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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20] 세계지도 by 양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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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지도 아반이 나에게 물었다. " 브라질이 어디야? " 나는 말했다. " 멍청하냐? " 나는 침대에 누워 멍 때리고 있는 두보오빠에게 가서 물었다. " 오빠 브라질이 어디에요?" 두보오빠는 말했다. " 말세다.. " 이런 제기랄, 바보 멍청이도 아니고 말세라니. 나는 말했다. " 이건 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7차 교육과정의 문제라구요. " 두보오빠는 말했다. " 이런 건 혼자라도 했어야지. " 어이구야.. 잘나셨네요.. 몇일 후 나는 세계 지도를 벽에 붙였고 오늘부터 아반과 나는 심오빠에게 1시간씩 세계지도 특강을 듣는다. 무척이나 재밌다. 이제 남아메리카가 어딘지 아프리카가 어딘지 알 수가 있다. 세계지도를 가슴에 품은 라온아띠 1기가 되어야지.
[에세이-19] 독립기념일에 웃다 by 홍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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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일에 웃다 라온아띠 1기, 동티모르 사메팀 1. 오늘은 2008년 11월 28일 금요일이다. 지금은 오전 8시 27분, 나는 조금 들뜬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특별한 날이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로부터 티모르 레스떼가 독립한 기념일이 바로 오늘인 것이다. 그래서 어젯밤, 오늘을 기념하려는 티모르 사람들은 대단했다. 우리 숙소 바로 앞에 사는 마을의 유지(有志)는 소(牛)를 잡았다. 기쁜 마음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싱싱한 생고기를 우리에게도 가져다주었다. 여담이지만, 안주(양은정)와 나는 그 고기를 아픈 두보 오빠를 위해 힘겹게 구해온 거라고 거짓 영웅담을 지어내 자랑했지만, 거짓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짭쪼롬하게 양념한 소고기를 먹으며 우리는 앞집에다 대고 ‘Obrigada(고맙습니다)!’하고 인사를 했다. 2. 간밤에 ‘기념 의식’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밤새 이어졌다.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 사람들. 함께 가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에 누누(두호오빠)만이 참석했다. 나는 어두운 야외에서 모여 있을 많은 사람들과 취객들이 두려워 숙소에 남아 아르만두, 아띠와 함께 <City of God> 영화를보고 있었다. 누누의 외출은 생각보다 길었다. 총격전이 난무하는 영화를 보면서 나는 조금 걱정을 했던 것 같다. 무사히 돌아올까? 별 일 없겠지? 그리고 별 일 없이 돌아온 누누. 다녀온 이야길 간단하게 들을 수 있었다. 과연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했다. 가브라키 초등학교의 꼬맹이들도 부모님과 함께 그 자릴 찾았다고 했는데, 여자 아이들은 보이지 않고 모두 남자 아이들만 왔더란다. 티모르 전통 술도 한 잔 얻어 마셨다는데, 영 맛이 별로였나 보다. “비추야, 비추!”하며 고갤 흔든다. 마을 청년들도 모두 모인 그 자리, 사람들 소리가 숙소까지 들렸다. 의식 속의 노래와 춤은 디스코텍 같은 시끌벅쩍한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가만히 앉아 듣기에도, 의식이 치러지는 동안 들리는 노래는 노래라기 보다는 주술을 읊는 소리 같기도 하고 염불 소리 같기도 했다. 낮은 소리지만 강하게 공중을 떠돌아다니는 소리가 계속 되었다. 누누 오빠의 설명도 그랬다. 춤 역시 화려한 춤이 아니라, 정말로 경건한 의식을 치르는 약간의 몸놀림 정도가 오랫동안 계속 되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자리에 누워 잠이 들 때까지, 그리고 잠이 든 후에도 그 노래와 춤은 계속되었다. 나는 문득문득 잠에서 깨곤 했는데, 잠이 든 새 꾸었던 꿈과 집 밖에서 들려오는 그 노랫소리가 섞여 묘한 기분이 들었다. 몇 시까지 계속된 걸까. 6시 반, 아침 빵을 사러 나간 아띠(효정이)가 들어와 키득키득 웃으며 말한다. “빵 굽는 아줌마들도 다 밤 새셨나 봐. 다들 눈이 퉁퉁 부어있어.” 3. 전기(電氣). 3일에 한 번씩 완전한 정전의 날이 있고, 나머지 날에는 저녁 6~7시 무렵부터 12시까지만 전기가 들어오는(사정에 따라 약간의 변동이 있다.) 사메에서, 어제는 6시 즈음부터 약 12시간 동안 내내 전기가 들어왔다. 설핏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는데, 화장실이며 사무실 방 안에 환하게 불이 들어와 있었다. 아니, 들어온 게 아니라, 들어온 불이 아직 나가지 않고 있었다. 이미 충전이 완료된 노트북과 카메라는 여전히 코드를 꽂은 채 벽에 달라붙어 있었고, 여전히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말라리아 양성 반응 판정을 받고 무조건적인 휴식 상태에 강제 소환된 두보 오빠는 자다가 깨서 전기가 나가지 않은 걸 보고 ‘아직 자정이 안 됐구나.’ 했단다. 깨고, 깨고, 또 깨도 ‘자정이 되지 않은 상황’이 잠결에 당황스러웠다며, 아침에 일어나서야 상황을 파악했다며 웃었다. 아침 빵을 먹으며 꺼내는 이야기도 모두 이 신기한 ‘12시간 들어온 전기’ 이야기였다. 만약에 우리나라에도 ‘3.1절 전야제’라 해서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이 날을 기뻐하며 음식을 나눠 먹고 노래하고 잔치를 즐긴다면? 그리고, “‘특별한 날’이라고, 오전에도 전기가 들어온다면?” 이라는 대목에서 모두 쓰러졌다. (완전 깜빡했다. 우리나라는 24시간 전기와 만나는 구나.) 아침, 무심결에 충전기를 콘센트에 연결하던 아띠가 ‘아차!(전기 안 들어오지.)’하는 순간, 놀랍게도 전기가 들어왔다. 나는 화장실에 경건하게 앉아 랜턴 불빛으로 책을 보고 있었는데, 화장실에도 불이 들어왔다! 정말로 전기가 들어온 거다! 커다란 오디오를 돌려 노래를 크게 틀었다. 티모르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크게 음악을 틀어놓고는 신나게 듣는다. 녹음을 해서 트는 건지, 매일매일 생방송인지 모를 티모르의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오고, 신나는 티모르 음악도 한 곡 흘러 나왔다. 나는 깜짝 놀라하며, 노트북에 전기 밥을 줘가며, 수필 하나를 쓴다. 오늘은 동티모르의,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 기념일. Loron-bo'ot tebe-tebes(정말정말 큰 기념일)다. *이 날 결국은 오후 4시 반이 되어서야 전기가 나갔다. 그러나 그리고 나서 6시 무렵, 다시 전기가 들어왔다는 사실! 사메가 최고다. 2008. 11. 28 금요일 홍연지(Aban) iamheypk@gmail.com
[에세이-18] 말라리아 첫 타자 기념 에세이 by 양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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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리아 첫 타자 기념 에세이 clear , sat 22 Nov 2008 D - 59 지난 9월초 일주일에 한 알씩 먹던 말라리아 예방약이 내 몸속에서 뒤틀렸다. SAO MIGUEL 학교에서 돌을 나르던 나는 화장실에서 헛구역질을 하고 빈혈이 쏟아지는 말라리아 부작용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날 이후로 효정이와 나는 그 비싼 9만원 돈의 말라리아 약을 접었고 그렇게 말라리아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그로부터 약 2개월이 훨씬 넘는 시간이 지났고 사메 에서의 활동으로 몸이 많이 지쳤다. 그리고 비자연장을 위해 인도네시아를 가야했고 일주일동안의 딜리 휴가가 다가왔다. 우리 팀은 흥분했다. 딜리에서는 답답하지만 인터넷도 할 수 있고 에어컨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세탁기도 있고 깨끗한 물도 있고 자동차도 있고 전기도 있고 고기도 먹을 수가 있다. 우리 팀은 딜리를 가자마자 인터넷 카페를 다녀오고 뷔페에 가서 고기도 실컷 먹었다. 죽었던 몸이 되살아나는 기분 이었다. 다음날부터 딜리의 풍부한 전기를 맛보기 위해 영화 황진이와 크로싱을 연달아 보는 중이었다. 보람언니가 튀겨온 설탕 듬뿍 묻은 빵이 속에서 느끼함으로 가득 찼다. 저녁에 되니 너무나 더부룩해 동티모르에 와서 처음으로 식사를 거르게 되었다. 저녁 시간 나는 온몸이 추웠고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갑자기 쐬어버린 에어컨 바람에 냉방병인줄만 알았다. 동화간사님은 나의 온도를 재더니 " 말라리아네 "라고 하셨고 나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괴로운 밤을 보냈다. 다음날 9명의 단원들은 인도네시아로 갔고 동티모르에 와서 가장 큰 발전을 보인 정현이는 뜨거운 물을 끓여 차를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 고마움을 느낄 새도 없이 아팠다. 나는 침대에 뻗었고 간사님은 클리닉에 가서 말라리아 체크를 해보자고 하셨다. 택시를 타려고 문을 열고 나갈 때 배가 심하게 아파왔다. " 간사님, 클리닉에 화장실 있어요? " " 화장실 가야돼? 그럼 여기 화장실 쓰고 가자 " 그대로 나는 앞이 보이지 않았고 화장실에서 30분 동안 앉아 있었다. 설사로 인해 밑으로 빠지고 헛구역질을 했다. 일어서자마자 1초도 되지 않아 머릿속의 뇌가 흘러내리는 기분이었고 빈혈은 최절정에 달했다. 나는 정말 한걸음도 걸을 힘이 없었다. 그대로 침대로 가 쓰러졌다. 간사님은 현지인 친구를 불렀고 YMCA 숙소 앞으로 '요디'라는 현지인 친구가 트럭을 몰고 왔다. 나는 그 트럭을 타고 클리닉으로 가는 도중에 창문 밖으로 노란 물을 퍽퍽 토해 내었다. 아.. 그 광경이란.. 무슨 트럭에 찌나인지 자판인지 꼬레아인지 모르는 외국인 여자애가 토를 하면서 지나간다.. 그때 수많은 현지인들의 눈빛을 나는 느꼈지만 그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 당장 나는 죽게 생겼으니까. 클리닉에 도착해 나의 짙은 피 몇 방울을 드리고 간사님과 요디는 마트에 금방 갔다 온다며 가버렸다. 나는 검사결과를 기다리기 위해 클리닉 앞 의자를 벽에 붙이고 쓰러져 있었다. 그때였다. 내 앞에 앉아있는 티모르 대학생 정도로 되 보이는 남자 3명이 내 사진을 찍는 것이다. 이런 죽일 놈들 내가 모를 줄 알고 3번씩이나 찍는 것들, 나는 맘 같아선 내 피를 헌혈해 말라리아에 걸리게 하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힘도 없었다. 의사는 나를 불렀다. " 말라리아 로스까? (말라리아 맞나요?) " "로스 (맞습니다) " 그대로 나는 약을 받아서 숙소로 돌아왔다. 하루 동안 아무것도 못 먹은 나를 위해 간사님은 한국에서 가져온 버섯스프와 식빵 두 개를 준비해 주셨다. "이것도 안 먹으면 약 먹고 속 더 뒤집어 진다 " 나는 오랫동안 식빵 두 개와 스프를 먹었고 딱 봐도 거부감이 생기는 말라리아 약 3개를 5분 간격으로 먹었다. 크기도 큰 알약은 내 목에 걸려 덕분에 식빵 한 개를 더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나는 침대로 또 쓰러졌다. 화장실을 몇 번이나 왔다갔다 거렸고 나는 이때의 생각을 말했다. " 간사님.. 제 나이가 한 60됐다면 안락사를 놓아달라고 했을 거예요 .. " 그렇게 생애 첫 말라리아를 만나고 딜리로 올라갔다. 아침이 밝아오기 전에 일은 또 터졌다. 배가 아파서 죽을 것 같은 것이다. 새벽3시50분.. 나는 아반을 깨우러 거실로 나갔다. " 아반.. 나 배가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아 손 좀 따줘 " 아반은 항상 그렇듯 어느 때 깨우더라도 안자고 있던 사람처럼 일어나 나를 간호해 주었고 곧 간사님도 함께 나를 간호해 주셨다. 따뜻한 팩을 배에 붙어주었고 아반은 내 옆에서 잤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나의 상태는 점점 양호해져 갔다. 로뚜뚜를 가는 날, 아직 호전되지 않은 나는 마흔 줄리앙운과 사메집에 남고 딜리팀과 간사님은 딜리로 우리팀은 로뚜뚜로 올라갔다. 처음 혼자 있어 보는 시간 나는 진정으로 무서웠다. 발자국 소리 하나에도 깜짝깜짝 놀랐고 그 첫날 저녁에 전기가 안 들어오는 날이었다면 나는 혀 깨물고 죽었을지도 모른다. 다음날도 그렇게 징그럽게 무서운 날을 보내려고 하는데 누누오빠 목소리가 들린다. 심오빠와 아반과 아띠도 왔다. 동티모르 특성상 수업이 없다는 통보를 받지 못해 고생해서 올라간 그 높은 로뚜뚜에서 "빨리 와" 내 한마디가 생각나 하루먼저 4시간 되는 그 거리를 2시간 만에 내려온 우리 팀.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에세이로 올릴까. 나 아팠다고 투정 부리는 거? 위로 받고 싶은 거? 3개월 동안 라온아띠 1기 단원으로 생활을 하면서 여기저기서 잡음이 들리고 슬픈 소식들이 들려오기도 한다. 나는 여기서 핸드폰 없이도 MP3없이도 internet없이도 전기 없이도 한국음식 없이도 씻을 물 없이도 다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이다. 사람은 사람 없이는 못 산다.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상대방 사람에게 기대어 사는 것 이다. 사람이 없다면 사람은 외로워서 살 수가 없다. 곧 죽을 것이다. '사람은 더불어 살아간다' 이 말이 내 가슴속에 들어와 나에게 깨달음을 주다니.. 국내훈련을 포함한 6개월의 시간이 나에게 도움을 줄지 손해를 줄지는 모르는 상황 이었다.모든 것은 내 자신에게 달려있었다. 지금 3개월이 된 시점에서 아직도 이 5개월 동안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단원들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깨달았다. 사람은 결국 사람으로 끝난다는 거. 나는 어쩌면 죽을 때 까지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 깨달음을 진정으로 깨달아 버린 것 이다. 더군다나 나는 보너스로 아시아 연대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과 실천 경험을 하고 있지 않은가. 거기에다가 제대로 손빨래 하는 법도 배웠다. 여러분 나는 이미 5개월을 성공 했습니다.
[에세이-17] 종교 관용? 동티모르 속 이슬람 by 심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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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관용? 동티모르 속 이슬람 2008년 6월 26일자 Dili Weekly에 관심 가는 기사가 보였다. 이슬람교에 관한 이야기였다. 언뜻 이해가지 않은 부분이었다. 동티모르 인구의 98%가 자신을 가톨릭이라 부른다.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영향이다. 이런 이유로 서쪽으로 인도네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지만, 1975년 인도네시아 침공 이전까지 이슬람과는 동떨어진 땅이었다. 이런 면에 비추어보았을 때 주간지에 한 면을 차지한 기사는 의외였다. 기사에 의하면, 과거 적지 않은 무슬림이 있었다. 하지만 1999년 자치-독립 선거 당시의 사태, 2006년 유혈 사태 등을 거치며 많은 무슬림이 떠나갔다. 떠나간 무슬림은 인도네시아 인이거나 인도네시아를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동티모르인 중에는 사실상 무슬림은 적었다는 것이다. 가톨릭은 동티모르의 어두웠던 시절에 호국 종교와 비슷한 존재였던 듯하다. 이제 남은 무슬림은 1%도 채 되지 않는다. 딜리 Markoni에 모스크가 있지만, 외국인을 위한 면이 많다. 모스크의 상황도 좋지 않다. 창유리 안쪽이 부서져 있고, 천장은 썩어있으며, 바닥 타일은 깨져있다. 딜리의 유일한 모스크는 재정적 기반을 상실한 상태이며 존재 자체가 가장 큰 의미이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는 무슬림에게 학교이며, 집이고, 연대의 장소이다. 또, 불안정한 정국에는 피난의 장소가 된다. 교육 방식은 동티모르의 방식과 현격히 다르다. 동티모르 학교의 경우, 강제적이지는 않지만, '레자'가 조례와 종례에 행해진다. 상세한 교육 내용도 판이하게 다를 것이다. 기사 중 가장 염두 하여 읽은 부분은 종교관용에 관한 부분이다. [ 2006년의 불안한 시기 동안, 딜리에서 몇 십 명이 목숨을 잃었고, 10만 명 이상이 집을 잃었다. 근처의 수 십 채의 오두막집은 불탔지만 모스크는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았다. 모스크의 직원은 어떠한 박해도 받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티모르는 이러한 종교적 관용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Srifulloh는 "우리는 모두 티모르인이다. 우리는 가톨릭과 무슬림 사이에 사실상 차이가 없음의 예시를 세계에 보여주길 원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모스크가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분명 직접적인 침입과 폭력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투석과 같은 간접적인 피해는 받았다. 이러한 점을 차치하면 2006년 사태에 무슬림이 희생자 그룹이 되지 않은 것은 다행할 일이다. 하지만 이를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종교적 관용, '나는 너의 종교를 인정하고, 너는 나의 종교를 인정한다.'라는 명제에 부합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할까. 항상 통계 이면엔 또 다른 현실이 있기 마련이다. 티모르의 98%가 가톨릭이고, 1%가 프로테스탄트, 1%보다 적은 무슬림이 있지만, 이들 사이엔 공통점이 있다. 100%가 전통을 중시한다는 것. 가톨릭 신자라 할지라도 전통을 넘어서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집에 조상을 모신다. 전통은 종교를 뛰어넘어 동티모르인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어쩌면 전통이란 더 강한 종교 아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무슬림이 존재하는 듯하다. 티모르 문화에는 Uma Adat(Spirit House)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마을 어른들을 모시고, 조상을 모신다. 무슬림은 개, 돼지 등을 먹지 않지만 전통은 지킨다. 혹은 집에 조상을 모시는 곳이 있지만 전통적 의례를 행하지는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결코 전통에서 동떨어져 나가진 않는다. 주위의 사람들을 보면, 자신을 가톨릭이라고 부르지만 정작 일요일에 성당을 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오랜 시간 가톨릭 속에서 살아왔던 탓일까. 이곳 사람에게는 신념과 절박함, 혹은 신성함으로써의 종교라기보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지 않을까. 관용을 떠나, 종교로 집단이 나뉜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일 런지도 모른다.
[에세이-16] 알록달록 지구별에서 by 홍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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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록달록 지구별에서 라온아띠 1기, 동티모르 사메팀 1. 내 또래의 친구들이 모두 기억을 하듯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어린이용 크레파스에는 ‘살색’이란 것이 있었다. 사실 굳이 따지고 보면 어릴 때에도 썩 내 피부색이 그 색 같다고 생각하진 않았었는데, 사람을 그릴 때면 으레 그 색깔을 쓰곤 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닳아 없어지는 색 중의 하나가 바로 ‘살색’이었다. 연한 살구 빛이기도 했고, 탁한 연주황 정도의 색이었다. 얼마 전 유색 인종의 인권과 관련된 문제를 근거로 그 ‘살색’이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잘된 일이다. 만화가 박광수 씨의 ‘광수생각’에도 나왔던 것처럼,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피부색이 존재하는데 감히 한낱 크레파스 하나가 ‘살색’이란 이름으로 서 있을 수 있으리오. 2. -말라이 무띤. 동티모르 사람들이 에마 꼬레아(한국 사람)를 보면 하는 소리다. ‘하얀 외국인’이라는 이야기인데,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사람은 황인종에 속한다는 걸 생각해보면 조금은 우스운 소리이긴 하나, 현지에선 일단 말라이 무띤으로 통한다. 호주와 가까워 호주에서 온 ‘백인(白人)’들이 많이 거주하는 동티모르에서, 그 많은 백인들을 두고 왜 우릴 보고 말라이 무띤이라 하는가. 어쩌다 한 번씩 현지 친구들과 서로 피부를 맞대고 피부색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참 재미있다. 길가에 지나가는 백인들을 가리키며, 하얀 사람들은 저 사람이고, 우리는 말라이 끼누르(노란 외국인)라고 이야길 하면, 단번에 아니라고 손을 휘저으며 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시라 말라이 메안!(쟤들은 빨간 외국인이지!)” 본디 하얀 피부의 백인종들이 쉽게 홍조를 띄는 걸 보고 나온 말일 거다. 와하하 웃고 말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말 백인들은 하얀 사람이기도 하지만 빨간 사람이기도 했다. 티모르 사람들이 관찰한 결과, 호주에서 온 백인들, UN 경찰로 근무하는 백인들은 아무래도 빨간 사람이고, 오직 한국 사람들만 하얗더라는 것이 그들의 지론이다. 아무래도 하얀 피부를 더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한국 사람을 크게 칭찬해주는 거니, 백인종이니 황인종이니 인종계에 관한 머리 아픈 이야기는 그만 해야 했다. 현지 사람들은 자신들의 피부색을 꼬르 카페(커피색 피부)라고 한다. 운딜 대학교의 한 친구는 ‘Sexy Chocolate’라며 극찬을 한 바로 그 색이다. 적도를 살짝 비켜간 남반구의 나라, 건기며 우기며 일 년 내내 따가운 태양이 내리쬐는 동티모르에서, 피부색이 커피색을 닮아가는 건 당연한 것이고, 가을과 겨울이라는 휴식기를 거치는 우리의 피부색이 동티모르 사람들보다 조금 덜 ‘섹시 초콜릿’인 건 역시나 당연한 것. 그러나 피부색 이야길 하며 그만큼 자신들의 피부색에 대해 자긍심을 가진 친구를 만난 건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커피 공정 무역: 피스 커피 프로젝트>를 함께 하고 있는 아저씨들과 어쩌다 수다 마당이 시작되면, ‘말라이 무띤’인 내 앞에서 에마 메딴(까만 사람) 아저씨들은 한없이 작아지곤 한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하얀 피부는 좋은 피부, 까맣게 그을린 피부는 나쁜 피부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아저씨들을 아무리 달래고 얼러도, 에마 무띤(하얀 사람)은 ‘그저 최고’라 하는 아저씨들. 그에 대한 나의 색깔론은 훨씬 더 정확하고 객관적이었다. (상대적으로) 하얀 피부를 가진 우리라는 것은 인정하되, 절대 허여멀건한 피부는 아니라는 걸 아띠(효정)의 피부로 설명하고(반례1), 나의 건강하게 탄 구릿빛 피부들(반례2)로 설명을 해도 고갤 절레절레 흔들자, 나는 라.면.을 가져왔다. 현지식 식사에 절대 빠지지 않는 인도네시아산 라면인 ‘슈퍼-미’. 우리나라 라면처럼 기름에 튀긴 인스턴트 면을 가리키며, 나는 정확하게 황인종을 표현할 수 있었다. “아미 에마 꼬르 슈퍼미.(Ami Ema-kor-Super-mi.)” 굳이 나의 뉘앙스와 함께 해석하자면, “우린 라면색 피부를 가진 노리끼리한 사람들이에요.” 정도가 맞지 않을까. 그러자 와하하하, 깔깔깔깔 호탕하게 웃는 아저씨들. 뜨거운 태양 아래 농사도 짓고 집도 짓고 말도 돌보고 소도 돌보며 일을 하는 사람들의 피부가 그을리는 건 나쁜 게 아니라 좋은 것이라고, 사람을 색깔로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가를 수는 없는 거라고, 그런 이야기들을 함께 나눴다. 3. 외국인을 만나면, 우리는 종종(어쩌면 자주) 상대적으로 누구의 피부색이 더 어둡냐 밝으냐를 비교하게 된다. 피부색이 백인에 가까울수록 더 나은 인종이라는 생각은 서구 유럽의 식민지 개척 시기 때부터 흉물처럼 남은 부산물이다. 그러나 나 역시도, 한국에서든 외국에서든 피부 하얀 사람을 만나면 조금 주눅이 드는 건 사실이다. (아반이여, 어깨를 펴라!) 동남아를 ‘관광’하는 한국 사람들을 보면, 체구가 왜소하고 피부가 우리보다 검은 동남아 사람들 앞에서 황제나 왕비라도 되는 냥 한껏 콧대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다. 잔뜩 어깨에 힘을 주고는 우쭐대면서 거만하게 행동하거나, 행동거지를 아무렇게나 해대며 얼토당토않은 우월의식에 젖은 꼴불견들을 자주 보게 된다. 단지, 피부색이 좀 더 백인에 가깝다는 사실 하나로 그렇게 우쭐해질 수 있다는 것이 지금 우리의 자화상이다. 우리의 생각이 크레파스의 색이름을 만들었고, 다시 우리의 생각이 크레파스의 색이름을 바꾸었다. 인간이란 본디 크레파스보다 만 배는 더 복잡다단하고 오묘한 생물인지라, 달깍, 바꾸자 한다고 바꿔지는 것은 아니지만, 피부색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조금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다. 유색인종론에 대한 탁한 오류를 뽑아내자. 빨간 사람, 노란 사람, 하얀 사람, 까만 사람, 파란 사람 모두가 사는 이 좋은 지구별 위에서, 최소한 크레파스보다는 위대하게, 서로 다른 모습에 유쾌해 하며 어우러질 때이다. 홍연지(Aban) iamheypk@gmail.com
[에세이-15] 딜리 팀과 함께한 가브라키 학교 by 배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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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19일 딜리 팀과 함께한 가브라키 학교.. 배효정 중간평가를 위해 사메로 올라온 딜리 팀과 함께 가브라키 학교에서 작은 체육대회를 열기로 하였다. 하지만 운동장이 없는 가브라키 학교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기란 너무나도 힘든 문제였다 우리들이 어렸을 때부터 해오던 그런 거창한 행사는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1·2교시 총 2시간 30분을 진행해야 했었는데 긴 회의를 거쳐 1교시는 작은 놀이 활동 시간. 2교시에는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씩 찍어주고 액자를 만들어서 선물하는 시간을 갖기로... 당일 아침. 학교에 도착해서 뜻밖에도 마지막 수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고... 갑작스런 일이라 당황을 했지만 이왕 마지막 수업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다들 열심히 하기로 했다. 1교시 1시간30분 동안에는 조를 편성해 다치지 않고, 간단히 할 수 있는 줄넘기. 신발 던지기. 풍선 떨어뜨리지 않기. 음악교실을 열어 진행하도록 하였다. 처음 시작하기 전에는 아이들이 관심을 가져줄지.. 재미있어할지 고민을 많이 하였으나 게임 진행하면서 넘어져도.. 신발이 학교 지붕에 올라가버려 집에 돌아갈 때 맨발로 걸어가야 하는 그런 상황에서도 즐거워하는 모습에. 괜한 걱정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부끄러워서 하지 않던 여자아이들은 쉬는 시간에 몰려들어 저희들끼리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2교시 수업시간에는 2교실이 있는데 한 교실에서는 액자를 만들고 또 한 교실에서는 사메팀 5명과 한 명씩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었다. 처음 보는 카메라에 얼마나 신기해하던지 진정시키느라 혼이났다. 사진 찍을 일이 없던 애들에게서는 환한 표정이 나오긴 힘들었는데 역시나 사진을 받고 자기 표정이 마음에 안들어서 삐져있는 아이들도 여럿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사진을 집에 가지고 갈 수 있다는 사실에 다들 들떠있었고. 서로서 자기 사진 자랑 하느라 진정시키는데는 엄청난 어려움이 따라야했다. 그렇게 갑작스런 마지막 시간이 흘러가고.. 열심히 참여해주고 즐겁게 해준 고마운 마음에 연필 한 자루와 지우개를 한명도 빠지지 않고 나누어 주었다. 하루 동안 연필. 지우개. 폴라로이드 사진. 그리고 전 날 미술시간에 만든 비누까지 너무나도 많은 걸 받아서인지 어리둥절한. 또는 어쩔 줄 몰라하는 아이들의 모습속에서 마지막 수업시간을.. 그렇게 마무리 지어야했다.
[에세이-14] 우기 by 심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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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 우기의 시작은 10월 말 즈음이다. 남반구니까 한국과 반대로 절기상 여름이기도 하다. 이즈음부터 바람은 동티모르 북쪽 바다로부터 불어온다. 바람은 물을 한껏 품고 온다. 물을 품고 온 바람은 동티모르 땅과 산을 만나 비구름을 만든다. 건기에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불어온다. 땅으로부터 시작된 바람이라 물을 품지 못한다. 건조한 바람. 이렇게 적도 근처에 있는 동티모르는 우기와 건기로 나뉜다. 내가 도착한 8월부터 9월, 10월은 그야말로 날씨가 한창 좋을 때였다. 덥긴 했지만 습도가 높지 않아 그늘은 시원했다. 항구도시인 딜리에는 항상 바닷바람이 불었다. 따갑게 더웠지만, 땀이 많이 나지 않는 그런 더위였다. 우기 때는 딜리에도 있어보았고, 산에도 있어보았지만 모두 건기보다 더웠다. 산에 있다 딜리에 가면 숨이 턱 막혔다. 산은 비교적 선선했지만 해가 따가울 때 걸을라치면 높은 습도 때문에 땀이 금방 얼굴을 덮었다. 그래도 좋은 점은 있다. 비가 온 후에는 동티모르에서 지냈던 그 어느 때보다 하늘이 맑고 선선했다. 밤하늘의 별은 무서울 치 만하게 빼곡하다. 별이 너무 많아 별자리조차 분간해내기 쉽지 않다. 또 하나 우기가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은 비가 내리는 시간이 일정하다는 것. 아침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 해가 가장 높은 곳을 찍고 내려올 무렵부터 비가 온다. 비가 내릴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 대비할 수 있다. 특히 이 곳 사람들은 기가 차게 잘 맞춘다. 하지만 우기의 비는 순간 하늘이 무너질 만치 내리기 때문에 조심해야하기도 한다. 동티모르로서는 우기를 다스리는 것이 발전과도 직결할 것이다. 올해부터 시작된 대대적인 수로와 도로 공사 성공 여부를 알 수 있는 시기는 아무래도 우기가 지난 다음이 아닐까 싶다. 우기 때면 비 때문에 무너져 내린 바위와 나무로 길이 막히기 십상이다. 땅도 질어져 차로 움직일 땐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산 중턱에서 차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해결할 뚜렷한 방안이 없기 때문이다. 12월이면 우기 한창 때이다. 판초우의 들고 다니기, 하늘의 구름색깔 보기, 비 내리는 오후에 책읽기. 나의 몸은 우기에 맞춰져 간다. 비는 그렇게 날 길들인다.
[에세이] 아순시온, 그 열 세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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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삼킨 아순시온 요즘 아순시온에서는 햇빛이 쨍쨍한 날을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2주 동안 하루가 멀다하고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아순시온 이곳 저곳에서 홍수의 피해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아순시온 YMCA 사무총장님께서 말씀하시던 스위밍풀 (swimming pool)이 바로 이 모습을 가르키는 말이었던 걸까.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고야 말았다.물에 잠겨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이 곳은 원래 차가 다니는 도로이다. 논이 물에 다 잠겨 야자수만 보이는 상태. 처음, 홍수가 곧 날꺼라는 현지인의 말에도 좀처럼 공감하지 못했던 이유는, 마을 빽빽이 가득 서있는 야자수들과 다양한 열대 과일 나무들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때 배운 내용을 더듬어보면 나무 뿌리가 물을 흡수하기 때문에 나무를 많이 심으면 홍수를 막을 수 있다고 했다. 나무들이 이렇게나 많은 데 홍수가 난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야자수가 물을 한껏 머금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비가 그 용량을 초과했던 걸까, 기어이 비는 온 마을과 집, 학교, 논들을 삼키고야 말았다. 다행히도 우리 집은 고도가 낮지 않아 잠기지 않았다. 다만, 화장실 변기 수위가 조금, 아니 많이 높아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변기가 막힌 걸로 생각해 누가 규칙을 어기고 변기에 휴지를 넣었냐며 소리쳤지만 원인은 홍수였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나름 견디기 힘든 재해가 우리 집에도 일어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화장실 전구를 두 개에서 한 개로 줄였다. 차라리 캄캄한 상태로 안 보는 게 나았다. 이렇게 작은 일로도 홍수의 피해를 체감하고 있었는데,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밖을 나와 마을을 보니 가관이다. 쭉 뻗은 도로 길 옆에 내리막길을 따라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 길보다 고도가 낮은 탓에 피해가 크다. Tagum city로 차를 타고 가는 길에 "Swimming pool!" 이라고 하시며 껄껄 웃으시는 따따이의 말에 무슨 일인가 싶어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옆은 온통 강이었다. 논은 벼가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이 잠겨있었고, 반대편 도로에 있는 학교는 지붕만 간신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집들은 다행히 1층은 푹 잠겼지만, 2층은 살아 남아있었다. 사람들은 이미 살림살이와 화분 등을 모두 2층에 올려놓고 있었다. 1층은 비어있고 2층에서 생활하는 필리핀 주거형태. 이전에 초영 언니가 필리핀의 가옥구조에 대해서 쓴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필리핀의 전통 가옥구조는 나무로 만들어진 2층 집인데 1층은 지지대로만 구성되고 속은 비어있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의 생활은 대부분 2층에서 이루어진다고 보면 되는데 이는 홍수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논밭에 관개시설이 미약하고 도로 전반에 배수시설이 잘 설치되어 있지 않아 이러한 가옥 구조는 필수적이다. 한국에 있는 우리 집은 아파트이고 거기다 20층이다. 그리고 광주에서 홍수가 크게 난 적도 없다. 그래서 나는 홍수피해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한낱 작은 빗방울일 뿐인데 왜 그게 홍수가 날까. 그러나 이 곳에서 생생히 눈앞에서 목격한 홍수는 한낱 작은 빗방울, 훨씬 그 이상이었다. 인근 까팔롱 지역에 있는 초등학교에선 갑자기 내린 비에 초등학생 세 명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물에 휩쓸려버리고 말았다. 도로인지 강인지 경계선이 구별이 안가 차들이 타이어까지 올라오는 물살을 조심스레 헤치며 간다. 오토바이의 절반이 물에 잠겨있다.사정이 이정도이니 홍수가 나면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아도 학교는 자연스레 쉬게 되고(학교가 물에 잠겼으므로 당연한 거겠지만), 갑작스런 물난리에 우리에 있던 돼지들은 도로 가장자리에 배를 깔고 쭉 늘어서있다. 미처 물에 잠긴 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을 구조하는 구조대 차가 보이는 가운데 이상한 점 한 가지를 발견했다. 홍수난 걸 구경시켜주겠다며 우릴 차에 태우고 여기저기 드라이브 하고 있는 STAFF, 마침 옆으로 지나가던 구조대차를 보고 멈춰서 창문을 열고 시시한 농담을 하는 또 다른 STAFF, 그리고 빨리 사람들 구조하러 가야될 것 같은데 농담을 다 받아주며 웃고 있던 구조대원, Swimming pool 이라며 껄껄 웃으며 swim-suit를 준비하라던 따따이. 마당에 있던 살림살이들을 2층에 옮기고 있는 진짜 홍수 피해자 가족들, 그리고 길가에 팔자 좋게 늘어져있는 분홍빛 속살이 눈부신 돼지들까지 누구하나 얼굴에 근심 하나 드리워져 있지 않다. 가만 보니 “어떡해 어떡해”를 연발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건 우리 셋뿐인 것 같다. 세상 모르고 쿨쿨 단잠을 취하고 있는 핑크 돼지매년 한두 차례씩 홍수가 난다고는 하지만, 익숙해진다고 익숙해질 자연재해도 아니고,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했다 해도(사실, 철저해보이지도 않는다) 그때마다 피해는 생길 수 밖에 없는 데 왜 다들 조금도 심각해지지 않는 거야! 얼마 전 필리핀의 역사에 대한 글에서 필리핀은 자원이 풍부하고 땅이 기름지고 날씨가 온화해서(온화...;;) 사람들 성격도 자연스레 밝고 걱정 없고 낙천적이다 라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확실히 한국 사람들에 비해 훨씬 밝고 유머러스 하다. 친절하고 상냥하고 가끔은 달달한 말도 잘 하고. 그러나 가끔, 필리피노 들의 대책안서는 낙척전인 마인드에 허허- 기가 찰 때 가 있다. 예를 들면, 상대방을 잔뜩 열받게 해놓고선 “너의 행동 때문에 나 지금 화났어” 라고 말하면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It's up to you^^ (그건 너한테 달렸어) 그러니 나한테 화를 내든, 나를 용서하든, 마음대로 해 난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하는 식이다. 그럴 땐 뚜껑이 확 열리지만, 이번엔 낙천적인 마인드가 이긴 것 같다. 홍수가 날 때마다 안절부절 하늘을 저주하는 모습보다, 비가 와서 우리 집 1층이 잠기면 2층에 가있지 뭐, 가축 우리가 잠기면 도로가에 내놓지 뭐, 학교가 잠겼으면 하루 쉬지 뭐, 하는 가벼운 마음이 재해 앞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게 만든 것이다. 자연을 인정하고 같이 공존하면서 숨 쉬며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이제 필리핀의 모든 게 좋아보이던 시절은 비록 지나갔지만- 나는 또 한번 필리피노들한테 반한다. 어제도 밤새 비가 내렸다.양철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시끄러워 옆 사람의 얘기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다. 화장실 변기는 진작에 수위가 높아졌다. 그래도 시간 지나면 조금씩이나마 물이 꿀렁꿀렁 빠지는 걸 보면 흐뭇하다. 아침에는 갑자기 오랜만에 해가 쨍쨍하더니 이제 한창 뜨거울 점심시간인데 어느 새 다시 구름 색깔이 흐릿흐릿하다. 어쩌면 오늘 오후, 혹은 내일 아침, 또 다를 것 없는 세찬 비가 내리겠지만 예전처럼 걱정 가득한 얼굴은 우리도 지웠다. 대신 조금은 쿨하게 조금은 시크하게 조금은 가벼운 마음을 가졌다. “ 홍수 나서 변기물이 높아지면 좀 기다리지 뭐 ” 이렇게. 우리 잘 지내고 있어요 :)
[에세이] 아순시온, 그 열 두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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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들에 대한 재발견 흔히 사람들은 ‘크레파스’라 하면 초등학생들이나 쓰는 수준 낮은 미술용 물감 정도로 알고 있다. 아직 물감을 쓰기에는 손놀림이 섬세하지 못한 아이들을 위한 미술 도구쯤으로 말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 했다. 초등학교 3학년쯤 되었을 땐 ‘크레파스’로 색칠하는 건 10살이 된 내게 용납할 수 없는 창피한 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아카데믹 올림픽의 아순시온 YMCA지역 예선 현장. 날도 무덥고 해서인지 스텝들은 나를 그리기 대회 현장에 있을 것을 권했다. 노래대회나 퀴즈 대회는 야외무대에서 펼쳐지고 있어서 너무 더웠기 때문이다. 그 세심한 배려에 감동받으며 대회장인 아순시온 센트럴 하이스쿨의 어느 한 교실로 들어갔다. 미술 대회장에는 7명의 아이들이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해남 촌마을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1년에 한 번씩 해남에서 제일 큰 초등학교에서 열리는 학예회 같은 대회에 조소와 사물놀이로 매년 출전했던 경력이 있던 나는 그 대회장에서 가을빛이 가득했던 시골의 대회장이 떠올라 가슴이 뜨거워 졌다. 이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곧 아이들의 모습을 비디오 카메라에 담기 위해 촬영을 시작했는데 혹시나 방해가 될까 무척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촬영 중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의 책상엔 붓이 없었다. 물통도 없다. 이정도 대회쯤 나오는 친구들이라면 으레 가지고 있을 영어가 써진 물감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도 없다. ‘어라... 대체 뭘로 그림을 그리겠다는 거지?’ 생각하는 찰나, 어떤 아이가 주섬주섬 크레파스를 꺼냈다! 크레파스! 크레파스! 크레파스! 그렇다 크레파스!를 꺼냈다. 햇빛에 그을릴 대로 그을려진 까만 손을 가지진 남학생이, 그것도 나보다 훨~씬 크고 긴 손가락을 가진 남학생이 크레파스를 꺼냈다. 그리고 그 크레파스라면 우리 유치원 아이들이 수학 교재 색칠할 때 쓰던 바로 그 제품이다. ‘하하하’ 속으로 웃음이 터졌다. 유치하고 시시해서가 아니라 그간 이런 대회에 나오면 물감으로만 그림을 그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참 좁은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교실을 한바퀴 돌며 촬영을 한 뒤 다른 대회장도 살피며 촬영을 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잠시 그 그림대회장에서 자리를 비웠다. 한 1시간 정도나 지났었을까? 다른 경쟁의 장들을 카메라에 담고 조금을 지쳐 그림대회장으로 돌아왔다. ‘아이들 그림을 얼마나 완성됐을까’ 하는 마음에 다시 대회장을 한 바퀴 빙 돌아봤다. 그리고 나는 곧 미소를 동반한 충격에 휩싸였다.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작품들이 완성되고 있었다. 크레파스로 그라데이션 효과를 주다니! 그날 크레파스는 내게 익숙한 것들을 다시 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주 가끔씩 익숙한 것들에게서 익숙하지 않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우와 이런 면이 다 있었어?’ 하며 신기하기도 하지만 조금은 서운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배신감처럼. 물론 익숙함에 젖어 사물을 무한한 발전가능성을 애초에 배제한 본인의 잘못이 크지만. 어쨌든 크레파스는 이제 내게 익숙하지만 잘 모르는 물건이 되었다. 나는 크레파스의 사용법을 잘 모르는 사람이 된 것만 같다. 필리핀에 와서 ‘익숙한 것’들을 가끔 만났다. 이제부터 내가 만난 몇 가지 익숙한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볼까한다. 헌 옷 수거함을 필리핀의 시골마을에서 만나다. 아순시온에는 금요일마다 7일 장이 선다. 작고 아담한 시골 장터는 금요일이 되면 북적북적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나는 정겨운 광경이 펼쳐진다. 그날은 아이들 장난감부터, 각종 해산물을 파는 사람도 나오고, 옷을 산처럼 쌓아 놓고 파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가 필리핀에 도착한 초창기에 함께 일하는 스텝 한 명이 그 옷 가게를 가리키며 “ It is 오까이오까이 ” 라고 말했다. “ What's 오까이오까이?” 라고 되묻자, “ 오까이오까이 is the secondhand products. Maybe that cloths came from Korea."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옷들이 아무리 봐도 새것은 아닌 것이 분명해 보았다. 헌 옷 수거함속의 옷을 필리핀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아파트 단지 눈에 띄는 듯 띄지 않는 한 구석, 촘촘한 빌라들 사이 어딘가, 평소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지만 항상 그 자리에 있는 헌 옷 수거함. 나는 살면서 그 헌 옷들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관심을 가져보지 않았다. 단지 막연히 어느 고아원으로 보내지지 않을까 생각했었을 뿐. 또 TV에서 그것들이 중국이나 동남아 같은 곳으로 수출된다고 했던 것도 같고. 어쨌든 그 문제는 내 관심 밖의 것이었다. 그런데 그 헌 옷 수거함에나 들어있었을 옷은 낮선 땅 필리핀에서 만났고 이것은 이제 내게 꽤 흥미로운 주제가 되었다. 현물을 사고파는 시장에는 공장에서 갓 생산된 재화만이 유통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손에서 유용하게 쓰이다가 더 이상 필요 없어진 물건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매우 귀중하게 쓰일 보물일 수도 있다. 미국의 절약정신, 이웃 간의 정에 관해 이야기 하던 중학교 영어 교과서 본문에 나왔던 ‘garage sale(차고세일)’의 내용처럼. 그러고 보니 ‘오까이 오까이’ 옷 가게는 ‘garage sale’이 집 차고 앞에서 국가 간으로 확대된 재미있는 그림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일부의 비지니스적 요소가 짙게 깔려 있지만. 하지만 이런 ‘garage sale’이 국가 간에 유통되는 과정을 가지기 위해서는 불가피 하게 소모되어야 할 에너지(상품의 관리 및 선별, 자금, 유통과정의 노동 등)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나쁘게 봐야할 필요도 없고 좋게 봐야 할 필요도 없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우리나라가 헌옷을 팔게 된 건 지긋지긋한 IMF때라고 한다. ‘헌 옷 수출’은 ‘외화 벌어들이기’의 한 수단이었다. 우리는 달러가 필요했고, 헌 옷은 필요 없었다. 그리고 필리핀은 옷이 필요했지만 새 옷은 비쌌고 질 좋고 값싼 중고 옷이라면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헌 옷 수출’을 시작되었고 필리핀의 ‘헌 옷 수입’은 시작되었다. 참 괜찮은 수요와 공급에 따른 시장 원리의 한 예가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필요한 외화를 벌었고, 필리핀 사람들은 낯설어 더 멋져 보이는 한글이 프린트된 티셔츠나 가방을 싼 값에 살 수 있게 되었으니. 최근 한국에서 요즘 세상에 옷이 떨어져서 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옷이 닳기 전에 싫증나고 오래 돼서 버린다. 그래서 헌 옷을 수거하는 업자들은 이런 옷들을 1kg당 300~500원을 받고 동남아로 그 옷들을 수출해 꽤 짭짤한 수입을 내고 있다고 한다. 또 강남과 같은 고소득층 밀집 지역에서는 헌 옷 수거함이나 재활용품 수거함이 준 명품제품의 전시장이 되었다고 한다. 이쯤 되니 재활용품 수거업자들 사이에서 ‘물 좋은’ 지역 쟁탈전도 벌어진다고 한다. 어쨌든 모아진 재활용품을 수거업자에게 넘기고 받는 수익금은 지역 부녀회같은 단체에서 관리하여 동네 행사나, 아파트 도서관 만들기 같은 주민들을 위한 공익사업에 사용된다고 하니 옷 쓰레기통에 안 버리고 수거함에 넣는 수고를 한 보람이 있다. 게다가 그 옷들이 배 타고 이웃나라에 건너가 가치를 알아주는 새 주인까지 만나게 되었으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한국과 필리핀. 대체 어떤 고리가 연결된 관계일까 하는 고민을 많이 하는 요즘이다. 그리고 시골 장터의 ‘오까이 오까이’ 옷 가게를 통해 고리 한 개를 찾은 것 같다. 첨부아카데믹 올림픽 에서 찍은 사진 몇 개 올립니다. 저희 잘 살고 있어요~이제 딱 50일 남았네요^^한국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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