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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카신문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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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귀국전에 올릴수 있게되어 정 말 감사드립니다.다들 바쁘신 와중이라서 큰 기대는 안하지만 저희팀 5월생활이니 심심하시면 한번보세요업로드에 민감한 내용이 있어 팀내에서도 의견수렴하고 현지와이랑도 의견 수렴한다고 좀 시간이 길게 걸렸네요여튼 정말 감사하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알께요^^파이팅
끝나기 전엔 끝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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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끝나기 전엔 끝나지 않아. 140일째. 끝무렵 이제 보름채 남지 않은 라온아띠. 아마. 나를 비롯한 몇몇의 이는 관계, 혹은 이 라온아띠 생활에 지쳐 있을 것이다. 사실 나는 둘다 지쳐있다. 관계며, 생활이며 지칠대로 지쳐있다. 나만의 공간없이 지내는 이곳에서 모든 것을 공유하는 자체가 부담이다. 이런글을 적는것에 팀원들은 의아해 할지도 모르지만 지쳤다. 아니 지쳤었다. 몇몇 글을 보면. 다른 라온아띠들에게도 같은 고민들이 있는 것 같다. 손실장님 메일의 관계에 대한 글도 생각난다. 잘버텨온 나. 마지막 한달에 스스로 폭발해 버렸다. 바보같은 생각도 들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될 때로 되라. 시간아 가라. 나는 이 상황을 해결하기보다는 버틸테다. 괜히 부담에 부딪치기 싫다. . .... 솔직히 이런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도망치는것 같았다. 이제까지 남이 판단했을 때는 엉망인 생활을 해왔을지 모르지만, 스스로는 그래도 잘해왔던것 같았다. 마지막순간까지 포기하기는 싫었지만 지쳤었다. 마무리가 좋지않으면 훗날 후회할수도, 아마 후회할것이다. 그것을 알지만 사실. 모든 것이 말처럼 쉽지 않았다. 진리는 간단하다는것을 알지만. 실천하는것은 간단하지 않았다. 나의 고민은 얼마되지 않아 실마리를 찾았다. 술먹은호랑이 형의 신곡. 친구가 보내준 신곡에서 타이거형의 ‘죽기전엔 죽지않아’라는 노래 호랑이형은 나보다 더 힘든 상황이였을텐데. ‘아직 늦지 않았다. 눈을 떠도 변치않아. 죽기전엔 죽지않아’ 라고 한다. JK타이거 형 말대로 죽기전엔 죽지 않아. 지치고 힘들고 피하고 싶은 부담이 있지만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프로젝트도 남아있고, 지켜야할 관계도 끝나지 않았다. 단지 끝무렵 일뿐이지 아직 끝은 아니다.
프로젝트 전단지가 나왔어요^^
99+
환경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추진했던 Smile Moratuwa 프로젝트.처음 3개월간은 길거리 쓰레기통 설치를 준비하였으나, 시장님과의 미팅후 안전문제(쓰레기통 테러 위험)로 허가를 받지 못하고, 대신 Composter Bin (자동 비료화 시스템) 프로젝트를 시행하기로 하였다.플라스틱이나 유리처럼 잘 썩지 않는 것을 제외한 일반쓰레기들을 이 통에 넣으면 약 7개월 뒤에 비료를 얻을 수 있다. 이를 통해 분리수거 생활화, 쓰레기 처리, 비료 획득의 일석삼조 효과를 창출해낼 수 있다.Composter Bin은 다음주에 나올 예정.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간 후엔 현지YMCA에서 잘 사용하는지 알기 위한 star point 제도를 시행하여 지속적으로 활동할 예정이다.
5월 :: 람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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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적인 현지적응을 마친 5월즈음에 이르러서 본격적인 홈스테이 활동을 시작. 람푼씨티에서 40분 거리에 있는 타캇이라는 동네로 입성하게 되었다.. 두둥! ▶그냥 마을 모습. 하늘이 참 예쁘다. 밤엔 별이 쏟아질거같이- 슬쩍 며칠쯤 지냈던 것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였으니.. 어쨌거나, 이곳에서 하게 된 일은 대략 학교가기+퇴근 후 마을생활하기 쯤이 되겠다. 일단 학교. ▶학교 간판(?). ▶학교 운동장 ▶학교 건물(교무실과 4~6학년 교실, 컴퓨터실, 도서실이 있다) ▶아침 조회모습. 아침마다 운동장에 모두 나와 조회를 한다. 국기 게양 후 선생님의 말씀, 아이들의 간단한 스피치 그리고 무예타이 체조로 시작되는 학교의 아침. ▶학교 부속 유치원 아가들도 조회에 함께한다. 교복위에 앞치마를 입은 모습. 아 이에 앞서 마을 입성 첫날에 이루어진 학교 선생님들의 축하회식! 어쩌면 이날부터 우리는 선생님들의 진면목을 적나라하게 봤을지도 모를.. 일이다... ▶회식중. 아직은 낮이라그런지 정갈한 맛이 나는 것 같... 태국인의 삶의 가장 큰 낙인 가라오케가 시작되고부터는 모두가 하나되는 진풍경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오프 더 레코드... 이렇게 시작된 홈스테이. 대략적인 일상을 살펴보자. ▶아침에 무척이나 일찍 등교하는 아이들. 모두가 학교 청소를 한다. 보통8시에서 8시 반쯤 조회가 시작되는데 7시쯤부터 학교에 모여드는.. 아침에 학교가기 싫어서 이불속에서 버둥댔던 나를 생각하면 참 기특한 일이다. 게다가 청소까지 하다니. ▶ 무예타이 체조를 하는 따완과 아이들. 저 너머로 파도 보인다. ▶ 요일마다 바뀌는 교복. 오늘은 예쁜 태국 전통의상을 입는 날. 노란 옷을 입은 아이들을 보면 병아리 같다. 물론 날보고 외치는 함성을 생각하면....-_-...닭이다... ▶ 학교 건물 안에서 바라본 창밖풍경. 불교국가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는 절들이 마을마다 꼭 하나씩 있다. 학교 옆에 있는 절. ▶아가들과 놀아주고 있는 파와 따완. 자갈을 쌓고 무너뜨리는 정체모를 놀이다. ▶방과후 모습.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를 하는데 수업이 끝나면 집에가서 옷을 갈아입고 학교로 다시 모여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학교가 공부만을 하는곳이라기 보다 아이들의 사랑방 역할까지 톡톡히 하고 있는 셈. 특별히 '피 까올리(한국언니, 누나)'를 집으로 모셔가야 하는 특명을 받은 아이들은 이곳에서 오랜시간 대기하기도 하는데.. ▶예쁜 하늘. 그러나 너무 더워서 기력이 쇠했던 기억뿐... ▶내동생 씨빗. 특히 홈스테이 초기에는 내가 어딜가나 뭘 하나 꼭 따라다녀야만 한다고 해서 나를 눈물흘리게 했던 녀석. 나중에는 나따위 아웃오브안중이긴 했다. ㅋㅋㅋ 저 캐리어식 책가방은 요즘 유행아이템인듯. 그야말로 '잇백'인 셈. ▶우리집에 놀러온 아이들. 재밌는건 내가 태국말을 잘 못하니까 아이들에게 애취급 당한다는 거다. 언어구사수준으로 레벨이정해 졌으니.. 아직 저렙이지만 언제나 만렙을 이상으로 하고있다. 어쨌든 나의 부족한 실력이나마 향상시켜준 원어민 선생님들인 셈. ▶이것은 비밀컷! 울 학교 교장쌤의 달콤한 낮잠 도촬 ㅋㅋㅋ 우리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셨던 얼리어답터 교장쌤! 물론 이렇게 주무시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며 대부분은 눈썹 휘날리시며 일하느라 바쁘시다. 하루종일 학교에 있어서 못 뵙는 경우도 있고잉. ▶우리 외증조할머니! 엄마의 엄마의 엄마다. 실제 연세로는 나의 할머니정도. 다들 일찍 결혼해서 일찍 아이를 낳으시는 바람에 외할머니의 연세가 한국엄마의 연세와 비슷했다는.. 외증조할머니께서 지금 하고 계신것은 대나무로 직물짜기(?). 이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것으로 모자를 만든다. 나름 손재주가 있다고 자만했건만 이 엮기를 배우는데 외증조할머니 애를 꽤 먹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인! ㅋㅋㅋㅋ ▶외증조 할머니께서 만드신 대나무줄기(?)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씨빗. 지금 씨빗이 쓰고 있는 모자같은것을 만든다. ▶ 외삼촌할아버지. 아까 외증조할머니께서 엮으신 것을 실로 밖아 모자를 만드신다. 2차원에서 3차원으로 변화하는 모습. 신기하다. ▶토요일 밤에 서는 싼캄팽 스트리트 마켓. 현지인들이 즐겨찾는 명소 중 하나. 매주 다양한 물건들이 착한 가격으로 선을 보인다. 현지 사장님들 역시 흔쾌히 깎아주시는 그야말로 매력만점 놀이터. ▶일한다.. 좌맥주 우마우스(혹은 키보드)로 일하는 모습. 대략 이정도. 사실 5월은 홈스테이 적응하느라 개인적으로 힘겨웠던 시기이기도 하다. 가족 외의 사람들과 살아본 경험이 없던 나로서는 말도 잘 안통하는 이들과 한집에 산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 이기도 했을 뿐더러.. 사생활(?)에 대한 문화차가 엄청난 폭풍으로 다가왔었기 때문에. 방문을 노크없이 열고 들어온다던가 창문에 커튼이 없어서 밖에서 다 보인다던가 하는 아주 사소한것들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한계를 슬슬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물론 현지 YMCA스탭들과 가족들의 도움으로 많은 부분 개선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게 맞춰주시려고 정말 많은 분들이 노력하신거지. 지독한 개인주의의 노예로 살아오던 내가 해방되는 순간일수도 있었을 게다. 그러나.. 까놓고 얘기하자면 그때의 난 돌아버릴것 같이 힘들기도 했다. '알을 깬다는게 이런거구나'라는 수준에도 이르지 못할 정도로...(의식이 희미해지고 있었던거 같다;; 덕분에 팀원들에게 보이지 않아도 좋을 모습까지 보이기도 했다. 미안..-_-*) 어쨌거나 이것이 홈스테이 시작의 단상.
# 2. 6월 5일 ~ 6월 12일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여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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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6월 5일 ~ 6월 12일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여행길. 9일 새벽 바기오를 떠난 우리는 북으로 북으로 향했다. ‘culture trip’의 컨셉에 가장 맞는 일로코스 지역을 둘러보기 위함이었다. 한 번,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익사할 뻔 했던 나인지라 우리 스탭의 ‘보라카이 예찬론’에도 시큰둥했거늘, 식민지 시절의 흔적이 300년 넘게 보존되어 있는 곳, 400년이 넘은 교회가 있는 곳, 원주민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고 설명 된 북쪽 지역을 여행책에서 확인하는 순간, 바로 여기라며 내 돈을 털어서라도 가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정말 내 돈을 털게 되었다.-_-;;;;;;;; 그럴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했다. 계단식 논을 볼 수 있는 바나우에를 못 간건 천추의 한이 되었지만. 바기오에서 비간으로 향할 땐 이미 우리의 여행길이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것이었음을 잊고 있었다. 잘 털렸다는 말도 나오는 마당에 트라우마는 무슨. 그냥 즐기는 거다. 여행의 목적은 여행 그 자체여야 한다. 무언가를 위한 여행은 이미 순수한 설렘을 잃은 것이다. 2. 비간과 라왁, 사라지지 않은 역사의 흔적 9일, 비간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1시. 그렇게 크지 않은 비간이라는 도시는 고풍스러움이 집약되어 있는 곳이었다. 비간에 있던 메스티조 지역은 여행책자에 의하면, 스페인풍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중국식과 멕시코 식이 혼합된 양식의 옛스러운 집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 보수가 된 모습들이긴 하지만 300년 넘게 보존되어 있는 그 거리는 뭔가, 세상의 모든 행, 불행을 다 겪은 노인의 얼굴 같았다. 수많은 전쟁이 있었던 필리핀에서 거의 유일하게 폭격을 피했던 곳, 그래서 다 부숴진 벽돌들로 지어진 집들이 거짓말처럼 우뚝 서 있는 곳, 또각거리는 마차소리가 그윽한 울림을 반복하는 곳, 비간은 이런 곳이다. 사실 우리가 둘러본 곳은 얼마 되지 않는다. 비간이 어떤 도시라고 얘기하기도 쑥스러울 정도로 잠시 잠깐 머물렀을 뿐이다. 요 것이 이번 여행에서 땅을 치고 아쉬워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 날 하룻밤을 묵은 곳은 비간에서 30분 가량 떨어져 있는 라왁이라는 도시이다. 라왁 은 ‘일로코스 노르테(필리핀 최북단에 있는 주)’에 속한 지역으로 비간보다는 조금 더 ‘기록화 된 역사’를 감상할 수 있었다. 이렇게 느낀 이유는 사실, 비간에 있는 박물관이나 갤러리 같은 곳을 가지 못했기 때문도 있겠지만 라왁에는 ‘마르코스’의 흔적이 살아 숨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코스는 1965년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989년 망명 도중 사망할 때까지 필리핀을 통치한 인물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어떤 전 대통령처럼 긍, 부정적인 평가를 모두 받고 있는 독재자이자 번영의 구세주이자 전설이다. 라왁 씨티는 그의 고향이기도 하고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곳이었다. 저녁이 되기 전 마르코스 박물관에 들렀을 때 우리는 역사적 인물의 실제 시신을 보게 되었다. 곧 망자의 혼이 튀어나올 듯한 시꺼먼 방에 유리와 온갖 꽃에 둘러싸여 있던 그. 한 때는 대통령이었고, 사치 심한 미스 마닐라 출신 미녀의 남편이었고, 또 한 때는 망명자였던 꽤 거창한 삶을 산 사람이 지금은 방부제와 에어컨 바람에 의해 겨우 그 색을 유지하고 있는 시체가 되어 누워있는 것이다. 죽으면 아무것도 아닐 것을. 쯧. 조금, 허망함을 느꼈다. 라왁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밤, 김희곤 단원은 라왁까지 갔으면서 또 졸리비에서 치킨을 시켜댔다. 이러다 알을 낳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쨌든 그가 주문한 스파이시 치킨은 하나도 맵지 않았고 이에 이의 제기를 했다. 그러자.. 종업원은 닭의 살점에다 ‘spicy’’라고 써 있는 깃발을 하나 퐉 꽂아주었다. 허허. 마술의 깃발인가. 꼽기만 하면 치킨이 매워 지는가.. 허허허허-_-^^^ 10일 아침, 우리는 필리핀 북부의 바다를 감상하러 떠났다. 바다는 언제나 그렇듯 맑고 투명하고 푸르렀다. 차를 타고 조금만 달려도 바다가 지천으로 있는 필리핀에서 그닥 새로울 풍경은 아니었지만 신기하게도 바다를 볼 때마다 마음이 차분해진다. 여행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동반자임을 심히 확인시켜 준 다툼이 있었는데 아직 그것들이 가시지 않아 나는 분노에 차 있을 때 였다. 그러나 뭐 금방…. 바다와 풍차와 등대 같은 이름만 들어도 산뜻한 피조물들을 보고 나니 조금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자연의 힘은 위대하기 이를 데 없다. 이후엔 또 다시 마르코스와 그의 가족이 20년간 살았다던 사저를 둘러보고 400년 넘게 보존되어 있는 파오아이 성당을 보았다. 종교에 관련해선 지식이 전무한 나라, 뭐 그 성당을 보고 한 생각이라고는.. 한 자리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인간의 추태를 지켜봐야만 했던 그 성당이 참 불운하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신에게 내리는 가장 큰 형벌은 인간과의 결혼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 죽음을 맞을 수 밖에 없는데 신은 불멸의 존재이니 그저 사랑하는 이들의 부재를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왜 그 성당을 보고 문득 그 신화가 떠올랐는지.. 어쨌든, 난 그 곳이 좀 안쓰러웠다. 라왁에서의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비간으로 돌아갔다. 덜 본 듯한 미미함에 견딜 수 없어 없는 시간을 쪼개서 발걸음을 돌린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빡빡했지만 그 아련한 느낌을 지속할 수는 있었다. 다시 보니 300년 넘은 건물 양식 따라 만든 초현대식 레스토랑이 눈에 걸렸다. 마치 한글로 정갈하게 ‘스타벅스’라고 써 놓은 것과 같이 뭔가 어긋난 느낌이랄까. 그 유명한 ‘맥도널드’도 메스티조 지역의 건물 양식으로 지어졌고 사람들은 그 거리 입구에 있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팬피자를 즐기고 있었다. 에잇, 좀 그렇다. 어쨌든 우리도 저녁을 체인점에서 먹긴 했다. 김희곤 단원은 또, 또 졸리비에 가고-_- 마닐라에서 또 하룻밤을 보내고 12일에 레가스피로 돌아오던 길, 북쪽으로의 여행길을 돌아보며 역사를 훔쳐보는 것은 사뭇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언젠가 ‘훔쳐봄’을 당할 수 있는 역사적 인물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다들 돌을 던질텐가. 후훗. 쥐도새도 모르게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싶다면 어디 던져보시지. 괜찮은 여행을 했다. 물론 유쾌하지 않은 기억도 있다만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신비한 곳을 많이 다녀왔다. 모든 것이 여행의 추억이겠거니 싶다. 희.노.애.락이 다 있었다. ‘애’는 어디에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여튼. 쿨한 날씨와 녹음이 인상적이었던 바기오, 고풍스러움의 극치 비간, 볼 것 없다고 책에 나왔지만 자연스러운 매력이 눈부셨던 라왁, 이젠 좀 지겨워진 마닐라 호텔ㅋ 명소들을 둘러본 것도 물론 좋았지만 우리끼리 그렇게 미친듯이 웃으며 여행을 했다는 것이 그저 좋았다. 차 안에 압축되어서도 엄청 웃고 풀밭에 갖다 풀어놔도 웃고.. 조증이었다.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오니 할 일이 산더미. 후우, 남은 날들은 점점 줄어드는데 할 일은 늘어나는 이상한 구조다. 괜찮다. 일 하다가 짜증나면 800장이 넘는 우리의 여행 사진을 보고 또 웃어제끼면 된다. 괜찮아 그래 괜찮아!!!!!
상처 주지 않았음 좋겠습니다.ㅠ
99+
저번 송국장님께서 중간평가 오셨을 때 송국장님께서 해주신 말 중에 가장 인상깊게 들었고 내 마음속으로 되뇌었던 말이 "현지분들에게 상처주지 말고 조용히 귀국합시다"였다. 4개월도 지나고 귀국 날짜가 점점 다가오는 이 시점 자꾸 이 말이 되새겨진다 머릿속으로 .오늘 일이 머릿속에 계속 맴돈다.오늘 여느 때나 내가 자주가는 마을에 놀러를 갔다. 이 마을은 아이들,어른들 너무 자연스럽게 놀고 웃음이 많은 동네라고 내 개인적으로 생각을 한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마을 어른들이랑 아이들이랑 함께 배구를 했다. 2시간 정도 함께 했다. 날씨도 흐리고 땅바닥도 진흙투성인데도 마을 사람들과 나는 뭐가 그리 신났는지 미친듯이 배구를 했다. 옷도 벗어버리고 팬티 차림으로 함께 이렇게 논다는 게 너무 즐거웠다. 센터에서는 아이들과 함께 그리고 현지 스텝과 지내는 시간이 많지 현지 마을 어른분들이랑 지내는 시간이 없기에 이런 시간이 나에겐 너무나 즐겁다. 온몸에 문신한 분, 술이 취하신 분, 갑자기 왈가닥 하시는 분 등 다양한 마을 어른분들이 있지만 이런 분들이랑 함께 어울리는 나 자신을 볼 때 "캄보디아 사람 다 됐다. 캄보디아 살아도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한다. 그분들이 나를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오늘 날씨가 흐리고 비가 조금 조금씩 내리더니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폭우가 쏟아져서 구경하시는 분들이 많이 집에 가고 있던 찰나 웃음이 엄청 많으신 어른 분께서 내 소지품과 옷이 들어있는 자전거를 끌고 급히 가시는 거였다. 나는 깜짝 놀래서 큰 소리로 불러서 서라고 말을 했다. 그런데 들었는지 말았는지 계속 가시더니 어느 집에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에 자전거를 대 놓고 계셨다. 나는 괜히 의심하고 놀라서 목소리를 키웠는데 알고보니 마을 어른분은 오히려 내 자전거와 소지품이 비에 젖을까봐 걱정해서 그랬던 것이었다.순간 확 내 자신이 초라했고 그분한테 미안하고 그분한테 괜한 상처를 준 게 아닐까 자꾸 생각이 난다. 머릿속으로는 마을 어른분들이랑 잘 어울리고 있다고 ,나는 이제 캄보디아 사람 다 됐다고 생각하는데 마음속으로는 아직 그 분들에게 어느 정도의 경계를 하고 있는 오늘 내 자신을 바라보았다. 이런 내 자신으로 인해 캄보디아 마을 분, 그분이 상처 받지 않았음 좋겠다. 얼굴은 항상 웃으면서 괜찮다 괜찮다 하지만......이제 남은 3주동안 누구에게나 상처주지 말고 조용히 한국에 가고 싶다. 조심해야겠다. 말년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던가ㅡㅡㅡ
Berita malaysia 8호 입니다 :)
99+
어느덧 7월이 되었네요. berita malaysia 8호가 나왔습니다 . 이번호에는 여자팀원들이 일하고 있는 pre-school소식과 함께 주말여행, 한국수화와 말레이시아 수화, 열대과일 두리안에 대한 소식이 있습니다. 이번호도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다음주에 나올 9호도 기대해주세요 :)
아무데서나 잘 먹고 잘 자는 태국팀: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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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6. 23 태국에 온지 벌써 100일이 지났고,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기 40여일의 시간이 남았다. 이 곳에서 몸에 익숙해지고 배운 것 중에 이동식 생활을 통해 하나가 어디가던지 잘 먹고 잘 씻고 잘 잔다는 것… 베이스캠프인… 이제는 정말 집이라고밖에 생각 안 되는 쌈캉펭 YMCA외에도 정말 여러 곳에서 짧게는 1박2일 길게는 한달 정도의 시간을 숙박을 하였다. 아직 남은 기간 또 이동해서 머물러야 할 곳이 있긴 하지만… 지금까지 태국에서 머물렀던 숙소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1. 쌈캉펭 YMCA (3월 5일~8월4일) 우리의 집!!!! 가장 편한 곳~~ 처음 치앙마이 공항에 내려서 Y스탭들이 우리를 데려다 준 곳은 바로 이곳 쌈캉펭 YMCA이다. 빈 교실에 있는 책상을 싹 치우고 서랍장과 빨래 바구니, 옷걸이와 침대 메트리스, 이불, 베개… 이런 섬세한 배려까지 해주신 우리의 포근하고 아늑한 숙소이다. 태국팀 10명중 여자 8명은 한방에 4명씩 2층 205호와 206호에서 지내고 있고 남자 2명은 3층 한방을 쓰고 있다. 처음 왔을 때는 나는 사다리 타기로 뽑아서 따완(수진), 마리(민영), 꿀랍(자하)과 한방을 썼는데 4월이 되면서 플로이(서현), 퐈(희진), 마리(민영)와 한방을 쓰고 있다. 그 후에는 귀찮아서 그냥 방 안 바꾸고 쭉 살고 있다. 이곳의 음식은 Y 스탭이신 피멈과 피낭이 오셔서 아침 점심 저녁을 해주시고, 1층 부엌에 세탁기도 있어서 빨래도 쉽게 할 수 있다. 샤워시설은 화장실에서 하는데 벌레가 좀 많고 찬물만 나오긴 하지만 이젠 적응해서 샤워하는데 불편함은 없다. 다만 비가 온 날에는 날개 달리고 징그러운 벌레가 화장실 바닥과 세면대를 뒤덮고 있는 건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Day off를 보내고 있고 저녁이 되면 우리팀끼리만 남아서 각자 혼자 시간을 갖기도 하고 함께 보내기도 하면서 지내고 있다. 마음도 몸도 이곳에 오면 가장 편한 쌈캉펭 YMCA~! 정말 우리의 ‘집’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이 좋은 곳이다. 2. 람푼 홈스테이 (3월 16,17일 / 5월 19일~7월3일) 모든 라온아띠 멤버는 5명이 한 팀이 되서 각 나라로 파견되어 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태국팀만 람푼팀, 쌈캉펭 팀(지금은 더이따오 팀이지만) 이렇게 두 팀이 와서 10명이서 함께 생활하고 있다. 태국에서의 대부분의 생활은 10명이서 한팀처럼 같이 생활하고 있지만, 예외적으로 지역에 들어가는 기간에는 따로 지내고 있다. 우리팀인 람푼팀의 경우는 와타캇 스쿨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있고, 더이따오팀은 더이따오 프랭8스쿨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10명 한 명씩 다른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고 있는데, 나의 경우는 람푼팀이기에 람푼에서 생활하고 있다. 3월 중순에 홈스테이를 미리 체험해 보는 기간으로 람푼에서 2박, 더이따오에서 2박을 했었다. 람푼 우리 집에 촘푸랑 같이 2박을 했었는데 그 때는 근처 사는 아이들이 자기집인양 마구 놀러 와서 우리랑 놀아달라고 하고 사람들이랑 말도 통하지 않아서 어떻게 지내야 할지 막막하고 힘들었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고 5월 중순에 홈스테이 들어와서 계속 홈스테이를 하고 있는 현재는 태국에서의 생활이 많이 적응되어서 인지 불편하지 않고 난 오히려 집에 있으면 편하다. 우리 집 가족의 경우는 메(태국어로 엄마), 피웨(언니) , 피겜(삼촌?), 봇(우리애기), 야이(할머니) 이렇게 다섯명이서 살고 있는데 야이와 피겜은 나랑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는다. 보통 메가 밥 먹거나 여러가지 많이 챙겨 주시고, 피웨는 날 볼 때마다 옷이나 신발 같이 이것저것 선물을 많이 주신다. 그리고 우리 집 귀염둥이 봇은 낯가림이 심해서 처음엔 내가 불러도 들은채 만채 하더니 지금은 만나면 신나게 잡기 놀이를 하며 즐겁게 지내고 있다. 내 방은 굉장히 아담한데 큰 침대 메트리스가 방 전체를 차지 하고 있고 조그마한 테이블 하나가 앞에 있다. 그리고 나의 친구 도라에몽 인형도 함께 생활하고 있다. 23년만에 처음으로 혼자만의 방을 갖게 되었고, 방에 있으면 가족들이 부르긴 하지만 피곤하다고 하면 터치를 하지 않기 때문에 누워서 음악 듣거나 일기 쓰거나 편지 쓰거나… 그냥 그렇게 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샤워시설의 경우는 무려 뜨거운 물도 나와서 따땃한 물로 샤워를 하고 있으며, 빨래는 가끔 빨래 통에 넣어놓으면 세탁기에 돌려서 다 마르면 우리 방에 옷걸이에 걸어서 주시는데 언제 빨래를 주실지 몰라서 그냥 맘 편하게 쌈캉펭 YMCA가서 빨고 있다. 5월 중순부터 7월초까지 홈스테이 할 예정이고, 평가회를 빼면 이제 일주일도 홈스테이 기간이 남지 않았다. 주말은 항상 쌈캉펭 Y에 가거나 다른 지역에서 생활을 해서 평일에만 홈스테이를 했었는데, 우리 집 가족들이 정말 좋아서 그리울 것 같다. 남은 기간동안 우리 봇이랑 잘 놀고 메 말씀 잘 듣고 착하게 지내야 겠다. 3. 더이따오 홈스테이 ( 3월 18,19일) 3월 중순에 2박 했었던 더이따오 홈스테이. 난 더이따오 팀의 수은이(모아)와 함께 홈스테이를 했었다. 람푼 지역은 시골 동네에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는 분위기라면 더이따오 지역은 산동네(첩첩 산골은 아님)에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지는 않다. 수은이네 집은 할머니, 할아버지, 쨍이라는 유치원 아가와 지내고 있는데 애기도 귀엽고…(너무 놀아 달라고 하는게 수은이는 힘들다고 하지만)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친절하게 잘 챙겨주셔서 편했던 것 같다. 4. 도인타논 텐트 (4월 1일,2일) 태국에서 가장 높다는 도인타논. 이 곳에서 우리는 유스리더들과 캠핑을 했었다. 산속에서 이렇게 텐트치고 자고, 캠프파이어 한 것은 처음이라서 마냥 신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텐트에 2명이 함께 들어가 잠을 잤는데, 제비 뽑기로 라온아띠 한 명과 태국 유스리더 한 명이 짝이 되어 한 텐트에 들어갔다. 그러나 나는 어찌 된게 박촘푸, 김마리(장민영)..이렇게 콘까올리(한국사람) 셋이서 잠을 자게 됐다. 덕분에 밤새 옆 텐트가 시끄러울 정도로 민영이랑 떠들었지만… 이 곳에서 밥은 Y 스탭분들이 신경 써줘서 맛있게 먹었고, 샤워장은 근처 별장 같은 곳에서 편하게 했었다. 밤하늘을 이불삼고, 잔디밭을 요 삼아 잤던 기분… 밤에 산에서 아래를 내려보면서 느낀 자연을 통해 벅참 감동이 있었던 행복한 도인타논 캠핑이었다. 5. 도인타논 카렌족 마을 (4월 3일) 도인타논 텐트에서 2박을 하고 도인타논에서 살고 있는 카렌족 마을에 가서 1박을 했다. 홈스테이라고 볼 수는 없는 건 마을사람 집 한집을 통채로 빌려서 한집은 여자숙소, 한집은 남자숙소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텐트를 치고 잤다. 밥은 이번에도 Y스탭들이 해주셨다. 샤워는 화장실에서 했는데 화장실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안에 촛불을 키고 했었는데 그리 깨끗하진 않았지만 까올리 쏘까뽁(한국인 더러워)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 난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 그리고 도인타논에서의 잠은 둘 다 침낭에서 잤다.(텐트에서랑 카렌족 마을 집에서 둘다) 사실 침낭에서 잔건 라온아띠 국내 합숙훈련때 양평 가서가 처음이었는데… 이래저래 올해 침낭에서 많이 자게 된 것 같다. 6. Praw 마을 홈스테이 (4월 24일, 25일) 유기농 농산물을 키워 판다는 praw마을. 이 마을에 가서 두 명씩 짝을 지어 홈스테이를 했다. 이번 파트너는 따완(구수진)이었다. 이 마을에서의 기억은 더운 것밖에 없다. 태국은 4월에서 5월초가 건기라 정말 더운데, 이 더위는 살인적이라 한국에서는 느낄 수 없을 정도의 강한 햇볕에 몸이 녹아 내릴 지경이다. 쏭크란이 4월중순에 하는데 왜 그때 송크란을 하는지 알 것 같다. 쏭크란을 하면 신나게 물을 뿌리고 맞다 보면 더위를 잊고 오히려 추울 정도니깐… 홈스테이 기간에 잠시 농산물 수확 및 포장 도와 드리고 새벽시장 열리는 곳 따라가서 장사 조금 도와 드린 정도… 그냥 그럭저럭 이 때부터 홈스테이 및 짐싸기에 달인이 된 것 같다. 7. 치앙라이 Y호텔 (5월 10일 ~ 14일) 지금까지 묵었던 숙소중에 최고급 이었다. 무려 호텔이었으니깐… 오랜만에 누워보는 폭신폭신한 침대 메트리스, 하얀 시트와 이불, 그리고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시설...그리고 맛있는 식사까지!!! 치앙라이에 있었던 기간은 HIV마을 방문, VISA연장하러 미얀마 국경 방문, 댐 만들기 작업등 짧은 기간에 많은걸 경험하고 배운 시간이었고 아무리 힘든 일정 속에서도 숙소가 좋아서 몸과 마음이 편했다. 처음으로 쌈캉펭Y에 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자발적 가난, 자발적 불편함을 겪으러 왔다고 하지만…. 역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편한 것 익숙한 것이 좋은가 보다. 8. 더이따오 프랭8스쿨(6월 5일,6일) ‘Y volunteer for EARTH ‘camp를 하기 위해 유스리더들과 함께 더이따오 프랭8스쿨에 모였다. 프랭8스쿨의 도서관을 정리하고 페인트칠 및 벽화를 그리는 작업이었는데 람푼팀도 더이따오팀과 함께 했다. 오랜만에 간 더이따오였고, 당연히 3월 달에 왔던 홈스테이 집에서 잘 줄 알았는데 유스리더들과 함께 학교 교실에서 자게 됐다. 타이유스리더 아이들과 라온아띠는 다른 교실을 썼는데, 모기장도 쳐 주시고 침낭 속에서 잤다. 이제 침낭이 더 이상 낯설지 않는다. 9. 메홍손 지역 홈스테이 (6월 13일~15일) 원래는 없던 스케쥴 이었는데 우리의 요청과 여러 사람의 의견이 모아져 갑작스럽게 방문하게 된 메홍손. 도인타논에서도 봤었던 카렌족이 사는 마을에 방문하게 됐다. 태어나서 이렇게 길이 험하고, 첩첩 산골은 처음 가봤다. 치앙마이 쌈캉펭 Y에서 메홍손 시내까지 차로 3시간(이 길도 중간에 구불구불해서 편한 길은 아니었다.) 그리고 바퀴가 큰 썽태우를 타고 3시간 정도 가서 도착한 마을. 썽태우 타고 가는 길은 비포장 도로에 구불구불한 산길이라 어떻게 올라가나 싶을 정도로 험하고 멀었다. 이 곳에서도 홈스테이를 했는데, 이번엔 2인 한집이 아닌 one by one 한명 씩 한집에 들어가게 됐다. 나는 찐따나라는 13살짜리 소녀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방 한 개를 빌려줘서 편하게 잘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갔던 숙소 중에 환경은 최악이었다. 물도 빗물을 받아서 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석회가루가 섞여서 뿌연색이었고, 밤에는 불 안 들어 오는 집도 많고 거리에는 가로등이 하나도 없어서 저녁8시만 되면 밖은 달빛만 보일 정도로 깜깜했다. 씻을 때도 우리 집 화장실은 불이 안 들어와서 어둡고 냄새 나는 화장실에서 석회물로 씻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곳 저곳 홈스테이하고, 여기저기에서 자는 거에 단련이 되어서인지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다만 밤이 빨리 찾아와서 다른 곳에 있을 때보다 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지만… 태국에 살지만 태국인이 아닌 소수민족.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 사람들과 닮은 카렌족. 그들은 첩첩 산골에서 계속 살아왔기 때문에 그곳이 편해서 사는 걸까. 아니면 갈 곳이 없어서 계속 그곳에서 머물 수 밖에 없는 걸까. 나의 편견일 수도 있지만, 가진 것이 없어서 웃고 떠들고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이었지만, 이 사람들의 행복이 과연 어떤 색인가 생각해보게 되는 홈스테이 기간이었다. ------------------------------------------------------------ 이렇게 우리는 3달반동안 9곳의 숙소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덕분에 이젠 어디 간다고 하면 짐도 몇 분이면 금방 싸고 자는 것도 씻는 것도 먹는 것도 어디 가서든 적응을 잘 하게 되었다. 7월초에 일주일정도 휴가를 받아서 여행을 가게 됐는데, 아무리 싸고 질 나쁜숙소에 들어가도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끔 내가 태국에 와서 무엇을 배웠나. 얼마나 많이 변했는가를 생각하곤 한다. 그게 무엇이라고는 아직 확실하게 정의 내릴 순 없지만, 이렇게 태국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있고 생활할 수 있는 나와 우리팀원들을 보면 많이 성장하게 적응 한게 아닌가 싶다. 앞으로 남은 한달 반 동안의 태국에서의 기간도 태국을 좀 더 배우고 적응하면서 지내고 싶다.
아픔 속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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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7. 3람푼에서의 생활이 내일이면 작별을 한다. 학교에 오면 ‘피차엠~’ 하면서 나를 부르는 아이들을 보는 것도, 재밌고 친절하신 선생님들을 만나는 것도, 날 항상 보살펴 주시는 호스트패밀리와 함께 지내는 시간도, 우리의 ‘능썽쌈’하면서 펀치를 날렸던 무에타이 도장도, ‘히우카우’(배고파요) 하면서 양쁠라 두부 먹었던 식당도… 그 외 익숙한 람푼의 풍경들이 오늘 마지막 밤을 보내면 내일 다시 쌈캉펭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처음에 이 곳에 왔을 때 막막했었다. 어떻게 아이들을 대해야 할지, 어떻게 가족들을 대해야 할지… 아이들은 우리가 뭐가 좋은지, 피 까올리~(한국인), 혹은 우리의 태국이름을 부르면서 매일 쫓아 다녔다. 우리를 좋아해주고 받아 준 아이들이 예뻤던 것도 잠시… 우리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우리를 점점 지쳐가게 만들었다. 아이들과 노는 대신 우리는 교장실에 앉아서 책을읽고, 다이어리를 쓰고, 컴퓨터를 하고, 편지를 쓰는 등 각자 자기 할일을 하며 학교에서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사실, 태국은 이미 생활 기반이 잘 갖춰져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의 손길이 많이 필요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해외자원봉사의 개념은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고 같이 더러워지고 같이 아파 하는 숭고한 희생정신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태국에서의 자원봉사의 개념은 너무 달랐다. 우리가 주체적으로 활동을 찾기 보다는 YMCA에서 끌고 다니는 데로 따라 다녔고, 갑자기 스케쥴이 바껴도 우리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듣지 못했고, 심지어 자기네들 스타일에 맞추기를 요구하면서 보고서가 튕긴적도 있었다. 스케쥴은 유동적이었고, 여러 마을을 다니면서 잠깐씩 아이들과 만나는 시간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는 체계적으로 프로그램을 짜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보다는 항상 ‘안녕하세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다시 만나요’ 등의 짧은 인삿말들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고, 꼬리잡기, 말전달하기 게임, 나따라해봐요, 개구리송, 곰세마리 등 매일 비슷한 패턴의 수업을 하였다. 그리고 한국인만 보면 ‘땐 노바디~(노바디 춰주세요)’하는 사람들 속에서 작년 노바디 열풍때도 추지 않았던 노바디를 연습해서 사람들앞에서 춤을 췄다. 이 곳 생활을 하다 보면 말도 통하지 않고, 여기서 시키는 일조차 잘하는지 모르겠고, 스스로 무언가 찾아서 이곳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데 찾기 힘들었고, 모든게 다 제대로 되지 않는것 같아서 태국에 왜 왔는지에 대해 괴리감이 심했다. 그러나 태국에서의 생활도 엄연한 자원봉사였다. 며칠전에 중간평가를 하기 위해 송실장님과 인천 Y간사님께서 왔다 가셨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송실장님께 자원봉사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했다. 내가 생각했던 자원봉사는 바로 성과물이 보이는 일은 아니지만, 강요 받는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찾아서 즐거운 마음을 갖고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서로 행복해지는 모습을 서서히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곳에서는 항상 끌려 다녔고, 여기서 시키는 일 외에는 제대로 한 것이 없어서 답답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송실장님은 해외봉사의 경우 그 나라에 따라 자원활동의 내용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하셨다. 태국같이 기반이 잘 갖춰진 나라는 동티모르처럼 아무것도 없는 나라에서 하는 일대신 이 곳 사람들이 노바디를 춰달라고 하면 추는 것이 맞는 거라고 하셨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복지 뿐만 아니라, 중상층을 위한 복지도 필요한 것이고 피비랜내 나는 전쟁터에서 아이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 만이 숭고한 자원봉사가 아니라고 하셨다. 그러나 자원봉사 하면 절대 빈곤,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모습등이 먼저 떠오르는 고정관념을 갖고있는 나로서는 이미 기반이 잘 갖춰저 있는 태국이기 때문에 람푼에 와서도 우리가 과연 필요한 존재일지에 대해 회의감이 많이 들었었다. 처음에 나온 수업 시간표는 우리가 일주일에 8시간정도 아이들과 수업할 수 있는 시간이 할당되어 있었다. 그러나 3주차 쯤 되었을 때, 방콕에서 학교 평가를 오셔서 아이들은 우리들과의 수업대신 시험공부에 더 매진을 해야 했고, 우리들을 일주일에 한번 세 시간 몰아서 하는 수업시간 밖에 받지 못했다. 게다가 그 적은 수업 시간 조차도 매번 변동되는 YMCA 일정 때문에 지역활동 하다가 다른 곳에 갔다가 오면서 취소 되는 경우가 많아 제대로 수업했다고 하는 시간은 다섯손가락도 넘지 못한다. 이래선 우리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냥 시간떼우기 아닌가… 그리고 아이들한테 대체 뭘 가르쳐야 할지 혼란스러웠고 답답했다. 그러다 내가 찾은 해답은 – 정답이라고 는 확신할 수 없지만 – 무언가를 제대로 해야 겠다는 강박관념을 갖기 보다는 이대로 물같이 흘러가는 스케쥴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한달 반정도밖에 안되는 기간에 한국어를 아무리 체계적으로 가르친다 해도 아이들이 얼마나 기억 할 수 있을까? 심지어 난 고등학교때 제2외국어로 2년동안 수업 들었던 중국어도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매일 붙잡고 있는 영어도 잘하지 못한다. 이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체계적으로 가르친다는 것은 내 오만한 생각일 뿐이었다. 먼 한국에서 건너온 우리를 보며 신기하고 반가워 하는 아이들과 웃고 떠들고 뛰어다니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게 더 많은 것을 주는 거라고 깨달았다. 그리고 송실장님이 왔다 가면서 람푼지역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Y에서 왜 람푼과 더이따오를 활동지역으로 선택했는지 생각해 본 사람있냐는 질문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더이따오의 경우는 댐건설을 하면서 원래 있던 마을을 강제로 이주시킨 마을이고 삼모작에서 이모작 혹은 일모작밖에 할 수 없는 지역으로 오게된 마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보상을 해주지 않아 10년전에 농민운동으로 피비랜내 나는 지역이었다고 하였다. 왜 산골 마을에 있는 집들이 새 집 처럼 깔끔하고, 길이 반뜻하게 닦여 있는지 의문을 품지 않았냐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람푼의 경우는 원래 농촌마을이었는데 큰 공단을 들어서면서 갑자기 이주민들이 마을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원주민가 이주민간의 마찰이 생기면서 마을 환경이 급격히 변해 지역사회가 혼란스럽다고 하셨다. 항상 웃고 있고, 우리들에게 항상 호의적이었던 더이따오와 람푼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그런 아픔이 숨어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지역활동을 시작할때쯤 팀내부의 문제, 현지 스탭들과의 마찰, 일에대한 스트레스 등 여러가지가 겹쳐서 하루하루 이겨냈고 아이들에게 웃는 얼굴로 대하기 보다는 피곤하다고 피해버린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에 이 곳에 내가 왜 왔는지 생각하기 보다는 하루하루 버티는것도 힘든 날도 많았다. 한 달 좀 넘는 시간동안 내가 이 곳 람푼에 와타캇 스쿨에서 지낸 게 이들에게 어떤 의미일지는 아직도 잘은 모르겠다. 마을 전체가 알고 있는 깜짝 이벤트 일지도 모른다. 그 깜짝 이벤트가 이들을 즐겁게 했기에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고 싶어 지나친 관심을 표했고 친절을 베풀었다고 생각한다. 그 호의를 감당하기 힘든적도 있었지만 우리의 존재를 무시하고 냉소적으로 바라보지 않은점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겉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혼란한 시간을 겪고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우리의 존재가 즐거움이 되고 희망이 되었길 염치 없이 바랄 뿐이다. 지금까지 람푼지역에서 우리를 받아준 모든 분들께 다시한번 감사의 마을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귀여운 덱덱(아이들), 쿤 크루(선생님), 크럽쿠르아 컹 찬(나의 가족) 모두 보고싶을 것이다. 다시 내가 이 곳에 올 수 있을까? 아니 이곳에 오고 싶어 할까? 확실한건 이 곳을 그리워 하긴 할 것이다. 모두 컵쿤막막카. 싸와디카. 촉디나카. (정말 고마워요 안녕히 계세요, 행운을 빌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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