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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썹의 에세이2) 태국팀 되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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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태국으로 파견된 라온아띠 람푼 팀이다.이화여대 선구,경북대 세미,계명대 수진,영남대 수현,대구가톨릭대의 나, 이렇게 각기다른 학교,학과,성격,사는곳도 제각각인 남자2명,여자3명의 우리 람푼팀이 여기 태국에서의 생활을 한지도 140여 일이 지났다.한국에서의 면접과 국내훈련까지 포함한다면 6개월 정도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이제는 서로의 얼굴이 지겹다며 농담을 하기도 하며 ‘현지인’이라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태국서의 생활이 쉽지 만은 않았다.음식.,물,날씨,언어 ,사람들의 성향까지. 우리 람푼팀 은 올해 여름 8월20일에 출국하여 이제 1월 귀국까지 5개월간의 기간을 두고 활동을 하고 있으며, 귀국까지 일주일의 시간을 남겨두고 있다함께 지내고 있는 ‘프레팀’도 마찬가지이다. 태국팀은 크게 환경과 평화 캠프,HIV보균자 학교캠프와 수업,study trip ,환경과 대체에너지 (람푼 ,프레 )지역 학교수업과 지역 호스트 패밀리 가족과 생활하게 되어있었다 라온아띠 는 YMCA와 국민은행의 파트너십으로 만들어진 조직이었다.한국 YMCA와 태국YMCA 와도 자연히 함께 하다 보니 YMCA라는 조직을 조금씩 알게 되기도 하고 한국과 태국Y와의 관계가 50년 이상의 교류를 통해 끈끈해져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우리는 여기서 태국Y의 도움을 받고 ‘캠프’라는 활동을 가장많이 진행한 것 같다. ‘라온아띠’ 봉사단은 봉사경력이 전무한 사람도 ,해외경험이 전무한사람도,영어를 잘하지 못해도 그런건 문제될게 없었다.실제 ‘영어”만 놓고 봤을때 원어민 수준의 멤버가 있다고는 못하겠다.처음엔 손짓과 발짓과 개개인의 짧은 영어회화가 전부였고 이제는 태국어로 말을 하는데 더 익숙해진 것 같다. 람푼에 머물던 시간들을 떠올려본다. 한국시간으로 아침 7:30분.태국시간으로 새벽 5시30분에 나는 저절로 눈이 떠진다.나와 수현이는 졸린 눈을 비비고 급하게 세수만 한후 5분거리인 학교로 뛰어갔다.단 한명도 빠짐없이 아이들은 아직은 어두컴컴한 새벽에 우리보다 먼저 학교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다음주에 있는 지역 초,중학교 체육대회를 대비해 아이들과 아침마다조깅,달리기연습,축구연습을 하기로 약속 했기 때문이다.갑자기 추워진12월의 태국날씨 덕분에 추위에 떨며 자던 수현이와 나는 우리집 호스패밀리 엄마 ‘미’에게 따뜻한 잠옷도 선물받고 오늘도 이렇게 아이들과 아침운동을 하러 나온것이다.장난끼 많고 피부가 까무잡잡한 태국아이들이 언제나처럼 교문뒤에 숨어서 “짠” 하고 나타나며 우리를 놀래키려 한다.아이들은 추워진 날씨 탓에 낙엽과 나뭇가지로 작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불을쬐며 “ 나우마이?” (춥지않니?)를 연신 묻는다.태국의 겨울날씨는 한국만큼 춥진 않지만 갑자기 떨어진 기온탓에 추위를 많이 느끼는 태국아이들은 저마다 두꺼운 점퍼를 입고 왔다.그래봤자 뛰면 덥다고 냅다 팽개치고 뛰어올거면서 자기는 두꺼운 옷 입어서 춥지않다며 “히죽”웃는 아이들이 귀엽기만 하다.그렇게 아이들과 우리는 아침운동을 시작으로 8:30분에 아침조회, 9시부터 4시까지는 한국어 수업, 오후4시~5시까지 클럽활동을 함께하면 어느새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된다. 이곳은 태국북북 ‘람푼’ 지역의 ‘라오빠꺼이’초등학교이다.전교생(유치원포함)하여 87명에 선생님 8분이 근무하고 계신다. 람푼팀 5명의 주무대 이다. 아이들과의 아침운동후 아침식사를 하고 8:30까지 학교로 향하는 길.채5분도 안되는 거리지만 많은마을주민들이 마주치면 반갑게 아침인사를 건네주신다.“싸와디 캅”(안녕하세요) 이젠 마을사람들이 우리의 얼굴을 모르는 분이 없다.한국에서 왔다고 한마디 더 건네주시고 한번 더 미소지어주는 사람들이 정겹다.학교 정문 앞은 아이들의 등교를 위해 저마다 어머님,아버님 들의 오토바이 엔진소리가 요란하다.교문을 들어서면 아침청소를 하고있는 아이들이 쉽게 눈에 들어온다.인사를 나누면 수줍어 하는 여자아이에서 오늘은 자기반 수업을 들어오라며 손가락으로 자기네 반 숫자를 손가락으로 펼쳐 보이며 묻기도 하는 남자 아이 까지 .. 아침조회 시간은 학생 회장 ‘푸룩’과 ‘또또’가 전교생 앞에서 진행을 하는 목소리로 시작한다.불교국가,국왕을 존경하고 숭배하는 국민답게 학교마다 조회대 앞은 큰 불상이 있으며 국왕의 사진과 국기앞에 태국국가를 부르고 선생님의 훈시로 마무리 된다.조회가 끝나면 우리 5명은 오늘있을 한국어 수업을 위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거나 준비물을 챙긴다.“오늘은 말 안 듣는 ‘요”가 있는 6학년 반이니 효섭 오빠가 집중마크 좀 해주세요”6학년 진행담임 선생님인 수진이가 제일 먼저 나에게 말한다.“저번 시간에 너무 산만해서 동요를 가지고 ‘가나다’노래를 부르니 훨씬 잘 따라하더라구,” 1학년을 맡은 선구도 저학년이다 보니 만만치 않은가 보다.한국어 수업을 하다 보면 여간 어려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언어 라는 것이 처음엔 무작정 외워야 하는 부분도 있기 마련인데 생판 모르는 언어를 ,그것도 초등학생 1학년에서 6학년까지 수준별로 수업을 진행하고 이해시키려니 결코 쉽지 않았다. 이리저리 부딪혀 보니 ㄱ.ㄴ과 ㅏㅑㅓㅕ같은 자모음만 익히고 이해 시키는데 2주가 할애됐다.각 반을 고루 들어가기위해 시간표를 짜보았는데 운동회다 뭐다 빠지는 아이들도 생기는 바람에 우리의 바램대로 온전히 진행되진 않았다.말썽쟁이 녀석들을 조금이라도 관심 가지게 하고 따라오게 하기 위해 갖은 수 를 다 써보기도 했다.그럴 때 마다 지치거나 발음을 자꾸 들려줘야해서 목이 쉬어서 안타까울 때도 있다.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반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자모음과 가,나,다,와 쉬운 받침과 단어는 이해할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한국어 수업과 함께 연말에 있을 ‘학예회’도 준비하고 있다.이날 우리는 아이들과 뮤직비디오,난타,댄스 를 학교수업후에 원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함께 연습하고 있다.당일 별도로 한복입고 부채춤과 다같이 노래도 한곡 부르기로 해서 어떤 노래를 불러야할지 고민되기도 하였다.수업시간에는 말 안 듣던 아이들이 방과후 클럽활동 시간만 되면 그렇게 신나하고 재미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역시 아이들은 아이들인가 보다. 그렇게 한국어 수업을 한지 2주째,학교를 마치고 저녁에 집에서 쉬고 있는데 옆집에사는 2학년 ‘보이’가 공책과 필통을 들고 와서는 대뜸 나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것 이었다. 순간 놀랐다.수업시간에는 산만하고 장난끼 많은 까불이 ‘보이’ 가 제 스스로 찾아 오다니 ,엄마가 강제로 보냈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한번 두 번 오더니 매일 저녁 찾아오기 시작했다.여럿이 있는 한반을 수업하다 1:1로 한국어를 가르쳐주니 훨씬 집중하기 쉬웠고 나도 신이나서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며칠 후 ‘보이’는 고등학생인 누나와 함께 왔고 나와 수현이는 두 명을 1:1로 방과후에 가르쳐 줄 수 있어서 의미 있고 보람된 시간이 되었다.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태국의 대학교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일명 ‘명문대’인 치앙마이 대학교에서 내년부터 한국어 과가 개설된다 한다.중국어 .일본어에 이어 한국어도 배우고 싶은 수요가 크다는 것도 차츰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초등학교가 우리의 주 무대였지만, 우리는 활동영역을 조금 넓혀보기로 했다.인근에 ‘남딥’이란 고등학교의 선생님 한 분을 통해서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 학생의 수를 조사해 달라고 부탁드려서 주말에 2시간씩 수업을 하기로 했다.수는 30명정도에 적지않은 숫자에 너무 많지도 않아서 부담도 적었다.고등학생들이라 이해도 빠르고 곧잘 따라와서 여기서 머무는 기간만 충분하다면 시간을 늘리고 싶었다.처음에 수요를 조사할때 학생들이 우리에게 ‘수업료’로 얼마를 내면 되는지 묻던 기억이 떠오른다.‘공짜’라도 했을때 깜짝 놀라던 표정들이 어찌나 우습던지 잊지 못하겠다.남딥 고등학교 는 한국어를 통해 우리와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이었다. 예전 치앙마이Y로부터 스텝들이 ‘바이오 가스탱크’설치와 그에 필요한 돼지우리 짓기와 가스탱크를 땅에 묻기 위해 ‘라오빠꺼이’학교를 방문했다. ‘바이오가스 탱크 사업’이란 동물의 인분을 재활용한 대체 에너지 자원을 생산하는 사업을 말한다.태국북부 지역의 치앙마이 YMCA는 ‘바이오가스 프로젝트’를 다른 지역에도 실시하는 중이었다.우리도 ‘라온아띠’ 란 이름으로 이에 동참하여 함께 진행하였다.YMCA 에서는 시설자체만을 지원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의 과정을 학교와 마을주민들이 함께 이루고 유지 시킬 수 있게 도와준다.워크샵을 열어 선생님과 아이들 ,마을주민들과 지방정부 관료분을 초대해서 설명회를 하여 이해시키고 그날은 다채로운 행사와 활동으로 인근 지역학교 아이들도 참여하게 된다.환경에 대해 공부할수 있는 체험의 장도 되고 실제 필요한 일감을 도와주기도 한다.바이오 가스탱크 설치가 완료되면 그 밖의 활동으로 태양열을 이용한 ‘쏠라오븐’만들기 를 통해 공해를 일으키지 않는 태양열로도 음식을 조리할수 있다는 걸 몸소 배워볼수 있다.학교에 이 시설이 완료되기까지 지방관료와 학교 선생님 ,마을주민들은 적극적으로 이를 돕는다.교장선생님이신 ‘싸이쑤니’선생님은 아이들을 위한 일에 열정이 크신 분인데, 바이오 가스 사업을 계기로 에너지 교육센터 를 짓기로 결정하시고 YMCA의 도움을 받아 추진중에 있다.그밖에 가정형편이 어렵거나 부모 없이 사는 아이들 집에 후원도 해주시고 친구분들의 성금도 모아서 학교 컴퓨터실도 마련해 주시는 ‘라오빠꺼이’의 멋쟁이 여장부 선생님 이시다.마을주민들도 학교일 이라면 적극적으로 도와 주시는 든든한 후원자이다.오래전부터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 집에 학교를 계속 다닐수 있게 해주시고 그런 모임을 조직하여 자체적으로 운영중에 있어서 우리는 매우 놀랐다.게다가 학교에 행사나 큰 축제가 열리는 날엔 발벗고 도와주시고 참여도 해주신다.그렇게 선생님들과도 좋은 유대관계로 형성되 있었다.실제 한 선생님의 제자들의 아들,딸이 지금도 라오빠꺼이 학교에서 부모님의 스승에게 배우고 있었다. 우리집 호스트패밀리 아버님도 그런 제자 중에 한 분이었다.YMCA 와 학교,마을사람들은 이미 끈끈한 관계로 이어져 있었고 ,우리도 거기에 이어져 관계를 맺어 가는 중 이었다.모두에게 좋은친구로 다가가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팀은 태국에서 YMCA와 함께 환경과 지구온난화 ,평화와 환경를 주제로 캠프를 진행하고 참여하기도 한다. ‘태국은 음식물 쓰레기’ 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음식물은 쓰레기가 아니라는게 그 이유다.실제 내가 생활하는 호스트패밀리 집의 쓰레기통을 보면 일반쓰레기와 음식물쓰레기를 같이 버리고 있다.재활용,분리수거의 단계가 시작 된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다. 환경과 평화를 주제로 치앙라이 지역의 ‘매 러 라이’ 초등학교를 방문했었다. 이 학교가 특이한건 마을주민들과 학교아이들중 15명 정도의 HIV 바이러스 보균자 라는 사실이다.실제 우리도 캠프를 진행하면서 15명의 보균자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만 YMCA를 통해서 전해들었을뿐 그밖의 자세한 사항은 전혀 몰랐다. 아이들은 똑같았다.여전히 잘 웃고 잘 뛰어놀며 HIV바이러스 보균자 라는 사실때문에 우리가 문제되거나 신경쓸건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좋은 친구 사이 였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학교뒤의 숲에 들어가 생태체험 프로그램도 함께 하고 평화를 주제로 협동화 그리기와 지구온난화를 주제로 한 CO2게임도 함께 하였다.학교를 떠나기전 그곳 마을 주민들과 아이들이 ‘GOOD BYE’파티를 열어 주었고 태국전통의식(행운을 빌어주는)을 해주시고 아이들의 공연과 우리의 공연이 어우러져 마을주민들과도 교감할수 있는 자리가 되었다. 이렇듯 5개월 중의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수없이 많은 캠프를 통한 아이들과의 교류는 셀수도 없다.현재 람푼지역에서 생활하며 만나 ‘라오빠꺼이 초등학교의 아이들’선생님과 마을주민들.치앙마이 YMCA 분들과 여기서 얼굴을 마주치며 인사하는 수많은 사람들까지 ,내가 여기 오지 못했다면 만나지도 관계맺지도 소통하지도 못했을것 이란걸 떠올리면 현재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많은걸 주지 못해도 ‘친구’로서 우리는 얼마나 좋은 인연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이런 시간들이 있기까지 처음 ‘해외자원봉사’를 지원하면서 품었던 마음,더 넓은 세상에서의 나를 느끼고 싶고 ‘자원봉사’가 아닌 ‘자원활동’을 통해 내 자신도 분명 성장할거라 믿었고 다른 어려운 이에게도 작은 보탬이 되고 싶었다고, 그래서 지원하였었다.면접과 한달여간의 YMCA 에서의 국내훈련을 마치고 지금 여기서 함께하기까지 쉬운일은 아무것도 없었다.한달여간의 국내훈련을 할때는 최종모인 50명이 합숙을 하며 짜여진 프로그램 안에서 ‘봉사를 왜 가는지’?, ‘우리가 할일이 무엇인지’,’마음가짐은 어떻게 해야하는지’,팀원들간의 생활을 통해 서로의 성향도 파악하고 작은문제라도 고민을 품고 토론을 하는법 등을 배우게 되었다. 기존의 내가 생각하는 ‘자원봉사’든지 ‘해외봉사’에 대해 잘못 품고 있던 생각들이 깨지기도 했으며 수많은 국제활동가 분들의 생생한 강의도 들을수 있었다.나와 비슷한 또래의 생각들도 함께 공유할수 있어서 값진 시간들 이었다.또한 5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가지고 있으며 단기 봉사도 아닌 장기도 아닌 중,장기의 성향을 갖고, 단순히 지어주고 퍼주고 도와주는것도 아니었다.그렇다고 교육봉사도 아니었다.‘라온아띠’란 이름답게 좋은 친구처럼 그 지역의 사람들과 소통하고 교감하여 ‘다름’을 만나러 가는 자원활동이었다. 아시아의 연대를 지향한 자원활동 이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고민하기도 하고 국가와 국가가 아닌 지역과 지역사회의 만남을 이루어서 ‘어떻게 하면 영속적으로 이어지게 할수 있을까?’ ,’한국에서 어떻게 풀어낼수 있을까?’,’여기와 우리의 관계를 어떻게 지속시킬수 있을까? 를 고민하게 해주는 자원활동 이었다. 또한 태국은 그렇게 물질적 사회적으로 헐벗고 굶주리고 헐벗은 나라도 아니었다.물론 시골지역으로 가면 없진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을게 없어서 혹은 살아가기 힘들어 의,식,주 를 해결못할 정도는 아니다.흔히들 봉사활동이라 하면, 더더욱 해외봉사활동이라 하면 그런것들을 상상하기 마련이다. ‘나는 도우러 왔다’라고 잘못 생각할수 있다.잘먹고 잘사는데 왜 봉사활동을 왔을까? 람푼팀 은 여기 시골초등학교에 들어와서 ‘한국어’하나를 가지고 아이들과 교감하기 위해 수업을 진행하엿다.한국어를 가르쳐서 아이들의 진로에 보탬을 바라는것도 아니고 단순히 한국문화를 알려주고 전해주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다.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연대를 맺는 다는 건 문화수출이 아니라고 한다.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겸손한 걸로 나누고 교감하기 위해서 ‘한국어’라는 작은 통로를 이용했을 뿐이다.작게는 진솔한 만남을 이루기 위해서 크게는 아시아 연대를 이루는 지속적인 관계유지를 위해 ,태국과 한국이 아닌 사람과사람의 관계로 교감하고 소통하고 싶어서 우리는 여기 온 것이고 여기 있는 것이다. 나는 남은시간도 이들과 함께하는 ‘좋은친구’로 항상 머물고 싶다.아마도 우리팀 모두의 바램일 것이다.여기서의 인연들이 다른 방식으로 이어지길 바라며 , 서로의 관계와 만남이 계속 되길 바래본다..
episode 14 . 그리고 1/5 과 1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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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과 큰 관련은 없지만, 1월 3일 우리에게도 두 분의 간사님이 방문하셨다.자랑하려고.]1. 1월 4일부터 1월 10일. 여행을 다녀왔다. 우리는 일주일의 휴가를 베트남 와이에게 제안했고, 각자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고 이야기 했다. 따로 갈 수도 있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이야기 했는데, 의외로 베트남 와이는 의연하게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도와주었다. 갈등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조금은 어려운 시기를 지났다. 갈등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아마 각자 조금은 불편하고 부자유스러운 시기가 있었다. 다섯명이 함께 지내는 5개월에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우리는 아직 내공이 부족해서 갈등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이것을 자유 여행이라고 불렀는데, 아마 그것은 굉장히 1박 2일 탓이라고 생각한다. 자유여행일 수도 있고, 마무리 여행일 수도 있고, 여행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그 무궁무진한 긍정적 측면을 생각해 본다면, 그냥 여행이라고 불러도 충분할 것 같다. 어쨌든 우리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고, 계속 다섯이 같이 있었다. 1월 쯤에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베트남에서의 욕심이 부딪힐 때가 되었다. 게다가 아주 자연스럽게도 1월의 우리의 스케쥴은 우리의 몫이었기에, 부딪힐 수도 있었다. 고백하지만, 이렇게 따로 떠나는 여행에 가장 부정적인 것은 나였는지도 모른다. 안전과 같은 문제는 둘째 문제였고, 뭔가 다섯이 함께 하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던 나의 기대와 욕심이 첫째 이유였던 것 같다. 그래서 위와 같은 생각을 겪었다. 150일 중의 7일이라면 혼자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의미 있을 수 있겠다고 나를 설득했다. 다섯이 7일간 충분히 충전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좋은 여행이잖아,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건 정당화라기 보다는 아주 자연스러운 연습의 과정이라고 지금은 진심으로 이 기회에 고마워 하고 있다. 하노이로, 냐짱으로, 메콩으로, 앙코르와트로. 잘 다녀왔다. 모두 그런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고 출발했지만, 다들 5개월을 정리하고, 충전했다. 역시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2. 1월 11일부터 1월 20일. "만나는 사람, YMCA 사람들, 자전거를 고쳐준 오토바이 수리집의 청년들, 수연이가 교통사고를 낸 구멍가게 아줌마들, 호텔 주인가족. 그들의 친절만으로도 열심히 해야 겠다고 불탔다. (2008년 8월 21일의 일기)" "고마움을 잘 표현하는 연습을 해야하는 시기가 되었다. 고마움의 마음은 그 때 그 때의 감정에 충실하게 충분히 표현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내 애정이 담긴 물건은 언제라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줄 준비가 되어있다. (유치원에서의 작별을 준비하던 2008년 11월 27일의 일기)" 5개월의 생활 중 제일 많이 했던 생각은 우리는 정말 많이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장애인 클럽에서도 유치원에서도 우리는 늘 도움을 받았다. 어디에서도 우리가 가장 빨리 지치고, 자주 아펐다. 그것이 자괴감(자신이 괴로운 감정)이 될 때도 있었다. 우리가 도와주고, 우리가 없으면 안되고, 우리가 주체적인 상황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호의와 친절을 그대로 잘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멋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고마움을 있는 그대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받은 고마움으로 따뜻함이 넘쳐 나는 사람이 되서 나도 그런 호의와 친절을 어디서나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되겠구나. 꼭 Give and Take 가 아니어도 되는거겠구나. 이제 정말 그 고마움을 있는 그대로 충분히 표현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나는 지금 이 시간들이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헤어질 때의 따뜻함, 약속이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오늘은 희망 직업학교를 다녀왔다. 우리가 베트남어를 처음 공부하던 9월에 우리는 그 곳에서 학생들과 대화를 하면서 연습을 했었다. 레포트를 쓰던 12월에 우리는 그곳의 학생들로부터 설문지를 받고 선생님들과 인터뷰를 했다. 이런 인연이 있는 곳인데, 사실 제일 겁났다. 우리가 방문하기로 한 기관들 중에 제일 우리와 안 친한 기관이었다. 그 이상의 친분이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이 위대한 것은 역시, 우리는 여기서 따뜻함을 충분히 받아왔다. 사실 교실로 들어가서 학생들과 작별인사를 하는 시간에는 무척 부끄러웠지만,(9월달과 학생들이 바뀌어 있어서, 처음 봤는데 작별했다.) 그래도 그런 시간을 마련해주던 선생님들과 그 선생님들과의 식사, 커피, 그리고 차 선물. (우리가 선생님들이 끓여준 차에 대해 관심을 표했더니, 경비 할아버지께서 오토바이를 타고 나가서 사와주셨다. ) 이 모든 것이 따뜻해서 소중했다. 메일 주소를 교환했다. 선생님이 언젠가 다시 베트남에 와서 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쳐줄 수 있겠니 하고 물어서 우리는 돈이 없어서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헤어질 때 선생님이 한국 가면 공부 열심히 하고 돈 잘 벌어서 다시 베트남 오면 희망 직업학교에도 오라고 하셨다. 물론 메일을 교환하고, 그런 인사말들이 실제로 어떻게 될지는 늘 모르는 문제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역시 모르는 문제이다. 그래도 늘 그 순간은 참 소중하다. 설령 그것이 미래에는 빈말이 되더라도 지금은 그렇게도 참 소중한 순간들이다. 내일은 장애인 클럽, 그 다음날은 유치원, 그 다음날은 봉제학원이다.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만날까 고민한다. 오늘은 장애인 클럽에 줄 편지를 썼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표현은 "정말 고맙습니다." 라는 것이 아쉽다. "정말"을 아주 강조하는 것이 그나마 좀 더 적극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이것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온 얼굴로 모든 몸짓으로 이 고마움을 충분히 표현하는 연습을 해야 겠다. 3. 1월 20일부터. 억지로 어떻게 이어져야 하는가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5개월의 생활 중에 우리에게 붙은 실력이 개개인의 생활공간에서 발휘될 수도 있고, 여기와 관련된 일감을 계획할 수도 있고, 사람을 모을 수도 있겠다. 확실한 것은 이제 베트남은 내게 미국이나 프랑스 등의 나라를 주변에서 들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을 주는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고, 베트남 사람을 만난다면 이것 역시 미국 사람이나 프랑스 사람을 만났을 때와는 다른 감흥을 주는 만남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시작하고, 제안하고, 가능한 범위에서 도전도 하고. 난 충분히 이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에세이 11. 바기오를떠나서_ 마닐라 4박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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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 1:00 버스로 바기오와 '안녕' 하였다.고작 5일인데 짐을 바리바리 꾸리고, 버스를 타고, 잘 가라는 꾸야의 말에 - 바기오를 영영 떠나는 것만 같다.이런 느낌이 겠구나 연습이라면 연습이겠지. 바기오와 떨어져있기.크리스마스에 새해까지 홀리데이가 꽤나 길어서 우린 점점 추워지는 바기오를 벗어나기로 했다.처음에는 감히 . 세부나 보라카이를 꿈꾸었지만 비행기는 이미 매진된지 오래 _ 버스로 이동할수 있는 곳을 찾아야 했다.한울이와 혜성이가 정보를 열심히 모아모아, 다시 짠 루트는마닐라 - 마카티 - 보니또 아일랜드.마닐라는 우리가 처음 머물렀던 곳이였지만 제대로 돌아보지 못해서 다시 가보는것도 괜찮을것 같았다.니은언니 말대로 에어콘 버스는 그 장점을 자랑하느라 주구장창 에어콘을 가동하였다에어콘을 꺼주면 안되겠냐고 물어봤지만 관리자분께서는 친절하게도"다음에는 남자친구를 데려와서 껴앉고 계세요" 라고 말해주셨다.a추위에 밤잠을 설치며 도착한 마닐라.습습하고 끈적이는 공기 .아 마닐라는 이랬지.터미널에서 내리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팁 맨 - 들이 달려든다택시를 잡아준다며 짐을 옮겨준다며 원치않는 호의를 베풀고는 돈을 달라고한다. 그 광경이 무섭기까지 했다 .처음 이곳에 발을 내딛는 사람들의 기분은 어떨지 . 기분이 찹잡해진다.우리가 처음으로 머문 숙소는 마닐라Y였다.체크인이 2시부터여서 일단 졸리비에서 아침을 먹었다마닐라의 졸리비에서 모두가 내린 평가는"바기오가 팬케잌도 훨씬 맛잇군"팬케잌 하나에도 우리는 바기오가 좋았다.처음 머물던 곳에 있으니 이런저런 생각도 나고 '그땐 그랬었는데 - '라며 시간의 흐름을 실감한다.마닐라는 중심지. 따뜻한기후와 많은 쇼핑몰이 있다.마카티는 강남 삘- 화려했다.그곳에서 사람들과 카운트 다운을 외치며 2009년을 맞이했다.이곳은 빈부의 격차가 크다는걸 재확인 했고.보니또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바다를 가진 매력적인 섬.오랜만에 벗어난 바기오였고, 여행이여서 _나중에 느낀점이지만 그 유명하고 사람많은 세부나 보라카이가 아니라서 _ 더 좋았다. (특히 나는 한참 여행에 목말라 있었기에 .)여행 내내 큰 빌딩, 버스, 평평한 도로가 어색했다.강원도탄광에서 강남으로 상경했다는 언니의 표현이 딱 맞다알고보니 . 다르다 !몇개월 전에는 어색했던 마닐라 , 바기오였지만 필리핀에서 지낸 시간동안 우리는 많이 변했다. 바기오에 있다보니 정말 '마닐라'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이건 비슷하네- 이건다르구나 하는 안목도 생기고. 한편으로는 이제는 익숙해진 따갈로그어를 간간히 사용해 주면서,마닐라를 바기오마냥 돌아다니는 우리의 모습에 '많이 컸다' 라는 생각이 든다.한 나라를 이해하는데 정해진 시간은 없겠지만 우리는 5개월동안 많이 익숙해 졌다.한국에 돌아가서도 "언니"라는 말대신 "아떼" 라는 말이 불쑥 튀어 나올것 같다.이제 마무리와 다시 바기오와 '안녕'하는 일만이 남았구나.벌써부터 필리핀이, 바기오가 그리워진다.
뉴스클리핑 10. Merry Christmas in Philipp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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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서..필리핀, 카톨릭신자가 인구의 85%이상을 차지하는 국가답게 "Jesus Christ"가 매우 중요시되는 나라이다. 난.. 카톨릭신자인데(긴 휴식기간을 갖고 있긴 하지만..)이런 내게도 꽤 어색했던 점은 처음 필리핀에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만나왔던 사람들이 빠지지 않고 물어보았던 질문! 바로 "종교가 무엇입니까?"이다. (이때, 난 대답을 하긴 하지만.. 좀 민망하다...;)어쨌든, 필리피노들에게 종교가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건 명백한 사실이다.그래서 그와 관련하여 필리핀의 크리스마스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내가 지내는 Baguio에서는 10월 중순부터 몇몇 상점이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 다른 지역도 그럴 것이라 예상한다.) 그로부터 한 달정도가 지난 11월부터는 본격적으로 대부분의 상점들과 거리가 빨간색, 초록색이 조화를 이룬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뽐냈다. Baguio YMCA역시 뒤질세라 색색의 등과 장식을 외부, 내부 모두 달았다. 가는 곳곳마다 캐롤이 흘러나왔고, 사람들은 내게 필리핀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를 마음껏 즐기기를 바란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나도 그 분위기에 녹아 한국에 있는 지인들과 라온아띠들을 생각하며 미리 카드를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내용이 필리핀의 크리스마스 모습이었다. 그 이유인 즉슨 우리나라의 크리스마스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기 때문에 알리고 싶었던 것. :D 한국인인 내가 한국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 이틀이 전부였다. 그리고 가족들과 보내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대부분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상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매년 24,25일에는 명동거리가 연인들로 북적거리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하지만, 필리핀은 아주 긴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낸다. 보통 이브인 24일부터 쉬기 시작해 그 다음해 Happy New Year 시즌까지 주~욱 쉰다. 놀랍지 않은가? 여담이지만, 거의 2주를 크리스마스 연휴로 보내니 난 너무 오래동안 쉰다는 생각에 불안하기도 했다. 하하 ;;그리고 대부분의 필리핀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를 가족들과 함께 보낸다. 모두들 고향으로 돌아가 일가친척들이 다 함께 모여서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고 즐거운 시간을 만끽하는 것이다.우리팀원들의 영어선생님, YMCA식구들, 유치원 선생님들 그리고 Bua마을 어머니들도 모두 가족들과 함께 할 생각에 들떠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고 '가족과 함께 하는 크리스마스.. 참 따뜻하겠다'라고 생각했다. +뉴스 클리핑크리스마스와 관련된 다채로운 행사들이 곳곳에서 열렸는데, 그것들에 대한 기사가 뉴스에 실려 공유하고자 한다.1.YEARLY CANTATA바기오 대학교 학생들이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뮤지컬 타블로를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성직자들과 교구민들 그리고 지역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된 이 공연은 2009년 새해를 기념하는 대 성당 축하식때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2.CULTURAL CHRISTMAS TREATKapangan마을의 연장자가 오늘날에는 보기 힘든 고대 크리스마스 시즌 의식을 대중들에게 선보였다. 이 의식은 "Chu-om 만들기"로서 수확시기에만 행해졌다고 한다.3.RE-ENACTMENT크리스마스 이브에 바기오 대성당에서 자정미사가 진행되었는데, 청년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재현함으로써 미사에 의미를 더했다.
[뉴스클리핑] HIV에 감염된 커플 간에도 결혼을 허락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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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내용과 표제와는 별 관련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단 한줄빼고는.. Kuala Lumpur : 말레이시아의 무슬림 커플들은 결혼 전에 의무적으로 HIV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 장관 대리인 Datuk Seri Najib Razak은 HIV 진단 테스트가 무슬림의 결혼 전에 꼭 해야할 부분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 테스트는 최근 증가하고 있는 HIV에 감염된 여성들의 빈도를 줄이기 위한 정부 정책의 일환이라고 하였다. 그는 “내년에, 우리는 모든 주에서 결혼 전에 HIV 스크리닝 테스트를 하도록 의무화할 예정이다.”고 의회의 AIDS 위원회 회의에서 말하였다. 이러한 HIV 진단은 이미 Johor, Kelantan, Negri Sembilan, Sabah, Sarawak, Selangor 주에서 의무화 되어있다. Johor는 2001년부터 처음으로 스크리닝 제도를 도입하였다. 10월에, 말레이시아 이슬람 개발부 부장 Datuk Wan Mohamad Sheikh Abdul Aziz는 결혼을 원하는 무슬림 커플에 대한 의무적인 HIV 테스트에 대해 공표하였다. 그는 HIV 테스트에서 양성이 나온 커플들도 결혼을 허락하기는 할 것이나, 예방 방법에 대한 카운슬링을 받게 하기로 하였다. Najib은 AIDS에 대한 국가적 전략 계획에 의한 프로그램과 노력으로 인해, HIV/AIDS 양성인 사람들이 2003년에 비해 반으로 줄었다고 하였다. 그는 새롭게 HIV/AIDS 양성인 사람들이 2003년에는 6756명이었으나 올해는 3452명이었다고 했다. “우리의 노력으로 인해, HIV/AIDS인 사람들이 2003년에 50% 줄었다는 것이다.” 그는 보건복지부에서 2005년부터 시행중인 위해-감소 프로그램에 대한 소개를 하였다. 그 프로그램에는 AIDS 감염율을 낮추는데 도움이 되는 주사기 교환 프로그램과 메타돈 유지법 프로그램 등이 있다. Najib은 위해-감소 프로그램이 현재 인구 10만명당 12.8명인 HIV/AIDS 환자 수가, 2015년에는 11명이 되도록 정부에 의해 더 확충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Najib은 HIV/AIDS를 막기 위한 국가의 노력이 해외에서 인정받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HIV/AIDS의 United Nation Joint Programme에서 이 질병에 대처하는 데 있어 말레이시아 정부의 의지가 낮았으나, 최근에는 높아졌다고 표현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HIV에 걸린 많은 여성들의 수에 걱정을 나타냈다. 그는 1990년에 HIV에 걸린 여성의 비율이 1.1%였는데 반해, 작년에는 16.3%로 늘어났다고 하였다. “우리는 성공적으로 마약이용자의 HIV 감염을 줄였으나, 성관계에 의한 전파는 늘어나고 있다.” HIV couples will be allowed to marry Kuala Lumpur All Muslim couples in the peninsula will have to undergo mandatory screening for the human immunodeficiency virus (HIV) before they get married. Deputy Prime Minister Datuk Seri Najib Razak said the HIV screening would be a part of the pre-marital course for Muslims. He said the measure was in line with the government's objective to reduce the incidence of HIV infection among women, which was on the rise. "Next year, we will make it mandatory for all states to impose the HIV screening as part of the pre-marital course." he said after chairing a meeting of the cabinet committee on AIDS at Parliament. Such HIV screening is already mandatory in Johor, Kelantan, Negri Sembilan, Sabah, Sarawak and Selangor. Johor was the first to introduce screening in 2001. In October, Department of Islamic Development Malaysia director-general Datuk Wan Mohamad Sheikh Abdul Aziz announced compulsory HIV testing for Muslim couples wanting to get married. Wan Mohamad had said couples who tested positive would be allowed to get married but would be counselled on preventive measures. On the number of HIV/AIDS cases, Najib said it had been halved since 2003 because of concerted efforts and programmes implemented under the National Strategic Plan on AIDS. He said there were 6756 new HIV/AIDS cases in 2003 but the number dropped to 3452 this year. "This means through our efforts, the number of HIV/AIDS cases has been reduced by 50% since 2003." He said the introduction of the harm-reduction programme by the Health Ministry in 2005, which involved a needle and syringe exchange programme and the methadone maintenance treatment programme, helped to bring infections down. Najib said the harm-reduction programme should be expanded and strengthened as the government aimed to reduce HIV/AIDS to 11 cases for every 100000 population by 2015, from the current 12.8 cases. Najib said the country's efforts to tackle HIV/AIDS had received recognition from abroad. He said the United Nation Joint Programme on HIV/AIDS had noted that Malaysia had moved from "low political will" to "high political will" in fighting the disease. However, he expressed his concern over the high number of women infected with HIV. He said in 1990, women only constituted 1.1% of those who had HIV, but the rate shot up to 16.3% last year. "We have successfully reduced the number of cases among drug users but transmission through sexual activities had increased." Reference : New Straits Times
[SUN의 에세이] 라온아띠의 시간을 돌아보며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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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온아띠의 시간을 돌아보며 그리다 나는 라온아띠다. 라온아띠의 정체성에 대해, 우리의 목적에 대해 그동안 끊임없이 고민하고, 열 한시간, 열두시간 동안의 토론 끝에 내린 우리의 결론은 “ 관계 ” 였다. 그리고 라온아띠가 되어 살아온 지난 반년의 시간들을 돌아보았다. 만남 – 소통 – 그리고 관계 – 진보 우리는 모두가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나 혼자보다는 다른 이들과 함께 하고, 서로 나누는 과정들 속에서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그래서 나 자신 만큼 다른 존재도 얼마나 소중한 지에 대해서 깨닫는 지금이 얼마나 행복한 가에 대해서. 우리는 그동안 나 자신만을 바라보고 살아오다가 라온아띠가 됨으로써 나 이외의 무수히 많은 존재들과 만남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 만남이 때론 유쾌했고 때론 불편했으며 때론 아프기도 했다. 5 개월여 동안 수많은 만남과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우린 소통이라는 끈을 사용했으며 소통이 성공적이든 성공적이지 않든 그 끈으로 인해 수많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또한 라온아띠를 통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통이라는 산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갖아 보았고, 삶에 대해 더불어 산다는 것에 대해서 성찰하며 또 다른 삶의 진의를 발견하는 기회도 갖게 되었다. 존재대 존재를 넘어서는 관계 맺기의 순간들을 경험하는 순간은 우리네 삶을 울리는 감동을 주었으며 그를 통해 좀 더 깊은 관계 맺기가 무엇인지, 우리가 함께 함으로써 우리는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함께 성장하고 함께 진보한다. 내 삶 속으로 무수히 많은 존재들이 들어왔다. 라온아띠, YMCA, 태국사회, 치앙마이, 라오빠꺼이, 상캉펜, 왕리안, 치앙라이, ‘우리’ 라는 단어가 이제는 낯설지 않을 만큼 익숙하다. 관계 맺음으로 '나'는 ‘우리’가 되었고, 우리는 함께 서로의 성장을 지켜보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래서 함께 공존하고 함께 사랑하는 지금의 순간들을 경험하고, 그 조각들이 모여가는 지금이 참 행복하다. 개인적으로는 지금의 경험들이 내 삶의 진정 중요한 지점을 발견케 했기에 라온아띠 활동이 종료되더라도 라온아띠로서 정체성을 계속 유지하며 삶의 방향을 만들어가고 싶다. ‘우리’가 되어감을 통해 나를 발견하고 희망을 꿈꾸다. 나는 라온아띠의 삶을 그리는 중이다.
[에세이] 아순시온, 그 열 여덟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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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rth & South 그저께 있었던 YMCA 보드 멤버 미팅에서, 이번에 새롭게 보드 멤버에 당선된 부자 아저씨 한 분이 우리 셋에게 말을 걸어왔다. 대뜸 자기는 North Korea 와 South Korea 를 구별하는 방법을 안다고 했다. 어떻게 하냐 그랬더니 North는 못 먹어서 빼빼 마른 사람이고 South는 잘 먹어서 살이 통통하게 오른 사람이란다. 그러면서 자기의 농담에 반했는지 으하하 웃어 제끼시는데 우린 순간 굳어버렸다. 솔직히 한국의 분단된 현실에 대한 농담, 처음은 아니다. 그렇지만 들을 때마다 상처가 된다. 아마도 저 부자 아저씨는 우리 덩치를 보고 자신의 구별법에 더 확신을 얻은 것 같았다. 그러 길래 이런 험한 꼴 당하기 전에 진작에 다이어트를 했어야 했는데 젠장. 한국에 있을 땐 분단된 현실이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분단이 되어있지만, 선 하나만 제외하고는 여전히 우린 붙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언젠가 통일이 될 거고 지금은 잠시 집안 사정으로 각방 쓴 정도라 생각했으니 북한을 다른 나라라고 생각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 곳의 사람들은 KOREA 라고 말을 하면 당연스레 North or South를 묻는다. 처음엔 너무 당황스러웠다. 마치 우리 집안의 비밀을 들킨 것 같은 기분 -당연히 모두 아는 사실일텐데 왜 그동안 나는 다른 나라 사람들은 모를 거라 생각했을까- 나의 편협한 사고가또 한번 발견되었다. 나는 우리가 남/북한으로 나뉜 사실을 우리와 일본, 중국, 그리고 미국만 알거라고 생각했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저 무식이 죄라는 말밖에는.... 그래서 필리핀 사람들이 이웃집 사정 물어보듯 아무렇지 않게 North or South? 할 때마다, ‘뭐야, 우리 나뉜 거 알고 있었어?’, ‘그냥 korea 라니까 왜 굳이 남, 북을 물어. 알아서 뭐 할껀데.’ 기분이 괜시리 나빠졌다 슬퍼졌다 우울해졌다 하다가 결국 잔뜩 비뚤어진 마음을 담아 “South.” 라고 대답하고 만다. 한국이 왜 분단이 되었을까. 그 원인배경과 과정을 우리보고 말하라고 한다면 고등학교 때 근현대사 시간에 배웠던 교과서적인 이유들을 일어난 순서대로 줄줄 읊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여전히 하나도 모르겠다.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되었는지,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우리가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는건지. 어렷을 때 여름 휴가로 아빠랑 엄마랑-지아는 태어나기 전이니까 아마 내가 일곱살 때 쯤- 광주에서 통일 전망대까지 뽈뽈뽈 차를 몰고 간적이 있다. (아! 생각났다. 그때 지아는 엄마 뱃속에 있었는데 그리고 나서 한달 후에 지아가 태어났다) 아빠는 내가 “우리 어디로 놀러가?” 라는 말에 항상 “ 아빠도 몰라. 바퀴 굴러 가는데로 갈꺼야.” 하시며 웃으셨는데 그때는 정말로 만삭이 된 엄마를 데리고 예고도 없이 바퀴가 굴러갈 수 있는 데까지 가버린 것이다. 푸른 동해바다를 옆에 끼고 달리고 달려서 강릉을 찍고 양양, 속초, 뭐 이런 지명의 곳들을 지났던 것 같다. 그리고 하루 걸려 도착한 통일 전망대에서 망원경으로 불과 몇 안 떨어진 거리에 있는 북한도 보았다. 그리고 한 강당 같은 곳에서 북한과 관련된 영상을 보았는데 사람들이 영상이 끝나자 다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을 부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난 그때 의심스러웠다. 정말? 정말로 우리의 소원이 통일이야? 북한도 그걸 원하긴 한대? 나의 미운 일곱 살 스러운 질문에 엄마는 웃으시며 북한도 통일을 정말로 원한다고, 그렇지만 여러 상황 때문에 잠시 통일을 못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후로 커가면서 북한도 남한도 소원은 통일이라는 것은 알게 되었다. 하지만 정치적 · 군사적으로 보여지는 북한의 모습은 우리의 염원과 점점 멀어져가는 모습 뿐이었다. 잘해주면 튕기고, 못해주면 그대로 등 돌려버리는 북한을 보며 원망도 했고 미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밤새 앞으로 말 한마디도 안 할거라고 중얼거려봤자 자고 나서 아침이 밝으면 금새 마음 풀려버리고 애틋해지는 가족처럼, 딱 그 마음이다. 어제의 뭉쳐진 원망도 오늘이 되면 귤 알갱이 부서지듯 와르르 무너지고 마는, 차마 한낱 글자로는 표현 못 할 형용할 수 없는 우리네의 마음이,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도, 느끼지도, 이해는 더더욱 못할 필리핀 사람의 한낱 시시껄렁한 농담 따먹기에 함부로 사용되어지는 것이 불쾌하다. 항상 KOREA! KOREA! 하던 사람들이 북한 얘기가 나오면 눈을 가늘게 뜨며 슬슬 무시하기 시작하는 데, 그들은 아마도 North를, 그리고 한국의 분단된 현실은 자기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우리보다 잘살면 뭐해 분단되었잖아’ 하는 그들의 표정을 접할때의 심정은 뭐라 말할 수 없다. 무슬림한테 맨날 테러당하는 주제에 누가 누구를 동정한단 말이냐아!!!!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오지만 이미 속상해진 마음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다. 인종 차별도 아니었고, 경제 차별도 아니었다. 단지 분단되었다는, 그 이유 뿐이었다. 이제는 필리핀 사람들이 김정일을 얘기하면서 욕을 하면 그것마저도 기분이 나쁘다. 대치 되어있다고 해서 내가 응, 맞아 맞아! 하면서 맞장구라도 쳐줄줄 알았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흥!! 스페인에게서 식민지를 해방시켜 준 게 미국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영웅 대하듯 하는 자존심 없는 필리핀 보단 북한이 백배 천배 더 나아!!! 눈치 없이 우리 앞에서 끊임없이 나불 나불대는 필리핀 사람들도, 그리고 잔뜩 심사가 꼬여버린 나도 구제불능들 같다. 엉엉. 필리핀 사람들, 아니 중국,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블라블라블라- 기타 모든 나라들에게 우리의 진가를 보여주기 위해 반드시 통일을 이루고 말겠어!! 이미 본래의 인도주의적 의의는 잃어버린 나의 수틀린 이성위에 순간 어느 평화적인, 그리고 너무나도 낭만적인 한 소녀의 이야기가 바람을 타고 내려 앉았다. “ 백석, 정지용, 박태원, 이용학, 김기림 ···· 이 문학가들은 모두 월북하거나 납북되어졌대.고등학교 때 문학시간에 되게 좋아했던 작가들인데... 특히 백석 시인의 ‘여우난 곬족’ 을 좋아했어. 그런데 백석 시인의 시에는 평안도 사투리가 많이 쓰여서 문학 평론가들이 해석하는데 애를 많이 먹는다는 거야. 그리고 정지용 시인은 ···· ” 그래. 나도 고등학교 때 백석 시인 참 좋아했어. 당나귀도 좋아서 ‘응앙응앙’ 울 거라는 표현에 홀딱 반해버렸던 기억이 나. 세상에 ‘응앙응앙’ 이라니. 정말로 조그만 당나귀가 흰 눈밭에서 좋아서 폴짝폴짝 뛸 것만 같잖아. 오죽했으면 필리핀 올 때 영어 이름을 ‘나타샤’ 라고 하려고도 했으니까. 결국은 한낱 열매 이름인 체리가 되어버렸지만. 그리고 교과서 밑에 나온 백석 시인의 조그마한 프로필 사진에도 그대로 뻐렁쳐 버렸어. 인물이 장난 없더라구. 역시, 평양 YMCA 차기 사무총장님은 다르구나.지혜는 원창수 팀장님이 평양 YMCA 사무총장님이 되어서 실세를 잡으시면 팀장님의 오른팔이 되었다가 언젠가 은퇴하시면, 자기가 실권을 잡고 평양 YMCA 사무총장 자리를 꿰차겠다고 했었다. 얼마 전엔 신의주 YMCA 사무총장을 하고 싶다고 해서 도대체 북한 사람들의 일자리를 다 빼앗을 참이냐고 면박을 줬지만 쨌든, 그 이후로 나는 그녀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언젠가 나는 꼭 북한을 위해 일을 하고 있을거야- 라고 항상 입버릇처럼 얘기하던 너의 가치 있는 원대한 포부들이 반드시 현실로 이루어지기를. 분단이 되어있는 북한을 위해, 그리고 하나가 될 한국을 위해, 혹은 이미 하나가 된 이후의 한국을 위해. 언젠가 반짝반짝 빛날 평양 YMCA 사무총장님이 있어서 마음이 참 든든하다. “ 나는 지금 우리에게 어떠한 군사적, 정치적 대립이 있다 해도 불안하지 않아.” 그녀는 말을 이었다. “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우리가 떨어져있는 시간들은...” 음, 그러니까 고조선,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다 합쳐서, “ 5000년 역사 중의 극히 일부분이니까. 먼 미래의 사람들이 한국의 역사를 쓸 땐 지금의 이 시간이 너무나 짧고 순간적이어서 어쩌면 자칫 잊고 빼먹어버릴지도 모를 정도로.”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슬프기도 하지만 또 영광스럽기도 해. “ 우리는 결국 하나가 될꺼야. 언제나 그랬듯이.” 그래. 나도 언젠가 언젠가 다시 떠날 여름 휴가에서는 아빠는 부릉부릉 운전하고 나는 뒷 자리에서 편히 한숨 푸욱 깊게 자고 일어나면 바퀴가 멈춰져있는 마지막 장소가 강릉, 속초, 양양을 훨씬 더 지나 멀리 멀리 나진시의 어느 쯤 이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런 날이 꼭 올거라고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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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 of Malaysia'다양한 인종이 모여 살고 있는 말레이시아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이곳 콸라룸푸르에는 인도, 중국, 말레이계의 세 인종이 주를 이루고 그 외에도 세계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길거리를 다니다 보면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 터번을 쓴 사람, 히잡을 쓴 사람, 나시티에 핫팬츠를 입은 사람 등 정말 다양한 옷차림의 사람들과 마주치게 된다.식당에도 각 나라 음식 코너가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어서 꼭 지구촌 축제의 음식소개 코너에 온 것만 같다. 손으로 난을 커리에 찍어먹는 인도사람 옆에 파스타를 먹고 있는 유럽사람이 있는가 하면 똠얌을 먹고 있는 사람, 대장금의 열풍으로 김치찌개를 먹는 사람, 중국요리나 일본의 스시를 먹고 있는 사람을 모두 볼 수 있다.내가 일하고 있는 KL 차일드케어 센터도 마찬가지다.우리와 똑같이 엄마를 엄마라 부르는 인도계 수수미타, 아침마다 오하요우 하고 인사하는 리틀원숭이 일본계 에이지, 최고 훈남 아일랜드&중국 혼혈 찰리, 배우는 속도도 먹는 속도도 남다른 인도네시아계 끌로위, 너티보이 말고 굿보이 핸섬보이 중국계 션, 차일드 케어 센터 유일의 말레이-말레이시안 지브레일...이렇게 다양한 나라의 아이들이 모인 만큼 언어 또한 다양하다.처음 차일드 케어 센터에 간 날, 페트리샤라는 13살 아이가 와서는 나에게 물었다."Teacher, can you speak malay?"못한다고 대답하니 그럼 무슨 말을 할줄 아냐고 한다."Korean, English and Japanese"페트리샤는 곧 실망스러운 얼굴이 되어 입을 삐죽대며 말한다."선생님 그럼 그렇게 3가지 언어밖에 못하는거에요?"지금까지 한국에서 세 언어만으로도 너무나 편하게 살아왔던 나이기에 페트리샤의 반응은 좀 의아했다.콸라룸푸르에서 보통 일상적인 언어는 영어를 쓰지만, 워낙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살다 보니영어, 말레이어, 중국어, 인도어를 모두 할 줄 아는 사람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여기에 태국,베트남,일본, 한국어 등 다른 언어를 할 줄 알면 최대 7-8 개국어까지 가능하다.나에게 질문을 했던 페트리샤도 어린 나이에 영어와 중국어와 말레이어를 완벽하게 구사했고 지금은 학교에서 인도어를 배우는 중이라 했다. 어린나이에도 이렇게 4개국어를 할 줄 아니 어른인 내가 3개국어밖에 하지 못하는게 신기할 수 밖에.이렇게 어려서부터 여러 언어를 할 줄 알고 다양한 나라의 문화를 접하고 이해하는 말레이시아 아이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많은 문화와 언어로 인해 공감대 형성이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가만히 살펴보고 있자면 중국계아이들은 중국계끼리, 인도계아이들은 인도계끼리 자연스레 그룹이 나뉜다. 아빠가 유명한 인도음악 가수인 '샤샤'는 종종 아빠의 노래를 부르곤 하는데, 인도계 아이들은 박수를 치며 좋아하지만 중국계나 일본계 아이들은 관심이 없어서 딴짓을 하거나 자리를 뜬다. 선생님들께 여쭈어 보니 실제로 다른 인종의 사람들끼리 결혼하는 경우도 극히 드물다고 한다. 아이들이 크면 인도계 아이들은 인도계 학교에, 중국계는 중국계 학교에 입학하면서 생각보다 어우러짐이 적다고. 콸라룸푸르 안에 공존하는 다양한 인종, 언어 그리고 문화의 장단점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반면 단일민족, 한가지 언어를 가진 우리나라는 어떨까? 하는 궁금함이 생긴다.
[발로 그리는 가야니 그림 일기] #6. 하리 라싸나 나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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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양형이도 잘 그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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