워야 하는 부분도 있기 마련인데 생판 모르는 언어를 ,그것도 초등학생 1학년에서 6학년까지 수준별로 수업을 진행하고 이해시키려니 결코 쉽지 않았다. 이리저리 부딪혀 보니 ㄱ.ㄴ과 ㅏㅑㅓㅕ같은 자모음만 익히고 이해 시키는데 2주가 할애됐다.각 반을 고루 들어가기위해 시간표를 짜보았는데 운동회다 뭐다 빠지는 아이들도 생기는 바람에 우리의 바램대로 온전히 진행되진 않았다.말썽쟁이 녀석들을 조금이라도 관심 가지게 하고 따라오게 하기 위해 갖은 수 를 다 써보기도 했다.그럴 때 마다 지치거나 발음을 자꾸 들려줘야해서 목이 쉬어서 안타까울 때도 있다.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반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자모음과 가,나,다,와 쉬운 받침과 단어는 이해할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한국어 수업과 함께 연말에 있을 ‘학예회’도 준비하고 있다.이날 우리는 아이들과 뮤직비디오,난타,댄스 를 학교수업후에 원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함께 연습하고 있다.당일 별도로 한복입고 부채춤과 다같이 노래도 한곡 부르기로 해서 어떤 노래를 불러야할지 고민되기도 하였다.수업시간에는 말 안 듣던 아이들이 방과후 클럽활동 시간만 되면 그렇게 신나하고 재미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역시 아이들은 아이들인가 보다. 그렇게 한국어 수업을 한지 2주째,학교를 마치고 저녁에 집에서 쉬고 있는데 옆집에사는 2학년 ‘보이’가 공책과 필통을 들고 와서는 대뜸 나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것 이었다. 순간 놀랐다.수업시간에는 산만하고 장난끼 많은 까불이 ‘보이’ 가 제 스스로 찾아 오다니 ,엄마가 강제로 보냈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한번 두 번 오더니 매일 저녁 찾아오기 시작했다.여럿이 있는 한반을 수업하다 1:1로 한국어를 가르쳐주니 훨씬 집중하기 쉬웠고 나도 신이나서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며칠 후 ‘보이’는 고등학생인 누나와 함께 왔고 나와 수현이는 두 명을 1:1로 방과후에 가르쳐 줄 수 있어서 의미 있고 보람된 시간이 되었다.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태국의 대학교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일명 ‘명문대’인 치앙마이 대학교에서 내년부터 한국어 과가 개설된다 한다.중국어 .일본어에 이어 한국어도 배우고 싶은 수요가 크다는 것도 차츰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초등학교가 우리의 주 무대였지만, 우리는 활동영역을 조금 넓혀보기로 했다.인근에 ‘남딥’이란 고등학교의 선생님 한 분을 통해서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 학생의 수를 조사해 달라고 부탁드려서 주말에 2시간씩 수업을 하기로 했다.수는 30명정도에 적지않은 숫자에 너무 많지도 않아서 부담도 적었다.고등학생들이라 이해도 빠르고 곧잘 따라와서 여기서 머무는 기간만 충분하다면 시간을 늘리고 싶었다.처음에 수요를 조사할때 학생들이 우리에게 ‘수업료’로 얼마를 내면 되는지 묻던 기억이 떠오른다.‘공짜’라도 했을때 깜짝 놀라던 표정들이 어찌나 우습던지 잊지 못하겠다.남딥 고등학교 는 한국어를 통해 우리와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이었다. 예전 치앙마이Y로부터 스텝들이 ‘바이오 가스탱크’설치와 그에 필요한 돼지우리 짓기와 가스탱크를 땅에 묻기 위해 ‘라오빠꺼이’학교를 방문했다. ‘바이오가스 탱크 사업’이란 동물의 인분을 재활용한 대체 에너지 자원을 생산하는 사업을 말한다.태국북부 지역의 치앙마이 YMCA는 ‘바이오가스 프로젝트’를 다른 지역에도 실시하는 중이었다.우리도 ‘라온아띠’ 란 이름으로 이에 동참하여 함께 진행하였다.YMCA 에서는 시설자체만을 지원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의 과정을 학교와 마을주민들이 함께 이루고 유지 시킬 수 있게 도와준다.워크샵을 열어 선생님과 아이들 ,마을주민들과 지방정부 관료분을 초대해서 설명회를 하여 이해시키고 그날은 다채로운 행사와 활동으로 인근 지역학교 아이들도 참여하게 된다.환경에 대해 공부할수 있는 체험의 장도 되고 실제 필요한 일감을 도와주기도 한다.바이오 가스탱크 설치가 완료되면 그 밖의 활동으로 태양열을 이용한 ‘쏠라오븐’만들기 를 통해 공해를 일으키지 않는 태양열로도 음식을 조리할수 있다는 걸 몸소 배워볼수 있다.학교에 이 시설이 완료되기까지 지방관료와 학교 선생님 ,마을주민들은 적극적으로 이를 돕는다.교장선생님이신 ‘싸이쑤니’선생님은 아이들을 위한 일에 열정이 크신 분인데, 바이오 가스 사업을 계기로 에너지 교육센터 를 짓기로 결정하시고 YMCA의 도움을 받아 추진중에 있다.그밖에 가정형편이 어렵거나 부모 없이 사는 아이들 집에 후원도 해주시고 친구분들의 성금도 모아서 학교 컴퓨터실도 마련해 주시는 ‘라오빠꺼이’의 멋쟁이 여장부 선생님 이시다.마을주민들도 학교일 이라면 적극적으로 도와 주시는 든든한 후원자이다.오래전부터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 집에 학교를 계속 다닐수 있게 해주시고 그런 모임을 조직하여 자체적으로 운영중에 있어서 우리는 매우 놀랐다.게다가 학교에 행사나 큰 축제가 열리는 날엔 발벗고 도와주시고 참여도 해주신다.그렇게 선생님들과도 좋은 유대관계로 형성되 있었다.실제 한 선생님의 제자들의 아들,딸이 지금도 라오빠꺼이 학교에서 부모님의 스승에게 배우고 있었다. 우리집 호스트패밀리 아버님도 그런 제자 중에 한 분이었다.YMCA 와 학교,마을사람들은 이미 끈끈한 관계로 이어져 있었고 ,우리도 거기에 이어져 관계를 맺어 가는 중 이었다.모두에게 좋은친구로 다가가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팀은 태국에서 YMCA와 함께 환경과 지구온난화 ,평화와 환경를 주제로 캠프를 진행하고 참여하기도 한다. ‘태국은 음식물 쓰레기’ 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음식물은 쓰레기가 아니라는게 그 이유다.실제 내가 생활하는 호스트패밀리 집의 쓰레기통을 보면 일반쓰레기와 음식물쓰레기를 같이 버리고 있다.재활용,분리수거의 단계가 시작 된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다. 환경과 평화를 주제로 치앙라이 지역의 ‘매 러 라이’ 초등학교를 방문했었다. 이 학교가 특이한건 마을주민들과 학교아이들중 15명 정도의 HIV 바이러스 보균자 라는 사실이다.실제 우리도 캠프를 진행하면서 15명의 보균자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만 YMCA를 통해서 전해들었을뿐 그밖의 자세한 사항은 전혀 몰랐다. 아이들은 똑같았다.여전히 잘 웃고 잘 뛰어놀며 HIV바이러스 보균자 라는 사실때문에 우리가 문제되거나 신경쓸건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좋은 친구 사이 였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학교뒤의 숲에 들어가 생태체험 프로그램도 함께 하고 평화를 주제로 협동화 그리기와 지구온난화를 주제로 한 CO2게임도 함께 하였다.학교를 떠나기전 그곳 마을 주민들과 아이들이 ‘GOOD BYE’파티를 열어 주었고 태국전통의식(행운을 빌어주는)을 해주시고 아이들의 공연과 우리의 공연이 어우러져 마을주민들과도 교감할수 있는 자리가 되었다. 이렇듯 5개월 중의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수없이 많은 캠프를 통한 아이들과의 교류는 셀수도 없다.현재 람푼지역에서 생활하며 만나 ‘라오빠꺼이 초등학교의 아이들’선생님과 마을주민들.치앙마이 YMCA 분들과 여기서 얼굴을 마주치며 인사하는 수많은 사람들까지 ,내가 여기 오지 못했다면 만나지도 관계맺지도 소통하지도 못했을것 이란걸 떠올리면 현재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많은걸 주지 못해도 ‘친구’로서 우리는 얼마나 좋은 인연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이런 시간들이 있기까지 처음 ‘해외자원봉사’를 지원하면서 품었던 마음,더 넓은 세상에서의 나를 느끼고 싶고 ‘자원봉사’가 아닌 ‘자원활동’을 통해 내 자신도 분명 성장할거라 믿었고 다른 어려운 이에게도 작은 보탬이 되고 싶었다고, 그래서 지원하였었다.면접과 한달여간의 YMCA 에서의 국내훈련을 마치고 지금 여기서 함께하기까지 쉬운일은 아무것도 없었다.한달여간의 국내훈련을 할때는 최종모인 50명이 합숙을 하며 짜여진 프로그램 안에서 ‘봉사를 왜 가는지’?, ‘우리가 할일이 무엇인지’,’마음가짐은 어떻게 해야하는지’,팀원들간의 생활을 통해 서로의 성향도 파악하고 작은문제라도 고민을 품고 토론을 하는법 등을 배우게 되었다. 기존의 내가 생각하는 ‘자원봉사’든지 ‘해외봉사’에 대해 잘못 품고 있던 생각들이 깨지기도 했으며 수많은 국제활동가 분들의 생생한 강의도 들을수 있었다.나와 비슷한 또래의 생각들도 함께 공유할수 있어서 값진 시간들 이었다.또한 5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가지고 있으며 단기 봉사도 아닌 장기도 아닌 중,장기의 성향을 갖고, 단순히 지어주고 퍼주고 도와주는것도 아니었다.그렇다고 교육봉사도 아니었다.‘라온아띠’란 이름답게 좋은 친구처럼 그 지역의 사람들과 소통하고 교감하여 ‘다름’을 만나러 가는 자원활동이었다. 아시아의 연대를 지향한 자원활동 이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고민하기도 하고 국가와 국가가 아닌 지역과 지역사회의 만남을 이루어서 ‘어떻게 하면 영속적으로 이어지게 할수 있을까?’ ,’한국에서 어떻게 풀어낼수 있을까?’,’여기와 우리의 관계를 어떻게 지속시킬수 있을까? 를 고민하게 해주는 자원활동 이었다. 또한 태국은 그렇게 물질적 사회적으로 헐벗고 굶주리고 헐벗은 나라도 아니었다.물론 시골지역으로 가면 없진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을게 없어서 혹은 살아가기 힘들어 의,식,주 를 해결못할 정도는 아니다.흔히들 봉사활동이라 하면, 더더욱 해외봉사활동이라 하면 그런것들을 상상하기 마련이다. ‘나는 도우러 왔다’라고 잘못 생각할수 있다.잘먹고 잘사는데 왜 봉사활동을 왔을까? 람푼팀 은 여기 시골초등학교에 들어와서 ‘한국어’하나를 가지고 아이들과 교감하기 위해 수업을 진행하엿다.한국어를 가르쳐서 아이들의 진로에 보탬을 바라는것도 아니고 단순히 한국문화를 알려주고 전해주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다.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연대를 맺는 다는 건 문화수출이 아니라고 한다.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겸손한 걸로 나누고 교감하기 위해서 ‘한국어’라는 작은 통로를 이용했을 뿐이다.작게는 진솔한 만남을 이루기 위해서 크게는 아시아 연대를 이루는 지속적인 관계유지를 위해 ,태국과 한국이 아닌 사람과사람의 관계로 교감하고 소통하고 싶어서 우리는 여기 온 것이고 여기 있는 것이다. 나는 남은시간도 이들과 함께하는 ‘좋은친구’로 항상 머물고 싶다.아마도 우리팀 모두의 바램일 것이다.여기서의 인연들이 다른 방식으로 이어지길 바라며 , 서로의 관계와 만남이 계속 되길 바래본다..
episode 14 . 그리고 1/5 과 1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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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과 큰 관련은 없지만, 1월 3일 우리에게도 두 분의 간사님이 방문하셨다.자랑하려고.]1. 1월 4일부터 1월 10일. 여행을 다녀왔다. 우리는 일주일의 휴가를 베트남 와이에게 제안했고, 각자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고 이야기 했다. 따로 갈 수도 있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이야기 했는데, 의외로 베트남 와이는 의연하게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도와주었다. 갈등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조금은 어려운 시기를 지났다. 갈등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아마 각자 조금은 불편하고 부자유스러운 시기가 있었다. 다섯명이 함께 지내는 5개월에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우리는 아직 내공이 부족해서 갈등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이것을 자유 여행이라고 불렀는데, 아마 그것은 굉장히 1박 2일 탓이라고 생각한다. 자유여행일 수도 있고, 마무리 여행일 수도 있고, 여행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그 무궁무진한 긍정적 측면을 생각해 본다면, 그냥 여행이라고 불러도 충분할 것 같다. 어쨌든 우리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고, 계속 다섯이 같이 있었다. 1월 쯤에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베트남에서의 욕심이 부딪힐 때가 되었다. 게다가 아주 자연스럽게도 1월의 우리의 스케쥴은 우리의 몫이었기에, 부딪힐 수도 있었다. 고백하지만, 이렇게 따로 떠나는 여행에 가장 부정적인 것은 나였는지도 모른다. 안전과 같은 문제는 둘째 문제였고, 뭔가 다섯이 함께 하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던 나의 기대와 욕심이 첫째 이유였던 것 같다. 그래서 위와 같은 생각을 겪었다. 150일 중의 7일이라면 혼자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의미 있을 수 있겠다고 나를 설득했다. 다섯이 7일간 충분히 충전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좋은 여행이잖아,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건 정당화라기 보다는 아주 자연스러운 연습의 과정이라고 지금은 진심으로 이 기회에 고마워 하고 있다. 하노이로, 냐짱으로, 메콩으로, 앙코르와트로. 잘 다녀왔다. 모두 그런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고 출발했지만, 다들 5개월을 정리하고, 충전했다. 역시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2. 1월 11일부터 1월 20일. "만나는 사람, YMCA 사람들, 자전거를 고쳐준 오토바이 수리집의 청년들, 수연이가 교통사고를 낸 구멍가게 아줌마들, 호텔 주인가족. 그들의 친절만으로도 열심히 해야 겠다고 불탔다. (2008년 8월 21일의 일기)" "고마움을 잘 표현하는 연습을 해야하는 시기가 되었다. 고마움의 마음은 그 때 그 때의 감정에 충실하게 충분히 표현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내 애정이 담긴 물건은 언제라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줄 준비가 되어있다. (유치원에서의 작별을 준비하던 2008년 11월 27일의 일기)" 5개월의 생활 중 제일 많이 했던 생각은 우리는 정말 많이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장애인 클럽에서도 유치원에서도 우리는 늘 도움을 받았다. 어디에서도 우리가 가장 빨리 지치고, 자주 아펐다. 그것이 자괴감(자신이 괴로운 감정)이 될 때도 있었다. 우리가 도와주고, 우리가 없으면 안되고, 우리가 주체적인 상황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호의와 친절을 그대로 잘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멋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고마움을 있는 그대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받은 고마움으로 따뜻함이 넘쳐 나는 사람이 되서 나도 그런 호의와 친절을 어디서나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되겠구나. 꼭 Give and Take 가 아니어도 되는거겠구나. 이제 정말 그 고마움을 있는 그대로 충분히 표현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나는 지금 이 시간들이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헤어질 때의 따뜻함, 약속이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오늘은 희망 직업학교를 다녀왔다. 우리가 베트남어를 처음 공부하던 9월에 우리는 그 곳에서 학생들과 대화를 하면서 연습을 했었다. 레포트를 쓰던 12월에 우리는 그곳의 학생들로부터 설문지를 받고 선생님들과 인터뷰를 했다. 이런 인연이 있는 곳인데, 사실 제일 겁났다. 우리가 방문하기로 한 기관들 중에 제일 우리와 안 친한 기관이었다. 그 이상의 친분이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이 위대한 것은 역시, 우리는 여기서 따뜻함을 충분히 받아왔다. 사실 교실로 들어가서 학생들과 작별인사를 하는 시간에는 무척 부끄러웠지만,(9월달과 학생들이 바뀌어 있어서, 처음 봤는데 작별했다.) 그래도 그런 시간을 마련해주던 선생님들과 그 선생님들과의 식사, 커피, 그리고 차 선물. (우리가 선생님들이 끓여준 차에 대해 관심을 표했더니, 경비 할아버지께서 오토바이를 타고 나가서 사와주셨다. ) 이 모든 것이 따뜻해서 소중했다. 메일 주소를 교환했다. 선생님이 언젠가 다시 베트남에 와서 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쳐줄 수 있겠니 하고 물어서 우리는 돈이 없어서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헤어질 때 선생님이 한국 가면 공부 열심히 하고 돈 잘 벌어서 다시 베트남 오면 희망 직업학교에도 오라고 하셨다. 물론 메일을 교환하고, 그런 인사말들이 실제로 어떻게 될지는 늘 모르는 문제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역시 모르는 문제이다. 그래도 늘 그 순간은 참 소중하다. 설령 그것이 미래에는 빈말이 되더라도 지금은 그렇게도 참 소중한 순간들이다. 내일은 장애인 클럽, 그 다음날은 유치원, 그 다음날은 봉제학원이다.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만날까 고민한다. 오늘은 장애인 클럽에 줄 편지를 썼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표현은 "정말 고맙습니다." 라는 것이 아쉽다. "정말"을 아주 강조하는 것이 그나마 좀 더 적극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이것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온 얼굴로 모든 몸짓으로 이 고마움을 충분히 표현하는 연습을 해야 겠다. 3. 1월 20일부터. 억지로 어떻게 이어져야 하는가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5개월의 생활 중에 우리에게 붙은 실력이 개개인의 생활공간에서 발휘될 수도 있고, 여기와 관련된 일감을 계획할 수도 있고, 사람을 모을 수도 있겠다. 확실한 것은 이제 베트남은 내게 미국이나 프랑스 등의 나라를 주변에서 들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을 주는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고, 베트남 사람을 만난다면 이것 역시 미국 사람이나 프랑스 사람을 만났을 때와는 다른 감흥을 주는 만남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시작하고, 제안하고, 가능한 범위에서 도전도 하고. 난 충분히 이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에세이 11. 바기오를떠나서_ 마닐라 4박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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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 1:00 버스로 바기오와 '안녕' 하였다.고작 5일인데 짐을 바리바리 꾸리고, 버스를 타고, 잘 가라는 꾸야의 말에 - 바기오를 영영 떠나는 것만 같다.이런 느낌이 겠구나 연습이라면 연습이겠지. 바기오와 떨어져있기.크리스마스에 새해까지 홀리데이가 꽤나 길어서 우린 점점 추워지는 바기오를 벗어나기로 했다.처음에는 감히 . 세부나 보라카이를 꿈꾸었지만 비행기는 이미 매진된지 오래 _ 버스로 이동할수 있는 곳을 찾아야 했다.한울이와 혜성이가 정보를 열심히 모아모아, 다시 짠 루트는마닐라 - 마카티 - 보니또 아일랜드.마닐라는 우리가 처음 머물렀던 곳이였지만 제대로 돌아보지 못해서 다시 가보는것도 괜찮을것 같았다.니은언니 말대로 에어콘 버스는 그 장점을 자랑하느라 주구장창 에어콘을 가동하였다에어콘을 꺼주면 안되겠냐고 물어봤지만 관리자분께서는 친절하게도"다음에는 남자친구를 데려와서 껴앉고 계세요" 라고 말해주셨다.a추위에 밤잠을 설치며 도착한 마닐라.습습하고 끈적이는 공기 .아 마닐라는 이랬지.터미널에서 내리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팁 맨 - 들이 달려든다택시를 잡아준다며 짐을 옮겨준다며 원치않는 호의를 베풀고는 돈을 달라고한다. 그 광경이 무섭기까지 했다 .처음 이곳에 발을 내딛는 사람들의 기분은 어떨지 . 기분이 찹잡해진다.우리가 처음으로 머문 숙소는 마닐라Y였다.체크인이 2시부터여서 일단 졸리비에서 아침을 먹었다마닐라의 졸리비에서 모두가 내린 평가는"바기오가 팬케잌도 훨씬 맛잇군"팬케잌 하나에도 우리는 바기오가 좋았다.처음 머물던 곳에 있으니 이런저런 생각도 나고 '그땐 그랬었는데 - '라며 시간의 흐름을 실감한다.마닐라는 중심지. 따뜻한기후와 많은 쇼핑몰이 있다.마카티는 강남 삘- 화려했다.그곳에서 사람들과 카운트 다운을 외치며 2009년을 맞이했다.이곳은 빈부의 격차가 크다는걸 재확인 했고.보니또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바다를 가진 매력적인 섬.오랜만에 벗어난 바기오였고, 여행이여서 _나중에 느낀점이지만 그 유명하고 사람많은 세부나 보라카이가 아니라서 _ 더 좋았다. (특히 나는 한참 여행에 목말라 있었기에 .)여행 내내 큰 빌딩, 버스, 평평한 도로가 어색했다.강원도탄광에서 강남으로 상경했다는 언니의 표현이 딱 맞다알고보니 . 다르다 !몇개월 전에는 어색했던 마닐라 , 바기오였지만 필리핀에서 지낸 시간동안 우리는 많이 변했다. 바기오에 있다보니 정말 '마닐라'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이건 비슷하네- 이건다르구나 하는 안목도 생기고. 한편으로는 이제는 익숙해진 따갈로그어를 간간히 사용해 주면서,마닐라를 바기오마냥 돌아다니는 우리의 모습에 '많이 컸다' 라는 생각이 든다.한 나라를 이해하는데 정해진 시간은 없겠지만 우리는 5개월동안 많이 익숙해 졌다.한국에 돌아가서도 "언니"라는 말대신 "아떼" 라는 말이 불쑥 튀어 나올것 같다.이제 마무리와 다시 바기오와 '안녕'하는 일만이 남았구나.벌써부터 필리핀이, 바기오가 그리워진다.
뉴스클리핑 10. Merry Christmas in Philipp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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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서..필리핀, 카톨릭신자가 인구의 85%이상을 차지하는 국가답게 "Jesus Christ"가 매우 중요시되는 나라이다. 난.. 카톨릭신자인데(긴 휴식기간을 갖고 있긴 하지만..)이런 내게도 꽤 어색했던 점은 처음 필리핀에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만나왔던 사람들이 빠지지 않고 물어보았던 질문! 바로 "종교가 무엇입니까?"이다. (이때, 난 대답을 하긴 하지만.. 좀 민망하다...;)어쨌든, 필리피노들에게 종교가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건 명백한 사실이다.그래서 그와 관련하여 필리핀의 크리스마스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내가 지내는 Baguio에서는 10월 중순부터 몇몇 상점이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 다른 지역도 그럴 것이라 예상한다.) 그로부터 한 달정도가 지난 11월부터는 본격적으로 대부분의 상점들과 거리가 빨간색, 초록색이 조화를 이룬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뽐냈다. Baguio YMCA역시 뒤질세라 색색의 등과 장식을 외부, 내부 모두 달았다. 가는 곳곳마다 캐롤이 흘러나왔고, 사람들은 내게 필리핀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를 마음껏 즐기기를 바란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나도 그 분위기에 녹아 한국에 있는 지인들과 라온아띠들을 생각하며 미리 카드를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내용이 필리핀의 크리스마스 모습이었다. 그 이유인 즉슨 우리나라의 크리스마스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기 때문에 알리고 싶었던 것. :D 한국인인 내가 한국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 이틀이 전부였다. 그리고 가족들과 보내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대부분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상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매년 24,25일에는 명동거리가 연인들로 북적거리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하지만, 필리핀은 아주 긴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낸다. 보통 이브인 24일부터 쉬기 시작해 그 다음해 Happy New Year 시즌까지 주~욱 쉰다. 놀랍지 않은가? 여담이지만, 거의 2주를 크리스마스 연휴로 보내니 난 너무 오래동안 쉰다는 생각에 불안하기도 했다. 하하 ;;그리고 대부분의 필리핀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를 가족들과 함께 보낸다. 모두들 고향으로 돌아가 일가친척들이 다 함께 모여서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고 즐거운 시간을 만끽하는 것이다.우리팀원들의 영어선생님, YMCA식구들, 유치원 선생님들 그리고 Bua마을 어머니들도 모두 가족들과 함께 할 생각에 들떠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고 '가족과 함께 하는 크리스마스.. 참 따뜻하겠다'라고 생각했다. +뉴스 클리핑크리스마스와 관련된 다채로운 행사들이 곳곳에서 열렸는데, 그것들에 대한 기사가 뉴스에 실려 공유하고자 한다.1.YEARLY CANTATA바기오 대학교 학생들이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뮤지컬 타블로를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성직자들과 교구민들 그리고 지역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된 이 공연은 2009년 새해를 기념하는 대 성당 축하식때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2.CULTURAL CHRISTMAS TREATKapangan마을의 연장자가 오늘날에는 보기 힘든 고대 크리스마스 시즌 의식을 대중들에게 선보였다. 이 의식은 "Chu-om 만들기"로서 수확시기에만 행해졌다고 한다.3.RE-ENACTMENT크리스마스 이브에 바기오 대성당에서 자정미사가 진행되었는데, 청년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재현함으로써 미사에 의미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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